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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영화연대]  영화읽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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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nguage>ko</language>
        <pubDate>Fri, 30 Jul 2010 16:05:03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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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lt;파주&gt; 폐허를 생산하는 고립된 삶</title>
            <dc:creator>영화연대</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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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gt;&lt;img src=&quot;http://img.todaystory.net/img/9dd46714c992a6875105f535ea1a3291.jpg&quot; alt=&quot;&quot; style=&quot;border:0;&quot; /&gt;&lt;/p&gt;


&lt;p class=&quot;bt11&quot;&gt;(스포일러 많습니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대학 때 만난 한 선배는 파주가 고향이라고 했다. 파주에서도 그 선배가 사는 지역은 북쪽과 맞다있어서 그곳 주민들은 주민등록증을 제시해야지만 들락거릴 수 있다고 했다. 선배에게 들었던 파주시의 한 마을은 국가에 의해 허락을 받아야 움직일 수 있는 곳이었다. 그 마을은 주민이 결정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고, 즉 주민의 것이 아니라 국가의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파주에는 임진각과 땅굴이 있다. 한편 몇 년 새 파주하면 헤이리와 출판단지가 생각나게 되었다. 이 설계 역시 국가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 어떤 분야보다 자유롭다고 하는 예술의 터를 국가가 모으고 전시한 것이다. 어느새 파주는 주민등록증을 내야 하는 동시에 문화적이고 예술적인 공간으로 생각나게 되었는데, 어쨌거나 파주는 우리가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었던 터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두 공간 모두가 우리에게 허락되는 방식은 관광이다. 임진각을 지나 헤이리 예술공원을 도는 관광코스, 결국 파주는 어쨌거나 관광의 도시인 것일까. &lt;br  /&gt;그런데 영화 속 파주는 파괴되어 폐허가 되가는 것들의 이미지들이 모이고 중첩되어 있는 파주이다. 임진각을 돌면서 통일의 염원을 빌어보는 곳이기 보다는 운동을 하다 수배자가 된 사람이 있는 곳이며, 예술적인 꿈을 꾸는 곳이기 보다는 생존에 절박함을 느끼는 철거민들의 도시인 것이다. 여기에서 파주는 관광되는 곳이 아닌 겪어내는 사람들의 공간으로써의 모습을 드러낸다. 고통이 맞닥트려질 때 관광은 불편하고 하기 싫은 것이 된다. 어쩌면 영화 &amp;lt;파주&amp;gt;는 광광도시 속에 숨겨진, 우리가 결정할 수 없는 공간을 그려보려는지도 모르겠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중식의 사연은 8년 전부터 시작된다. 중식은 수배를 받고 있는데, 함께 운동을 했던 선배이자 첫사랑인 자영의 집에 숨어 있는 처지이다. 그리고 자영의 남편은 교도소에 있다는데 역시 같이 운동을 했던 선배인 것 같다. 그 집에서 자신이 선배의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을 안 중식은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던진다. 그런데 던진 옷이 선배 부부의 아이에게 날아가 아이는 울음을 터뜨린다. 그러자 중식은 옷을 얼른 다시 주워 입고 아이를 안아 달래고 있다. 중식은 영화 속에서 이 첫 번째 상황을 계속 반복하는 것 같다. 그 상황은 계속 커지고 무거워지지만 중식은 이때에처럼 계속 자기 주변에 고통을 안겼다는 자신의 미욱함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는 자영을 탐(?)한 죄(?)로 아이가 화상을 입자, 자신의 미욱함을 처음으로 확인한 서울로부터 도망쳐 파주로 들어온다. 중식이 꿈꾼 운동과 사랑은 모두 파괴되어 돌이킬 수 없는 채 말이다. &lt;/p&gt;
&lt;p class=&quot;bt11&quot;&gt;한편 은모는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부모님이 물려준 집에서 언니 은수와 살고 있다. 은수는 술에 취해 밤길을 혼자 걸어가던 때에 자신을 걱정해준 중식을 좋아하기 시작하고, 은모는 하나 밖에 없는 언니 은수가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주는 상황이 불안하다. &lt;br  /&gt;은모는 중식과 달리 자신이 벌이게 된 일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녀는 언니를 걱정하여 돈을 벌러 가출을 하지만 이때 자신의 실수로 언니가 죽게 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중식은 은모를 보호하기 위해 오해를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벌인 실수의 흔적을 제거한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중식의 이야기와 은모의 이야기는 은모가 두 번째로 집을 나가게 된 3년 전 상황까지는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중식의 경우는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벌어지는 사건(아이의 화상과 가스폭발 사고로 죽은 은수의 모습)들의 반복에 대한 책임감? 혹은 죄책감?을 잊지 않고 살아간다. 그건 뭐랄까, 중식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은모가 언니를 지키고 싶다는 마음에서 한 가출이나 중식을 떠나면 안 될 것 같아 집을 떠난 것 역시 소녀의 치기가 아닌 절박한, 그래서 은모에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파주라는 지역과 그곳에서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겹침이 이루어지면서 우리는 파괴되어 폐허가 된 삶의 형태들과 만날 수 있게 된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그런데 영화 &amp;lt;파주&amp;gt;의 이후 전개는 공감하기에는 조금씩, 점점 더 어긋난다. 은모는 보험회사를 통해 언니가 죽은 이유가 교통사고가 아니라 가스폭발 사고였다는 것을 알게 되고, 관객에게는 은모와 중식의 8년이 모두 공개된 뒤 장면에서 은모는 철거 현장을 뚫고 들어가 중식에게 질문한다. 이런 일 왜 하느냐고. 중식은 이제는 할 일이 계속 생겨서 그렇다고 말한다. 그리고 물대포가 쏟아지고 중식은 은모를 감싸않아 보호한다. 그날 저녁, 은모는 다시 질문을 이어간다. 언니를 사랑했느냐. 사랑하지 못했다고 중식은 말한다. 그럼 자신은 어땠냐는 질문에 중식은 너를 사랑하지 않은 때가 없었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은모는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는 거냐고 진실을 알고 싶다고 한다. 이어지는 것은 키스, 그리고 은모는 뛰쳐나와 중식을 보험 사기로 고발한다. 할 일이 계속 생긴다는 것은 은모를 보호하기 위한 것일까? 왜 중식은 은모를 사랑하지 않은 순간이 없다고 하는 것일까? &lt;br  /&gt;보험 사기로 감옥에 가며 정작 철거촌도 위기에 휩싸이게 되었을 때, 중식의 지인은 진실을 밝혀야 하지 않느냐고 묻지만, 중식은 철거촌은 괜찮을 것이다, 한 마리의 어린 양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니겠냐, 자신이 미욱했던 것 같다 등의 이야기로 은모의 실수로 생긴 가스폭발 사고의 진실을 밝히지 않는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은모가 한 마리의 어린 양이 되는 순간 영화는 이상한 불편함을 준다. 그 대사 이후 은모는 사라지고, 그 순간 중식은 유일하게 할 일이 주어진 사람으로, 짐을 짊어진 사람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과연 중식은 은모가 실수로 꽂은 가위가 실수인 것을 아는가? 실은 이 질문은 하등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실수이든 아니든 모든 것을 떠안으려는 중식은 다른 사람에게 그럴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혹은 떠안을 만큼 알 수나 있는 것인가? 어쩌면 중식이 감옥에 혼자 앉아 무거운 어깨를 늘어뜨리는 마지막 장면은, 그 불가능성에 대한 좌절로 인한 어두움일 것이다. &lt;br  /&gt;그런데 중식은 자신이 미욱했다고 말한다. 그의 미욱함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가 은모를 어린 양이라고 하는 순간이 바로 미욱하게 느껴진다. 만약 그가 좌절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가 어린 양을 보호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중식의 무겁고 어두운 어깨는 과연 어떤 좌절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었을까?&lt;/p&gt;
&lt;p class=&quot;bt11&quot;&gt;또 은모가 확인하려고 하는, 그리고 확인해야만 한다는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그녀는 왜 반복적으로 계속해서 파주를 나가고 파주로 돌아오는 것일까? 영화가 이렇게 결말로 치달아 갈 때, 영화 &amp;lt;파주&amp;gt;는 소통이 불가능하고 파괴를 막을 수 없기에 폐허로 낳는다기 보다는 잘못된 소통과 잘못된 반성으로 인해 불가능해진 폐허를 보여주고 있는 느낌이 든다. 중식과 은모는 결국 스스로의 밖으로 한 번도 나서지 않고, 그러고자 하지도 못했다는 느낌인 것이다. &lt;br  /&gt;그래서 좀 가혹하게 뱉어보자면 중식 역시 파주의 파괴된 이미지를 생산하는 또 하나의 얼굴처럼 느껴진다. 중식이라는 인물이 주는 답답함은 파괴되는 것 앞에서 그것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자의 것만이 아니다. 영화 속 파괴의 답답함은 중식이 움직이는 방식 자체가 생산해내는 것이기도 하다. 은모의 눈물도 그러하다. 아무 것도 감지할 수 없도록 만들어 지는 방식, 아무 것도 공유되지 못하는 방식이 초래하는 눈물인 것이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영화를 보고 한동안은 은모의 도피는 소녀의 도피로만 느껴졌는데, 그 도피가 낳는 결과란 철거 투쟁의 큰 축이자, 반대 편 조폭 용역 입장에선 걸림돌이었던 중식의 사라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얻어낸 성과란 은모가 부모님 집을 안정적으로 얻어냈다는 것이다. 사라지는 파주 속에 우뚝 남을 은모의 집. 그리고 얇게 미소짓는 자는 이경영이 분한 조폭 사장이다. 이경영이라는 많은 관객들에게 인지될 배우가 이 짧은 분량에 할애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그러한 무게를 가져야 하는 것일까. 마치 은모의 도피를 탓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필자는 이 영화에서 은모의 행동을 소녀의 치기로 평가하는 것이 이 영화가 회자되고 뻗어나간다면 이를 결론적 이미지로 느껴진다. &lt;/p&gt;
&lt;p class=&quot;bt11&quot;&gt;여기서 다시 중식의 답답한 얼굴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느끼고 말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왜 그는 은모를 한 마리 어린 양으로, 진실에서 소외되어야 하는, 그렇게 보호되어야 하는 자로 만들고 있는 것일까?&lt;/p&gt;
&lt;p class=&quot;bt11&quot;&gt;필자는 바로 이러한 방식이 무기력을 생산하는 지점 자체라고 생각한다. 이 세계를 대상으로 대하는 방식. 주체들의 움직임이 아니라 오직 자신만을 주체로 놓고 세계를 대상화하는 방식, 그로부터 느끼는 고통과 그로부터 기인하는 자책, 그리고 그로부터 도달하는 무기력. 이것은 중식이 도달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것처럼까지 느껴진다. &lt;br  /&gt;그리고 이러한 방식이 바로 파주라는 공간을 더욱 더 우리가 결정할 수 없고, 허락받아야만 하는 곳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그러므로 이 모호하다고 읽혀지는 영화에서 필자가 모두와 함께 묻고 싶은 것은, 과연 중식은 무엇으로부터 은모를 보호하려고 하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중식은 실은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진실로부터 도망가고 싶은 것은 자기자신인 것이 아닐까? 실수를 했기에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의 삶을 보호하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어린 양이 되어야 하는 ‘할 일’은 적어도 이 시대에 적절한 책임감이 아닌 것 같다. 은모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진실을 함께 볼 수 있어야 한다. 중식이 해야 하는 반성은 개인으로 남아있는 죄책감에 대해서다. 그리고 중식이 반복적으로 직면하는 좌절은, 아무도 그렇게 제 손에 남아 있을 만큼 어린 양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gipsymoon)&lt;/p&gt;&lt;/div&gt;</description>
                        <pubDate>Thu, 14 Jan 2010 15:59:57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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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lt;아바타&gt; 누구에게 물어봐야 하나</title>
            <dc:creator>영화연대</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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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gt;&lt;img src=&quot;http://img.todaystory.net/img/afd157952a8af9c82622fed04e557171.jpg&quot; alt=&quot;&quot; style=&quot;border:0;&quot; /&gt;&lt;/p&gt;

&lt;p class=&quot;bt11&quot;&gt;&amp;lt;아바타&amp;gt;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 중에는 ‘영화가 게임을 의식하고 제작한 형태’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한편에는 기존의 SF영화가 큰 규모로 제작되었으며 여기에 3D상영 정도가 가미된 것 정도인데 그리고 이미 3D상영은 있었던 ‘과거’인데 무슨 호들갑이냐는 의연한 태도도 존재하지만, 실제로 확인한 &amp;lt;아바타&amp;gt;가 그렇게 의연하게 처리할 정도의 SF영화로 간주하는 태도에는 반대이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amp;lt;아바타&amp;gt;와 같은 사태(?)가 발생했을 때, 가장 손쉬운 방법은 사실 이 영화의 이야기가 무난한 것이며, 일부분 웨스턴 장르의 SF버전이며 미국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대한 간사함이 묻어있는 결과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이로써 &amp;lt;아바타&amp;gt;의 비범함을 일견 인정하지만, 영화계는 의연함을 유지해야한다는 결론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의연한 반복을 언제까지 유효하게 할 수 있을까?&lt;/p&gt;
&lt;p class=&quot;bt11&quot;&gt;사실 고전적인 영화의 형태가 어떻게든 어떤 형태든 바뀔 것이다라는 예상은 누구나 하고 있었지만, 영화에 환호하는 방식과 영화를 지지하는 관객 대상 자체가 크게 변화를 이루며, 이 변화의 과정에서 영화가 어떻다 저렇다 말하는 자체가 무기력해지는 풍경은 불안하긴 했지만 대비되지 않은 상황이었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짐작컨대 예전의 영화에 관한 글이 어떤 형태든, 영화를 봤거나 볼려고 하거나 영화를 알지만 안 보는 관객을 머리 한 켠에 염두하고 글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amp;lt;아바타&amp;gt;류의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머리 한 켠에 영화에 대해서 생각하는 잠재적 관객만을 염두한다면 &amp;lt;아바타&amp;gt;에 대한 글을 이어나가는 필자 자신 스스로 무기력해지는 사실을 느낄 수밖에 없다. &amp;lt;아바타&amp;gt;류의 영화를 말할때는 이제, 원하지 않아도 머리 한 켠에는 온라인 게임을 하다가 아이폰 스킨을 만들고, 웹스토어를 검색하며, 지속가능한 오덕질 속에서 3D상영의 ‘진보’에 대한 기대와 CG렌더링의 ‘진보’에 대한 기대 속에서, 잠시 게임을 멈추고 극장을 찾는 SF Nerd을 염두할 수밖에 없다. 그럼 과연 SF Nerd를 감당할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필자 중에 완숙한 사람이 누가있을까. &amp;lt;아바타&amp;gt;를 보면서 영화매니아가 단순히 이렇다 저렇다 말할 처지에서 차츰 진심으로 밀려나고 있다는 느낌은 단순한 개인적 불안인지 궁금하다. 그렇다고 방학을 맞이하여 어떤 영화 중의 하나로서 &amp;lt;아바타&amp;gt;를 찾은 학생 관객이나, 여러 개봉작 중 인기있는 SF영화로서 &amp;lt;아바타&amp;gt;를 선택한 관객에게 영화에 관한 ‘글’이 접속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이미 오래된 판단아닌가.&lt;/p&gt;
&lt;p class=&quot;bt11&quot;&gt;비유해 보건데 SF Nerd를 상대하는 것은 주성치 영화팬을 상대하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주성치 영화팬들은 주성치 영화 세계에 있는 매혹을 좋아하고, 영화에 관한 글(평론 등)이 주성치 영화를 좋게 보든 나쁘게 보든 천하게 보든 상관안하고 주성치 영화 세계 밖과는 평행선을 달린다. 주성치 영화의 팬들은 지적으로나 평론적으로 주성치 영화를 옹호하지도 않으며 대신 간섭받지 않겠다는 ‘포괄적 협정’을 만든 것에 비해, SF Nerd가 지지하거나 환호하는 &amp;lt;아바타&amp;gt;에 대한 입장은 훨씬 (잠재적으로) 공세적이다. &amp;lt;아바타&amp;gt; 관람을 나와 영화가 지닌 세계관이나 우주론에 관심을 갖는 것은 소박한 수준이다. SF Nerd의 심급은 영화를 넘어 다시 현실 세계에서 생명이나 우주관, 이론상 가능한 일인지 확률상 가능한 일인지에 대한 분석, (주로 유전학에 바탕한) 생명과 인간 주체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 질문들이 행해지고 조사를 행하는 속도 또한 광범위하고 빠르게 진행되는데, 영화의 인문학적 평론가들이 극장을 나와 현실세계에 대한 현실적 질문 그리고 인간 내면이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질문과 그 답을 통한 영화에 대한 적정성 평가와 유사하다. 얼핏 예상해도 이 유사성과 각자가 처한 토대의 차이가 유치한 수준이든 보다 덜 유치한 수준이든 과학주의 대對 인문주의의 소모적 투쟁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하다.&lt;/p&gt;
&lt;p class=&quot;st11&quot;&gt;안전한 내러티브 vs 많은 빈도의 피드백&lt;/p&gt;
&lt;p class=&quot;bt11&quot;&gt;인문학 쪽 진영에 있는 소박한 평론가는 &amp;lt;아바타&amp;gt;를 통해 인간이 갖은 인간주의 오만함에 대한 영화의 메시지나 판도라 행성을 정복하려는 지구인을 통해, 현실세계의 아마존 원시림 파괴나 소수인종말살에 대한 현실 지구 문제를 연상해 주길 바라는 소망을 갖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SF Nerd의 많은 사람들은 &amp;lt;아바타&amp;gt;를 보러 오기 전에 집에서 즐기던 게임에서 이미 반인간주의에 대한 태도를 충분히 갖고 극장으로 발길을 옮긴다. &lt;br  /&gt;가령, 블리자드에서 출시한 &amp;lt;스타크래프트&amp;gt;를 이야기할 때, 이 게임을 심화하여 이해하고 게임의 세계관을 이해하려는 게임유저는 각 종족의 다양성에 몰입되어 있다. 어느날 PC방에서 나오는 두 청소년 &amp;lt;스타크래프트&amp;gt; 유저가 나눈 대화가 인상적인데, 테란 유저가 “저그는 징그럽다”고 하자 저그 유저가 “저그 입장에서 테란은 혐오스럽게 보일지 모른다”라는 식의 대화, 저그의 귀여움(!)에 대한 이어지는 찬사는 굳이 &amp;lt;아바타&amp;gt;가 판도라 행성의 외계인을 파란색이었을 때 느끼는 태도가 아닌 것이다. (아마 부모님과 함께 극장을 찾은 학생 &amp;lt;아바타&amp;gt;관객의 많은 수가 ‘다시’ 집에 가서 게임을 하거나 부모님과의 스케줄을 마감하고 ‘다시’ PC방에서 게임을 했으리라.)&lt;/p&gt;
&lt;p class=&quot;bt11&quot;&gt;&amp;lt;아바타&amp;gt;에 관한 인터넷의 글 중에는 이 영화가 내러티브 면에서는 안전하고 무난하게 구성되었다고 한 문단 정도씩은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극장을 함께 간 나의 친구 아무개 엔지니어는 이야기가 무난하다는 말을 &apos;&amp;lt;아바타&amp;gt; 영화가 많은 빈도의 피드백‘을 걸쳐 만들어진 것 같다고 덤덤하게 말을 한다. 같은 사안이 다른 방식으로 드러난 표현의 차이일 수도 있겠으나 확대해서 상상해보니, “안전한 내러티브...”류의 말을 엔지니어의 감수성으로 받아드린다면 “피드백을 많이 해서 당연한 것인데, 뭘 그리 다시 내러티브가 안전하닥고 하는지...”라고 해석하지는 않을까라는 상상이 들었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다시 &amp;lt;아바타&amp;gt;가 ‘영화가 게임을 의식하고 제작한 형태’라는 지배적 평가로 돌아와 생각해 보면, 여러 영화를 보다가 &amp;lt;아바타&amp;gt;를 보는 사람들이 느낄 영화가 게임을 ‘의식’한다는 것과 게임을 하다 극장을 찾아 &amp;lt;아바타&amp;gt;를 보는 사람들이 당연시 할 게임을 ‘의식’하는 것 사이의 맥락 차이와 감수성의 차이를 &amp;lt;아바타&amp;gt;는 전면적으로 불러일으켰다. 한편으로는 하나의 영화로서 의연하게 받아드리거나 한편으로는 제임스 카메론의 기술적 진보의 성과를 받아쓰기하는데 많은 에너지를 할애할텐데, 이 둘을 화해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방식이 &amp;lt;아바타&amp;gt;를 이야기하는데 의미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 둘다 석연치 않으며 둘다 결과적으로는 환대받지 못할 방식이라는 것에 불안감이 남는다. &amp;lt;아바타&amp;gt;가 불러일으킨 이 상황, 누구에게 물어봐야 좋을까.(mamoro)&lt;/p&gt;&lt;/div&gt;</description>
                        <pubDate>Thu, 14 Jan 2010 15:55:11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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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lt;파주&gt; 그곳은 어디에도 없었다</title>
            <dc:creator>영화연대</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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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gt;&lt;img src=&quot;http://img.todaystory.net/img/08994018350339e7e96167f7919399b6.jpg&quot; alt=&quot;&quot; style=&quot;border:0;&quot; /&gt;&lt;/p&gt;


