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이상적인 삶을 꿈꾸는 것은 불가능한가. <레볼루셔너리 로드>가 근본적으로 제기하는 문제는 소위 보편적인 ‘가정’으로 보이는 가족의 외피가 아닌 내피에 대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가 상정하는 배경이 1950년대 미국 변두리 중산층 가정일지라도,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핵심을 꼭 그 배경적인 문제 때문이라고 꼬집을 필요는 없다. 어떤 견지에서든 이 영화는 '누구든 생각하지만 취할 수 있느냐, 그럴 수 없느냐의 문제에 도달하기위한 과정'인데, 그것이 ‘뻔히 보이지 않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장르의 틀에서 논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멜로영화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더글라스 서크의 작품과 구분되는 지점은 바로 계급과 관계 차원의 갈등양상이 아닌, 부부관계라는 수평적인 구도에서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멜로영화가 아닌 ‘멜로 드라마’이며, 가족 내피의 본질에 대한 탐구가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연기자-관람자로 상정되는 윌러 부부
프랭크 윌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에이프릴(케이트 윈슬렛)이 결혼으로 이르는 과정은 생략되어 있다. 즉, 도입부 파티에서 그들은 ‘결혼’을 결정지었다고 볼 수 있다. 에이프릴이 무대에서 연기하고 있을 때 프랭크는 그녀의 연기를 지켜보는 관람자로 객석에서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의 불안한 시선을 끝으로 막이 내릴 때, 이미 그 둘은 두 자녀까지 둔 안정된 가정을 이룬 상태이다. 만남과 결혼-자녀의 탄생 등이 이토록 집약되어 있는 도입부는 윌러 부부의 달콤한 신혼생활을 생략하고 새로운 시작 - 결혼 생활의 2막- 으로 달려간다. 영화는 에이프릴이 무대에서 연기하는 장면을 보여줄 때, 막이 내리는 동시에 그녀의 얼굴만을 클로즈업한다. 그리고 에이프릴을 바라보는 이는 프랭크다. 에이프릴의 표정은 영화 결말에서의 표정과 다르지 않다. 결국 영화는 윌러부부의 내피를 에이프릴의 표정으로부터 도출하고 있는 셈이다.
프랭크는 (아버지가 평생 다녔던) 녹스회사의 직원이 된다. 이 역시도 영화상에서는 시작을 생략하고 무료하게 직장을 출퇴근하는 그의 모습을 통해 보여준다. <레볼루셔너리 로드>가 평범한 가정을 보여주는 방식은 응당 필요한 부분을 배제시킴으로써 윌러 부부의 문제를 건드린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집이 서 있는 레볼루셔너리 로드가의 그 평화로움의 외피가 혹시라도 낯설지 않다면 충분히 윌러 부부의 문제가 무엇으로 치달을 지 예상이 가능하다. 먼저 지적했듯이 프랭크와 에이프릴의 문제가 파열될 때, 그들의 관계는 관람자와 연기자의 구도였다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게다가 관람자는 연기자를 아주 냉철히 파악할 수 있는 입장에 있으며 연기자는 자신을 결코 속일 수 없다. 연극 무대는 그런 면에서 첨예한 내면을 밝히고 들킬 수 있는 장소다. 프랭크는 갈수록 에이프릴으로부터 자신의 위치를 확인받고 싶어하고, 에이프릴은 무대에서 내려오고 싶어 한다. 프랭크는 무대에서 내려오려는 에이프릴을 가만두고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에이프릴이 연기하고 있는 무대는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집안 내부다. 그녀가 연극무대를 벗어났다고 할지라도 그녀의 집 역시 무대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현실적(realistic)인 것과 비현실적(unrealistic)인 것의 차이
앞만 보고 달려가는 프랭크의 (직장)생활과 달리, 에이프릴은 프랭크와 처음 만났을 당시를 떠올리며 파리로 떠나자는 제안을 한다. 여기서 에이프릴은 현실→이상(≒비현실적)이라는 삶의 변화를 꿈꾸고, 프랭크 역시 조심스럽지만 동의하게 된다. 마음가짐만으로도 충분히 무료하고 지루했던 가정생활을 변화시킬 수 있게 된 두 사람은 그 이상(理想)만으로주위의 비관적인 시선을 감수하며 미소 짓는다. 그러나 현실적인(realristic) 삶의 일부를 꿈꾸었던 그들의 이상은 그것이 문자 그대로 비현실적(unrealistic)한 삶을 꿈꾸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갈등으로 치닫는다. 