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태양은 매일 떠오르고, 매우 따뜻하다. 누가 뭐라고 해도 매일같이 우리를 덥혀줄 그 따뜻함 때문에 우리는 태양에 희망이라는 이름을 붙이고는 한다. 이만희 감독은 그러한 태양을 닮은 소녀라면서 한 명랑 아가씨를 불쑥 소개한다. 한편 영화에는 태양 닮은 소녀를 보며 지나간 청춘을 그리는 동수가 있다. 반드시 실패하고 말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를 찾으려는 노력일 것이다. 우리의 과거에 대한 그리움의 단어인 청춘은 태양이 지속되는 것과는 달리 다시 찾을 수 없는 시간이다. 얄궂게도 태양이 매일 뜨고 지는 한 시간은 흐르고 청춘도 흘러가버릴 것이다. 청춘을 돌이킬 수 없다는 그 절대적인 좌절은 희망이라는 이름을 한 태양의 거스를 수 없는 법칙이기도 한 것이다. <태양 닮은 소녀>는 이렇듯 언제나 찾아올 미래인 태양과 어떻게 해도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인 청춘에 대한 꿈을 동시에 그려내고 있다.
영화는 30대 중반의 동수가 맞이한 절망에서 시작하고 있다. 그는 사랑보다는 돈과 권력을 좇아 떠나간 아내에게 돌아오라고 말하지만 거절당한다. 그리고 그녀와 현재 함께하고 있는 남자는 동수에게 돈을 주면서 아내와 결별할 것을 요구한다. 다툼 끝에 돈과 권력의 남자는 과거의 남자 동수에게 총을 겨누고, 아내는 동수에게 겨눠진 총을 막으려다 자신이 총에 맞아 숨을 거둔다. 동수는 그 총으로 아내의 남자를 죽인다. 아내가 뒤늦게 지키려던 사랑은 죽음으로 끝나며, 돈과 권력을 쥐었던 남자도 죽고, 동수는 극도로 절망적인 시간을 보낸다. 이 모든 현실은 죽음의 시간이 된 것이다.
그렇게 절망하며 도망쳐 나와 헤매는 동수에게 태양을 닮은 소녀가 나타난다. 인영은 이상하리만치 명랑하다. 그녀는 가진 것 없는 청춘이지만 거침없다. 동수는 깔깔거리며 서울 도심을 헤집고 다니는 이 명랑아가씨를 사랑스럽고 동경어리며 소중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그는 소녀의 꿈인 바다로의 바캉스를 가능케 할 48000원을 필사적으로 구해주려 하지만, 소녀의 가벼운 발걸음을 미처 따라잡지 못한 채 형사가 쏜 총에 맞아 쓰러진다. 인영은 태양이 뜨는 것처럼 매일 희망찼고 태양의 온기처럼 정이 많았으나, 동수는 이 태양 닮은 소녀의 꿈을 보호해주지 못해 안타까워하면서 죽음을 맞이한다.
<태양 닮은 소녀>를 보는 순간 생각나는 건 이 감독의 67년 작인 <휴일>이다. <휴일>과 <태양 닮은 소녀>는 휴일과 바캉스라는 젊은이들의 비일상적인 시간을 다루고 있는데 그것을 바라보는 톤이 매우 상반되기 때문에 무언가 의아한 느낌을 갖게 된다. <휴일>에서 절망적으로 휘적거리던 신성일은 <태양 닮은 소녀>에서 30대 중반의 아저씨 동수가 되어 22살의 명랑소녀의 명랑한 발걸음을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다.
인영은 <휴일>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진 것 하나 없이 도시를 휘적거리는 젊은이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것도 상관하지 않는 해맑은 태도로 일관한다. 그녀라면 그 어떤 절망도 날려버릴 수 있을 것만 같다. 이런 명랑한 기운은 우리가 종종 찾는 돌파구인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상당히 설득력 있기도 하다. 책상머리에 앉아서 심각하게 굴거나 땅이 꺼져라 한숨만 쉬며 현실에 압도되기를 거부하고, 현실을 압도하며 기운차게 살아내려고 하는 태도 말이다. 이런 명랑함은 현실을 극복할 많은 수단들이 다 없어졌을 때 그 가장 밑바닥에서 살아보겠다고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명랑함에는 그럴듯한 현실분석이나 대안을 갖추지 못하고도 더 나은 삶의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에너지가 있는 것이다.