&lt;p class=&quot;bt11&quot;&gt;안개서린 옛 정취가 묻은 파주역, 기차에서 내린 중식(이선균)은 찌푸린 얼굴로 먼발치를 바라본다. 그리고 또 다른 주인공 은모(서우)는 택시를 타고 깊은 밤, 촌스러운 네온사인 불빛을 가진 어딘가에 들어선다. 이 두 이미지는 ‘파주’라는 공간(지역성)을 확인시켜준다. 도시가 삭제되어 있는 공간 파주. 영화 &amp;lt;파주&amp;gt;는 왜 안개를 빌어 변방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일까. 이 영화는 도피처와 안개라는 설정 때문에 김수용의 &amp;lt;안개&amp;gt;를 떠올리게 하고, 개발과 귀향의 의미에서 이창동의 &amp;lt;초록 물고기&amp;gt;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시대적 의미로도 해석할 수 없는 이상한 기운만이 남겨진 영화이다. 영화 속의 파주라는 공간은 무진과 같은 도피와 이상의 공간으로서도, 개발과 귀향의 의미로서도 명확한 설명 없이 모호하게 설정되어 있다. 많은 의문을 던지게 하지만 결코 명확한 답은 얻을 수 없는 영화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파주는 중식에게 도피처였지만, 새로운 가정을 꾸리는 보금자리가 된다.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의식적으로 주인공들은 자신이 사는, 돌아오는, 떠나는 공간인 ‘파주’를 말한 적이 없다. 도로 표지판, 기차역, 우체국 등으로 알 수 있는 그 곳은 이상하게도 펄럭이는 깃발처럼 영화 내내 지시만 될 뿐이다. 그래서 개발을 기다리는 버려진 농촌 같은 푸석하고 어두운 그곳은 과연 등장인물에게 어떤 의미의 장소일지 자못 궁금하게 한다. 수배 중이던 중식이 유부녀가 된 첫사랑에게 저지른 끔찍한 잘못(혹은 실수)은 그를 파주로 들어서게 하지만 중식은 결코 작금의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는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두만(이대연)을 만났을 때 중식은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지 않고, 두만이 귀농하겠다는 말을 듣는다. 그리고 중식은 은수(심이영)를 발견한다. 중식이 은수를 만나는 순간부터 중식에게 파주는 더 이상 도피처가 아니라 보금자리의 의미로 바뀐다. 공부방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지만 그것은 하나의 설정으로 남고, 중식의 흐름으로 전개되던 영화는 은수와 은모의 입장에서 중식을 보여준다. 은수는 중식에게 점점 호감을 가지게 되는데, 그녀는 중식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 것일까?&lt;/p&gt;
&lt;p class=&quot;st11&quot;&gt;파주, 안개로 뒤덮인 마을&lt;/p&gt;
&lt;p class=&quot;bt11&quot;&gt;영화는 중식이 은모와 은수를 알게 된 시점부터 파주를 안개로 설명하지 않는다. 안개는 중식이 파주에 도착했을 때, 그리고 은모가 파주에 돌아왔을 때에만 이미지화된다. 그리고 영화에서 파주는 지역 명을 주지시키는 몇몇 표지판 외에, 철거해야 하는 건물과 집안 내부, 네온사인 켜진 나이트클럽, 논밭의 정경, 휑하니 비어있는 국도를 보여줌으로써 파주의 모습을 그려나간다. 중식은 이방인이지만 너무 쉽게 파주에서 안식을 하고, 은수와 은모는 이방인인 중식을 너무 쉽게 가족으로 받아들인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중식은 파주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떠나지 않는다. 물론 그가 수배중인 것을 감안했다 치더라도, 그가 왜 거기서 또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고 ‘정착’하게 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파주의 의미를 되새기기란 허탈할 수밖에 없다. 중식의 아내가 된 은수는 그곳에서 가스폭발로 증발되어 버리고, 그녀의 동생 은모는 중식을 사랑한 나머지 언니의 죽음에 기여한 가해자가 되어버린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파주는 첫사랑의 아들에게 치명적 상처를 입힌 중식이 도망치듯 떠나와 버린 도피처였지만, 그곳에서 은수와 결혼한 그는 안식처를 얻자마자 그녀를 잃는다. 중식은 죄책감을 짊어진 것처럼 파주에서 떠나지 않는다. 은모에게 파주는 부모님을 잃고 언니마저 잃어버린 끔찍한 공간이지만, 여행을 떠났다가 다시 귀향할 수밖에 없는 곳이다. 어쨌든 중식과 은모에게 끔찍한 기억을 만드는 파주는, 도피와 정착의 의미를 공존하게 한다. 그런데 그것이 왜 ‘안개’로 수렴될 수 있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중식이 철거민 대책위원장까지 맡아가면서 파주의 저개발을 붙잡으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은모는 결국 그에게 묻는다. “이런 일 왜 하세요?”라고. 중식은 대답한다. “모르겠어. 그냥…”&lt;/p&gt;
&lt;p class=&quot;st11&quot;&gt;파주, 모호한 군상들의 서식처&lt;/p&gt;
&lt;p class=&quot;bt11&quot;&gt;&amp;lt;파주&amp;gt;는 공간을 ‘위치 짓기’ 보다는 안개를 드리운 채 이미지를 부각시킨다. ‘파주=안개’라는 등식이 성립되어야만 하는 것처럼 실제 파주의 지역성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은수와 은모의 캐릭터가 좀처럼 설명되지 않고, 이들에게 중식을 향한 사랑만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래서일까. 적어도 중식은 운동권 출신이자, 신학공부를 했던 정체성이 부여되어 있다. 은수는 그렇다 치고 은모는 자신의 정체를 스스로 만들지 않는다. 중학생이었던 그녀가 중식을 알게 되는 순간, 그녀는 공부방 학생이자 은수(보호자)의 동생일 뿐이다. 이미 중식 옆에는 은수가 버티고 있고, 은모는 언니에게 해야 할 말을 중식에게 바꿔 말한다. “우리 언니 건드리지 마” 라고. 은모는 단지 그런 말만을 할 수 있는 아이다. 그녀가 간접적이든 은수의 죽음을 방기하고 떠났다가(물론 은모는 몰랐지만) 3년 후 다시 돌아왔을 때, 철거대책위원장이 된 중식과 그녀는 이질적인 한 쌍처럼 보이지 않는다. 어느 순간 은모는 중식과 함께 철거농성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중식과 자신의 관계에 몰입한다. 언니가 남겨놓은 생명보험금 때문에 비로소 언니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파헤치지만 은모는 그에 대한 죄책감이 정말 있는 것인지 파악하기 힘들다. 그녀가 파주에 돌아와 ‘하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lt;/p&gt;
&lt;p class=&quot;bt11&quot;&gt;그런 점에서 안개는 은모와 등식을 이룬다. 파주의 안개는 은모다. 결국 파주는 안개이자, 은모가 된다. 그러나 영화는 ‘안개=은모’의 등식을 곧이곧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은모가 파주에 돌아왔을 때 맞닥뜨리는 것은 언니의 죽음과 그녀가 남긴 생명보험금과, 부모님이 남긴 집, 대학입학 그리고 중식이다. 그녀는 그것들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하며 선택을 해야 한다. 왜 영화는 은모에게 할 일을 부여하지 않고 선택만을 남겨놓은 것일까?&lt;/p&gt;
&lt;p class=&quot;bt11&quot;&gt;그렇다고 중식은 은모를 선택하지 못한다. 그가 “널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어” 라고 은모에게 말했을 때 은모는 “그게 나에게 할 수 있는 모든 말이냐”고 울며 매달린다. 중식은 두 번의 상처를 경험한 남자다. 다시 말해 트라우마를 지닌 남자다. 그런데 은모에 대한 연민을 갑작스럽게 고백한 후 그는 진심에서인지 알 수 없게 그녀에게 키스를 한다. 이 형국이 과연 중식과 은모의 사랑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일까. 의아하기만 하다. 희뿌연 안개가 의미하는 모호함처럼 중식과 은모의 불투명한 관계는 영화에서 설정한 파주의 이미지와 상응하지만, 결코 그들이 흩뿌려 놓은 사건들과 관계는 결론 내려지지 못한다.&lt;/p&gt;
&lt;p class=&quot;st11&quot;&gt;파주, 현재와 단절된 땅&lt;/p&gt;
&lt;p class=&quot;bt11&quot;&gt;이 영화는 지금의 시대 현실과 맞물려 말할 수 있는 가치가 사실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물론 철거민 문제라든가, 재개발 문제 등을 던져놓고는 있지만 결국 그것을 ‘문제시’하지 않고, 내러티브와 캐릭터 그리고 현실과의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지 않은 채 끝맺어 버리기 때문에 이도저도 아닌 영화가 되어 버렸다. 묻고 싶다. &amp;lt;파주&amp;gt;는 한국영화로서 현재와의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인가?&lt;/p&gt;
&lt;p class=&quot;bt11&quot;&gt;&amp;lt;파주&amp;gt;는 1967년의 &amp;lt;안개&amp;gt; 와 1997년의 &amp;lt;초록물고기&amp;gt; 2006년의 &amp;lt;밀양&amp;gt; 등을 경유함으로써 한국영화에서 다뤄왔던 현대사회의 개인과 지역, 개발의 문제를 수직선에 두고 논해볼 중요한 가치가 있을 뻔했다. &amp;lt;파주&amp;gt;는 안개, 도피, 안식, 회귀, 죽음, 사랑, 지역성, 운동권, 저개발과 개발, 그리고 재개발의 문제를 나열해 놓고 어느 것도 제대로 파헤치거나 말하지 못한 채 끝맺는다. 과연 &amp;lt;파주&amp;gt;의 개인(특히 중식)은 어디서 온 인물일까?&lt;/p&gt;
&lt;p class=&quot;bt11&quot;&gt;점점 한국영화 속 공간은 &amp;lt;파주&amp;gt;와 같이 지역성을 지워버리려는 경향이 보인다. 한국사회는 도시 서울과 그렇지 않은 곳은 아직도 도시사회와 변두리(혹은 지방)로 이분화 되어 있다. &amp;lt;오! 수정&amp;gt;, &amp;lt;극장전&amp;gt;과 &amp;lt;멋진 하루&amp;gt;, &amp;lt;비스티 보이즈&amp;gt; 등 도시 서울에 대한 집착적 이미지들은 한국사회의 변두리는 삭제되어 있다. 반면에 변두리의 집착적 이미지도 있다. 지방만을 부각시켜버린 조폭영화는 지방도시를 영화적 공간으로 혹은 장르 화된 공간으로 한때 자리매김해 놓은 바 있다. 그러나 &amp;lt;행복&amp;gt; &lt;m&gt;&amp;lt;마더&amp;gt; &amp;lt;싸이보그지만 괜찮아&amp;gt; &amp;lt;박쥐&amp;gt; 등과 같은 영화에서 그려지는 한국의 지역은 실제 공간임을 부인한 채 가공의 공간처럼 설정된다. 한국이긴 한국인데 어딘지 도통 알 수 없고, 그럼으로써 캐릭터들은 더욱 방만하게 혹은 자유롭게 내러티브 속에서 움직이는 것 같다. 
&lt;p class=&quot;bt11&quot;&gt;그런데 &amp;lt;파주&amp;gt;는 분명 가공의 시간을 설정한 것도 아니며, 가공의 공간으로 설정된 영화도 아니다. 제목으로 알 수 있듯, ‘파주’라는 지역에서 벌어진 이야기다. 만약 제목 파주가 지역 명을 지시하는 파주가 아니라면 모르겠지만(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영화는 현재에서 7년 전 그리고 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다시 현재로 되돌아오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영화는 적어도 주인공들의 개인적인 시간과 공간의 히스토리를 전제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어쨌든 &amp;lt;파주&amp;gt;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전면화 시킨 파주라는 공간과 재개발의 모티브를 좀 더 현실적인 문제로 끌어당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철거 농성 장면을 보면 나름 시위의 격렬함을 스펙터클하게 찍으려는 노력이 배어있다. 그런데 깡패와 철거민 사이의 긴장관계 역시 깊은 갈등으로 치닫지 않는다. 이 부분은 중요하다. 제목 ‘파주’가 왜 설정되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뿐만 아니라 중식과 은모의 관계 역시 죽은 은수가 남긴 유산 때문에, 혹은 형부와 처제라는 그어진 금기 때문에 감정만으로 남고 만다. &amp;lt;파주&amp;gt;는 드라마를 가장한 멜로영화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중식을 둘러싼 세 여자의 이야기. 그러나 은모와 중식이 프롤로그에 차례로 등장하면서 둘 간의 이야기가 &amp;lt;파주&amp;gt;의 중심이 될 것을 예견할 수 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 은모는 오토바이를 타고 어디론가 가는 도중 나이트클럽 사장(이경영)이 타고 가는 차를 보고 그와 시선을 교환한다. 영화는 중식의 이야기가 전개될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은모의 이야기로 도달한 채 끝맺어진다. 결국 &amp;lt;파주&amp;gt;가 정말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었을까? 식상하지만 가장 중요한 질문이 아닐까라고 되뇌고 싶다. by 김다현(vovovdh)&lt;/p&gt;
&lt;p class=&quot;batang&quot;&gt;&lt;span style=&quot;COLOR: #951015&quot;&gt;김다현 [스크린] 2009. 12월호 게재&lt;/span&gt;&lt;/p&gt;&lt;/m&gt;
&lt;p&gt;&lt;/p&gt;
&lt;p&gt;&lt;/p&gt;
&lt;p&gt;&lt;/p&gt;&lt;/p&gt;&lt;/div&gt;</description>
                        <pubDate>Thu, 14 Jan 2010 15:50:48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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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끝맺음 없는 강박관념 - 반복되는 기억과 행위, 홍상수의 영화들</title>
            <dc:creator>영화연대</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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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 class=&quot;bt11&quot;&gt;이제 한국영화에서 영화스타일을 말할 때, “홍상수 스타일이야”라고 말하는 경우는 이미 흔해졌다. 이제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을 한데 묶어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스타일’의 성립을 말하기도 하지만, 스타일의 변화 역시 포함할 수 있는 말이다. ‘홍상수식 스타일의 영화’ 혹은 ‘이거 홍상수식인데’라고 말하는 그의 스타일은 이렇게 한국영화에서 분명히 대중적이든 아니든, ‘다름’을 가진 형식을 가진 채, 일관성을 유지해 나가는 드문 영화미학을 구축한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lt;img src=&quot;http://mamoro3.cdn2.cafe24.com/wb01.jpg&quot; alt=&quot;wb01.jpg&quot; title=&quot;wb01.jpg&quot; style=&quot;&quot; /&gt;&lt;/p&gt;
&lt;p class=&quot;bt11&quot;&gt;내가 홍상수 영화에 대해 고민하고자 하는 부분은 그의 영화 속 인물의 모방과 재현이 말의 패턴, 행위의 패턴 등으로, 시공간 그리고 기억을 오가면서 개별적인 퍼즐을 구성하는 기이한 메커니즘에 관해서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 ‘홍상수’라는 감독의 영화를 이해하려는 과제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영화에 관해 말하려는 본인의 욕망 중 하나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홍상수의 영화에 관한 일련의 모호함을 풀어내려고 노력한 작은 시도이면서, 짤막하게나마 그의 영화 전체를 둘러보는 기회로 삼으려는 일종의 애정 표시이다.&lt;/p&gt;
&lt;p class=&quot;st11&quot;&gt;1. 말의 반복과 행위의 반복으로, 행위을 직조하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홍상수의 영화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인물간의 대화와 행동이 기억과 결부된 모방으로 이루어지거나 반복된다는 것이다. 특히 반복된 말과 행동이 캐릭터 구성과 내러티브 구성으로 짜여진다. 이것이 혹, 흔히 말하는 ‘일상성’의 일부분 중 하나라고 규정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amp;lt;생활의 발견&amp;gt;(2002)에서 성우는 경수와 함께 방석집에 앉아 술에 취해 몸을 좌우로 흔든다. 그리고 그는 경수와 명숙이 함께 한 술자리에서도 역시 좌우로 몸을 흔든다. 이 행동은 경수가 경주에 내려가 선영과 술을 마시면서 재현된다. 후에 성우의 습관적 행동은 경수에게 전이되어(혹은 경수가 모방하여) 일시적 인간관계를 지체하는 일부분으로 작용시킨다. 방석집에서 취한 채 몸을 흔드는 성우에게 그의 파트너는 “왜 자꾸 몸을 흔드냐”고 다그치지만, 그는 취해서인지 대답하지 않는다. 그저 몸을 흔들 뿐이다. 그의 행동을 모방한 경수는 선영에게 같은 질문을 받는다. 반면에 경수는 “술 마실 땐, 술이 취하지 않게 하구요. 기분이 무거울 땐, 그냥 앞뒤로 흔드는 것 같아요.”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이 대답은 진지한 대답이 아니다. 영화에서는 그 이전에 오히려 경수의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성우의 행동을 경수가 ‘따라했다고’ 볼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경수의 대답은 그다지 ‘진짜 이유처럼’ 납득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대충 대답한 것처럼 보인다. 왜 경수는 술 마실 때 몸을 흔들었을까. 성우도 그랬지만, 경수 역시 항상 몸을 흔들지는 않는다. 성우가 술이 취했을 때 그랬듯, 경수 역시 술 마실 때 몸을 흔들었지만 술이 취했을 때 흔들지는 않는다. “술이 취하지 않게 하구요”라는 경수의 대답은 오히려 성우의 행동과는 정반대다. 여기서 다시 우리는 캐릭터간 행동의 모방이 결코 단순한 베끼기로 그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인간의 행동은 영향관계 속에 놓여있다. 그러나 그들이 상대방으로부터 모방한 것은 결코 항상 동일한 방식으로 전이되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차이가 파생되고, 인물간의 동질성이 확보되지 않는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영화에서 설정한 단순한 인물의 대사와 행동이 인물간 갈등구조에 연결되지 않은 가닥이라는 점이다. 영화는 인물이 인물에게 영향받아 전이되는 일련의 복잡한 과정들이 개별적으로 혹은 전혀 반대방향의 성질들로 변하게 되는 모순들을 지적해내고, 그것은 의도된 플롯 배치로 더욱 더 강조된다. 내러티브상의 존립근거를 무색케 하는 이러한 발상들은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가’의 중요성보다는, 객체들의 비합리성에 관한 조소섞인 배열로써 끊임없이 인물들의 말과 행위에 관해 묘사한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홍상수의 영화에서 캐릭터들의 행동은, 정해진 귀결을 좇지 않는다. 다시 말해 시간적으로 다음 순번을 기약하지 않는다. &amp;lt;돼지가 우물의 빠진 날&amp;gt;(1996)에서 보경은 어쩌지도 못할 자신의 처지를 순간적인 우울로 표현한다. 영화는 이른 새벽, 신문을 보다 말고 천천히 신문 한 장 한 장을 마루에서 베란다 방향으로 깔아놓던 보경이 베란다 창문을 열고 밖을 바라보는 뒷모습으로 끝맺는다. 이 종결되지 않는 주인공의 모습은 &amp;lt;강원도의 힘&amp;gt;(1998) &amp;lt;생활의 발견&amp;gt;(2002) &amp;lt;여자는 남자의 미래다&amp;gt;(2004) &amp;lt;극장전&amp;gt;(2005) &amp;lt;해변의 여인&amp;gt;(2006)의 결말과 별반 다르지 않다. &amp;lt;강원도의 힘&amp;gt;에서 상권은 지숙과 (영화 속에서 잠정적인 마지막)섹스를 하고 자신의 일상으로 복귀한다. 새로 부임한 교직을 위해 사무실을 정리하던 중 상권은 키우고 있었던 세숫대야의 금붕어를 바라본다. 그리고 영화는 끝이다. 이 장면은 기이하게도, 영화 초반부 지숙이 강원도 여행 중 산길에서 발견한 금붕어를 산채로 묻어주는 장면과 병치된다. 그런데 이 두 주인공이 마주하는 금붕어는 영화 속에서 어떠한 설명도 거두어내지 않는다. &amp;lt;생활의 발견&amp;gt;의 경수는 어떠한가, 선영을 문밖에서 기다리던 경수는 춘천에서 성우가 말했던 회전문의 전설처럼 천둥과 함께한 장대비를 맞으며 결국 그녀를 만나지 못하고 발길을 돌린다. 그리고 &amp;lt;여자는 남자의 미래다&amp;gt;에서 헌준은 선화의 (알 수 없는)행동에 화를 내며 사라지고, 그들과 같이 있던 문호는 우연히 만난 학교 학생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여학생과 여관에서 시간을 보내다 여학생을 보낸 후 홀로 찻길에 휑하니 서 있다. &amp;lt;극장전&amp;gt;의 동수는 여배우와 하룻밤을 보낸 후 선배감독 이형수의 병문안 을 마치고 “생각을 해야 해, 죽지 않고 오래 살 수 있도록...”이라고 중얼거리며 열심히 걸어간다. &amp;lt;해변의 여인&amp;gt;의 문숙은, 서울로 가기 위해 운전대를 잡고 재빨리 해변을 벗어난다. 무엇이 주인공들을 ‘어디로 가야할까’라는 고민에서 자유롭게 하는가. 기실 주인공들은 결코 어떤 뚜렷한 방책도, 계획도 없는 ‘쉬어가는’ 사람들이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극심한 갈등으로 점철된 내러티브가 진척되지 않는 이유는 주인공들의 시덥지 않은 여유를 노출시키는 것 보다는, 느린 걸음으로 걸어가는 캐릭터를 관조하기 때문이다. 홍상수는 캐릭터가 경유하는 시공간에 대해 기억의 모티브를 끄집어내어 해결되지 않을 문제를 다시 도제해낸다. 그 속에서 모방과 반복이 재생산되고, 인물들은 느린 걸음으로 다시 생각한다. 그리고 관객은 다시, 느리게 영화를 사유한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그의 영화에서 인물의 행위가 대사를 통해, 행동을 통해 모방되고 반복되는 것은 외려 기승전결의 이야기 구조가 아닌 비(非)장르적 성격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홍상수의 영화는 스펙터클하거나, 이야기에 깊이 빠질 수 있는 매력은 없다. 그래서 그의 영화를 보고 나면, 특정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든가, 캐릭터의 세부적인 행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지고지순한 사랑도 없고, 애틋한 멜로도 없으며, 캐릭터 상호간의 믿음이나 신뢰도 두각되지 않는다. 정말로, 인물간의 의사소통 그리고 관계에 관한 영화다. 인물이 서로 가지는 관계를 말할 때,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틈새를 포착하는 것, 그것이 말과 행위를 탐구하는 데 더할 나위 없는 가볍고도 무거운 가치인 것이다. 정리해 보면, 홍상수가 영화를 통해 보여주는 것은 관계를 맺는 인물들의 시시껄렁함이다. 그들은 한마디로 ‘거창하지’ 않다. 반복과 모방을 할 뿐이다. 그들은 공간 속에 놓여 있으며, 약간의 이동을 할 수 있고, 말을 하고 약간의 행위를 할 뿐이다. 그 뿐이다.&lt;/p&gt;
&lt;p class=&quot;st11&quot;&gt;2. ‘기억’으로 현재를 지속시키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lt;/p&gt;
&lt;p class=&quot;bt11&quot;&gt;점잖은 동창(이하 동창): 그래도 너 영화보러 온 거 보면, 너랑 형수선배랑 친하긴 친했다 그지?&lt;/p&gt;
&lt;p class=&quot;bt11&quot;&gt;동수: 학교 다닐 때 그랬지, 나도 안본 지 오래돼.&lt;/p&gt;
&lt;p class=&quot;bt11&quot;&gt;동창: 그래도 서로 닮은 게 많잖아.&lt;/p&gt;
&lt;p class=&quot;bt11&quot;&gt;동수: 뭐가 닮았어?&lt;/p&gt;
&lt;p class=&quot;bt11&quot;&gt;동창: 뭐, 쿨한 척 하는 것도 그렇구, (피식 웃으며) 또 여자도 많이 좋아하고. 그리구 이번에 하려던 영화도, 비슷하지 않아?&lt;/p&gt;
&lt;p class=&quot;bt11&quot;&gt;동수: (피식 웃으며) 치, 자식, 난 하여튼 니네 집에서 해준 갈비찜만큼(이 때 줌 아웃하는 카메라. 동창과 동수의 투숏에서 옆에 앉은 친구의 아내까지 잡힌 쓰리숏으로) 맛있게 먹은 갈비찜이 없었어 진짜.&lt;/p&gt;
&lt;p class=&quot;bt11&quot;&gt;동창: 무슨 갈비찜? 아아, 그게 몇 년 전껀데에..&lt;/p&gt;
&lt;p class=&quot;bt11&quot;&gt;동창처: 아아, 그걸 기억하세요? 아 역시,(멋쩍게 웃으며) 아직도 그런 걸 기억하시는 구나.&lt;/p&gt;
&lt;p class=&quot;bt11&quot;&gt;동수: 진짜 맛있었는데, 살이 이렇게(두 손을 올려 고기가 양쪽으로 쪼개지는 모양을 만들며) 완전히 살살 녹았어.&lt;/p&gt;
&lt;p class=&quot;bt11&quot;&gt;하하 (다들 웃음)&lt;/p&gt;
&lt;p class=&quot;bt11&quot;&gt;동수: (동창을 바라보며) 너 근데 너 갈비찜 먹으면서 니 와이프 칭찬 몇 번 했는줄 알아?&lt;/p&gt;
&lt;p class=&quot;bt11&quot;&gt;동창: 갈비찜 먹으면서?&lt;/p&gt;
&lt;p class=&quot;bt11&quot;&gt;동창처: 그랬어요? 당신이?&lt;/p&gt;
&lt;p class=&quot;bt11&quot;&gt;동창,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동창처와 친구를 번갈아 본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동수: 여섯 번이다. 내가 그때 세 봤거든. 여섯 번을 칭찬하더라고 니가.&lt;/p&gt;
&lt;p class=&quot;bt11&quot;&gt;동창:(어처구니 없다는 듯 웃으며 손가락질한다) 별걸 다 기억한다니까.&lt;/p&gt;
&lt;p class=&quot;bt11&quot;&gt;다들 소리 내어 웃음. 그 때 동수에게 원숏으로 다시 줌인.&lt;/p&gt;
&lt;p class=&quot;bt11&quot;&gt;동수:(아래를 쳐다보고 웃으며 말한다) 난 누가 그렇게 음식 칭찬하는 거 첨 봤거든. (얼굴이 굳어지며 두 손으로 얼굴을 부빈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lt;/p&gt;
&lt;p class=&quot;bt11&quot;&gt;위 대화는 &amp;lt;극장전&amp;gt;에서 우연히 만난 동수와 그의 동창이 점심식사를 하는 중화요리 집 씬 중 일부이다. 여기서 이들의 대화를 살펴보면, 동수는 동창이 형수선배(전반부 영화의 감독)와 자신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자, 바로 동창에 대한 기억으로 화제를 돌린다. 동창이 떠올리는 기억은 동수와 형수선배와의 유사점들인데 이 기억은 사람과 사람을 기억할 때 가장 평범하게 각인되는 것들이다. 반면 동수의 동창에 대한 기억은 몇 년 전 동창이 아내의 음식 솜씨를 ‘몇 번’ 칭찬했는지다. 동창의 기억은 과거, 현재를 아우르는 연속성이 부여된 것이라면, 동수의 기억은 그 자체로 단절될 수밖에 없는 기억이다.(중화요리집에 와서 몇 년 전 먹은 갈비찜이 떠오른다는 것 역시 의아하다) 동창의 칭찬으로 인해 당시 다른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동수의 언급은 그걸로 중단된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lt;img src=&quot;http://mamoro3.cdn2.cafe24.com/tale.jpg&quot; alt=&quot;tale.jpg&quot; title=&quot;tale.jpg&quot; width=&quot;760&quot; height=&quot;493&quot; style=&quot;&quot; /&gt;&lt;/p&gt;
&lt;p class=&quot;bt11&quot;&gt;다음 장면은 식사를 마친 후 음식점 문 밖에서 이루어진다. 어쨌든 동수와 형수선배와의 연관성은 단정적으로 동수의 입으로 동수의 입장에서만 정당화된다. 제 3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동수와 형수선배의 취향은 단지 ‘비슷했을 뿐’인 것처럼 보이는데 동수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형수선배가 자신을 따라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amp;lt;오!수정&amp;gt;(2000)과 같은 기억의 차이가 논해질 것처럼 보이지만, 병상에 누워있는 이형수의 입으로는, 그의 시각으로는 언급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가 철저히 동수에 관한 이미지임을 자각해야한다. 여기서 형수의 기억따위, 제 3자의 기억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그냥 인간의 기억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전반부영화에서 상원과 영실이 있던 호프집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다시 사랑한다면’은, 동창모임에 참석하려는 동수가 남산을 올라가며 휴대폰으로 듣게 된다. 그리고 동수는 모임에 참석한 배우 영실에게 그 노래를 신청함으로써 다시 반복하여 들을 수 있게 된다. 이는 영화 밖을 빠져나온 관객(우리)이 너무 자연스럽게 상기해버릴 수 있는 감상적 기억들 따위와 동일한 것이다. 홍상수는 대단한 기억에 대해 말하지 하지 않는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amp;lt;해변의 여인&amp;gt;에서 문숙과 선희는 각각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눈물을 보인다. 그리고 중래는 전 부인의 나쁜 이미지와 문숙의 과거이미지 사이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중이다. 이들의 기억은 영화에서 보여주지 않은 것이며, 인물들은 각각 영화 속 현재에서 혼자 갈등을 겪는다. 이에 반해 영화 속 인물들 간의 간극을 채워주는 회상씬을 집어넣은 경우를 보여주는 영화가 &amp;lt;여자는 남자의 미래다&amp;gt;이다. 헌준과 문호는 둘 다 그들이 함께 앉아있는 시퀀스에서 각자가 자리를 비운 사이, 창문 너머의 같은 여자를 보고 그들의 과거 여자 선화를 떠올린다. 즉 하나의 시퀀스 안에서 두 개의 회상씬이 끼워져 있는 셈이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각자의 기억으로 회상된 씬들은 &amp;lt;오!수정&amp;gt;에서처럼 각기 다른 시점의 동시간을 경유하지 않고, 철저히 분리된 시공간을 기억하는 것으로 처리되어 있다. 그 후 영화는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문호로 하여금 헌준과 선화의 관계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오게 하며, 놀이터에 앉아 난데없는 나르시스적 환상에 사로잡히게 한다. 이 시퀀스에서 문호가 두르게 된 빨간 목도리의 주인인 여학생은 술자리 후 문호와 함께 여관에 가게 된다. 이제 헌준과 선화와의 어떤 관련도 맺어지지 않은 채, 오롯이 문호의 독립된 이야기로 집중된다. 그리고 영화의 결말 역시 문호의 서성거림으로 일단락된다. 영화 초반부, 열심히 헌준과 문호의 회상으로 이들을 ‘이야기’하던 영화는 오히려 헌준과 선화의 미래에 집중하기는커녕, 제3의 인물(처럼 보이는) 문호의 이야기로 후반부 힘을 싣는다. 사실 ‘기억’이란 것은 홍상수의 영화에서 중요한 모티브이지만, 그의 영화에서 좀 더 중요한 것은 물 흘러가듯이 흘러가야만 하는 영화 속 현재-자체인 것이다. 헌준과 선화의 관계는 거기서 끝, 문호와 선화의 관계 역시 거기서 끝이다. 헌준은 미국에서 돌아와 ‘무엇을 해야 할 지 결정해야’ 하지만, 문호는 진행형을 살고 있는 인물이다. 그래서 오히려 문호의 욕망이 영화 속 후반부에 배치된 것은 아닐까. 선화의 현재는 어쨌든 헌준과 문호의 회상 속에 존재했던 과거의 사람으로서, 그리고 이미 그들의 기억 속을 지배하는 예전의 선화가 아니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홍상수는 도통, 영화 속 인물이 ‘기억하는 것’을 내러티브의 결정권 속으로 밀어넣지 않는다. 기억은 기억일 뿐이다. 다만 그들의 기억을 용의주도하게 ‘배치하는 것’에는 관심을 보인다. 그래서 그는 처절하게 기억의 상이함으로 영화 구성의 모티브를 만든다. &amp;lt;생활의 발견&amp;gt;에서 경수가 선영에게 다가서는 이유는 선영의 기억 속에 자리잡고 있는 중학교 시절의 기억 때문이 아니다. 겨우겨우 그녀의 손동작을 기억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정말로 기억하고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러한 기억이 내러티브를 결정한다면 즉시 회상씬을 배치해야 하지만 결코 회상씬 따위는 나오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홍상수가 말하는 인간의 기억이란 것은 영화라는 매체 속으로 들어오게 되면, 현재를 말할 수 있는 모티브 중 하나가 되지만, ‘현재’의 짧은 순간 속에서 괄목할 만한 단서로 기능하지는 않는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홍상수의 모든 영화가 ‘긴 시간’을 설정하지 않는 ‘말하기’ 방식을 취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보통 영화가 규정하는 방대한 시간성은 끊임없이 지나쳐가는 대과거/과거/이른 과거 등을 만들게 되는데, 그렇다면 온전한 영화적 현재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에 대한 논의를 펼치는 영화로 &amp;lt;극장전&amp;gt;을 들 수 있는데, 홍상수는 방대한 시간성의 간격을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전반부)와 온전한 영화적 현재로 구성되는 동수의 이야기를 이음매 없이 이어 붙임으로써, 시간의 단절을 좁히게 된다. 동수의 기억으로 말해지는 ‘말보로’담배와의 시간적 간극과, 자신의 행위를 모티브화 하여 영화(전반부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그의 말은, 회상으로 복귀하지 않고, 말의 일시성으로 환기될 뿐이다.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위에서 언급했던 &amp;lt;생활의 발견&amp;gt;에서 경수의 날듯 말듯한 기억 역시 마찬가지다. 그의 영화에서 대과거는 &amp;lt;여자는 남자의 미래다&amp;gt;의 회상씬과, &amp;lt;극장전&amp;gt;의 1부 영화라고 볼 수 있는데, 이 역시 온전한 영화적 과거는 아니다. 잠정적으로, 홍상수의 영화에서 영화적 현재를 중심으로 ‘과거’는 현재를 향한 모티브로, 연속적인 시간성을 용인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의 영화는 철저하게 시간을 분리시킴으로써 그것이 현재의 시.공간과 얽매이지 않도록 하는 방법론을 구사한다. 인물의 기억과 시간의 상관성은 오로지 ‘영화’에서, 그것이 ‘영화’일수 있도록 조직될 수밖에 없다.&lt;/p&gt;
&lt;p class=&quot;st11&quot;&gt;3. 끊임없이 닫힌 시공간을 유영하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목적이 뚜렷하지 않은 여행에서, 인물들은 술을 마시고 만난 지 몇 시간 안 되어 스스럼없이 섹스를 한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단 한 번도 취하지 않은 적이 없다. 느슨해질 수밖에 없게 만드는 술의 기운은, 반대로 인물간의 관계 설정이 견고해지는 데 도움을 준다. 단지 홍상수의 영화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술을 마시면서 대화의 진전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술을 마시는 상황 속에서 일련의 포인트가 구축되는 것이다. &amp;lt;오!수정&amp;gt;의 재훈은, 술자리를 통해 수정의 이름을 알게 되고 그녀와 가까워질 수 있는 동기를 만든다. &amp;lt;여자는 남자의 미래다&amp;gt;에서 역시 헌준과 문호는 둘의 술자리에서 각각 선화를 떠올리게 되고, 즉흥적으로 그녀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인물들은 뚜렷한 기약없이 행동한다. 그래서 더욱 ‘길거리’를 돌아다닐 수밖에 없게 되고, 술을 마시거나, 여관에 갈 수 밖에 없다. 간혹 누군가의 ‘집’에 들른다고 할지라도, 역시 목적은 섹스이거나 쉬어가는 페이지의 일부분이다. 홍상수 영화에서 영원히 정착할 수 있는, 혹은 묶여있는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자연스럽게 시간 역시 얽매이지 않는 흐름 속에 놓여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시간에 걸친 이야기를 풀어놓을 여력은 없다. 역으로 말해, 시간과 공간은 산, 바닷가, 도시 속에서 배회할지언정 배회의 지점에 연결된 사다리와 같은 탈출구는 없다. 이들의 행위가 어느 순간 매우 건조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은 바로 그 점을 발견한 순간이기 때문일 것이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그런데, 남녀의 행위에는 논리적이지 않은 대화, 술, 기다림 등뿐만 아니라 ‘섹스’가 반드시 포함되어 있다. 남녀가 가까워지는 순간은 술을 마시는 장소에서 이루어지지만 육체관계를 통해 또 하나의 의미없음을 만드는 순간은 남녀가 여관방에 공존하는 그 순간이다. 역시 끊임없이 무의미의 공간을 상정시키는 섹스씬에서 그들은 결코 ‘사랑’이라는 애틋함이 왠지 제대로 표현되지 않는다. 아니 표현하지 못한다. 이들 남녀가 벌이는 일종의 일탈은 어떤 의미에서 그 가치의 유무를 판단하게 할 수 있는가. &amp;lt;생활의 발견&amp;gt;의 명숙의 말처럼, “이제 거짓말하지 말자”라는 말은 정말로 솔직한 제스처인가. &amp;lt;오!수정&amp;gt;의 수정과 재훈을 제외하고, 나머지 영화들에서 남녀는 결합되기만 하면, 거짓말하지 않고 섹스를 한다. 그들의 밀착되어 있는 육체들처럼, 영화는 좀 더 닫혀있는, 은밀한 공간 속에서 행위를 전개시킨다. 그런 면에서 보면 홍상수의 영화는 굉장히 미시적인 성격을 가진 영화이다. &amp;lt;해변의 여인&amp;gt;에서는 어떤가. 아예 해변가 숙박업소와 음식점 몇 군데로 한정된 인물들은 또한 이제까지의 영화들 중 가장 좁은 공간들 속에서 이야기를 풀어낸다. 홍상수는 데뷔작부터 일관되게 짧은 시간동안 인물들의 움직임을 그려내는데, 이제 점점 그 영화적 시간은 단축되고 있다. 동시에 사건 역시 점점 줄어든다. 점점 분절되는 시간들은 공간 속에서 천천히 유영하고, 끊임없는 지체 속에서 동작을 반복, 구성한다. 