에이프릴의 임신이 혹은 프랭크의 승진기회가 이상으로의 발목을 잡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생각이 에이프릴이 그토록 꿈꾸는 이상으로 하여금 완벽하게 비현실적인 생각일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현실적인 것과 비현실적인 것은 이들의 삶에서 현실적인 삶의 과정으로 읽혔는데, 일순간 프랭크는 이상적인 삶으로의 도피는 결국 비현실적인 삶일 수밖에 없다고 단정짓는다. 에이프릴에게 있어서 아이는 더 이상 자신의 이상실현을 막는 장애물이 되면 안 된다. 에이프릴은 프랭크 말대로 정상적인 어머니가 될 수 없는 것일까. 프랭크와 에이프릴이라는 합(合)이 결코 연극무대에서 동질적인 합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두 부부가 이질적으로 변해가는 지점은 바로, 이상실현에 대한 현실적인 태도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프랭크는 에이프릴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한다. 에이프릴은 점점 프랭크와의 사랑을 파리로의 이주로 견고하게 다듬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프랭크의 외도가 그녀에게 아무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상이란 프랭크에게 있어서 가정을 책임지는 아버지로서의, 남편으로서의 의무를 생각할 때 비관적인 꿈에 지나지 않는다. 에이프릴은 아이를 지워서라도 이상에 도달하려 하고, 그 시도가 프랭크와 결코 합의를 이룰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할 때 비극이 될 수밖에 없다.
비극이 될 수밖에 없는 이상 실험
이상과 비극은 같은 수직선에 놓인다. 누구나 꿈꾸는 현실적 삶에 가로 놓인 이상, 이상이 현실적 삶에 편입되면 그것은 비극과 궤를 같이 한다. 현실적인 삶이라는 것은 속되게 말하자면 ‘안정’이다. 현대사회가 곧 자본주의와 뗄 수 없는 생계위주형 사회가 되는 가운데, 에이프릴같은 인간의 이상은 비현실을 넘어 꿈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단단한 현실적 삶의 무게는 그녀의 이상을 비현실로 만들고, 꿈으로 만든다. 게다가 여성이 가져야 할 모성으로서의 의무는 더욱 더 안정적 삶으로 발목을 잡는다.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윌러 부부의 아이들이 그 ‘이상’에서 끼어들 틈은 별로 없다. 기빙스 가족을 초대할 때도, 캠밸 부부와의 만남에서도 윌러 부부의 아이들은 누군가에게 맡겨진다. 지극히 ‘성인’들의, 기혼 부부들의 이야기에서 아이들은 논외다. 아이들은 부부 생활을 완성으로 이끄는 가정의 일부이다. 그런데 에이프릴 개인의 이상을 위한 마지막 실험은 그녀의 낙태 여부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것은 더 이상 현실적인 삶에서도 존재할 수 없는 이상(unreal)으로 수렴된다. 부부관계라는 안정적인 관계에서 파열되는 갈등은 관점의 차이에서 그치지 않는, ‘생계’로 초점이 옮겨간다.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비극은 결국 모성애의 임무를 실현하느냐 포기하느냐를 선택하는 것으로 결정지어진다.
이 영화가 ‘시대 구분 없이 공감 얻는 이유’(변성찬/씨네21)는 안정된 삶(으로 보이는 외피)에서 누구나 떠안고 있을 수 있는 근본적 문제를 건드리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삶을 지향하면 할수록 어떤 방식으로든 비극은 그 내부에 깊숙이 숨어든다. 비극은 선택의 문제다. 영화는 선택에 대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에이프릴은 선택의 기로에 서지만, 결론적으로 선택은 그녀의 표정에 담겨있다.
원작에서의 수많은 디테일들은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로 각색되면서 한결 간결하고 명확한 문제의식으로 드러난다. 끝내 윌러 부부의 행복이 깨어진 후, 헬렌 기빙스의 남편이 헬렌의 주절거림을 더 이상 받아줄 수 없다고 느낄 때, 그의 보청기 전원은 꺼진다. 헬렌의 주절거림은 그의 아들 존 기빙스의 견해와 판이하게 다르다. 존 기빙스가 정신이상으로 설정된 이유는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다(에이프릴은 자신들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존이라고 말했다). 결국 헬렌의 남편이 보청기전원을 끄는 행위, 그것이 이 영화가 말하는 바다. 비극으로 남은 윌러부부, 영화는 그 실험이 결코 녹록한 행위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vovovdh)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