&lt;p class=&quot;st11&quot;&gt;4. 풀리지 않는 의문들은 꼬리를 물고 미완성의 지도를 그린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미시적인 이야기 구성은 사실 영화적 현재에 충실히 집중하는 장점을 가진다. 그래서 홍상수의 개별적인 영화 속에서 등장하지 않는 이미지, 혹은 이야기(일회적인 말로써 증발되는 것들)가 부재했을 경우 그 여백이 크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만큼 홍상수의 영화는 러닝 타임 속에서 꽉 찬 구성적 시간을 갖추고 있으며 흥미로운 시공간의 배열을 조직한다. 그러나 풀리지 않는 오브제들이나 대화들이 그러한 배열구조 속에 녹아 있다는 것은 반대로 미시적 시공간의 배열이 낳은 모순은 아닐까라는 의문이 들게 한다. &amp;lt;극장전&amp;gt; 전반부에서 영실이 상원에게 갑자기 “첩해줄까?”라고 제안한다든지, &amp;lt;해변의 여인&amp;gt;에서 중래는 해변에서 만난 개 ‘돌이’를 무서워 하지만, 주인이 버리고 간 후 마주친 ‘돌이’를 무서워하지 않는데, 그러자마자 중래가 다리를 다치게 된다. 이 엉뚱하고도 비인과적인 인물 행위의 결과는 비어있는 내러티브라는 구석진 공간에 침잠되는 상황의 일부이다. 그런데 이러한 말-행위는 결코 플롯 구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는, 있는 그대로 묻어둘 수밖에 없는 매개고리들이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이 풀 수없는 모순된 상황들은 끝까지 왜?를 물어보지 않고, 그 자체로 비워둔 채 영화 안으로 포섭된다. 홍상수 영화를 말하면서 가장 풀리지 않는 숙제가 이러한 부분들일 것이다. 그것은 마치, &amp;lt;극장전&amp;gt;의 동수가 행했던 것처럼, 끊임없는 모순과 모방적인 상황을 재현하는 인간들의 알 수없는 움직임들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실제 순간들에서 감지한 채 우리의 은연 중 의식 속에 자리잡은 일부분이다. 영화 속 캐릭터가 영화 속 시간과, 실제 러닝타임 속에 귀속되어 미니어처처럼 작동되고 있는 동안 우리도 의식되지 않은 불균질한 상황들이 연출된다. &amp;lt;생활의 발견&amp;gt;의 경수가 선영에게 섹스가 잘 이루어지지 않자, “우리 같이 죽을까요?”라고 말하거나, &amp;lt;극장전&amp;gt;전반부에서 상원이 영실에게 “깨끗이 죽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이 역시 후반부, 동수가 배우 영실에게 하는 말로 전이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영화는 주인공이 결심하려는 죽음에 관해 설명하지 않는다. 결국, 영화에서 집중하는 것은 결코 주인공이 죽음을 결심하는 이유는 아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죽음은 그들 자신에게도, 심지어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도 납득이 되지 않거나 설명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존재 의미 그 자체다. 홍상수가 던져놓고 결론짓지 않는 것들 중 하나는 바로 이러한 설정들이다. 반드시 드러내주어야 하는 것들이 드러나지 않는 것. 바꿔 말하면, 왜 그렇다면 그것들은 전부 말해져야 하는가? 라는 말로 치환된다. 어차피 홍상수의 영화는 처음부터 미수에 그친 이야기를 반복하는 중이다.(&amp;lt;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amp;gt;을 상기해 보라. 등장인물들이 비로소 ‘깨닫는 것’은 무엇이었나?)&lt;/p&gt;
&lt;p class=&quot;st11&quot;&gt;5. 결론의 부재&lt;/p&gt;
&lt;p class=&quot;bt11&quot;&gt;홍상수의 영화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욕망에 대해 집착적일 정도로 집중한다. 그래서 그의 영화가 항상 같은 얘기만 한다고 느끼게 된다. &amp;lt;오!수정&amp;gt;부터 시작된 인물구도(남-여-남)는 대체적으로 &amp;lt;해변의 여인&amp;gt;에 이르기까지 거의 변하지 않는데, 인물들의 말, 행동 등 역시 거의 변하지 않는 패턴으로 이어간다. 그런데도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영화 속 인물들은 거창하게 행동하는 인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갇혀 있지 않는다. 나는 이글에서 홍상수의 영화를 ‘시공간을 유영하는 기억들이 반복과 모방의 행태로 재현되는 것’으로 요약하고 있는데, 이 점은 홍상수 영화에서 가장 눈여겨 들여다봐야 할 뼈대이다. 그는 정말 인간들이 놓치고 있는 무수한 소일들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그것은 역설이기도 하고, 냉소이기도 하며, 일침이기도 하다. 왜 굳이 우리는 스펙터클에 시야을 노출시켜야만 하는가. 나이기 때문에 내가 들여다보지 못할 부분들, 그것은 나 자신을 위한 확대경이다. 그가 반복하고, 모방하며, 촉수를 곤두세우며 욕망에 집착하는 것은 자신을 더 잘 들여다보기 위해서다. 그래서 그의 영화에는 결론이 존재하지 않는다. 김다현(vovovdh)&lt;/p&gt;
&lt;p&gt;&lt;/p&gt;
&lt;p&gt;&lt;/p&gt;
&lt;p&gt;&lt;/p&gt;
&lt;p&gt;&lt;/p&gt;
&lt;p&gt;&lt;/p&gt;
&lt;p&gt;&lt;/p&gt;&lt;/p&gt;&lt;/div&gt;</description>
                        <pubDate>Sat, 26 Sep 2009 21:18:48 +0900</pubDate>
                        <category>홍상수0909</category>
                                </item>
                <item>
            <title>&lt;극장전&gt; 삶의 시간은 스크린과 그 바깥이라는 시간의 두 차원 속에서 반복된다</title>
            <dc:creator>영화연대</dc:creator>
            <link>http://www.yhyd.org/10742</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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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 align=&quot;center&quot;&gt;&lt;img src=&quot;http://mamoro3.cdn2.cafe24.com/tale.jpg&quot; alt=&quot;tale.jpg&quot; title=&quot;tale.jpg&quot; width=&quot;760&quot; height=&quot;493&quot; style=&quot;&quot; /&gt;&lt;/p&gt;
&lt;p class=&quot;bt11&quot;&gt;명민한 관찰이란 어떠한 현상을 단순히 보는 데에 있지 않다. 훌륭한 관찰은 현상이 얽혀진 설계도를 보게 되고야 마는 것이다. 홍상수의 영화들은 무책임하게 뒤섞어 놓은 현상들이 아니며, 매우 단단한 설계도를 제공한다. 그리고 그 설계도는 자주 스스로의 의식을 통제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의심하고 경계하며, 이를 자신하는 사람들이 양산하는 오류를 희극화 하여 드러내고는 한다. &lt;br  /&gt;이런 홍상수 감독의 여섯 번째 영화 &amp;lt;극장전&amp;gt;에 대해 평론간 정성일은 매우 꼼꼼한 분석을 하고 있는데, &apos;홍상수는 죽음 대신 존재를 선택한다. 그래서 죽지 않기 위해서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고 결심한다.&apos;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허문영은 극중 동수의 결심이란 &apos;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하루 동안의 행적을 보셨습니다. 혹은 제 결심을 귀담아 듣지 마세요.&apos;처럼 들린다고 말하고 있다. &amp;lt;극장전&amp;gt;은 지속의 실패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것은 곧 역사적 시간으로 편입되는 것에 실패한 것인데, 생성과 축적을 가능케 하는 시간이 없으므로 성장은 불가능하고 역사적 시간은 그의 영화 밖에 있는 것이라는 거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amp;lt;극장전&amp;gt;은 감독의 영화 필모그래피에서 어떤 도약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허문영의 말을 빌리자면 이 영화는 감독의 축적과 생성을 보여주며, 이는 감독의 역사적인 시간을 보여주는 것이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amp;lt;극장전&amp;gt;은 전작들이 보여주는 반복처럼 평행적인 구도를 갖지 않는다. &amp;lt;극장전&amp;gt;은 영화와 현실이라는 깊이를 가진 반복을 행한다. 그 전 영화들의 시간은 계속적으로 가는, 하나의 직선적인 시간 속에 속한 반복이었지만, &amp;lt;극장전&amp;gt;에서 시간은 들어가고 나가는 시간이다. 극장에 들어갔던 시간과 극장 밖에서의 시간이 닮은 모습은 애초에 지속의 시간 속에 존재하는 반복이라기보다는, 서로 이질적인 시간이 어떻게 관계를 맺거나 혹은 관계를 맺는다는 기대를 저버리는지를 보여주는 반복인 것이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영화 속의 인물들은 여전히 제 자신을 인지하지 못하고 단지 시시각각 드는 감정에 따라 자기를 포장하려들고, 동수는 영화를 보고 난 후 영화에서와 닮은 궤적을 밟는다. 마치 상원이 된 것처럼 놀랍게도 영화 속 영화의 영실을 안경집에서 발견하고 그녀를 졸졸 따라다니며 그녀에 몰두한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 말보로 레드 담배를 사는 장면은 영화 속 영화와 그 밖에 있는 현실의 반복을 보여주는 단면적인 예이다. 그리고 이러한 반복은 서로 직접적인 영향 관계에 있다는 것을 노출하지는 않지만 그 하루 동안의 주제라고 할 만큼 계속된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그런데 &amp;lt;극장전&amp;gt;에서 반절 이상을 차지하는 영화 속 영화의 중요성은 그 안에 포함된 내용보다는 반복 자체, 즉 영화 속 영화 이야기가 있고 같은 이야기가 한 번 더 동수에 의해 반복된다는 것과, 그것이 스크린이라고 하는 거리를 통해 경계지어 있다는 형식에서 나온다. &lt;br  /&gt;인물들은 여전히도 자신의 의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애매한 채로 무언가를 흉내낸다. 진실한 사랑이라거나 절망이라거나 하는 것들을 말이다. 우리가 목격하는 동수의 하루는 영화를 보고 극장 밖으로 나오는 때부터 시작한다. 스크린 안에서 밖으로 나온 동수, 그리고 상원에서 동수로 이어지는 반복은, 지속되는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한 사람의 순차적인 시간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미 단절되어 있는 서로 다른 시간의 접점이다. 애초에 동수의 하루는 영화를 보고 난 후의 영향 아래서 그 전의 시간과 단절되어 새롭게 형성된 시간인 것이다. &lt;br  /&gt;여기서 들고 나감의 시간이라는 것이 생겨난다. 홍상수의 그 전 영화들에서 반복은 이러한 겹침이 형성되지 않는 평행적이거나 하나의 직선을 그리는 시간 속에 있었다. 이때 지속되는 시간 속에서는 질적인 도약을 볼 수 없다. 그 지속의 시간이야말로 서로가 흉내 내고 반복하는 시간일 뿐인 것이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그런데 &amp;lt;극장전&amp;gt;은 그 반복을 경계 짓고 잘라서 서로 다른 차원 속에 집어넣어 버렸다. 그 서로 다른 차원은 들어가고 나가는 시간이라는 구도를 갖는다. 지속의 시간이 아니라 들고 나가는 시간에는 문이 있다. 물론 이 영화가 이 문을 통해 해결점을 보인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속 영화가 내용상으로 우리에게 정보가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주된 것은 그 이전과 다른 식으로 반복되는 시간 그 차제인 것이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이러한 시간의 들고 나감은 그 전보다 더 발전적인 설계도인데, 그것이 이 전 감독의 영화들에서보다 더 다채로운 반응의 결을 포함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홍상수의 영화에서 서로가 결국 흉내 내고 있다는 사실보다도 흉내를 내는 시간의 들어가고 나가는 결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즉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간의 결을 보는 것이다. 홍상수의 영화들은 어떤 현상들이 관찰되는 판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답답하고 그 자체로 닫혀있는 단 하나의 시간이었다. 그런데 &amp;lt;극장전&amp;gt;은 시간이 여러 개 존재함을 발견한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그것을 알고 있는 영실은 자신의 의지로 하나의 시간을 종료시키고 동수를 꾸짖는다. 이러한 인물은 시간의 배치와 함께 홍상수 영화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는 매우 획기적인 것이다. 스스로 &quot;동수씨는 영화를 잘못봤다.&quot;거나 &quot;이제 그만 뚝!&quot;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은 말이다. 물론 동수는 여전히 헤매고 있다. 그렇지만 동수는 영실에게 혼나 본다. 또 동수는 마지막에 죽음 앞에서 눈물을 보이면서 하루 간 지속되었던 시간, 즉 영화 속 영화를 보고나서부터 시작되었던 그 시간을 끝내 보기도 한다. 동수는 갑자기 생각을 하려하고, 담배를 끊으려고 결심하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한 시간의 죽음이 주는 영향 속에서 또 다른 시간을 형성하려 하는데, 이것이 감동적이거나 거창할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홍상수 영화의 남자들은 드디어 자신을 제어하는 것들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앞서 소개한 것처럼 허문영은 영화가 지속에 실패하고 있기에 아무 것도 말하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오히려 &amp;lt;극장전&amp;gt;이라는 작품은 감독의 영화에 새로운 전환점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슬슬 홍상수가 보여주는 우리네의 적나라한 모습에 허허실실 익숙해갈 무렵에 감독의 인물들은 무언가와 새롭게 부딪히고 바둥대며 우리에게 또 다른 차원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lt;br  /&gt;&amp;lt;극장전&amp;gt;에서 감독은 시간을 이전과 다르게 배치한다. 그 시간은 단순히 평행적인 것이 아니라 깊이를 가지고 있는, 서로 다른 차원을 갖는 시간이다. 하나의 숏 안에서 카메라와의 거리차를 보여주는 줌이나, 화면과 동떨어져 거리져 있는 나래이션이라는 사운드를 노출한 것도 이러한 새로운 시간의 사용과 딱 맞아떨어지는 시도로 보인다. &amp;lt;극장전&amp;gt;은 이렇게 단 하나의 시간이 아닌 우리네 시간의 깊이, 차원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의 영화에서 새로운 것이며, 그것이 또한 하나의 지속을 포기하고 단절하여 가능한 새로운 배치, 새로운 시간이다. 계속 이어지는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또한 죽음과도 같은 것이다. 반대로 단절의 계기들은 오히려 삶의 순간들이다. 그것은 새로운 살을 돋게 하는 반복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감독이 자신의 작품 속에서 삶을 밀고 나가려는, 즉 계속 살아보려는 버둥거림으로 보이며 그렇기에 우리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또 다시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by gipsymoon)&lt;/p&gt;&lt;/div&gt;</description>
                        <pubDate>Sat, 26 Sep 2009 21:02:22 +0900</pubDate>
                        <category>홍상수0909</category>
                                </item>
                <item>
            <title>홍상수에 대한 잡담: 클레어 드니와 홍상수의 말들에 대한 모자이크</title>
            <dc:creator>영화연대</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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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 style=&quot;MARGIN-RIGHT: 0px&quot; dir=&quot;ltr&quot; class=&quot;batang&quot;&gt;&lt;span style=&quot;COLOR: #352e2c&quot;&gt;
&lt;span style=&quot;COLOR: #352e2c&quot;&gt;“내 영화에서 일상은 일상인데, 여행을 보통 다루고 있잖아. 서울을 보여주더라도 하루간의 여행을 보여주고. 사람들이 직장과 집과 취미활동단체를 오고가는 이야기는 거의 없다. 그렇게 고정적으로 반복하는 곳에 들어가서 뭘 보여주는 걸 내가 싫어하거나 혹은 아직은 보여주기 싫다. 난 주로 여행을 떠나서 부딪히는 관계, 특별히 너무 이상한 사건은 아니지만 모르는 사람과 만나거나 스쳐지나갈 때 생기는 관계를 그린다. 난 그런 상황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직장과 집을 오가는 일상을 그리려면, 그들이 원래 갖고 있는 역사를 표현해야 한다. 거기서 피로를 느낄 것 같다. 반복을 통해 시간 경과를 보여준달지,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하고 응축되어왔는가 하는 설명이 들어가야 하는데, 설명은 심리적이고 논리적인 무언가가 될 위험이 있다. 너무 계획을 많이 해야 한다. 배우들이 나와 작업하는 게 힘들다고 하면서도 결국 좋아하는 건, 거의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고 오거든. 태도만 유지하는 거다. 그런데 그 사람한테 “야, 너는 2년 반 전엔 그랬어” 하다가 그 다음엔 “이번엔 1년 전이야”, “이건 오늘이야” 이렇게 요구할 수가 없다. 난 배우가 풀어져 있는 상태에서 뭔가 이상한 부분을 잡아내는 걸 좋아하는데, 그렇게 계획이 들어가면 불가능해진다. 모르는 사람과 탁, 부딪히며 튕겨 일어나는 스파크 정도만 갖고 일상적인 관계를 꾸미고 싶다.” &lt;/span&gt;&lt;br  /&gt;&lt;span style=&quot;COLOR: #352e2c&quot;&gt;(김용언, 『씨네 21』 702호 스페셜 [홍상수]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다른 게 보인다(홍상수 감독 인터뷰), &lt;/span&gt;&lt;br  /&gt;&lt;a href=&quot;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1001&amp;amp;article_id=56237&quot; target=&quot;_blank&quot;&gt;&lt;span style=&quot;COLOR: #352e2c&quot;&gt;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1001&amp;amp;article_id=56237&lt;/span&gt;&lt;/a&gt;&lt;span style=&quot;COLOR: #352e2c&quot;&gt;)&lt;/span&gt;&lt;/span&gt;
&lt;p class=&quot;bt11&quot;&gt;클레어 드니(&lt;a href=&quot;./voice/10540&quot; target=&quot;_self&quot;&gt;&lt;span style=&quot;BACKGROUND-COLOR: #ffdaed; COLOR: #000000&quot;&gt;이번 특집에 실린 번역문 참조&lt;/span&gt;&lt;/a&gt;)는 홍상수의 영화들을 ‘남성적’이라고 하였다. 자세한 설명 없이 던진 이 단어에 대한 근거가 홍상수 본인의 인터뷰 내용에서 드러난다. &lt;br  /&gt;홍상수는 지속적으로 만나는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기 싫다고 말하면서 그 까닭이 관계의 변화 과정에 대한 설명이 심리적이고 논리적이 될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한 너무 많은 계획이 필요해서라고 한다. 그의 이러한 발언은 섀런 톰슨이 만난 십대 소년들을 떠올리게 한다. &lt;br  /&gt;1980년대 후반 섀런 톰슨이 미국 십대들을 중심으로 면접조사를 통해 섹스를 논하는 방식에 있어서 소년, 소녀들의 차이점을 발견하였다. 소년들은 섹스에 대해 서사 형식으로, 즉 마음속에 그려본 미래와 연관시켜 이야기하지 못하고 다양한 성적 정복 같은 산발적인 성적 에피소드만 주로 말했다. 반면 소녀들은 약간만 장단을 맞춰주면, ‘만남과, 고뇌와, 의기양양한 친밀한 관계들이 담뿍 담긴’ 기나긴 이야기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고 한다(앤소니 기든스, 배은정, 황정미 옮김,『현대 사회의 성 ? 사랑 ? 에로티시즘』, 새물결, 1996, 91쪽). &lt;br  /&gt;여행에서 스쳐지나가는 관계들을 보여주는 것을 선호하는 것은 산발적인 성적 에피소드만 주로 말하는 소년들과 유사하지 않은가! 물론 큰 차이는, 소년들의 과장과 우월감이 사라진 자리에는 그들이 가질 수 없는 시선이 들어선다는 점이다. 만남과 고뇌가 있는 이야기로 감동을 주지는 않지만, 홍상수는 ‘남성적’ 방식으로 냉소와 유머를 선사한다. 우리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 일어나는 일들을 팔짱 낀 채로 거리를 두고 바라볼 줄도 알아야하는 것이다. 그래야 친밀함에 대해 재고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느끼는 친밀함의 정체는 &amp;lt;생활의 발견&amp;gt;에서처럼 의미를 만들지 못하는 ‘반복’에서 오는 것은 아닌가하고 말이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말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열심히(?) 반복하면 새로운 경지가 열린다고! &lt;br  /&gt;클레어 드니의 표현에 따르면 홍상수의 여자들은, 우주에서 부유하고 있는 남자들의 방문에 응해 정거장에 있는 자신들의 공간을 열어준다. 여자들 역시 홍상수의 세계에 초대 받으면 손발이 오그라드는 면면들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 이렇듯 홍상수가 여자 캐릭터를 특화시키거나 신비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남자와는 다른 점을 그리고 있다. 그것이 여자가 남자의 미래가 될 수 있는 근거인지는 잘은 모르겠다. &amp;lt;생활의 발견&amp;gt;에서 하룻밤 사이에 사랑한다고 경수(김상경)에게 들이대는 명숙(예지원)과 &amp;lt;잘 알지도 못하면서&amp;gt;에서 자신의 과거를 간략하지만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후 구경남(김태우)을 꼬시는 고순(고현정)이 있다. 고순과 더불어, &amp;lt;생활의 발견&amp;gt;에서 짧게 내비쳤지만 명숙 역시 과거의 연애사에 대한 심리적이고 논리적인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상대방에 대한 통찰까지는 제쳐두고서라도, 이 두 캐릭터는 관계에서 자신의 심리 상태, 행동의 이유를 알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알고 있다고 홍상수의 세계로부터 초연한 존재가 될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녀들은 남자 주인공들과는 다른 태도를 보인다. 다시 한 번 섀런 톰슨이 발견한 소녀들과 소년들의 차이점이 홍상수 영화에도 적용되는 듯하다. 홍상수는 어떤 심리적이고 논리적으로 구성된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위험하다고 했다. 논리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때 그 이야기는 위험할 수도 있지만, 관계 속에서 영향을 주고받는 자신의 모습을 살필 수도 있다. 형식상에서 장르영화의 내러티브에 대한 반발 이외에 감독의 어떤 심리 기제가 그것을 싫어하게(회피하게?) 하는 지 살짝 궁금해진다. &lt;br  /&gt;개인적으로 할리우드식의 로맨스도 거부하지만 홍상수가 보여주는 일시적인 관계의 반복도 원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이 두 형식과는 갈라지는, 남녀 사이에서 다른 무언가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 (dela68)&lt;/p&gt;
&lt;p&gt;&lt;/p&gt;
&lt;p&gt;&lt;/p&gt;
&lt;p&gt;&lt;/p&gt;&lt;/p&gt;&lt;/div&gt;</description>
                        <pubDate>Tue, 08 Sep 2009 01:33:25 +0900</pubDate>
                        <category>홍상수0909</category>
                                </item>
                <item>
            <title>번역 : &lt;생활의 발견&gt;과 &lt;여자는 남자의 미래다&gt;에 대한 단상(클레어 드니)</title>
            <dc:creator>영화연대</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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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 class=&quot;batang&quot;&gt;&lt;span style=&quot;COLOR: #6e391a&quot;&gt;다음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영문본으로 출판한 한국의 영화감독 총서 가운데, 허문영이 편저한 Korean Film Drecters HONG SANG SOO에서 프랑스 영화감독 클레어 드니가 홍상수영화의 프랑스판 DVD에 코멘터리한 음성 해설을 녹취, 편집해 올린 것을 번역한 글이다. 클레어 드니는 &amp;lt;네네트와 보니&amp;gt;(1996) &amp;lt;아름다운 직업&amp;gt;(1999) &amp;lt;트러블 에브리데이&amp;gt;(2001) &amp;lt;텐 미니츠 첼로&amp;gt;의 &quot;낭시를 향해&quot; 등의 영화를 감독 한 바 있다. 드니는 홍상수의 열렬한 팬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글에서 그녀는 감독으로서 바라보는 홍상수영화의 매력을 독특한 시선으로 표현해내고 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st11&quot;&gt;※이어지는 텍스트는 &amp;lt;생활의 발견&amp;gt;과 &amp;lt;여자는 남자의 미래다&amp;gt; 프랑스판 DVD서플먼트에 프랑스 영화감독 클레어 드니(Claire Denis)가 두 영화에 관해 해설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텍스트는 클레어 드니의 동의하에 적정 수준에서 교정되었다. 드니의 해설은 홍상수 영화의 정서적 효과를 풍부하게 묘사할 뿐만 아니라 미학적 원리를 분석하였으며, 특히 홍상수 영화 속 여성의 역할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나는 &amp;lt;여자는 남자의 미래다&amp;gt;를 보면서 돌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강렬하고 자극적이었지만, “외국” 영화 였다. 이 영화는 내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했다. 나는 &amp;lt;생활의 발견&amp;gt;에서도 이 같은 느낌을 받았었다. &amp;lt;생활의 발견&amp;gt;은 실제 충격 속에 나를 밀어 넣었고, 완전히 나를 흔들어댔다. 마치 “회전 문” 안에 뒤흔들린 것처럼 정말 무서운 경험이었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홍상수 영화에서 그려진 폭력은 분명하고 직설적이다. 그의 영화에서 폭력은 멋있게 포장되지 않을 뿐 아니라, 매혹적이거나 장식적으로 포장되지도 않는다. 어떤 영화들은 폭력을 예쁜 포장지처럼 사용한다. 그런데 홍상수 영화에서 폭력은 유머나 조명의 그림자 등과 같은 요소들과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 한 숏 안에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그의 영화 속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든 것은 같은 방법론으로 연출된다. 나는 그것이 홍상수가 폭력을 창조해내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홍상수 영화에서 모든 것은 명백하게 표출된다. 달리 말하면 홍상수는 결코 어떤 것도 잊지 않는다는 말이다. 모든 것이 제시되기 때문에 모든 것은 즉시 지각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영화를 다시 봐야 한다. 하지만 그의 영화는 그렇게 섬세하지는 않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신은 그의 영화가 이해하기 힘들다고 쉽게 결론내리는 것이다. 물론, 홍상수 영화는 대단한 의미나 공감을 주지는 않는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그의 영화에서 내가 보는 것은 “유폐(confinement)”이다. 나는 홍상수(영화)의 언어들을 감금된 영화라고 부르고 싶다. 인물들은 하나의 프레임 속에 갇힌다. &amp;lt;여자는 남자의 미래다&amp;gt;가 하나의 숏을 포함할 때 그것은 내게 큰 영감을 주었다. 문호가 그의 아파트로 선화를 데리고 간다. 카메라는 아파트 빌딩에서부터 복도를 걸어오는 두 인물을 파노라마기법으로 찍는다. 홍상수 영화에서 공간을 보여주기 위해 파노라마를 쓰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파노라마 숏을 잊을 수는 없다. 그러한 숏은 과시적이라 중요한 어떤 것도 보여주지 않으려 한다. 홍상수는 일종의 감옥처럼 공간을 노출시킨다. 도시는 캐릭터가 갇힌 장소이다. 택시, 창이 있는 카페, 식당, 호텔룸, 기차 안에서도 탈출을 위한 공간은 제공되지 않는다. 이러한 구조는 그들이 삶에 감금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 모든 요소들, 감옥, 유머, 섹스, 윤리 등은 영화에 흥미와 특별함을 부여하기 위해 모두 파헤쳐졌다가 모인다. 홍상수는 우리들에 관한 많은 것들을 폭로 한다. 이런 점에서 영화는 매우 매력적이며, 이국적이지 않다는 사실로 인해 더욱 그렇다. 홍상수는 결코 아시아 영화감독으로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지 않는다. 감독은 그것이 마치 거짓 타이틀인양 단호히 밀어내고 있다. 홍상수의 영화는 뒤에 남아 성숙한 도덕 체계로 들어가지 않길 원하는 학생같이 보인다. 동시에 그의 영화는 인간의 운명에 대한 매우 성숙한 시선을 보여준다. 이런 양상 때문에, 홍상수 영화들은 두 박자 영화 혹은 가끔은 세 박자 왈츠와 같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홍상수 영화는 때때로 두 남자를 필요로 한다. &amp;lt;생활의 발견&amp;gt;에서 ‘반감을 부르는 기억’이 있다. 한 남자는 그의 압박을 덜어줄 수 있는 또 다른 인물을 필요로 하고 이 두 번째 인물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 모욕당한다. 이 인물은 더 큰 위안을 얻기 위해 타협하려 하지만 결국은 모든 걸 잃어버리는데, 그 이유는 그의 전복적 행위가 여자를 떠나도록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amp;lt;생활의 발견&amp;gt;은 두 남자와 한 여자로 시작한다. 세 인물들은 서로를 필요로 하지만, 주인공은 갑자기 떠나버린다. 그때 두 번째 여자가 등장한다. 이 두 번째 여자는 마지막에 아주 재밌는 방식으로 주인공은 떠난다. 점집 앞에서 그것은 매우 코믹하게 그려진다. 홍상수의 모든 영화들은 작은 실수를 보여주곤 한다. 두 번째 여자는 주인공에 의해 차이고, 그는 심지어 그녀의 사진을 버리기까지 한다. &lt;/p&gt;
&lt;p class=&quot;bt11&quot;&gt;명숙이 두 남자 앞에서 춤을 추는 장면은 내게 충격이었다. 그 장면은 거의 고통 속에 놓여 있는 것처럼 느끼게 했다. 이런 이유로, 그의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용기를 낼 필요가 있다. 난 내 자신과 명숙을 동일시할 수는 없었다. 난 그 장면에 등장한 모든 캐릭터에 동일시하였고, 특히 그 상황에 대해 그러했다. 무엇보다도 그런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들에게 공감한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이는 나의 상상을 넘어선 것이었다. 그 장면은 매우 아름답고 용감하다. 그 장면은 이상한 관점으로, 거의 연극적인 방식으로 찍혔다. 젊은 여자는 관객 쪽으로 그녀의 등을 보이고, 두 사람은 그녀와 마주보고 앉아 있다. 두 남자는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만, 관객은 그녀의 일부만을 보게 된다. 이는 그 장면이 그녀에 대한 것임을 보여준다. 이 장면이 만들어내는 것을 꽤 특별하다. 이 장면은 조금이라도 그녀와 관련된 것이고 남자 주인공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그는 이 시점에선 어떤 식으로라도 그녀와 연관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혼란스러운 시기에 의미없이 시시덕거리기를 원할 뿐이다. 그의 경력은 그가 속했던 상황 때문에 망쳤고, 그는 상관하고 싶지 않아 한다. 그는 누군가에게 복수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는 누군가로 인해 모욕을 당했고, 누군가를 모욕하길 원한다. 그는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기 위해 그것을 원하는 것이다. &lt;/p&gt;
&lt;p class=&quot;bt11&quot;&gt;홍상수 영화에서 여성들은 각기 다른 역할을 한다. 먼저, 그녀들은 희생자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성들은 영화에서 시간의 축이다. 여성들은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 이는 또한 &amp;lt;여자는 남자의 미래다&amp;gt;에서 실제로 그렇다. 한 여자는 배신당하고 급기야는 또 다른 여자 때문에 잊혀지거나 더 매력적인 여자로 인해 교체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여자는 때맞춰 통일성을 만들어낸다. 여성들은 메트로놈처럼 영화의 시간을 조절한다. &lt;/p&gt;
&lt;p class=&quot;bt11&quot;&gt;홍상수는 그의 학생들과 관객들에게 자신의 영화의 원리에 관해 이야기한다. 나는 그가 언급한 파편들의 법칙을 주의 깊게 듣는다. 그리고 그가 말한 것을 이해한다. 시간의 토대와 파편들은 그가 말한 내용에 포함되어 있다. 그 시간은 여주인공을 위한 것이다. 영화에서 통일성을 만들어내는 것은 시간이다. 내가 옳게 이해했다면, 그가 영화를 구성하는 방식은 그러한 조각들을 결합시키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수집이며, 첨가와 축적과는 다르다. 역시 옳게 이해했다면 홍상수는 하나의 장면을 써내려간 것이다. 그는 무언가를 찾으며 작업을 하고, 그의 시나리오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새 영화의 설계 중인 세트 속에 있다. 홍상수는 파편들을 모은다. 그것들은 그의 기억, 상상, 그가 일상에서 본 것들로부터 온 것이다. 홍상수는 자신이 수집한 것들이 어느 정도 질서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며,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을 때 그 파편들은 한 편의 영화를 뜻한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심지어 최근 미국 영화에서도 일종의 검열이 있었다. 여성은 술에 취했을 때만 자신을 풀어놓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여성은 절대 스스로 자유로워질 수 없다. 나는 그런 것이 역겹다. 그것은 여성의 가치를 보호하는 방식이며, 도덕을 지키기 위한 끔찍한 방법 중 하나이다. 그래서 인간은 오직 술에 취했을 때만 동물적 본능의 경계선을 보이도록 허락 받는다. &lt;/p&gt;
&lt;p class=&quot;bt11&quot;&gt;그러나 홍상수의 영화는 정확히 반대 입장을 보여준다. 술은 그의 영화에서 결코 인간의 나약함을 위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금욕을 흔들어놓을 도구로 사용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즉 누군가를 욕망할 때 나약함을 감추는 도구가 아닌 것이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모든 것은 술을 마시기 전에 결정된다. 술을 마시는 것은 이미 결정을 내린 후 동의에 이른 것이다. 술은 인물들이 자신의 결정을 명백하게 하도록 만든다. 그들은 술을 마실 때 서로에게 “우리 자신을 기만하지 말자”라고 말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반드시 “로맨스”가 아닌, 단지 섹스를 즐기는 것이다. 그래서 정확하게 미국 영화의 반대 지점에 있다. 대부분의 영화들 속에서 묘사되는 술은, 인물들이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면서 “신이시여, 내가 이방에서 무엇을 하고 있나요!”식의 자기 비난을 하도록 만든다. 홍상수의 영화들은 이것과는 정반대이고 이점에서 그의 영화가 놀라운 것이다. &lt;/p&gt;
&lt;p class=&quot;bt11&quot;&gt;&amp;lt;여자는 남자의 미래다&amp;gt;에서 두 명의 중심 캐릭터 중 하나는 문호인데, 그는 초라한 선술집에서 그의 학생들과 진실게임을 한다. 관객은 문호가 빨간 목도리를 두르고 있는 동안 그것이 그의 꿈의 일부분인지 아닌지 아직 알지 못한다. 이 장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한 젊은 여학생을 향해 있다. 목적은 그녀를 유혹하기 위한 것이다. 한 남학생이 게임에 참여한다. 게임은 솔직함을 요구하지만 문호와 남학생은 어떤 것도 진실하게 말하지 않는다. 이 두 남자들은 줄다리기 하듯 논쟁을 벌인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영화의 마지막은 매우 복잡해진다. 영화는 조심스럽게 짜여 졌고 규칙대로 결합되었다. 또한 홍상수는 미리 시퀀스를 계획하고 시작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퀀스는 숏이 길게 지속되기 때문에 위험하다. 많은 사고들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지속되는 시간은 배우들에게 현실감을 제공한다. 이것은 마치 안전망 없이 공중 그네에서 뛰어내리는 것과 같다. 당연히, 시퀀스숏은 많은 준비를 요한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amp;lt;여자는 남자의 미래다&amp;gt;는 꽤 많은 것들을 남긴다. 마지막 장면에서 커다란 남자의 실루엣이 홀로 길 위에 비춰져, 강한 인상을 준다. 여학생은 갑자기 택시를 잡아타고 떠나버리고 남자는 바보같이 길 위에 남겨졌다. 이 영화에 전시된 망상의 그물은 끊어지지 않는다. 영화에서 묘사된 달궈진 감정도 오래 지속된다. 그 감정은 매우 단단하게 싸여져 장식할 공간도 공기가 들어갈 틈도 없다. 이 영화 속에서 다툼과 대면은 두 남자나, 한 남자 내부에 존재한다. &amp;lt;생활의 발견&amp;gt;에서 첫 번째 챕터는 단순히 처음 하는 행동처럼 끝내지 않는다. 첫 번째 챕터는 두 번째 챕터 속에 삽입된다. 첫 번째 챕터의 시간 덩어리는 두 번째 챕터에 드라마적 요소로 첨가된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amp;lt;여자는 남자의 미래다&amp;gt;에서는 한 여자와 두 남자가 등장한다. 남자들은 서로에게 무언가를 숨긴다. 여자만이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우리, 관객은, 이 두 남자가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길 원하지만, 오로지 여자만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 또한 &amp;lt;여자는 남자의 미래다&amp;gt;에 정말 흥미로운 장면이 있다. 이 장면에서 나는 어떤 빈 공간을 본다. 두 남자는 그녀의 집 근처에서 여자를 기다린다. 그녀는 아직 호텔 바에서 일하고 있다. 마침내 그녀가 회색 벤츠에서 내린다. 그때 우리는 두 남자가 기다리고 있는 술집을 본다. 이들 둘은 그들이 그녀와 치킨을 먹었던 것에 대해 말한다. 여자는 그 즉시 등장하지 않는다. 후에 그녀는 숨을 고르며 등장한다. &lt;/p&gt;
&lt;p class=&quot;bt11&quot;&gt;난 이 장면을 여러 번 보았지만, 그때마다 의문이 남는다. 그녀가 벤츠에서 내려 술집에 도착했을 때는 옷을 갈아입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그녀가 그 시간 동안 우리가 모르는 뭔가를 숨기기 위해 무엇인가를 한 것처럼 느껴진다. 이것은 그녀가 두 남자에게 숨기길 원하는 어떤 것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우리로 하여금 지시하는 것의 공범자로 만든다. 우리에게는 몇몇 정보가 주어진다. 우리는 아이처럼 꼭두각시극을 보고 있지만 형사들은 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알고 있다. 홍상수는 위대한 감독이다. 그는 영회 속 캐릭터들과 영화 그 자체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lt;/p&gt;
&lt;p class=&quot;bt11&quot;&gt;홍상수 영화의 여자들은 첫 번째 영화에서처럼 죽임을 당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을 받는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주인이다. 그들은 몸을 표류시키지 않는다. 나는 홍상수 영화에 대한 하나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공간에는 정거장들이 있고, 여자들은 그들 내부에 있다. 남자들은 산소 탱크를 가지고 공간을 떠도는 우주비행사이다. 그들이 정거장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문을 노크해야 한다. 이러한 상상을 한다면, 홍상수의 영화가 여성혐오라고 말할 수 없다. 여성혐오라는 용어는 여성을 바보처럼 다루는 관점을 의미한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여성들에게 평화로운 동심의 세계와 같은 이미지를 선사하지 못할 뿐이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존경을 가지고 홍상수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내게 있어서 자기파괴적이다. 물론 그의 영화는 나를 풍족하고 풍부하게 만든다. 매우 남성적인 것을 좋아하기 위해서는 마조히스트가 되어야만 한다. 그의 영화는 매우 남성적이다. 내 영화가 여성적인지는 모르겠다. 내 생각엔 잘 만든 혹은 실패한 영화들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홍상수의 영화는 한 가지 질문만이 가능하다. 영화가 남성주의적이거나 여성주의적일 수 있는가?&lt;/p&gt;
&lt;p class=&quot;bt11&quot;&gt;그의 영화는 나로 하여금 굉장히 풍성하고 풍부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가? 그건 잘 모르겠다. 난 홍상수의 영화가 적어도 우리를 덜 멍청하게 만든다고 본다. 그의 영화들은 최근 영화에서 점차 사라져가고 있는 복잡성을 내러티브에 부여한다. 영화들은 로맨스 소설처럼 변해서는 관객들을 유혹한다. 그러한 영화들은 드라마 법칙에 따라 발단, 전개, 결말을 가진다. 모든 것이 에피타이저에서부터 시작하여, 메인 요리, 디저트로 끝나는 코스 메뉴처럼 제공되고 있다. 이는 심각한 문제이다. 이전 영화들은 결코 그러한 강압적인 법칙에 갇히지 않았었다. 그러나 현재는 그 규칙에 구속되어 있다. 그 때 &amp;lt;여자는 남자의 미래다&amp;gt;가 나타났다. &lt;/p&gt;
&lt;p class=&quot;bt11&quot;&gt;출처: &quot;single phases of Turning Gate and Woman Is the Futeure of Man&quot;『Korean Film Drecters HONG SANG SOO』, HUH Moonyung, 2007, KOFIC, 31-36p &lt;/p&gt;
&lt;p class=&quot;bt11&quot;&gt;번역:&amp;nbsp;김다현(vovovdh) / 감수: dela68&lt;/p&gt;&lt;/div&gt;</description>
                        <pubDate>Tue, 08 Sep 2009 01:28:59 +0900</pubDate>
                        <category>홍상수0909</category>
                                </item>
                <item>
            <title>두 남자 사이의 여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가 2 : &lt;해변의 여인&gt;</title>
            <dc:creator>영화연대</dc:creator>
            <link>http://www.yhyd.org/10537</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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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 align=&quot;center&quot;&gt;&lt;img src=&quot;http://mamoro3.cdn2.cafe24.com/wb01.jpg&quot; alt=&quot;wb01.jpg&quot; title=&quot;wb01.jpg&quot; width=&quot;800&quot; height=&quot;533&quot; style=&quot;&quot; /&gt;&lt;/p&gt;
&lt;p class=&quot;st11&quot;&gt;2. &amp;lt;해변의 여인&amp;gt; 여성캐릭터와의 조우, 그녀들이 나아갈 길&lt;/p&gt;
&lt;p class=&quot;bt11&quot;&gt;&amp;lt;해변의 여인&amp;gt;은 이제, 좀 더 직접적으로 여성캐릭터의 유사이미지를 현재형에서 논한다. &amp;lt;여자는 남자의 미래다&amp;gt;에서 그것이 과거와 현재의 간격을 보여주는 이미지로 유사 실체에서 결론 내려졌다면, 이 영화에서 유사이미지를 가진 여성캐릭터들은 서로 ‘조우’함으로써 또 다른 국면을 보여준다. 남성 주인공 중래(김승우)가 욕망하는 문숙(고현정)의 이미지는 중래가 문숙의 솔직한 자기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그녀를 물러나게 하고, 문숙과 유사한 이미지(선희)를 찾게 한다. 결국 중래가 욕망하는 대상은 문숙이라는 한 명의 여자가 하나의 주춧돌이 되고, 그 위에 선희(송선미)라는 유사이미지의 여자가 기둥이 되는 셈이다. 중래가 욕망하는 대상의 이미지란, 가까이 갈수록 멀어지고 싶은 문숙이라는 캐릭터처럼 불완전할 뿐이다. &lt;/p&gt;
&lt;p class=&quot;bt11&quot;&gt;그런 맥락에서 이 영화 역시 &amp;lt;여자는 남자의 미래다&amp;gt;와 동일한 의도를 갖고 있으며, 다만 다른 점은 이상화된 여성캐릭터의 실체를 ‘진짜’ 끼리의 충돌로서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래에게 이혼한 전부인의 떠올리기 싫은 (불륜)이미지와 문숙의 또 다른 과거이미지(외국남자와의 교제)는 결국 동일하고도 불완전한 욕망하는 대상의 이미지인데, 그는 그 불완전함을 완전함으로 치환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문숙의 재등장으로 선희와의 관계도 이도저도 아닌 결말을 맞게 되지만, 애초에 그가 해변으로 와서 얻으려고 했던 것-시놉시스의 완성을 이루어 낸다. 이런 결말은 홍상수의 이전 영화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았던 구성으로, 좀 더 명백하게 캐릭터의 주체적 이동을 내러티브 속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주인공 캐릭터가 남자, 여자를 만나 우여곡절을 겪으며 얻는 것은 허탈함이라든지 모호함 이상을 나아가지 않았는데, 이 영화에서 그 결말을 문자 그대로 캐릭터들의 온전한 결실을 위한 유쾌한 결말로 과연 볼 수 있는가? 이에 대해서 다시 따져볼 필요가 있다. &lt;/p&gt;
&lt;p class=&quot;bt11&quot;&gt;&amp;lt;해변의 여인&amp;gt;이 홍상수의 이전 영화들과 다른 점은 캐릭터들이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감추는 부단한 과정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는 데 있다. &amp;lt;극장전&amp;gt;에서 그것은 주인공 동수의 자기합리화나 푸념 등으로 드러났었고, &amp;lt;여자는 남자의 미래다&amp;gt;에서 그것은 아예 내면의 욕망상태에서 정체되었고, &amp;lt;생활의 발견&amp;gt;에서 그것은 조롱하듯 주인공에게 소나기를 퍼붓는 것 등으로 표현되었다. &amp;lt;해변의 여인&amp;gt;의 미덕은 바로 속이고 감추고 아닌 척 하는 캐릭터들의 내면을 캐릭터들 간의 싸움 즉 남자와 남자(중래와 창욱) 여자와 남자(문숙과 중래), 남자와 여자(중래와 선희), 여자와 여자(문숙과 선희) 등으로 맞붙여 놓고 입체적 캐릭터를 전면화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의 관계를 관객들이 판단 내리게 하기 보다는, 영화 속 인물들 간의 갈등으로 지켜보게 함으로써 인간의 여러 욕망을 또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lt;/p&gt;
&lt;p class=&quot;bt11&quot;&gt;홍상수 영화의 ‘눈치 보고 계산하는 인간형’들은 이제 좀 더 직접적으로 인간관계의 방식을 모색한다. 이 영화에서 결국 끝까지 거짓말하는 중래는 스스로 물러나는 방법을 택함으로써 문숙과 헤어지지만, 속물근성으로 만족스러운 시놉시스를 완성한 뒤 서울로 되돌아간다(대신 다리를 다친다). 그리고 문숙은 중래와의 최종적인 싸움 전에 이미 선희를 만나고 늪지 숲을 거닐며 홀로 자신만의 깨달음을 얻은 듯 그와의 관계를 끝장낸다. 다음 날 그녀는 자신의 차가 해변의 모래사장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위기를 겪지만 의외로 쉽게 갑자기 튀어나온 사람들의 도움을 얻어 시원하게 해변을 떠날 수 있다. &lt;/p&gt;
&lt;p class=&quot;bt11&quot;&gt;문숙은 무엇을 깨달은 것일까? 해변을 질주함으로써 그녀는 중래가 대상화했던 이미지를 털어내는 듯 보인다. 그녀는 선희와 나누는 대화에서 서로 닮지 않았다는 강한 부정을 늪지 숲의 산책으로, 중래와의 결별로, 해변에의 질주로 표출한다. 그녀는 해변에서 자신이 애초에 말했던 “사람을 잘 믿지 않는다”는 믿음이 깨지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셈이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집착(아버지가 자신에게 하는)이지만 결국 자기 자신이(중래에게) 집착을 행할 수밖에 없음도 알게 되었고 그것을 설사 깨달았다 할지라도 그녀는 그럴 수밖에 없다. 그녀가 깨달은 것은 이미 자신이 알고 있고 믿었던 것들인 것이다. &amp;lt;해변의 여인&amp;gt;은 &amp;lt;여자는 남자의 미래다&amp;gt;와 마찬가지로, 남성주인공 캐릭터들로 시작하여 그 사이에 놓여있는 여자캐릭터의 욕망이 무엇이었나를 탐색한다. 그리고 그 욕망은 남성캐릭터들이 깨닫지 못하는 이상에서 빠져나와 자신들이 어떻게 나아가야할 지를 가늠할 수 있는 위치적인 성질을 간파한다. 여성캐릭터는 모두 자신의 의도가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을 깨닫게 되는 지를 남성캐릭터와의 관계 속에서 방향을 찾고, 그것은 다른 남성주인공들의 행위보다는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vovovdh)&lt;/p&gt;&lt;/div&gt;</description>
                        <pubDate>Tue, 08 Sep 2009 01:21:25 +0900</pubDate>
                        <category>홍상수0909</category>
                                </item>
                <item>
            <title>두 남자 사이의 여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가 1 : &lt;여자는 남자의 미래다&gt;</title>
            <dc:creator>영화연대</dc:creator>
            <link>http://www.yhyd.org/10534</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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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 align=&quot;center&quot;&gt;&lt;img src=&quot;http://mamoro3.cdn2.cafe24.com/wf01.jpg&quot; alt=&quot;wf01.jpg&quot; title=&quot;wf01.jpg&quot; width=&quot;700&quot; height=&quot;447&quot; style=&quot;&quot; /&gt;&lt;/p&gt;
&lt;p class=&quot;bt11&quot;&gt;홍상수의 영화 속 여주인공들은 대부분 한 두 명의 남자에게 들렀다가 떠난다. 이들 캐릭터들은 남성캐릭터와 비슷하게 오랜 시간 상대 캐릭터와 마주하기 보다는 짧은 만남으로 상대를 일깨우거나(?), 엔조이 상대 이상이 되지 않는다. 여성 캐릭터는 남성캐릭터의 욕망의 기재로 설정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는 암묵적 ‘동의’ 가 존재하기에 더이상 갈등은 생기지 않은채 그것을 회피해버린채 마무리된다. 이렇게 그의 영화는 피상적인 갈등을 지향하지 않는 모던 영화의 습성을 가지고 있다. 영화에서 홍상수가 말하려는 주제 역시 늘 장르영화 서사의 틀에서 비켜나 있을 뿐 아니라, 짧은 시간과 비좁은 공간 내에서 공허한 담론을 늘어놓는 것처럼 보인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아마도 홍상수의 영화들 중 &amp;lt;여자는 남자의 미래다&amp;gt;(2004)는 캐릭터간 욕망이 가장 비열하게 드러난 영화가 아닐까 싶다. 속된 말로 개새끼들이나 미친년처럼 보이는 이 영화의 남성/여성 캐릭터에게 감정이입을 하기란 힘들다. 그만큼 로맨스는 멀리 떨어져 있고, 갈등이 시작될 무렵 또 다른 &apos;관계&apos;가 끼어들기에 허탈하기만 하다. 그러나 &amp;lt;여자는 남자의 미래다&amp;gt;는 그렇게 단정짓고 넘기기에는 모호하기도 하고, 풀리지 않는 의혹이 남는 이상한 영화이다. 정말 홍상수 영화의 여성캐릭터는 남성 주인공의 하위기재로 움직이고 있는가? 홍상수 영화에서 욕망이 투영되는 방식은 남성캐릭터와 여성캐릭터가 어떻게 다른 것일까? 이 글은 그러한 질문을 토대로 한 &quot;&amp;lt;여자는 남자의 미래다&amp;gt; 와 &amp;lt;해변의 여인&amp;gt;의 여성캐릭터 다시보기&quot; 라고 할 수 있다.&lt;/p&gt;
&lt;p class=&quot;st11&quot;&gt;1. &amp;lt;여자는 남자의 미래다&amp;gt; 선화는 왜 두 남자 사이에 끼워져 있는가&lt;/p&gt;
&lt;p class=&quot;bt11&quot;&gt;&amp;lt;여자는 남자의 미래다&amp;gt;의 선화와, &amp;lt;해변의 여인&amp;gt; 문숙은 각각 두 남자와 관계 맺게 된다. 얼핏 보기에 선화와 문숙은 ‘두 남자 사이에서 오고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들은 모두 자기 의지대로 두 남자를 경유한다. 그리고 그녀들도 &amp;lt;극장전&amp;gt;의 주인공 동수처럼, 그녀들은 가감없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한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떠나는 남자를 쳐다보며 다시 생각하거나&amp;lt;여자는...&amp;gt;, 또 다른 관계를 맺기 위해 엑셀레이터를 밟아야 한다&amp;lt;해변의 여인&amp;gt;.&lt;/p&gt;
&lt;p class=&quot;bt11&quot;&gt;&amp;lt;여자는 남자의 미래다&amp;gt;에서 선화(성현아)는 헌준(김태우)과 문호(유지태)라는 인물 사이에 끼워진 인물이다. 선화는 헌준의 회상으로 처음 그 모습을 드러내지만, 사실 이미 그녀의 과거 이미지는(헌준과 문호의 기억을 통해 투사된) 중국집 여종업원과, 중국집 손님이자 창밖의 여자의 이미지를 통해 미리 예시되어 등장한다. 특히 중국집 여종업원은 헌준의 회상에서 나타난 선화의 모습과 가장 흡사한 모습이며, 창밖의 여자는 마치 헌준과 문호가 예전의 선화를 현재 시점에서 기억해 낼 때 ‘과연 선화는 지금 저런 모습일까’라고 상상하는 이미지이다. 실로 이 영화의 두 번째 씬에서 중국집 여종업원은 헌준이 회상하는 선화와 아주 비슷한 모습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예전 선화의 이미지처럼) 나이도 어려보이고, 창밖의 여자는 좀 더 나이가 든 성숙한 모습의 이미지로 그려져 있다. 그런데 두 남자가 각각 선화를 회상하기 전 바라보는 대상은, 중국집 여종업원을 거친 후 바라보는 창밖의 여자다. &lt;/p&gt;
&lt;p class=&quot;bt11&quot;&gt;이 영화에서 주안점은 ‘선화’의 이미지다. 헌준은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영화감독이며, 문호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들은 각각 선후배이자, 대학시절 선화와 관계했던 남자들인데 영화에서 선화는 이들을 통해 호출된다. 그래서 선화는 헌준과 문호가 대상화시키는 이미지처럼 보일 수 있다. 영화에서 선화는 독립적으로 등장하지 않고 두 남자(헌준과 문호)를 통해 등장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화에 대한 실마리는 이미 중국집에서 볼 수 있는 두 여인을 통해 던져져 있지만 이는 선화가 두 남자의 회상으로 등장한 이후에 인식할 수 있다. ‘선화’라는 실체는 모방된 이미지의 두 실체 그리고 영화 후반부에서 볼 수 있는 문호의 제자(여학생)까지 포함해 4가지의 이미지로 등장한다. 온전한 실체와 시뮬라크르의 실체들 모두를 하나의 ‘선화’로 통일해 본다면 &amp;lt;여자는 남자의 미래다&amp;gt;에서 여성캐릭터는 두 남성캐릭터를 위한 욕망의 대상으로 그 집착의 강도가 얼만 큼인지 알 수 있다. 다만 두 캐릭터를 조종할 수 있도록 설정된 것은 온전한 선화(성현아)밖에 없다. &lt;/p&gt;
&lt;p class=&quot;bt11&quot;&gt;그런데 그렇게 대상화된 이미지로 볼 수 있는 선화는 어떤 인물인가? 그녀는 헌준의 배신 때문에 (문호의 말에 의하면) ‘변화’하긴 했지만, 그것이 결정적인 이유인지 명백하지 않다. 헌준의 회상이후(헌준이 유학을 위해 출국하기 전 선화를 마지막으로 본 후) 그 다음 문호의 회상에서 알 수 있는 선화는, 문호까지 싸잡아 “남자는 다 똑같애, 당신도 그 새끼도 다 개새끼들이야”라고 말한다. 문호가 헌준을 경멸하는 이유는 “조강지처 버리고 도망간” 이유때문이기도 하지만, 문호가 헌준을 질투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그래서 문호는 선화를 탐했던 것일까). 문호의 회상에서 그는 당시 선화를 좋아했었다. 게다가 헌준의 회상에서 볼 수 있었듯 문호는 ‘도망가는’ 헌준 앞에 선화를 대동하고 나타난다. 이 세 인물 간의 관계는 지극히 거짓과 불신, 배신으로 똘똘 뭉쳐있다. 선화가 일편단심 헌준만을 사랑했을까? 헌준의 마지막 말대로 “기다릴 수 있지?”라고 말했듯 몇 년 동안 그를 기다렸을까? &lt;/p&gt;
&lt;p class=&quot;bt11&quot;&gt;문호의 기억으로 보자면 생각보다 쉽게 그녀는 문호와 건조하지만 명백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것은 선화의 체념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녀의 욕망으로 해석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선화는 문호에게 ‘국화꽃’을 선물 받은 후 그의 애무를 받아들이지만 섹스는 거부한다. 그러나 이틀만에 그와 섹스를 하게 된다. 위의 두 번째 그림이 바로 문호와 섹스하기 전 모습인데, 그녀는 헌준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긴 생머리를 천박한 파마머리로 바꾸고 나서야 문호와 성관계를 맺게 된다. 문호 역시 헌준의 기억처럼 선화의 생머리 이미지를 동경했던 것 같다. 그녀가 머리를 어떻게 한 후 등장하자, 못마땅하듯 잔뜩 찡그린 얼굴로“머리를 어떻게 했네요”라고 툭 내뱉는다. 결국 문호는 선화를 원해서 갖긴 했지만, 선화 역시 그를 원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선화는 문호의 집에 들어가기 전 “아무도 없으면 더 좋은데”라는 말을 한다. 그리고 둘 간의 싱거운 섹스가 끝나고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듯 그녀가 “매일 그러는 건 아니죠?”라는 말을 하자, 그는 “다리에 털이 많네요”라고 비아냥거리듯 응수한다. &lt;/p&gt;
&lt;p class=&quot;bt11&quot;&gt;결국 헌준과 선화도, 문호와 선화도 결실은 없이 끝이 보이는 관계를 마무리 짓는다. 선화 역시 헌준을 만날 때, 다른 남자와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므로 그녀가 눈물 흘리며 헌준을 기다린다고 해도 다른 남자를 만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선화 말대로 헌준이든 문호든 다른 남자들이든 “다 개새끼들”이라지만, 그러면 그녀의 욕망이 단지 헌준의 배신으로 급격히 변질된 것일까? &lt;/p&gt;
&lt;p class=&quot;bt11&quot;&gt;그러면 왜 선화는 자신의 집에 온 두 남자를 하룻밤만에 깔끔히 정리해버리는 것일까? 선화의 집 시퀀스는 두 남자가한 여자를 욕망하기 보다는 한 여자가 두 남자를 농락하는 시퀀스이다. 기본적으로 두 남자는 선화를 욕망하고 있는데, 선화는 두 남자를 온전히 욕망하지 않는다. 헌준과 자고 나온 후 아무렇지 않게 문호에게 구강섹스를 해주는 선화의 얼굴은 보이지 않은 채, 오히려 문호의 만족스러운 표정만이 비쳐질 뿐이다. 그 후 둘은 다른 방에(헌준이 자는 방이 아닌) 손을 잡고 들어간다. 그리고 아침에 먼저 일어난 선화는 새벽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천연덕스럽게 찌개 맛을 보고 있다. 선화가 두 남자에게 일말의 감정이 남아있었다면, 그런 행동들을 할 수 있을까. 결국 이 영화는 선화의 메마른 욕망의 놀이가 두 남자의 기억 속에서 호출되고, 현재형에서 선화의 관점으로 정리하는, 애초부터 결실없는 관계임을 명백히 하는 것이다. &lt;/p&gt;
&lt;p class=&quot;bt11&quot;&gt;또한 두 남자(혹은 대다수의 남자들)가 이상화하는 여자의 전형성을 선화라는 이미지에 빗대어 드러내고 있으며 그것은 결말부 문호의 욕망으로 (부질없이) 다시 실현되는 듯하지만(문호가 놀이터에서 만난 빨간 목도리의 여학생) 다시, 비현실의 현실 속에서 싱겁게 무산되고 만다. 문호는 선화와 헌준과 산에 오르기 전 놀이터에서 만난 그 여학생에게서 예전의 선화의 이미지를 보았을 때, 진짜 선화와 헌준과의 동행에 동참하지 않는다. 이제 문호는 헌준과도, 진짜 선화와도 더 이상 관계 맺을 필요가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여기서부터 문호의 또 다른 국면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헌준도, 선화도 이제 그 상태에서 멀고 먼 관계 이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선화는 떠나버린 문호를 빈 쥬스병의 흔적으로 직감하고, 화난 헌준이 가버리는 뒷모습을 지켜보며 멀고 먼, 쉬운 관계를 정리한다. 선화가 애타게 원했던 헌준은 이제 가식이든 진심이든 다시 돌아와 그녀 앞에 취기를 앞세워 무릎을 꿇었지만 하룻밤의 허상으로 끝났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문호의 욕망으로 옮겨가 그 허상을 다시 한 번 깨지게 함으로써 또 한 번 ‘강조’된다. 리바이벌된 예전의 생머리 선화이미지가 빨간 목도리 여학생에게 옮겨지지만 역시 그 이상(理想)은 처참히 무너질 수밖에 없다. 문호는 학교에서 오르내리는 여학생과의 입소문을 경계해야 하는 지경에 이를 수밖에 없는 욕망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다. &lt;/p&gt;
&lt;p class=&quot;bt11&quot;&gt;헌준과 문호가 욕망했던 그런 진짜 선화 이미지는 이 영화에서 마치, 팜므파탈처럼 이상을 깨뜨리고 그 언저리에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배신을 심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amp;lt;여자는 남자의 미래다&amp;gt;는 남성이 욕망하는 여성캐릭터의 이미지를, ‘두 남자 사이에 끼인 채’ 등장시켜 일침을 가하는 동시에 여성캐릭터 자체를 들여다 볼 수 있게 하는 영화이다. 여기서 선화가 오롯이 남성주인공들의 대상화된 캐릭터로 위치짓는 인물이라면, 그녀는 왜 다시 등장하여 그들에게 하룻밤동안 한꺼번에 자신의 집에서 그들의 욕망을 응수해 주었는가? 선화는 두 남자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현재형에서 그 실체를 드러낼 어떤 이유도 없다. 이 영화는 그런 맥락에서 두 남자 캐릭터를 먼저 등장 시킨 후 ‘그녀를 찾아가게 되는’ 트릭을 사용한 것이다. 마치 여성은 남성들이 순수했던 시절 욕망했던 이미지처럼 등장해, 전혀 다르게 변모한 모습으로 두 남자 사이에 놓여 있다. 두 남자가 선화와 단지 ‘자고 싶은’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서 선화를 소환했다면 그녀는 변모한 이미지로 등장하지 말았어야 한다. 그 지점에서 두 남자는 기대치가 무너지고, 여자는 싱거운 만남으로 욕망의 합리화를 반복하게 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 영화는 홍상수의 영화 속 여성캐릭터가 단지 남성들에 의해 ‘거쳐 가는 이미지’로 그리지 않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오히려 여성캐릭터들은 남성들이 욕망하는 이상을 만들어주고, 욕구를 채우는 것 이상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방패막을 설정한다. 그럼으로써 이상화된 여성이미지는 그들이 원하는 이미지를 변모시켜 전혀 다른 방향으로 튀어 나가게 되는 것이다. (vovovdh)&lt;/p&gt;&lt;/div&gt;</description>
                        <pubDate>Tue, 08 Sep 2009 01:14:36 +0900</pubDate>
                        <category>홍상수0909</category>
                                </item>
                <item>
            <title>&lt;밤과 낮&gt; 밤에서 낮으로 이행하지 않는 의미의 꿈</title>
            <dc:creator>영화연대</dc:creator>
            <link>http://www.yhyd.org/10531</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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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 align=&quot;center&quot;&gt;&lt;img src=&quot;http://mamoro3.cdn2.cafe24.com/nnd01.jpg&quot; alt=&quot;nnd01.jpg&quot; title=&quot;nnd01.jpg&quot; width=&quot;760&quot; height=&quot;506&quot; style=&quot;&quot; /&gt;&lt;/p&gt;
&lt;p class=&quot;bt11&quot;&gt;홍상수 영화에서 꿈은 매번 내러티브가 진행되는 동안 이음매 없이 갑작스럽게 등장하곤 한다. 예를 들어 그의 첫 작품인 &amp;lt;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amp;gt;(1996)에서, 보경의 꿈 장면은 정말 인상적이다. 꿈 시퀀스가 시작되기 전 숏에서 보경은 그녀의 친구가 운영하는 약국 안쪽, 친구의 아들이 앉아있는 책상 앞에 서 있었다. 그 다음 숏은 그녀가 잠이 드는 장면이 아니라, 보경 자신의 영정 사진이 클로즈업된 숏이다. 물론 그 시퀀스가 꿈 장면임을 알 수 있는 것은 꿈 시퀀스가 끝나고 난 후 보경이 이불위에서 잠을 자다 깬 장면을 통해서다. 꿈 시퀀스에서 갑자기 등장한 보경의 영정사진, 그리고 보경, 그녀의 남편 동우, 보경과 내연관계인 효섭, 그를 좋아하는 민재가 그녀의 아파트에서 한 자리에 모일 때, 이상하기는 하지만 꿈이리라고는 상상하기 힘들 수 있다. 난데없지만 미리부터 보경의 잠자리는 지시된 바 없고, 네 등장인물은 속이거나 숨겨진 떳떳하지 못한 관계로 얽혀있어 보경의 죽음으로 인해 급작스레 소급되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결국 이 시퀀스는 짧지만 하나의 스토리를 가진 채 보경의 꿈으로 남게 된다. 홍상수의 영화들에서 등장하는 꿈은 각각 영화 속 현실과 결코 동떨어진, “단지 꿈일 뿐”으로 그치지 않고 내러티브와 캐릭터와 연계된다. 그래서 꿈장면은 영화 내부적으로 내러티브의 반전이기도 할 뿐 아니라, 새로운 국면으로 착각될 만하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amp;lt;여자는 남자의 미래다&amp;gt;(2004)와 &amp;lt;극장전&amp;gt;(2005)에서 역시 꿈은 어김없이 주인공의 무의식적 욕망이라든가, 해석하기 힘든 난해함으로 등장한다. &amp;lt;여자는..&amp;gt;에서 문호가 학교 운동장 놀이터에 우두커니 앉아 있을 때, 같은 장소에서 벌어지는 학생들과의 에피소드는 역시 &amp;lt;돼지가..&amp;gt;와 마찬가지로 관객에게 트릭처럼 작용하고, &amp;lt;극장전&amp;gt;에서의 1부(영화속 영화)에 등장한 여관-꿈 장면 역시 모호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amp;lt;밤과 낮&amp;gt;에는 성남이 꾼 두 번의 꿈 장면이 등장하는데, 첫 번째는 성남이 유정의 발가락을 탐하는 꿈이고, 두 번째는 성남이 서울 집에 돌아와 꾼 꿈이다. 두 번째 꿈은 성남이 파리에서 머문 기간을 통째로 뒤엎는 역설적 의미를 품고 있다. 꿈 시퀀스에서 아내역할로 나오는 여자는 파리에서 영호가 그토록 애정을 표시했던 이유정(박은혜)의 미술학교 동료 지혜(정지혜)다. 그런데 성남은 그녀를 단 한번밖에 본적이 없다. 성남은 그녀를 통해 유정이 보여준 그림들과 학교 생활이 거짓이었음을 알게 되지만 유정에 대한 그의 마음이 흔들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 집착적이다. 임신했을지도 모르는 유정을 떼어내고 서울로 돌아온 성남이 아내 성인(황수정)과 잠든 채 꾸는 꿈. 왜 하필이면 꿈에 유정이 등장하지 않고 지혜가 등장한 걸까. 그리고 그녀는 왜 뜬금없이 성남의 아내가 되어 등장하는가. 그녀가 성남에게 비열한 욕지거리를 듣는 장면과 &amp;lt;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amp;gt;에서 민재가 효섭에게 손찌검과 욕지거리를 듣는 장면은 꽤 유사하다. 그러나 분명 변화된 성질을 보인다. 후자는 현실이고(그만큼 직설적이고) 전자는 꿈(무의식이 투영된 상상된 것)일 뿐이다. (허문영은 성남의 꿈에 지혜가 아내로 등장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지만, 나는 결코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먼저 짚어둘 것이 있다. 이러한 꿈들은 주인공이 결코 밤에서 아침시간으로 이어지는 스탠더드한 취침시간에 잠을 자면서 꾼 꿈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상하게도 홍상수 영화에서 매번 등장하는 꿈은 내러티브를 잠깐이나마 교란시키는 성격을 띠고 있다. 주인공들은 새벽까지 술을 마시며(그 다음 날의 일을 개의치 않고), 밤에는 자고 낮에는 깨어있는 일상생활을 보내지 않는다. &amp;lt;밤과 낮&amp;gt;에서 성남이 성인과 침대에 누워있을 때는 시퀀스의 흐름상 밤이라고는 볼 수가 없다. 그들은 ‘밤=잘 시간’ 의 룰을 지키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워있다. 성남의 꿈은, 그가 여행에서 ‘집’으로 돌아와 취하는 휴식이 아내의 거짓말과 그의 무의식적 욕망이 엉겨붙어 있는 찜찜한 소격효과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뿐만 아니라, 꿈은 파리에서의 도피 로맨스 역시 결정적으로 변질시킨다. 나는 짧지 않은 성남의 꿈 장면 때문에 긴 내러티브를 차지했던 유정과의 탐닉이 거짓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과장된 해석일 수도 있다. 꿈은 꿈일 뿐이니까. 그러나 꿈 꾸고 난 후 틸트 업 되는 “구름 그림”에서 정말로 나는 비극을 맛보았다. 우리는 꿈 장면을 마주하고도 성남의 순진했던, 천연덕스러운 미소를 기억한다. 그는 집에 돌아와서도 성인의 거짓 임신에 대해 성을 내지 않고, 파리와 여자를 청산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바로 홍상수의 영화가 항상 그래왔듯, 성남이 밤에서 낮으로 이행하는 시간적 휴식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lt;/p&gt;
&lt;p class=&quot;bt11&quot;&gt;결국 이 점은 홍상수 영화 전체를 특징짓는 비이상적 시간관념이라고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일반적이지 않은 공간관념 역시 존재한다. 바로 ‘집’의 의미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집은 항상 ‘불안’과 ‘불완전함’ 그리고 안식처의 반대말이다(&amp;lt;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amp;gt;과 &amp;lt;여자는 남자의 미래다&amp;gt; &amp;lt;극장전&amp;gt;에 등장하는 집의 의미를 생각해 보라). 어쨌든 &amp;lt;밤과 낮&amp;gt;에서 성남이 꾼 꿈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 채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그리고 폭신한 침대위에 있는 구름 그림이 더욱 더 성남의 도피 여행을 답답하게 가두어 버린다. 그러나 반대로 피상적 의미의 시공간 관념에서 벗어나, 홍상수의 영화를 즐기면 그것은 매력이 될 수도 있다. 괘씸하지만 허영으로 엉겨붙은 인간의 욕망. 거기서 낯선 카타르시스가 발생한다. 과연 성남은 자신의 구름에서 헤어나올 수는 있을까. 그걸 생각하면 그의 꿈은 안쓰럽다. 홍상수의 시공간은 밤에서 낮으로, 낮에서 밤으로 이행하지 않는 욕망의 부유물과 같기 때문이다. (vovovdh)&lt;/p&gt;&lt;/div&gt;</description>
                        <pubDate>Tue, 08 Sep 2009 01:04:58 +0900</pubDate>
                        <category>홍상수0909</category>
                                </item>
                <item>
            <title>&lt;드래그 미 투 헬&gt; 옹졸하고 슬픈 저주의 화살</title>
            <dc:creator>영화연대</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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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 align=center&gt;&lt;img src=&quot;http://mamoro3.cdn2.cafe24.com/dragme01.jpg&quot; alt=&quot;dragme01.jpg&quot; title=&quot;dragme01.jpg&quot; width=&quot;760&quot; height=&quot;507&quot; style=&quot;&quot; /&gt;&lt;/P&gt;

&lt;p class=&apos;bt11&apos;&gt;(스포일러 있습니다.)&lt;/p&gt;

&lt;p class=&apos;bt11&apos;&gt;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는 바퀴벌레의 빠른 궤적은 매우 공포스럽다. 또한 가위에 눌려 꼼짝 못하고 보내야 하는 시간도 땀을 쏙 뺄 정도로 공포스럽다. 어두운 골목길에서 실체는 확인할 수 없이 등 뒤로 듣게 되는 소리들도 자주 오싹한 공포감을 주고는 한다.  예상할 수 있는 궤적을 벗어난 움직임, 가진 능력으로는 해결 불가능한 사건, 시야에 확보되지 않는 것 등의 앞에서 우리는 공포를 느낀다. 이런 공포는 일종의 무력감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을 뛰어넘는 어떤 활동이나 존재를 목격할 때, 그 무력감은 공포가 되는 것이다. &lt;드래그 미 투 헬&gt;은 이런 무력감을 매우 잘 활용한 영화이다. 영화는 시각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효과적인 공포를 준다. 그런데 이 영화를 무엇보다 돋보이는 공포로 만드는 것은, 이 영화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적이고 현실적인 공포를 끌어들이고 있는 점이다.&lt;/p&gt;

&lt;p class=&apos;bt11&apos;&gt;주인공 크리스틴은 매우 집약적으로 우리의 현실을 소개하고 있는 존재이다. 그녀는 뚱뚱했었으며, 촌스러운 시골 출신에 어머니는 알콜중독자이다. 남자친구는 사회적 지위로 보나 가정환경으로 보나 자신보다 나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이 사회의 대다수 평가 기준에서 변변찮은 점수를 받을 우리의 주인공 크리스틴은 그러나 씩씩하게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 있다. 현재의 그녀는 열심히 살을 빼서 예뻐졌고, 도시로 나와서 은행에 근무하고 있으며, 멋진 남자친구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녀는 자신이 근무하고 있는 은행에서 승진 후보에 올라 있으며 곧 그 노력을 보상받을지도 모를 중요한 때를 보내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때에 그녀는 어떤 난관과 마주한다. 한 노파가 자신의 집을 담보로 한 대출금의 상환 기한을 늘려달라고 그녀의 창구에 와서 요청을 한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물으러 상사에게 갔을 때, 그의 처사는 가히 위력적이다.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아마 그러한 교묘한 압박이 무엇인지 단박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상사는 선택권을 주는 것 같지만 그것은 전혀 선택의 여지가 없다. 주어진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말이다. 게다가 그녀는 좀 전에 남자친구와 그의 어머니가 통화하는 것을 들고 어머니가 그녀를 탐탁치 않아 하고 있는 것도 알게 된 때이다.
&lt;br&gt;그리하여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구원하기 위해 노파의 요청을 거절한다. 여기서 우리는 첫 번째로 슬프고 옹졸한 어떤 선택을 보고 있다. 그것이 슬픈 이유는 그 선택이 살아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 때문이고, 그것이 옹졸한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건 어떤 종류의 이기적 삶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어 우리는 또 하나의 슬프고 옹졸한 이기와 마주한다. 그것은 할머니가 크리스틴에게 퍼붓는 저주이다. 할머니와 주인공은 악다구니를 내며 한판 붙고, 할머니는 결국 그녀에게 저주의 주문을 거는데 성공한다. 노파는 굴욕감과 억울함에 떨며 사투 끝에 크리스틴에게 저주를 걸고 이내 죽고 만다. 은행은 여전히 질타조차 당하지 않고 건재하며 크리스틴이 그 이기의 책임을 다 뒤집어쓴다. 이 얼마나 옹졸하고 슬픈 복수인가.&lt;/p&gt;

&lt;p class=&apos;bt11&apos;&gt;그런데 그것은 어떤 종류의 필연적인 관계이자 전개이다. 노파는 영화 속 상황에서 그와는 다른 복수를, 즉 은행이라는 금융자본을 향한 복수를 할 수 있었을까? 영화 속 관계 안에서 주인공이 노파의 요청에 대해 다른 판단을 내릴 수 있었을까? 그녀들은 영화가 보여주는 삶의 그물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필연적이고 최선인 행동을 한다. 그리고 그런 근원에 닿지 못한 악다구니들, 약하고 피해 입은 서로를 향해 상처 입히는 모습은 우리의 슬프고 옹졸한 현실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처한 현실이기 때문에 이 영화는 우리의 모습을 증거하고 있으며,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필연적인 전개를 따르고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실은 둘 다 밀려날 처지임에도 은행 창구를 경계로 서로가 대립하는 풍경은 끝없는 경쟁 속에 살고 있는 우리의 경계들, 대립들, 분열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만 같다.&lt;/p&gt;

&lt;p class=&apos;bt11&apos;&gt;한편 크리스틴은 매우 낙관적이고 열정적인 태도로 삶을 살아가는 인물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는 현실감각 있고 씩씩하여 엄청난 저주의 공포나 스트레스도 다이어트를 위해 꾹꾹 참아왔던 아이스크림 통을 비우는 것으로 풀어버리고 다시 고군분투하는 것이다. 그녀는 결국 자신을 지옥으로 이끌 저주를 풀기 위해 기르던 고양이까지 제물로 바치고 노파를 또 한 번 희생타 삼아 살아남으려 하는데, 결론적으로는 그 노력도 끝내 실패하여 그녀는 예정대로 지옥으로 끌려들어가 버리고 만다. 수많은 공포 영화들이 그토록 전지전능한 무법자를 그려내어도 여주인공 한 명쯤은 기어이 살아남고야 말았는데, 누구보다도 현실적이며 강인한 크리스틴은 실패하고 마는 것이다.&lt;/p&gt;

&lt;p class=&apos;bt11&apos;&gt;&lt;드래그 미 투 헬&gt;은 장르영화의 쾌감을 충분히 만끽시킴과 동시에 위의 실패에서 장르적 쾌감을 넘어서는 공포에 이른다. 그것은 우리 사회 속 어떤 경향이 무력감을 생산하는 지점에서 나오는 공포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낙관과 희망이 착각임이 드러날 때의 무력감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촌구석의 한 소녀는 도시의 욕망을 취하고 이에 닿으려 애를 쓰지만 그것은 지옥행에 이른다. 아메리칸 드림의 실패란 진정 슬픔과 좌절 등의 감정 상태를 훌쩍 넘어 삶이 끝장나고 죽음이 눈앞에 닥쳐온 공포일 것이다. 이 영화는 매우 정확하게도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사회적 공포를 영화로 번역해내고 있는 것이다.
&lt;br&gt;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안 되는 것, 동정심을 발휘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나 개인이라는 이기적 경계 짓기로도 충족되지 않는 끼어버린 상태는, 자기 삶의 궤적을 더 이상 예상하거나 능력으로 극복하거나 시야 속에서 통제할 수 있는 상태를 넘어 선 공포를 생산한다. 그 무력감을 이해했기에 이 영화는 필연적으로 공포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lt;/p&gt;

&lt;p class=&apos;bt11&apos;&gt;그런데 영화라는 창이 흥미롭고 재미있는 것은, 영화는 그러한 무력감, 좌절, 혹은 실패 등 펼쳐지는 사건이 출발하는 선을 노출한다는 것이다. 크리스틴이나 노파는 서로를 들여다보지 못할 것이지만, 관객은 크린스틴을 보거나 노파를 보거나 짠할 수 있다. 그리고 둘 간의 대립이 과도한 것임을 알 수도 있다.
&lt;br&gt;&lt;드래그 미 투 헬&gt;의 섬세함은 우리가 또한 섬세하게 이 영화를 관찰한다면, 무력감에 대한 공감과 더불어 그 공포가 생성되는 곳을 볼 수 있게 시대가 생산하는 공포의 맥락을 이해하고 풀어내었다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이 영화가 가장 칭찬(?) 받아야 할 것은 영화에서 공포가 시작되는 장소가 은행이라는 것, 그리고 그 주인공이 크리스틴 같은 배경 속에서 공포물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 등이 되어야 할 것이다.&lt;/p&gt;

&lt;p class=&apos;bt11&apos;&gt;잘못된 경계와 대립과 분열일지라도 내가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런 가능성을 무참히 짓밟는다. 살아가기 위해서 선택한 것이 결국 최대 악수가 되어 크리스틴을 덮쳐올 때, 그것은 우선 무력감과 공포를 동반할 것이다. 그럼 영화가 그 실패를 증거하고 거기에서 끝나버릴 때,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우리에게는  무슨 수가 남을 수 있을까? 크리스틴이 지옥으로 가긴 했지만 영화는 크리스틴의 실수가 남자친구를 지옥으로 몰고 갈 것만 같은 불안감을 준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남을 희생타 삼는 수들이 계속 최악의 악수들이었음을 보여준다. 만약 이것이 실제 우리의 삶의 궤적이고 아메리칸 드림이란 쫓아 쫓아가도 결국 지옥으로 향하는 착각의 꿈이라고 느낀다면, 결국 우리는 크리스틴이 어쩔 수 없었던 판단, 노파의 당연한 분노의 장면에서 정지 버튼을 누르고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지옥에서 탈출할 수 있겠는가 하고 질문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어쩔 수 없어 짠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옹졸한 시대의 이기적 삶 형식이, 바로 오답 자체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볼 기회를 얻을 수도 있다. 이 기회는 유쾌한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 이 영화에서 목격한 실패는 우선 아메리칸 드림에 실패하는 개개인의 고립된 좌절들이겠지만, 더 엄밀히 말하자면 이기적 삶의 형식이 맞이하는 좌절이고 무력함이기 때문이다. &lt;드래그 미 투 헬&gt;은 이렇게 실제 삶을 흔드는 무력감의 맥과 근원을 짚어내는 점에서는 섬세한 공포물이 되며, 덧붙여 그렇게 주어진 현실의 처절한 노출로 인해 현재 사회가 강요하는 삶 형식의 무력함을 목격하게 한다는 점에서 유쾌한 드라마가 되는 풍부한 영화이고 즐거운 경험이다. (gipsymoon)&lt;/p&gt;&lt;/div&gt;</description>
                        <pubDate>Tue, 21 Jul 2009 13:58:54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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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lt;똥파리&gt; 시선에 숨겨진 진실</title>
            <dc:creator>영화연대</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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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 align=center&gt;&lt;img src=&quot;http://mamoro3.cdn2.cafe24.com/breathless01.jpg&quot; alt=&quot;breathless01.jpg&quot; title=&quot;breathless01.jpg&quot; width=&quot;760&quot; height=&quot;507&quot; style=&quot;&quot; /&gt;&lt;/P&gt;

&lt;p class=&apos;bt11&apos;&gt;한국(영화/사회)의 대표적인 콤플렉스 중 하나는 불완전(불안정)한 가족으로 인한 개인의 트라우마에 대한 문제다. 완벽한 가족 구성에 대한 강박증은 매번 유실된 가족 혹은 고아에게 폭력을 표출시키고 경제적 짐을 지운다. 그래서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가족 구성원은 매번 정신적 상처를 가지고 살아간다. 영화 &lt;똥파리&gt;는, 불완전-완전 혹은 불안정-안정 이라는 갈등으로 한국(영화)의 콤플렉스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등장인물 간의 유사성 속에서 펼쳐진 진실이 구멍뚫려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차단되고, 숨겨진 진실은 등장인물에게 필요이상의 갈등으로 진척시키지 않고 동시에 복수심을 유발시키지 않는다. 그러한 &lt;똥파리&gt;의 유연한 태도는 상투적이거나 고질적인 강박증으로 영화를 귀결시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섭고도 희망적이다.&lt;/p&gt;

&lt;p class=&apos;st11&apos;&gt;보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lt;/p&gt;

&lt;p class=&apos;bt11&apos;&gt;&lt;똥파리&gt;의 주인공 상훈(양익준)은 일찍이 “보고야 만” 것이 있다. 어렸을 적 아버지(여동생에 대한)의 살인과 그로 인한 어머니의 죽음, 그것은 용역깡패가 될 수밖에 없었던 원초적 원인 중 하나로 설정된다. 그의 천박한 욕설과 무자비한 폭력성은 아비로부터 대물림된, 의식적이든 아니든 선택된 기질이다. 이러한 상훈의 기질은 고등학생 연희(김꽃비)와 사촌동생 형인으로 인해 제압당한다. 상훈에게 연희와 형인은 자신의 실체를 숨겨야 할 대상인 동시에 보호해야 할 대상이다. 특히 상훈이 형인에게 유사아버지로서의 역할을 하거나, 자신의 아버지를 때리는 장면을 들킨 후(혹은 형인이 &quot;보고야만 후&quot;) 용서를 구하는 이유는 의식적으로 자신의 기질을 숨기려는 마지막 책임감일지도 모르겠다.&lt;/p&gt;

&lt;p class=&apos;bt11&apos;&gt;사실 등장인물들이 주고받는 시선은 상훈과 형인의 관계보다 복잡한 것이 있다. 상훈과 연희, 그리고 상훈과 영재(이환) 그리고 연희와 영재의 시선이다. 이들이 주고 받는 시선은 영화에서 관객만이 인지하는 ‘진실’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그러나 이들의 시선은 끝내 감추어진 진실로만 그려진다. 상훈이 보지 못한 일방적인 연희의 시선에는 자신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포차가 용역깡패들로 인해 무너지는 장면이 담긴다. 여기서 연희모는 운명하지만, 연희는 용역깡패들 중 상훈이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알지 못한다(관객만이 알 수 있다). 여기서 물론 상훈은 자신이 숱하게 벌인 깡패짓 가운데 연희 모에 대한 폭력이 가해졌다는 사실만큼은 역시 알지 못한다.&lt;/p&gt;

&lt;p class=&apos;bt11&apos;&gt;상훈과 영재의 관계는 처음 만남에서부터 상훈에게 분노하는 영재의 시선으로 일관된다. 영재는 상훈에게 자신에게 감추어진 유사 폭력성을 인지하면서도 무자비한 상훈의 일거수일투족에 분개한다. 역시 상훈은 영재로부터 끊임없이 시선을 받아내고, 영재는 분개한 시선을 쏟아 붓는다.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깡패짓이지만 영재가 자신의 어머니가 그러한 폭력으로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지는 영화상으로 알 수 없다. 오히려 영재는 무자비하고 독한 깡패 상훈을 통해 자신을 발견함으로써 폭력으로 응징할 수밖에 없는지 모른다. 상훈이 영재의 손에 죽어갈 때 영재의 폭력적 행위는 이미 상훈과 동일시된 인간인 줄은 직시하지 못하는 것이다.&lt;/p&gt;

&lt;p class=&apos;bt11&apos;&gt;위에서 한국영화의 대표적인 콤플렉스로 가족문제로 인한 개인의 트라우마를 언급했는데,상훈과 연희의 캐릭터가 (나이와 성별을 떠나서) 극명하게 갈리는 이유는 개인의 트라우마가 어떻게 자리잡느냐에 있기 때문이다. 상훈은 어렸을 적 어머니를 때리고 여동생을 죽이는 아버지의 폭력을 똑바로 보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재혼을 하고 의붓누나(여동생의 대체)가 생겼지만 결코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나 트라우마가 생기지 않도록 의붓 누나의 아들(형인)에게는 유사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다하려고 한다. 상훈은 한국사회에 피상적으로 도사리고 있는 전형적인 아비 폭력-트라우마를 지닌 남성 중 하나이다. 그런데 연희의 경우, 상훈과 아주 비슷한 사연을 가진 가족이었지만, 직접적인 아버지의 폭력으로 어머니를 잃은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의 죽음 후 정신나가버린 아버지를 보살피는 역할을 하는 연희에게 적어도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는 많지 않아 보인다. 빈곤층의 전형적인 갈등(경제적 문제로 인한)이 파열하게 되는 미세한 차이는 상훈과 연희라는 캐릭터의 조합으로 일말의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lt;/p&gt;

&lt;p class=&apos;bt11&apos;&gt;이 영화에는 주고받는 시선이 별로 없다. 거의 일방적인 시선만이 ‘관계’를 만든다. “행위자-관찰자”에서 관찰자가 행위자가 되는 인물은 상훈과 영재다. 이들의 시선과 행위는 우리가 그토록 찜찜해 하는 ‘불편한 진실’로 다가가게 하고, 차단된 진실로 굳어지게 만든다.&lt;/p&gt;

&lt;p class=&apos;st11&apos;&gt;차단된 진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lt;/p&gt;

&lt;p class=&apos;bt11&apos;&gt; &lt;똥파리&gt;의 무서운 진실은  완벽한 조합이기를 포기한다. 연희가 알지 못하는 상훈의 행위는 결국 자신의 동생 영재가 행하는 동일한 폭력 행위를 쳐다보는 것으로 대체된다. 그리고 죽어버린 상훈밖에 알지 못하는 상훈의 살인범 영재는 그의 역할을 대신한다.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모든 불완전한 가족 구성원 중 하나인 만식, 연희, 현서, 형인은 상훈의 죽음으로 인해 그들이 꿈꿨던 행복한 가족을 대체하는 커뮤니티관계를 만든다. 죽어버린 상훈이 남긴 유산인 것이다. 그러나 엔딩 장면에서 영재를 바라보는 연희의 시선과, 그녀를 발견한 영재의 시선에는 아직 행복을 말하기에는, 희망을 말하기에는 조급한 과제가 남아있다. 정말 연희는 영재를 통해서 무엇을 느끼게 된 것일까.  영화는 관찰자로서의 역할만 남긴 채 진실의 투명성에 대해 보채지 않는다. 무시무시한 목격자로 남은 &lt;똥파리&gt;, 등장인물은 막장 인생을 살았지만  적어도 관객에게는 의미있는 관찰력을 쥐어준다.  by 김다현(vovovdh)&lt;/p&gt;&lt;/div&gt;</description>
                        <pubDate>Tue, 21 Jul 2009 13:49:57 +0900</pubDate>
                                </item>
                <item>
            <title>&lt;박쥐&gt; &apos;복수 3부작&apos;과 자살하는 사람들</title>
            <dc:creator>영화연대</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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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 align=center&gt;&lt;img src=&quot;http://mamoro3.cdn2.cafe24.com/thirst04.jpg&quot; alt=&quot;thirst04.jpg&quot; title=&quot;thirst04.jpg&quot; width=&quot;760&quot; height=&quot;507&quot; style=&quot;&quot; /&gt;&lt;/P&gt;
&lt;P class=st11&gt;1. 과잉된 스타일, 그 뒤로 숨는 죽음들&lt;/P&gt;
&lt;P class=bt11&gt;박찬욱은 한국 영화계에서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감독이다. 그는 거의 유일하게 대중과 평단의 관심을 동시에 받고 있다. 지지여부를 떠나서 일정 이상의 상업적 성공을 거두고 있으며, 그의 영화는 개봉과 동시에 뜨거운 찬반 논쟁이 벌어진다. 동시대 한국 감독 중에서 이 정도 위치를 갖고 있는 감독으로는 봉준호 정도가 있을 뿐이지만, 박찬욱 감독의 경우는 해외 영화제 경쟁부문 출품과 수상이라는 상징까지 갖고 있다. 이를테면 &apos;대한민국 대표 감독&apos;인 셈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영화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 의견을 표명하고 싶어 하며, 그의 다음 영화를 궁금해 한다. 쉽게 말해서 박찬욱은 한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감독이다.&lt;/P&gt;
&lt;P class=bt11&gt;굳이 이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이유는 그의 영화에서 현재 한국대중사회의 무의식을 읽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개별 영화에 사람들이 관심을 보내는 것도 의미심장하지만 어떤 감독 개인이 만든 일련의 영화들이 지속적으로 높은 관심을 받는 것은 대중들이 그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다는 점에서 또한 주목할 만하다. 또는 반대로 박찬욱의 영화가 대중에게 소구하는 지점이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분명 박찬욱의 영화와 대중들 사이에는 공명하는 부분이 있다.&lt;/P&gt;
&lt;P class=bt11&gt;그러나 여기에 우려감이 드는 것은 박찬욱의 영화가 가지고 있는 어떤 성격 때문이다. 그의 영화는 뚜렷하게 양식화된 스타일의 과잉을 보여준다. 조상경-류성희 콤비가 보여주는 &apos;특이한 패턴의 벽지와 의상&apos; 이라든지, 정정훈의 촬영이 보여주는 카메라 움직임과 미장센은 확실히 &apos;박찬욱표&apos; 스타일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만들어 가고 있다. 또한 &amp;lt;올드보이&amp;gt; 이후 음악 감독으로 참여하고 있는 조영욱이 들려주는 현악기 멜로디가 강조된 음악은 이러한 외형과 맞물려 어떤 과잉의 순간을 만들어 낸다. 물론 스타일이 뚜렷한 것과 스타일의 과잉은 구분을 해야 한다. 하지만 박찬욱의 경우는 그 뚜렷한 스타일이 종종 서사의 개연성을 정지시키고 스타일 그 자체에 주목하게 한다는 점에서 후자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문제이다. 이러한 스타일의 과잉은 결과적으로 영화의 서사에서 눈을 돌리게 만든다. 그의 영화에서는 내러티브의 논리보다 스타일이 만들어내는 과잉된 파토스가 먼저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박찬욱은 폭력의 묘사에 아낌이 없는 감독이다. 그의 영화에서 사람의 살이 찢기거나 피가 튀는 것을, 심지어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는 장면을 목격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apos;자극적인&apos; 장면들 역시 서사의 개연성을 정지시키고 파토스를 불러일으키는데 큰 역할을 한다. 이를테면 관객은 &amp;lt;친절한 금자씨&amp;gt;에서 금자(이영애)의 방이 보여주는 양식적인 세트에 일단 눈길을 뺏길 수밖에 없으며 &amp;lt;복수는 나의 것&amp;gt;에서 류(신하균)의 동선의 개연성을 생각하기보다 &apos;경동맥&apos;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에 몸을 움츠리게 되며, &amp;lt;올드보이&amp;gt;에서 오대수(최민식)가 장도리로 다른 사람의 이빨을 뽑는 장면을 기어이 클로즈업으로 보여줄 때 그 앞에서 논리적 사고를 멈출 수밖에 없다.&lt;/P&gt;
&lt;P class=bt11&gt;부연하자면, 이런 식으로 스타일의 과잉을 보여주는 영화는 많다. 당장 우리가 즐겨 보는 액션 장르의 영화들만 생각해보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들과 박찬욱의 영화가 다른 것은 박찬욱의 영화는 과잉된 스타일을 앞세워 그 뒤에 서사의 개연성을 숨긴다는 것이다. 즉, 서사의 빈자리를 스타일이 채우는 꼴이다. 또는 다르게 말하자면 서사상의 균열을 스타일이 억지로 봉합하려 하고 있다. 그 때 관객은 이야기 속에서 고민하고 생각해야 할 지점들을 놓치게 된다. 박찬욱의 영화가 양식적인 스타일을 방패삼아 숨은 서사 속 무의식적 욕망을 거의 밀어붙이다시피 할 때, 관객은 그 부분을 놓치고 만다.&lt;/P&gt;
&lt;P class=bt11&gt;그렇다면 관객이 스타일에 눈멀어 놓치고 마는 영화의 무의식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박찬욱의 영화에는 죄의식을 모조리 끌어안고 자살하려 하는 욕망이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apos;별 이유 없이&apos; 계속해서 죽어간다. 장르적인 순간을 위해서 죽어가고, 어떤 감정을 만들어내기 위해 죽어간다. 등장인물이 소모품처럼 다루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워내기 어렵다. 처음에는 장르적 장치가 방패가 되어주거나(&amp;lt;공동경비구역 JSA&amp;gt;), 또는 이유 없이 죽어나가는 인물들을 전면화 시켜서 오히려 의식하게끔 했다면(&amp;lt;복수는 나의 것&amp;gt;), 최근에 들어서는 그러한 방어 장치마저 없어지고 있다. 특히 &amp;lt;박쥐&amp;gt;에 이르러서는 등장인물들에게서 살고자 하는 의지를 찾아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만다. 그들은 그냥 죽기 위해 그 자리에 놓여 있는 듯하다. 더 큰 문제는 앞서 언급한 영화의 외적 요소들과 인상적인 몇몇 장면들에 가려서 이런 모습들이 점점 보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apos;훌륭한&apos; 영화에서는 스타일이 내용을 결정한다. 그러나 지금 박찬욱의 영화에서는 스타일이 내용을 감추는데 사용되고 있다. 아니, 오히려 그 과잉되고 도드라지게 양식화된 스타일과 재기발랄한 장르적 상상력이 역설적으로 서사상의 균열과 위기 지점을 드러낸다고 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서사상의 균열은 죽음, 특히 자살에 가까운 죽음을 통해 발생한다.&lt;/P&gt;
&lt;P class=st11&gt;2. &amp;lt;공동경비구역 JSA&amp;gt; - 죽어야만 끝나는 영화.&lt;/P&gt;
&lt;P class=bt11&gt;&apos;복수 3부작&apos; 이전에 먼저 &amp;lt;공동경비구역 JSA&amp;gt;을 짧게 언급하고자 한다. 개봉 당시 소위 &apos;웰메이드 상업 영화&apos;로 평가 받으며 대중에게 박찬욱의 이름을 널리 알린 이 영화는 공동경비구역에서 일어난 남북 병사들간의 우정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비극적인 상황을 다룬다. 영화는 마지막까지 순조롭게 진행된다. 남북한 병사들의 우정은 설득력 있게 그려지며, 어느 순간 불현 듯 발생하는 갈등과 그로 인한 비극도 따라가는데 별 무리가 없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이 마무리 되려는 순간, 이수혁 병장(이병헌)이 자살로 목숨을 끊는다. 이때는 이미 남성식 일병(김태우)이 투신 자살을 기도해 생사가 불분명한 상황이다. 이 두 명이 자살을 시도한 것은 물론 진실이 밝혀질 것에 대한 두려움과 정우진(신하균)을 죽였다는 죄책감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의 자살이 비극적인 분위기를 &apos;효과적으로&apos; 만들어 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사건이 거의 모두 해결된 상황에서 두려움과 죄책감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상황에 대한 의문은 차치하더라도, 이들에게서 살고자 하는 의지 자체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은 생각해볼만하다. 즉, 죽음은 예정돼 있던 것이었고 영화가 진실을 알려주기를 기다렸다가 진실이 플래쉬백을 통해 관객에게 알려지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자살을 택한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죽음이 그렇게 갑작스러운 것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 인물은 두려움과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느니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것을 선택한다. 이러한 선택을 영화의 정서적 효과를 위한 반전의 장치로 사용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추리극이라는 장르적 장치를 통해 이 죽음을 충분히 &apos;받아들일 만 한&apos; 것으로 그리는 것이다. 살아남아서 자신을 희생하며 까지 다른 사람을 살리려고 하는 오경필 중사(송강호)의 성숙한 캐릭터만이 오롯이 영화에 위로를 준다. 그러나 이제 &amp;lt;사이보그지만 괜찮아&amp;gt;를 제외하고 이러한 캐릭터는 다시 찾아보기 힘들며, 이들의 죽음은 앞으로 이어질 박찬욱 영화의 수많은 죽음을 예고한다. &lt;/P&gt;
&lt;P class=st11&gt;3. &apos;복수 3부작&apos; - 죄의식 끌어안기, 혹은 죄의식 전가하기&lt;/P&gt;
&lt;P class=bt11&gt;그리고 &amp;lt;공동경비구역 JSA&amp;gt; 이후 박찬욱 감독은 &apos;복수 3부작&apos;을 만든다. &apos;복수&apos;를 주요 테마로 삼고 있는 세 편의 영화들은 단순한 복수가 아니라 복수의 대상과 주체가 모두 죽음으로 끝장을 보고야 마는 &apos;하드코어&apos;한 복수를 보여준다. 시작부터가 심상치 않다. 먼저 &amp;lt;복수는 나의 것&amp;gt;에서는 결과적으로 총 14명의 사람이 하나씩 죽어 나간다. 영화의 시작은 류(신하균)의 누나의 수술비 마련을 위한 유괴극이지만, 사실상 이는 구실일 뿐이며 사람들이 하나씩 죽게끔 하기 위한 첫 번째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사람이 많이 죽는 영화가 &amp;lt;복수는 나의 것&amp;gt; 뿐 만인 것은 아니지만 이 영화의 죽음들은 그 연결고리가 헐거운 편이다. 오히려 죽음이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 그 연결고리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실제로 이 영화에서 죽음은 너무나 불가항력적인 것이라서 실제 복수와 관계없는 사람들마저 무차별적으로 죽음을 맞는다. 이를테면 마침 동진(송강호)이 영미(배두나)를 전기고문하고 있을 때 짜장면 한 그릇을 배달하기 위해 찾아왔던 중국집 배달부(류승완)를 생각해보자. 영화는 이 사람에 대해 설명을 전혀 해주지 않는다. 단지 영미의 시체 옆에 놓여 있는 시체를 보여줄 뿐이다. 그런가 하면 동진의 딸은 어떤가. 그녀는 단지 냇가를 건너다가 다리에서 미끄러져 익사한다. 영화는 친절하게(?) 그녀가 수영을 얼마 전에야 배우기 시작했다고 말해준다. 이를테면 그녀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 시침 뚝 떼고 &apos;그건 그녀가 아직 수영을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apos; 라고 부연 설명 해주는 것이다. 이 영화가 복수의 허무함에 대해 얘기하는 계몽 영화가 아닌 이상에야 이런 방식으로 찾아오는 죽음의 나열은 쉽게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그저 죽어야 하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동진의 죽음에 이르러서는 그 갑작스러움 때문에 일종의 소격효과마저 발생한다. 이 엔딩이 영화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것인데, 이런 식으로 죽음 앞에 놓인 인물들의 무기력함을 전면화 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를 친절한 영화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lt;/P&gt;
&lt;P class=bt11&gt;그리고 다음에 만든 &amp;lt;올드보이&amp;gt;에서는 &amp;lt;공동경비구역 JSA&amp;gt;에서 보여주었던 자살적 죽음을 완전히 전면화해서 다시 한 번 등장시킨다. 오대수(최민식)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자신의 딸과 섹스 했음을 알고, 자신의 혀를 자름으로써 복수의 행위가 완결되자 복수의 집행자인 이우진(유지태)은 그제야 자신이 누나를 죽게 했다는 죄책감에 눈물 흘리며 자신의 머리에 총을 당긴다. 오대수는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하지만 이우진에게는 결국 죽는 것만이 자신이 택할 수 있는 답이다. 이우진은 누나의 죽음 이후 그 책임을 타인(오대수)에게 전가하고자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문제의 핵심은 자신에게, 즉 누나의 손을 끝까지 잡고 있지 못한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박찬욱 영화가 보여주는 자살의 심리적 메카니즘이다. 어떻게든 죄의식을 타자에게 떠넘기려 하지만 결국 그 죄의식은 돌고 돌아서 자신에게 돌아온다. 그 때 그는 그 죄의식을 감당해 낼 수 없으며, 그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죽음 뿐이다. 그 진실을 자신이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lt;/P&gt;
&lt;P class=bt11&gt;반면, &amp;lt;친절한 금자씨&amp;gt;는 &amp;lt;올드 보이&amp;gt;와는 반대로 죄의식이 타자에게 온전히 넘겨졌을 때 벌어지는 일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복수의 집행자인 금자씨(이영애)는 치밀한 계획의 실행 끝에 결국 백선생(최민식)에게 성공적으로 복수를 한다. 심지어 백선생의 손에 죽은 아이들의 가족을 불러 모아 복수의 기회를 나누어줄 정도로 치밀하게 복수를 집행한다. 그리고는 두부 모양의 생크림 케익을 (얼굴을 파묻고)먹으면서 다시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을 보여준다. 금자의 딸인 제니의 나레이션은 금자가 그 이후에도 어떻게든 살아갔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지점은 백선생에 대한 것이다. 백선생은 철저하게 죽어 마땅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amp;lt;올드보이&amp;gt; 속 오대수의 저 유명한 대사 - &apos;아무리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도 살아갈 권리는 있는 거 아닌가요&apos;는 같은 배우인 최민식이 연기한 백선생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는 일종의 싸이코 패쓰로 그려지며, 따라서 금자의 철저하고 &apos;친절한&apos; 복수를 위한 완벽한 대상으로 그려진다. 복수의 집행자가 죽지 않고 살아가는 대신 복수의 대상은 완전한 괴물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를 위해 단순히(?) 제니의 유괴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복수 과정에서 백선생이 더 많은 아이들을 목매달아 죽였다는 설정을 추가한다. 왜 제니는 입양 보내고 다른 아이들은 죽였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백선생은 일말의 동정 없이 죽어도 괜찮은 사람으로 그려지고 영화는 더 이상 백선생에 대한 설명을 해주지 않는다. 여기에서 과잉은 홈비디오 영상으로 보여주는 이름 모를 아이들의 애꿎은 죽음이다. 관객이 그 아이들의 죽음의 이유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 받지 못하고 아이들의 죽음에 대한 분노와 책임을 백선생에게 떠넘기는 단계로 즉시 넘어간다. 결국 금자는 자신에게 돌아올 죄의식을 잘 방어해낼 수 있다. 죄의식 때문에 자살했던 &amp;lt;올드 보이&amp;gt;의 유지태가 금자의 환상 속으로 돌아와서 그녀의 죄의식을 건드리지만 그녀는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백선생이라는 괴물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백선생은 이해 불가능한 괴물이 되고 그 안에서 관객은 안도감을 느낀다. 죄의식을 끌어안고 자살하거나 죄의식을 다른 대상에게 전가하기. 이 양자 택일의 구조 안에서 죄의식의 다른 탈출구는 없다. &amp;lt;박쥐&amp;gt;에서는 이러한 이분법이 더욱 극단적으로 나타난다.&lt;/P&gt;
&lt;P align=center&gt;&lt;img src=&quot;http://mamoro3.cdn2.cafe24.com/thirst05.jpg&quot; alt=&quot;thirst05.jpg&quot; title=&quot;thirst05.jpg&quot; width=&quot;760&quot; height=&quot;507&quot; style=&quot;&quot; /&gt;&lt;/P&gt;
&lt;P class=st11&gt;4. &amp;lt;박쥐&amp;gt; - 비극적 자살에서 낭만적 자살로.&lt;/P&gt;
&lt;P class=bt11&gt;&amp;lt;박쥐&amp;gt;에서 죽어나가는 사람들의 서사를 놓치게 하는 방어 기제는 예의 양식화된 외적 스타일과 &apos;뱀파이어&apos;라는 장르적 장치이다. 현상현 신부(송강호)는 이브 바이러스 백신 실험을 위해 생체실험에 자원했다가 뱀파이어의 피를 수혈 받고 자신도 뱀파이어가 된다. 덕분에 이브 바이러스로부터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이 되지만, 흡혈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운명의 불완전한 존재가 된다. 그리고 친구의 아내인 태주(김옥빈)를 만난 후 사랑에 빠져 이런저런 사건을 일으키다가 태주마저 뱀파이어로 만들어버린다. 이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어지고 현상현은 최후의 수단으로 태주와의 동반자살을 선택한다.&lt;/P&gt;
&lt;P class=bt11&gt;줄거리를 거칠게 정리해보았지만, 이 영화에서 서사 상 설명되지 않는 부분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각 시퀀스 간의 유기적인 연결은 차치하고서라도 기본적인 개연성을 생략하고 있거나 아예 찾아볼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현상현 신부는 왜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자살과 다를 바 없는 생체 실험에 자원하는지, 왜 뱀파이어가 되고난 뒤 모든 종류의 쾌락을 갈구하는지, 왜 결국 자살이란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영화는 설명을 해주지 않는다. 다만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다양한 종류의 과잉된 감정과 폭력, 섹스이며 그 안에서 단 하나 영화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은 상현의 일관적인 죽음을 향한 이끌림이다. 우리는 이 영화가 상현의 자살로 시작해서 자살로 끝나는 영화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영화가 시작하면 상현은 곧 자신의 생명을 베풀기 위해 아프리카로 날아간다. 상현이 찾아간 연구소의 소장은 순교와 자살은 근본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고 얘기하며 다시 생각해볼 것을 권하지만 상현은 “내 기도는 잘 듣습니다” 라는 엉뚱한 대답을 내놓는다. 그리고 곧 보이스 오버 나레이션으로 상현의 기도문이 들려온다. “살이 썩어가는 나환자처럼 모두가 저를 피하게 하시고 사지가 절단된 환자와 같이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하시고… 다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만이 저를 불쌍히 여기도록 하소서” 언뜻 듣기에는 숭고한 희생의 기도 같지만, 이는 오히려 자신의 죽음을 가장 극단적으로 낭만화하는 방식이다. 자신의 희생을 미화하려 하지 않으려 하는 다짐으로 보이지만, 그 안에는 가장 비참한 곳까지 자신을 스스로 떨어트려 결국 신이라는 절대적 타자의 인정을 받으려는 욕구가 숨어 있다. 결국 박찬욱의 자살은 스스로를 낭만적인 주체로 만드는 지경에까지 다다른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결말 부분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욕망을 제어하지 않는 태주를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상현은 그녀와의 동반 자살을 선택한다. 이 시퀀스에서 상현의 대사는 단 한 마디 뿐이다. “우리 지옥에서 만나요” 태주가 “죽으면 끝” 이라고 말하든 말든 그는 자살로써 자신의 죄의식을 덜어내고 그 후의 새로운 삶을 그리고 있다. 심지어 그 자리에 나여사를 동반했다는 것은 상현의 의도를 더욱 잘 이해하게 해준다. 나여사가 보는 앞에서 죽음으로써 그는 자신의 죄의식을 더 확실하게 끌어안는다. &lt;/P&gt;
&lt;P class=bt11&gt;이 때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상현이 영화 내내 일관적으로 모든 일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했다는 것이다(“제가 좋아서 뱀파이어 피를 수혈 받은 건 아니잖아요”). 심지어 강우(신하균)를 죽일 때에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태주를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스스로 변명한다. 이런 식으로 계속 문제를 회피하고 자신의 죄의식을 방어하다가 결국 태주로 인해 상황이 돌이킬 수 없어지자(이 때도 문제가 되는 것은 상현이 아니라 태주이다) 그 때 비로소 다시 죽음을 택한다. 문제는 죽음 외에는 답이 없는 것처럼 영화가 자연스럽게 자살을 답으로 제시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한 것처럼 여기에는 태주의 태도도 한 몫 한다. 약간의 우스꽝스러운 반항을 한 뒤, 그녀는 비교적 간단하게 죽음을 받아들인다. 그리고는 추억이 깃든 상현의 신발을 꺼내 신는 더할 나위 없이 낭만적인 행동을 보여준다. 이전의 영화들이 자살을 비극적인 것으로 그린 것과 비교하면 이는 주목할 만하다. 심지어 영화가 마지막으로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 신발이다. 낭만적 자살을 위해 멜로드라마적 장치까지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상현은 무고한 사람을 죽게 하지 않겠다는 나름의 사명까지 등에 지고 있다. 이제 상현은 모든 죄의식을 끌어안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속죄를 완성시켜 줄 대타자(나여사) 앞에서, 사후 세계를 기약하며 자살한다. 이토록 완벽하고 숭고한 자살이라니!&lt;/P&gt;
&lt;P class=st11&gt;5. 살아도 괜찮아&lt;/P&gt;
&lt;P class=bt11&gt;결국 다시 앞에서 제기했던 문제로 돌아가자면 - 박찬욱의 영화가 대중들의 무의식과 공명하는 지점은 이러한 죽음, 즉 자살적 몸짓을 향한 끌림이 아닐까 하고 조심스럽게 가정을 해본다. 어떤 비극적인 상황에 대해 그 죄의식을 타자에게 전가하다가, 결국 자신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생각하고 죄의식을 모조리 끌어안은 뒤 자살하기. 한국의 관객들이 박찬욱의 영화와 공명하고 있는 부분이 이런 것이라면(공교롭게도 복수 3부작 이후 삶의 의지에 대해 이야기했던 거의 유일한 영화인 &amp;lt;사이보그지만 괜찮아&amp;gt;는 대중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지 못 했다. 박찬욱이 삶의 의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일까?) 우리는 좀 더 진지하게 박찬욱의 영화를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amp;lt;공동경비구역 JSA&amp;gt; 이후 박찬욱의 영화는 양식화된 스타일과 장르적 감수성에 기인한 파토스의 강도를 더해가면서 그 안의 등장인물들은 자살의 몸짓을 보인다. 이 말은 단순히 &apos;영화 속 등장인물을 쉽게 죽여서는 안 된다&apos; 라는 윤리적 명제를 확인하려 하는 것은 아니라 삶에 대한 의지를 보이지 않고 적당한 때가 오면 기다렸다는 듯 죽음을 택하고 마는 인물들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이다. &amp;lt;박쥐&amp;gt;는 그러한 맥락에 있어 정점에 다다른 영화이다. 박찬욱이 다음 영화에서는 어떤 선택을 보여줄지 모르지만 이대로 가면 다음 영화에서 는 더 끔찍한 것을 보게 될지 모른다는 걱정이 든다. 자살은 이미 숭고한 선택이 되어버렸고, 그 끔찍함은 더욱 화려해진 스타일에 가려지며 한국의 관객들은 다시 한 번 그 안에서 자신도 모른 채 뜨겁게 화답할 것이다.&lt;/P&gt;
&lt;P class=bt11&gt;그래도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박찬욱이 &amp;lt;사이보그지만 괜찮아&amp;gt;를 만든 감독이라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일군(정지훈)은 밥을 먹지 않는 영군(임수정)에게 갖은 노력을 다해 밥을 먹게 만들고, 세상을 끝장내겠다는 영군을 섹스에 눈 돌리게 만든다. 황량한 벌판 위 두 남녀의 나신 위로 무지개가 뜨면서 끝나는 이 영화는 &apos;죽으면 안 돼&apos; 라고 말한다(하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서사가 정신병원이라는 판타지적 공간에서 전에 없이 산만한 진행 속에서 가능했다는 점 역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일군과 영군 역시 죄의식을 갖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일군은 자신 때문에 엄마가 집을 나갔다고 생각하고 영군은 자신 때문에 할머니가 밥을 못 먹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두 인물은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으로 죄의식을 온전히 방어해낸다. 이 때 방점은 환상이다. 지금까지 박찬욱의 영화에서 진실과의 대면은 곧 자살로 이어졌다. 하지만 &amp;lt;사이보그지만 괜찮아&amp;gt;는 이를 환상 구조를 통해 막아낼 수 있는, 또는 우회해서 통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apos;복수 3부작&apos; 이후 박찬욱이 찍은 두 편의 영화 - &amp;lt;사이보그지만 괜찮아&amp;gt;, &amp;lt;박쥐&amp;gt;. 박찬욱은 다음 영화에서 어떤 길을 택할 것인가. 나 역시 매우 기대가 된다.(김보년)&lt;/P&gt;
&lt;br&gt;
&lt;P class=batang&gt;&lt;FONT color=#882222&gt;본 글은 ‘박찬욱의 영화세계’라는 주제로 시네마테크 부산과 부산영화평론가협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제1회 비평공모’에서 대상으로 당선된 원고로 필자의 동의 후 게재합니다.&lt;/FONT&gt;&lt;/P&gt;&lt;/div&gt;</description>
                        <pubDate>Tue, 21 Jul 2009 12:59:21 +0900</pubDate>
                                </item>
                <item>
            <title>&lt;박쥐&gt; 살아남지 못한 욕망과 살아남은 시선에 관한 일기</title>
            <dc:creator>영화연대</dc:creator>
            <link>http://www.yhyd.org/10112</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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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gt;&lt;img src=&quot;http://mamoro3.cdn2.cafe24.com/thirst01.jpg&quot; alt=&quot;thirst01.jpg&quot; title=&quot;thirst01.jpg&quot; width=&quot;760&quot; height=&quot;507&quot; style=&quot;&quot; /&gt;&lt;/P&gt;
&lt;P class=bt11&gt;박쥐는 포유류 중에서 유일하게 날 수 있는 동물이라고 하지만 자유로운 이미지보다는 오직 자신의 이익에 치우쳐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는 기회주의자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그래서 박쥐는 동물 우화에서 유일하게 쫓겨난 동물이기도 하다. 박쥐는 유일하게 날 수 있는 포유류이지만 그 날개는 다른 생에 치명적이며, 그래서 박쥐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반면 뱀파이어는 매우 매혹적이다. 그것이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갈 만큼 치명적이게 될 때는 말뚝으로 저지해야 하지만 어쨌든 뱀파이어가 자아내는 분위기는 매우 우아하다. 뱀파이어의 힘과 능력은 아름다우며 위협적이다. 그런데 그런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뱀파이어가 박쥐로 뿅 하고 변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갑자기 그 공포가 잊혀지고 피식 웃음이 나고야 만다. 영화의 제목이 뱀파이어가 아니라 박쥐인 데는 남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또한 동시에 이 영화의 영문 제목은 ‘thirst’ 즉, 목마름, 갈증, 갈망 등의 뜻을 가진 말이기도 하다. ‘박쥐’와 ‘갈증’은 마치 서로를 보완해주고 있는 제목 같다. 박쥐가 우리의 발가벗겨진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면, 갈증은 그만큼 우리가 애타하는 욕망을 생각나게 한다. 박쥐는 우리가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취하는 어떤 형태인 것처럼 보인다. 갈증 앞에 솔직해졌을 때 그것은 생을 파괴하기에, 우리는 뱀파이어가 될 수 없으며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금지된 것이다. 그러나 그 갈증을 포기할 수 없어 대신 우리는 박쥐처럼 숨어서 기회를 엿보고 자신을 변호하며 우리의 목을 축이고는 하는 것이다.&lt;/P&gt;
&lt;P class=st11&gt;상현의 욕망 : 박쥐의 욕망은 갈등한다&lt;/P&gt;
&lt;P class=bt11&gt;아프리카에서 기도하듯이 상현은 모두가 혐오하는 가장 밑바닥을 선택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 기도의 화답은 모든 욕망을 알고 그것을 취할 힘을 가진 뱀파이어로의 환생이다. 그의 환생은 성스러운 듯하지만 매우 속되며, 그의 힘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흡혈하고 그렇게 목숨을 앗아감으로써 유지되는 것이다. 즉 사람들이 그를 향해 구원의 희망을 품을 때, 그것은 파멸을 향한 기도인 것이다. 상현은 이러한 자신의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는 소원하던 대로 가장 더러운(?) 존재가 되었으니 그는 어떻게 여기서 구원을 일굴 수 있을까?&lt;/P&gt;
&lt;P class=bt11&gt;상현은 우연히 어릴 적 친구 강우와 그 엄마 라 여사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집에 거의 갇혀 사는 강우의 부인 태주를 만난다. 상현은 그녀에게 끌리며 그녀를 구원하려 한다. 그리고 강우를 살해하기에 이른다. 무엇보다 상현은 그렇게 자신의 저주받은 환생도 구원한다. 그러나 상현은 계속되는 난관에 봉착한다. 그는 그를 보살펴 온 신부님이 자신의 피를 통해 오래 전 멀어버린 눈을 뜨고자 하는 욕망에 집착하는 것을 보며, 후에는 결국 그 신부를 죽여 버린다. 상현은 노신부를 구원해주지 않았다. 태주는 자신을 사랑하고 구원했다 믿고 있는 상현의 앞에서 또 다시 지루해하고, 급기야 남편이 자신을 폭행한다고 했던 것은 그녀의 거짓말이었음이 드러나게 된다. 그리하여 서로가 서로를 부정하고, 모든 것을 부정하며 악다구니를 내다가, 상현은 태주의 목을 비틀어 버린다. 우리는 그 욕망의 속살을 남김없이 목격한다. 그것은 처절하고 볼품없다.&lt;/P&gt;
&lt;P class=bt11&gt;상현은 자신의 욕망을 그대로 수용할 수만은 없는 자이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위해 남을 해쳐서는 안 되며, 도리어 만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수도자의 윤리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상현이 빠져있는 함정이기도 하다. 그는 태주가 폭행당했기 때문에, 신부님이 과욕을 부렸기 때문에, 죽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배고픈 사람 돕기를 좋아했던 환자의 마음을 알기 때문에, 흡혈을 하고 사람을 죽였다고 믿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고 믿는 것, 그것은 자신의 욕망을 포장하는 효과적이고 한편 군색한 수단이다. 그런데 상현은 이런 포장으로 자신을 보전하거나 해방시키지 못한다. 그는 죄의식과 욕망의 사이에 끼인 존재이다. 그는 성스러운 성인도 아니며, 매혹적인 뱀파이어도 아니고, 오직 이리저리 처신을 바꾼 박쥐, 날개를 가졌지만 흡혈로 생을 유지하기에 해롭고 보잘 것 없고 슬픈 박쥐였던 것이다.&lt;/P&gt;
&lt;P class=bt11&gt;그래서 태주가 폭주(?)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거울임을 알았을 때, 그는 자신의 속됨을 만천하에 공개하고, 자신을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는 온 몸으로 성스러운 포장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초라한 속살을 드러내면서 스스로를 고발하였고, 그리고 이 세상을 등지며 자신이 세상에 취할 수 있는 최상의 구원을 행하였다. 욕망은 그렇게 드러나며, 그와 동시에 죽어가야 할 우리의 양날의 검인가. 상현은 바로 이 가장 더러운 곳, 가장 어두운 곳에 숨어있는 인간의 박쥐같은 모습을 온 몸으로 받아들여 공개하였던 것이다.&lt;/P&gt;
&lt;P class=st11&gt;태주의 욕망 : 갈증(Thirst)은 모든 것에 앞선다&lt;/P&gt;
&lt;P class=bt11&gt;그런데 태주의 경우, 그녀의 욕망은 조금 다르다. 태주는 어릴 적부터 라 여사의 세계에 철저히 갇혀 매우 제한된 삶은 살아왔다. 그녀가 할 수 있던 유일한 것은 맨발로 골목길을 달려보는 것이었을 뿐이다. 태주에게 엄마이면서 시어머니인 라 여사는 철저한 혈연 중심의 사람이다. 태주는 결코 동등한 자식이 될 수 없다. 밀려난 자의, 소외된 자의, 사랑받지 못한 자의 자유로움일까. 그녀는 뱀파이어가 되었을 때 파괴를 반성하지 않는다. 상현은 자신의 허벅지를 때려가면서 뱀파이어가 되어 생겨난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려고 했다. 그는 신부로서의 자신과 뱀파이어로서의 자신 사이에서 죄책감에 휩싸인다. 그런데 그를 움직이는 이러한 죄책감이란 것이 태주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태주는 늘 체념했으며 늘 분노했고 늘 제어된 채였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어떤 것이라도 필요했던 사람이었으나,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제어할 장치만은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고, 그녀는 욕망을 취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것을 즐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주에게 욕망은 오직 해방으로만 존재할 뿐, 죄의식은 들어설 여지가 없다. 아마도 상현이 보고 싶어 했던, 가장 낮은 곳은 태주의 자리였을 것이다. 그녀는 그 욕망에 대한 천진난만함 때문에 그만큼 혐오스럽다. 그리고 이러한 그녀의 욕망은 결국에는 제어되어 그녀는 결국 살해당한다. 그것이 모두를 위해 정당하다. 심지어 그것은 존엄한 죽음 따위는 선택할 수 없는 태주에게도 가장 깔끔하고, 그런 의미에서는 그녀에게도 정당하다. 상현은 모두를 위해 가장 낮은 곳의 진실을 삭제한다. &amp;lt;올드보이&amp;gt;에서 모든 것이 꿈일 뿐이라고 망각하는 것과 비슷한 시도일까. 한 줌 재도 남기지 않고 가장 혐오스러운 욕망은 감춰지고, 우리의 기억은 지워지려고 한다. 상현의 구원은 인류를 위한 것이어서 정말로 혐오스럽고 천진난만하고 무지한 악을 지옥으로 끌고 가고자 한다.&lt;/P&gt;
&lt;P class=bt11&gt;그런데 태주는 전혀 뉘우치지 않는다. 그녀는 재미있었다고 말한다. 잘 놀았다고, 이제 끝이라고 한다. 왠지 모르게 그녀의 여정은 억울하다. 상식이 없어 더욱 무서운 뱀파이어인 태주는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파렴치한-쪽가위로 피를 내는 모습을 보라- 연쇄살인마인데, 그래서 짠하다. 그녀는 그렇게 사라져줘야 하는 존재라서 그녀의 갈증은 무섭지만 짠하다. 그녀가 갈증 앞에 박쥐조차 될 수 없이 천진난만하다는 것과 그렇기에 그 악이 사라져줘야 함이 그렇다. 상식을 배우고, 죽음을 선택하여 존엄할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상현과 비교했을 때, 태주의 모습은 왠지 씁쓸하다. 어디선가 싸이코패스도 잘 자라면 엄격한 지도자가 된다 했던가. 그녀는 잘 자라지 못해 연쇄살인마가 된 싸이코패스 같다. 상현은 연기할 수밖에 없었던 그 마지막 퍼포먼스가 태주에게는 삶 자체라는 것도 짠하다. 대부분에게 있어 폭력은 감춰지고 은밀하지만, 태주는 가장 더럽고 혐오스럽게도 욕망의 폭력과 마주한다. 그러니까 상현은 태주에게 마지막 구원의 공연을 펼친 것이다. 그 속됨을 드러내는, 그리하여 우리의 성스러운 희망을 무너뜨리고 폭로하며 초라하게 만든 것은 태주를 기억하기 위해 바쳐진 것이었을지 모르겠다.&lt;/P&gt;
&lt;P&gt;&lt;img src=&quot;http://mamoro3.cdn2.cafe24.com/thirst03.jpg&quot; alt=&quot;thirst03.jpg&quot; title=&quot;thirst03.jpg&quot; width=&quot;760&quot; height=&quot;507&quot; style=&quot;&quot; /&gt;&lt;/P&gt;
&lt;P class=st11&gt;라 여사의 욕망 - 치명적인 것은 강우이며, 엄마의 시선은 죄의식을 수단으로 강우를 보호한다&lt;/P&gt;
&lt;P class=bt11&gt;그런데 태주가 짠한 것은 영화 내내 가장 공포스러운 엄마 라 여사의 욕망과 그 시선 때문에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라 여사는 자기 핏줄이며 아들인 강우에게는 매우 극진하지만, 핏줄이 아니며 딸인 태주에게는 그 수발을 들게 할 뿐이다. 그녀는 아들을 숭배하며, 순수한 혈통을 숭배한다. 그녀는 뿌리 깊게 이어져 왔던 어떤 억압을 구체화시키고 있는 존재 같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마비되어 오직 시선과 정신만 남았을 때 그 힘은 더욱 커진다. 이제 상현과 태주는 그 시선에 사로잡힌다. 상현과 태주를 향해 쉴 새 없이 깜박이는 눈, 그리고 상현이 태주를 죽이고 피를 나누는 때 부릅뜨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눈은 그 어느 장면들보다도 섬뜩하다. 그리고 그 시선은 매우 결정적이다. 라 여사의 시선은 벗어날 수 없는 무서운 것이 되어 우리를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상현이 스스로 자신의 생을 포기하며, 태주를 끌어들여 함께 사라져 갈 때, 라 여사는 웃는다. 그 시선이 웃는다. 오직 여사의 눈만 남아 있는데, 그 눈이 매우 크게 눈웃음 짓는다. 마치 승리했다는 듯이. 그것은 매우 사악하고 섬뜩하게 그녀의 살아있음을 우리에게 환기시킨다.&lt;/P&gt;
&lt;P class=bt11&gt;여사의 눈웃음이 주는 사악함은 영화에서 매우 중요하다. 만약 이러한 눈웃음이 없었다면, 상현의 죽음은 우리에게 욕망과 죄의식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윤리만을 남겼을 것이다. 이는 감독의 이전 복수 영화들에서 마지막에 남는 듯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죄의식의 승리였다. 그런데 오직 그러한 제어 즉 금기를 당연한 운명으로 느끼며 주인공들의 여정이 끝나간 뒤에, 우리는 &amp;lt;박쥐&amp;gt;에서 라 여사의 시선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 시선은 갑자기 무언가를 환기시킨다. 그것은 그녀가 지배하고 있는 어떤 것에 대한 환기일 것이다. 그것은 순수한 피를 숭배하는 여사의 억압에 대한 환기이다.&lt;/P&gt;
&lt;P class=bt11&gt;이러한 시선의 살아남음을 보게 된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그 수많은 피와 그 화려하던 욕망의 풍경들은 결국 죄의식 앞에 고개를 숙이고 혀를 잘랐고, 욕망의 모습이 그럴싸하고 설득력 있을수록 죄의식 앞에 주인공의 무력하기만 했다. 여기서 금기는 운명일 뿐이다. 그렇기에 그것을 탐한 자들은 망설임 없이 죄책감에 사로잡힐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라 여사의 시선을 함께 봄으로써 우리는 그 낮고 더러운 욕망을 더러워하거나 심판하지 않을 수 있는 선, 즉 운명적인 것만은 아니며 단지 뿌리 깊을 뿐일 수 있는 어떤 억압의 선을 비로소 함께 기억할 수 있게 된 것이다.&lt;/P&gt;
&lt;P class=st11&gt;욕망에 의해 치명적으로 파괴되는 것은 오직 혈통일 뿐인지도 모른다&lt;/P&gt;
&lt;P class=bt11&gt;그렇다면 이제 이 세 번째 욕망이 있음을 확인했을 때, 우리가 치명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보편적인 인간 일반이 아닌, 강우였음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상현과 태주가 죽어가야 했던 것은 그들이 강우에게 치명적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피가 섞이는 것은 더럽다. 그리고 그 욕망은 추악하다. 그것은 누구의 목소리인가. 피와 피의 나눔을 두려워하고 그것의 힘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애초에 억압하는 것이 있었음을, 그리하여 그것에게 치명적인 것이 피와 피가 섞이는 것임을 알게 되었을 때, 상현과 태주의 죽음은 비로소 짠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 때 우리는 가장 더러운 것을 비로소 편들고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우리는 그 초라함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lt;/P&gt;
&lt;P class=bt11&gt;라 여사가 없다면, 모든 위계가 사라진 욕망의 향연만이 영화에 남을 것이다. 그때의 욕망이란 생의 파괴와 닿아 있어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네 욕망의 배치는 그렇게 추상적이거나 모호하거나 평평하지 않은 것 같다. 실로 우리네 욕망은 위계 속에서 배치되고 해석되어 왔다. 그래서 상현이 스스로 초라한 모습을 연기하고 기꺼이 초라해짐을 택했을 때, 그것은 진정 가장 낮을 곳을 구원하기 위한 공연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낮은 곳의 욕망은 철저히 억압되었기에 반대로 솔직한 채로 보존되었고, 상현의 공연으로 그것은 우리 눈앞에 정면으로, 전면적으로, 소개될 수 있었다.&lt;/P&gt;
&lt;P class=bt11&gt;어쨌든 파괴되었어야 할 시선은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 그러나 어느 박쥐들의 죽음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욕망이 그들 내부에 도사린 위험요소가 아니라 그들 외부에서 그들을 억압하는 것들을 향한 위험이라는 진실이다. 무언가를 파괴한다는 것은 내부에 도사린 충동이라기보다는 어떤 분노이고 이 분노는 정당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감독은 마치 그 말을 하고 싶다는 양 여사의 살아남은 시선을 보여주었다. 이 때문에 &amp;lt;박쥐&amp;gt;는, 현실의 운명이란 상현과 태주의 여정을 짧은 일탈로 매듭짓게 할 수밖에 없으나, 한편 그것이 라 여사가 꿈꾸는 운명일 뿐임도 폭로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죽음을 정말로 슬퍼해야 할 것 같다. 이제 욕망이란 단지 내부의 어두운 충동이고 억제되어야 하는 보편 윤리로써 해석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순수한 혈통의 지배를 깨는 즐거운 섞임의 과정이라는 것을, 때문에 욕망이 야기하는 파괴란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일 수 있음을 생각해 봐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실로 인간의 역사에서 지난한 세월동안 우리 중 대부분은 인간으로서의 격을 갖추지 못한, 단지 더럽고 무지한 존재로 머물기를 강요당하고 있었지 않은가 말이다. 그것은 욕망의 독점이었던 것이다. 그 지난한 전통의 라 여사 시선 속에서 다수는 실은 인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니 피의 섞임이란, 그 처절한 나눔이란, 혐오스럽기보다는 즐거운 것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비로소 라 여사가 아닌 우리를 인간이 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라 여사는 정녕 파괴되어야 할 역사이며, 그러므로 이제 박쥐임을 인정하는 것은 혐오를 위한 것이기 보다는 솔직하고 즐겁게 도래하는 인류의 역사를 향한 것이 될 때이다. (gipsymoon)&lt;/P&gt;&lt;/div&gt;</description>
                        <pubDate>Mon, 15 Jun 2009 14:57:23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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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지아 장커 - 개인과 공간, 현대화에 대한 시선의 힘</title>
            <dc:creator>영화연대</dc:creator>
            <link>http://www.yhyd.org/10110</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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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div class=&quot;xe_content&quot;&gt;&lt;P&gt;&lt;img src=&quot;http://mamoro3.cdn2.cafe24.com/24city.jpg&quot; alt=&quot;24city.jpg&quot; title=&quot;24city.jpg&quot; width=&quot;760&quot; height=&quot;428&quot; style=&quot;&quot; /&gt;&lt;/P&gt;
&lt;P class=bt11&gt;지아 장커의 영화들에서 ‘사라짐’은 상실이라고 단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노스텔지어를 수반하지 않는다. 그의 초기작에서 등장인물들은 주로 ‘청춘’들이었다. 지아 장커는 그들에게 어떤 역동성도 부여하지 않는다. 청춘들의 희망은 생동하지 못하는 일상의 반복 속에서 서서히 피어나거나 정체된다. 지극히 느린 관조적 (카메라)시선은 청춘들과 텅 빈 공간을 대상화 하지만 결코 주변화하지 않는데, 지아 장커에게 인물들과 공간은 항상 매개되어 있으며, 현재의 위치에서 끊임없이 꺼내어지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이르러, 지아 장커의 주된 영화적 의식은 변화한 듯 보인다. &amp;lt;무용&amp;gt; &amp;lt;24시티&amp;gt;를 보면, 현대 중국에 대한 통찰은 젊은 청춘들에게서 노동자로 옮겨갔고, 그 내러티브의 순환성은 다큐멘터리를 통해 실제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나 특유의 롱테이크적 시선은 대상의 변화와 상관없이 일관된 태도를 증명하는 영화적 의식이다.&lt;/P&gt;
&lt;P class=st11&gt;1. 시선의 힘이 발휘되는 롱 테이크&lt;/P&gt;
&lt;P class=bt11&gt;후 샤오시엔이 의도하는 롱테이크(long take)가 개인사와 역사의 맥락을 가로지으려는 고정성에 있다면, 지아 장커의 그것은 단절된 개인사를 지형성과 이동의 맥락에서 불러오려는 의도로 사용된다. &amp;lt;소무&amp;gt;(1997) &amp;lt;플랫폼&amp;gt;(2000) &amp;lt;임소요&amp;gt;(2002)에서 롱 테이크는 개인과 공간의 극명한 연관성 속에서 힘을 발휘하며, 그것은 항상 팬(pan)과 수반되는 경우가 많았다. 롱 테이크가 단순히 고정된 시선으로만 일관되지 않는다는 것은, 화면에 부여된 공간과 인물이 결코 ‘정체’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amp;lt;플랫폼&amp;gt;의 배경인 편양에서 극단생활을 하는 문예 노동자들이 공간을 배회하며 (청춘의)미숙함을 드러낼 때, 그들을 바라보는 카메라 시선은 그들의 미숙함이 ‘어떻게 보이는지’ 확실히 보여주기 위해 건조한 성곽의 모습과 대비시킨다. 결국 미숙한 청춘을 통해 부여하는 교훈은 카메라 시선으로 그것을 담아낸 전지적 시선으로 그 공간적 함의를 추측할 수 있다. 성곽에서 한시라도 가만히 서 있지 못하는 인물들(따오와 추이밍량의 경우)을 그렇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이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는 혼란스러운 방황하는 청춘이기 때문이다(그들이 속해있는 공동체는 유랑극단이다. 결국 떠나게 되어 있고, 그들도 헤어지게 될 수밖에 없다).&lt;/P&gt;
&lt;P class=bt11&gt;&lt;img src=&quot;http://cfile24.uf.tistory.com/image/190DBF184A370D8D11E292&quot; alt=&quot;190DBF184A370D8D11E292&quot; title=&quot;190DBF184A370D8D11E292&quot; width=&quot;454&quot; height=&quot;255&quot; style=&quot;VERTICAL-ALIGN: middle&quot; /&gt;&lt;BR&gt;&lt;BR&gt;&lt;BR&gt;&amp;lt;스틸 라이프&amp;gt;(2006)에서 카메라 시선은 중국의 현재를 가늠할 수 있는 ‘산샤’에서 두 사람의(셰홍과 산밍) 발걸음에 초점을 맞춘 채, 은유의 피날레를 장식한다. 산샤는 16년 전 떠나버린 아내를 찾아 이미 산밍에게 낯설음과 위태로움을 안겨주는 장소다. 우여곡절 끝에 만난 부인과 허물어진 건물구멍에서 내려다 본 건물 밖 다른 건물의 허물어짐은 그 큰 구멍만큼이나 위악스러운 도시의 공포처럼 느껴진다. 이보다 더 공포스러운 산업화의 몰골이 어디 있겠는가? 이 장면에서 인물은 무너져 내리는 건물을 응시하고, 카메라는 다시 이 두 인물의 뒷모습을 조용히 비춘다. 산밍과 그의 부인은 그러한 공포스러운 순간에서도, 침착한 응시로 일관한다. 시선의 힘은 이러한 순간에 인물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이 장면에서 프레이밍은 두 겹으로 되어 있다. “무너지는 건물&amp;lt;그 건물이 보이는 또 다른 건물의 (파괴된) 구멍&amp;lt; 그 구멍을 통해 ‘무너지는 건물’을 바라보는 두 인물&amp;lt; 이 모든 것을 프레이밍하는 카메라 시선” 파괴된 구멍과 카메라 시선은 동질적인 프레임이라고 하기는 힘들지만, 궁극적으로 인물이 그 화면 속에서 결국 관조자가 될 수밖에 없도록 설정한 인물을 가운데에 둔 이중적 프레임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결국 지아 장커는 이 장면을 통해 (카메라)시선의 힘이 어떤 효과를 발산할 수 있는 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분명히 의도된 시선이지만, 그것이 인물(일종의 매개물)로 하여금 어떤 효과를 불러일으키게 하는 지 말이다.&lt;/P&gt;
&lt;P class=bt11&gt;&lt;img src=&quot;http://cfile3.uf.tistory.com/image/113120174A370CCA204615&quot; alt=&quot;113120174A370CCA204615&quot; title=&quot;113120174A370CCA204615&quot; width=&quot;381&quot; height=&quot;250&quot; style=&quot;&quot; /&gt;&lt;BR&gt;&lt;BR&gt;&lt;BR&gt;&amp;lt;스틸 라이프&amp;gt;의 근간이 되는 다큐멘터리 &amp;lt;동&amp;gt;에서 한 인물 (프레이밍과 관련된)이 등장한다. 다름 아닌 화가다. 이 화가는 산샤에서 노동하는 인물들을 자신의 의도에 맞게 배치시켜놓고 그림을 그린다. 그림에서 노동자들은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연출되었다. 화가는 그림을 그려놓고, 노동자 중 한 명의 가족을 직접 방문해 그림을 보여준다. 이런 와중에 화가는 노동자든, 그의 가족이든 디지털 카메라에 그들과 자신의 모습을 담는다. 화가는 그림뿐만 아니라 ‘실제’인물의 인상까지 놓치지 않으려 애쓴다. 화가는 끊임없이 ‘기록한다’. 그리고 나아가 타자에 의해 ‘기록된다’. 기록되는 화가의 모습과 이동은 화가가 쳐다보고 기록하는 세계와 그것 모두를 담아내는 다큐멘터리적 시선이 모두 담겨져 있다. 즉 &amp;lt;동&amp;gt; 역시 &amp;lt;스틸 라이프&amp;gt;의 구조와 맞물려서, 이중 혹은 다중적 시선이 함께 녹아있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시선의 다중성과 함께 풍경과 인물의 다층적 의미도 함께 섞여 있다.&lt;/P&gt;
&lt;P class=bt11&gt;지아 장커의 시선은 점점 진화하고 있다. 데뷔작에서부터 찬찬히 밟아온 그의 시각은 매체의 감각을 자신이 화두로 삼고자 하는 것에 피상적인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비록 결론에 있어서는 과감한 단정을 피하고는 있지만.&lt;/P&gt;
&lt;P class=bt11&gt;&lt;img src=&quot;http://cfile3.uf.tistory.com/image/1339E0154A370E1372B047&quot; alt=&quot;1339E0154A370E1372B047&quot; title=&quot;1339E0154A370E1372B047&quot; width=&quot;1024&quot; height=&quot;558&quot; style=&quot;&quot; /&gt;&lt;BR&gt;&lt;BR&gt;&lt;BR&gt;&amp;lt;무용&amp;gt;(2007)과 &amp;lt;24시티&amp;gt;(2008)에서 시선의 힘은 다시 한 번 압도적으로 발휘된다. &amp;lt;무용&amp;gt;에서 닫힌 (공장내부)공간을 보여주는 롱 테이크는 시선의 방식보다는 시선 안에 선택된 인물들의 모습이 중요하게 처리된다. 의류공업공장 내부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모습은 이 영화가 주제로 삼은 ‘옷’과 관련하여 동시에 등장한다. 떠도는 유령과 같은 시선으로 공장 내부와 노동자들을 비추더니 잠시 후 식당으로 이동하여 식사하는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보건소에서 진료받는 사람들의 모습, 보건소 침대에서 피로를 푸는 사람의 모습등을 담아낸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말 그대로 다큐멘터리적 속성을 노출한다는 것이다. 인물들은 무심하게 움직이는 카메라를 의식하고 때때로 쳐다본다. 카메라는 이에 대해 관조한다. 그러나 디자이너 마케의 스토리로 진입하고 나서는 이러한 의식이 사라진다. 마케는 자신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다는 것을 직시하고 있다. 인터뷰어와 말끔하게 인터뷰하고, 자신의 입장을 또박또박 드러낸다. 그리고 영화는 파리에서 그녀의 의상전시까지 꼼꼼히 기록한다. 그러고는 마케가 차를 몰고 편양으로 진입하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그녀는 자신이 디자인하는 의상에 대한 소신을 위해, 도시화되지 않은 시골의 모습을 통해 잃어버린 기억같은 것을 되새기러 편양으로 간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영화는 그런 그녀의 차를 뒤로 하고 그곳의 허름한 인물을 따라 편양에서의 옷 수선집의 나른한 모습들을 화면에 담아내기 시작한다.&lt;/P&gt;
&lt;P class=bt11&gt;&amp;lt;무용&amp;gt;에서 쓸모없는 것에 관한 시선은, 특히 디자이너 마케에 대한 기록의 시선은 앞과 뒤(화남의류공장과 편양의 옷수선집)의 시선과 완벽히 다른 종류의 시선으로 연출되어 있다. 의류공장과 옷 수선집에서 ‘옷’은 상징이 아니다. 생계의 일부분일 뿐. 그런데 마케에게 있어 옷은 디자이너로서 진지한 태도로 자신의 생각을 집어넣어야 하는 존재적 의미를 담아내고 있다. 그런데 그녀의 전시 제목은 무용(無用)이다. 그녀의 전시가 지아 장커의 같은 제목의 영화와 어떻게 같고 다른지는 편양에서의 옷 수선집에서 인물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비로소 알 수 있다. 편양에서 수선집은 생계형으로도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수준으로 전락한 상태다. 남성 노동자들은 새까만 탄광가루를 뒤집어 쓸 수밖에 없다. 잃어버린 기억을 찾는다는 디자이너 마케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이 우리는 편양의 사람들의 일상을 관조할 수 있다.&lt;/P&gt;
&lt;P class=bt11&gt;그러면 &amp;lt;24시티&amp;gt;에서 관조적 시선은 어떤 방식으로 자리하고 있을까? 이 영화의 시작은 &amp;lt;무용&amp;gt;과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역시 역사속의 공장으로 기억될 청두의 군수공장을 조감하며, 공장 정문에 운집한 노동자들의 모습은 사회주의 중국의 면면이 아직 남아있음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닫힌 공장 내부를 보여주는 카메라 시선은 훨씬 여유있는 패닝을 포함한 롱테이크이다. 그러나 다시 공장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인물 하나 하나를 카메라 앞에 고정시킬 때,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고, 인물들의 개인사에 침잠하게 된다. 어느새 우리는 실제 인물과 허구 인물을 섞어 접하게 되고, 진실과 허구를 중첩시켜 공장 노동자들의 소사(小事)를 공장과 청두라는 도시와 결부시켜 이해하게 된다. 마지막, 자오 타오가 (연기하는) 눈물어린 다짐은 비록 허구이고 연출된 내용들이지만 진실에 입각하여 영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들을 수밖에 없는’ 차원이 된다. 더불어 그녀를 통해 좀 더 변화하는 청두에 대해 혹은 이 시선을 갖고 있는 영화 &amp;lt;24시티&amp;gt;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지아 장커의 시선은 농밀한 롱테이크의 단선적인 의미에서 좀 더 복잡한 구조의 시선으로 변화했다.&lt;/P&gt;
&lt;P class=st11&gt;2. 변화하는 현대 중국&lt;/P&gt;
&lt;P class=bt11&gt;&amp;lt;24시티&amp;gt;에서 영화 마지막을 장식하는 하나의 문장은 마치 영화의 주제어처럼 느껴진다. “너는 사라졌지만, 너로 인해 나의 삶은 찬란해졌다” 지아 장커는 이 문장으로, 자신이 지금까지 꾸준히 말해왔던 변화되어가는 중국의 모습, 혹은 사라지는 모든 것들에게 찬사를 보낸다. 끊임없이 무너지고 재건되는 공간은, 비움으로 남지 않고 채움으로 성장해간다. 우리가 &amp;lt;소무&amp;gt;와 &amp;lt;플랫폼&amp;gt; &amp;lt;임소요&amp;gt;에서 무수히 보았던 반쯤 무너져 내린 벽돌더미는 &amp;lt;세계&amp;gt;의 미니멀한 메트로폴리스를 향한 준비 단계로 상징된다. 그렇다고 그의 시선이 메트로폴리스 자체로 향하는 것은 아니다. 지아 장커의 시선은 다시 &amp;lt;스틸 라이프&amp;gt;에서 산샤의 개발지역 공간으로 이동한다. 무너져 내리다 못해 물에 잠겨버리는 공간은 개인에게 변화를 종용한다. 혹은 그것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한다. 지아 장커가 항상 카메라를 들고 배회했던 화두는 현대 중국이 직면하고 있는 변화의 이면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매번 ‘개인사’에서 시작되며, 개인사의 조립으로 거대 서사를 암시하고 간파한다.&lt;/P&gt;
&lt;P class=bt11&gt;지아 장커의 영화들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은 “현대화의 중국, 혹은 도시화된 중국”에 대해서 라기 보다는 “현대화되기 직전의 중국, 도시화되기 직전의 중국”에 대해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어떤 영화에서든 자신의 의견을 드러낸 적은 없다. 그러나 도시화를 위시한 중국의 현재에는 분명 관심이 있다. 그가 매번 다루는 주제의 핵심은 변화하는 장소(지역)에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청춘들과, 변화를 맞이해야 할 수밖에 없는 인물들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종종 의미심장한 감독의 태도는 드러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amp;lt;임소요&amp;gt;에서 남자 주인공 두 명은 개인적 문제로 인해 다툼을 벌이다가 많은 사람들이 텔레비전 앞에서 모여 2008년 올림픽 개최지가 어디가 될지 시청하는 장면에서 사람들과 섞인다. 개최지는 중국 베이징으로 발표되고, 많은 사람들은 환호하며 개최지가 자국임을 기뻐하는데 이때 두 남자 주인공은 무표정한 얼굴(전혀 기쁘지 않다는 듯)로 텔레비전을 응시한다. 이때 카메라는 그들을 그대로 둔 채, 폭죽을 터뜨리고 기뻐하는 사람들에게 패닝한다. 두 주인공에게는 올림픽 개최지가 자국인 소식이 어떤 동요도 불러일으키지 않을, 무관심한 소식일 뿐이다. 그런데 영화는 이에 대해 기뻐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비춤으로써 숏을 마무리 한다. 두 청춘에게 국가적 행사를 개인의 기쁨으로 치환할 만큼 ‘변화하는 중국, 발전하는 중국’은 개인의 문제와는 이질적인 것이다.&lt;/P&gt;
&lt;P class=bt11&gt;&lt;img src=&quot;http://cfile22.uf.tistory.com/image/1559B4154A370E9F2C9D0D&quot; alt=&quot;1559B4154A370E9F2C9D0D&quot; title=&quot;1559B4154A370E9F2C9D0D&quot; style=&quot;&quot; /&gt;&lt;BR&gt;&lt;BR&gt;&lt;BR&gt;&lt;BR&gt;&amp;lt;세계&amp;gt;에서 도시는 청춘들이 희망을 품을 수 있을 만큼 그들에게 적합한 도시일까. ‘변화된, 도시화된 중국’ 역시 그들에게 희망을 담보하지 못한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자살을 시도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들이 자살에 실패한다고 해서 미래가, 결심이 담보될 수 있는 것일까. &amp;lt;세계&amp;gt;에서 보여지는 결말의 여운이 마치 청춘의 희망적 태도라고 섣불리 단정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몸담고 있는 대도시의 기운이 가상 도시 이상의 의미를 내재하고 있는지 물었을 때 돌아오는 대답이다. 주인공 따오의 외로운 걸음걸이를 뒤로 하고 펼쳐지는 애니메이션의 등장 장면을 상기해 보라. 휴대폰 문자 메시지의 가상 공간 속으로 유영하는 듯, 회색빛 현실이 유채색 컬러로 뒤바뀌는 순간 그것을 청춘의 희망이라고 직시할 수 있을까. 물론 그리 부정적으로만 볼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장면이 자꾸 채색된 실체임을 부인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또 있다. 그 장면이 판타지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따오와 따이셩이 공존하고 있는 공간이 이미 ‘세계 공원’ 내부이기 때문이다. 가상현실이 작동되는 그 공간은 어떤 ‘현실적(realistic)임’과도 어울리지 않을, 그러나 ‘현실적임’으로 드리워져 있는 대도시 속 모방의 공간이다. 지아 장커에게 그러한 현실은 청춘/인물이 종속되어 있는 공간이며 그것이 중국의 현재성을 보여주는 임의의 공간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amp;lt;스틸 라이프&amp;gt;의 결말 장면은 하늘과 건물이미지가 하나의 공간적 의미로 판타지화되어 드러나기도 한다.&lt;/P&gt;
&lt;P class=bt11&gt;지아 장커가 항상 고민하는 화두는,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그러나 이미 변화된 공간과 인물에 대해 아직 집중하지는 않았다. 그는 변화될, 그것을 목전에 두고 있는 공간과 인물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그런데, 사실 중국은 현재, 급속도로 변화를 받아들이고 있고, 진행중이며, 세계의 관심사다. 지아 장커는 세계의 관심사인 중국 - 가장 대표적인 시대적 흐름을 꿰고 있는 -에 결코 시선을 두지 않는다. 중국의 현대를 꿰뚫는 시선에는 그와 같은 이면이 있다는 것을 반드시 상기해야 할 것이다.&lt;/P&gt;
&lt;P class=st11&gt;3. 변화를 전제하는 ‘사라짐’에 대하여&lt;/P&gt;
&lt;P class=bt11&gt;&amp;lt;스틸 라이프&amp;gt;에서 무너져 내리는 건물들, 일부러 망치로 두드려 가루로 만들어지는 콘크리트 잔해들은 현대화를 향한 일종의 시행착오이지만, 그것은 또다시 파괴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현대화된 도시에서 재건에의 욕망은 가시적 성과와 맞물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지아 장커는 변화되는 것, 그것이 전제하는 ‘없어지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일까? 실로, &amp;lt;스틸 라이프&amp;gt; &amp;lt;무용&amp;gt; &amp;lt;24시티&amp;gt;에서 그것은 중심 화두이다. &amp;lt;스틸 라이프&amp;gt;에서 그것은 역시 어떤 목소리라기보다는 은유적 상징으로 결론 내려졌으므로 조각난 인생을 붙여보려는 개인의 노력으로부터, 사라지고 마는 지역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지는 추측이 가능하다. &amp;lt;24시티&amp;gt;에서 그 추측은 꽤 긴밀한 구성으로 &amp;lt;스틸 라이프&amp;gt;과 궤를 같이 하는 연장선상의 태도로 읽힌다.&lt;/P&gt;
&lt;P class=bt11&gt;&lt;img src=&quot;http://cfile5.uf.tistory.com/image/165023164A370EF330EE08&quot; alt=&quot;165023164A370EF330EE08&quot; title=&quot;165023164A370EF330EE08&quot; width=&quot;600&quot; height=&quot;337&quot; style=&quot;&quot; /&gt;&lt;BR&gt;&lt;BR&gt;&lt;BR&gt;&lt;BR&gt;현대식 건물로의 탈바꿈을 시도하기 직전에 유수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군수공장. 시끄러운 기계음으로 역사를 상기하는 대신 노동자들의 언술을 통해 듣는 공장의 히스토리는 마치 미시사(微視史)적 연구를 하듯 그들의 얼굴에 시선이 맞추어진다. 웃다가도, 울다가도 생계의 역사는 개인에서 가족으로, 노동에 얽힌 공동체로 자리를 옮기며 청두라는 지역에서의 공장이 의미하는 바를 찬찬히 알게 해준다. 사실 8명의 인터뷰가 진행되는 시간은 공장이 문을 닫는데 점점 가까이 하는 시간에 다름 아니다. 이들의 이야기가 결국 공장의 사라짐과 어떻게 연관될 수 있을 것인가? “노동을 하면 천천히 늙는다”라고 말하는 어떤 여성의 말을 염두에 둔다면, 이들의 인터뷰는 시간을 지연시킨다. 개인의 시간은 노동이 아닌 ‘회상’ 때문에 공장을 둘러싼 노동의 기억을 환기하고 향수어리게 만든다. 인물들은 각각 앞으로 사라질 공장을 곁에 두고, 개인사를 나열해 나간다. 이것은 개인에게는 ‘지연된 시간’이며 공장으로서는 불필요한 시간이다. 노동이 수반되지 않기 때문이다. &amp;lt;24시티&amp;gt;가 전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청두에 있는 큰 공장 하나가 없어지는 것 뿐만이 아니다. 공장이 없어지고, 노동이 없어지며, 생계수단이 없어지고 인간관계가 사라지는 것이다. 현대화를 위해 희생되는 것들은 실로 엄청나다. 이에 대해 코멘트하는 인물들에게 태도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사적인 내러티브로 진행되고, 인터뷰시간은 공장자체와 거리가 멀어진다. 인터뷰의 목적은 결국 공장 자체에 대한 소회가 아니었던 셈이다. &amp;lt;24시티&amp;gt;를 맞이하게 될, 공장 노동자들의 개인사와 다짐 그 이상이겠는가.&lt;/P&gt;
&lt;P class=bt11&gt;중국 6세대 감독들의 전반적인 공통점은 중국의 개인과 사회적 변화를 동시에 결부시켜 논한다는 점이다. 지아장커, 로우 예, 왕 샤오슈아이 등과 같은 감독들이 보여주는 일련의 영화들은 5세대 감독들이 과거를 통해 현재를 가늠하려는 노력들과 달리 철저히 현재와 개인의 관계에 시선을 집중한다. 그것은 개인 간의 관계와 사랑, 아이들, 노동과 당연히 관련된다. 6세대 감독들은 결코 5세대 감독들이 선택한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지아 장커가 선택한 태도는 인민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그것은 현실을 바라보는 어떤 극단적 태도가 아니다. &amp;lt;플랫폼&amp;gt; &amp;lt;임소요&amp;gt; &amp;lt;세계&amp;gt; 등에서 볼 수 있듯, 지아 장커가 개인과 현실에 대해 말하는 태도는 항상 유보적이다. 물론 그의 영화에서 중국의 현실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고, 문제를 파악하지 아니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관점이 직설적이거나 비판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는 청춘을 통해 그들 자체를 보여주려 하였고, 중국의 이면을 직시하려 노력했다. 예를 들어 &amp;lt;소무&amp;gt;의 마지막 장면에서 소무가 마지막으로 돌려받은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해 보자. 그 장면은 주인공 소무가 처음으로 체화된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순간이며, 동시에 사람들이 능동적으로 멈추어 서서 한 개인에게 시선을 모으는 장면이다. 감독은 자신이 만들고 싶은 시선을 주인공과 타자의 시선의 교환으로 보여준다. 정체된 개인(쭈그려 앉은 소무)과 집단의 시선이 맞교환되는 순간, 엔딩 크레딧으로 넘어가는 이유는 소무의 우스꽝스러움을 부각하려는 것도,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대한 엉뚱함을 부여하려는 것도 아니다. 개인과 집단이 시선을 교환하는 순간은 분명 위계가 성립되기 마련이다. 소무가 그것을 느꼈을지, 그 집단이 소무라는 개인에 대한 어떤 생각이 오갔을지는 알리 만무하다. 어쨌든 이 행위적 관계는 해프닝에서 필요에 의한 시선교환으로 바뀌었고 그 다음은 예측 불가능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시선을 만들어낸, 또는 이 순간에 영화를 끝내버린 감독의 태도이다. 지아 장커는 결론을 미리 정해두지 않는다. 그는 끊임없이 ‘어떻게’에 대한 영화적 고민이 앞서있는 감독이다. 시선이든, 변화든, 사라짐이든 모든 것은 태도 속에 담겨있다. 그것은 하나의 풍경으로, 응시로 대상화될 뿐이다. &lt;BR&gt;by 김다현(vovovdh)&lt;/P&gt;&lt;/div&gt;</description>
                        <pubDate>Mon, 15 Jun 2009 14:41:34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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