돈과 권력과 배신과 죽음의 상관관계를 깨우쳐 버린 동수는 앞뒤 가리지 않고 덤비는 인영이 가진 이런 순진함에 매료된다. 동수에게는 있지만 인영에게는 없는 것이라면 때 묻은(?) 관계일 것이다. 반대로 동수에게는 없지만 인영에게는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믿음일지도 모르겠다. 인영은 동수를 위해 생일파티를 준비하는데, 길에서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을 꼬드겨 동수의 아파트로 불러 모은다.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들이 스스럼없이 모여서 좋은 마음을 나누고 즐기는 것에 감사하고 눈물을 훔치기도 한다. 이미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의심하는데 익숙한 우리 사회 안에서 인영은 아랑곳없이 순진한 믿음을 보여주고 전파한다. 인영이 가지는 순진함은 우리가 믿고 싶은 해맑은 관계이며, 이 모습은 동수와 대비되고 동수에 의해 갈망된다.

그런데 동수가 그렇게 인영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으로 인해 명랑함은 청춘이 되고 추억이 된다. <휴일>의 젊음은 현재진행형이었지만, <태양 닮은 소녀>에서 보는 젊음은 과거인 것이다. 젊음이 어른에 의해 청춘으로 추억될 경우 그것은 과거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이 된다. 청춘은 종종 매우 크게 포장되고는 하는데, 알고 싶지 않았으나 알게 되어 버린 삶의 모습에 지쳐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던 때를 간절하게 그리워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과거를 향한 칭송은 현실의 무게와 젊음의 에너지를 만나게 할 힘이 없기 때문에, 현실의 암흑과 청춘의 반짝임은 서로 만나지 못한다. 이 영화도 젊음의 에너지를 동경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을 출구로 삼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젊음을 동경하는 것이 아니라 청춘을 동경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의 찬란함은 단지 추억 속에서만 살아있을 뿐이다.
영화 속에 동수가 있기 때문에 영화는 인영이 메울 수 없는 비극을 노출한다. 동수는 인영에게 바캉스 비용을 마련해 주려고 하지만 이는 결국 실패하고 만다. 인영은 그 사실도 모르고 명랑하게 거리를 걷고 있지만 그녀는 바캉스에 갈 돈이 없다. 사랑스런 청춘을 지켜주려는 시도는 결국 실패하고, 인영의 꿈은 위태롭다. 결국 인영의 청춘은 동수의 안타까운 시선과 함께 겹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영화에서 청춘을 바라보는 시선은 비극적이고 안타깝게 마무리되고 만다. 그리고 이는 청춘 속에서 답을 찾으려는 시도라면 당연히 닿을 결말일 것이다. 왜냐하면 청춘이란 과거의 시간이고 결코 현재로서 포착되지 않기 때문이다. 돈과 권력과 배신과 죽음을 알아버린 동수에게 인영이라는 해맑은 청춘은 자신의 비극적 현재를 확인하는 회한의 시간인 것이다.
<태양 닮은 소녀>는 청춘을 사랑한다. 이젠 닿을 수 없기에 청춘은 더욱 빛날 것이다. 그 빛나는 청춘은 자주 추억의 대상이 되지만, 그러나 그것은 과거이다. 청춘이란 이미 젊음을 잃은 사람의 시선으로 포착하는 젊음의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춘의 시간을 채우고 있는 젊은이는 늘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현재하는 젊음은 늘 반짝임과 암흑 사이를 직접 겪으면서 울고 웃고 하고 있을 것이다. 가끔은 바캉스 가는 꿈에 부풀고 가끔은 좌절감에 치를 떨고, 다시 건강한 몸을 움직여 바캉스 비용을 벌어대면서 말이다.
그러나 또 가끔 우리의 삶은 또다시 반짝이고 명랑해지기엔 너무 외롭고 힘든 것 같다. 그럴 때 우리는 과거의 시간인 청춘 속에서 태양을 추억하고는 하는 것이 아닐까. 미래가 가끔 너무 뿌옇고 어두워 또다시 뜰 엄두가 안 나서 말이다. 영화 제작시기가 한국사회의 최대 암흑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유신체제 70년대라는 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출구를 찾기 힘은 칠흑 속에서 발견한 명랑함은 삶에 대한 갈망을 읽게 해주며, 동시에 그것이 동수의 안타까운 시선에 머무는 점은 절망감의 크기를 읽게 하기도 한다. 이만희 감독의 연출 속에서 한국의 70년대가 숨쉬는 공기를 느껴볼 수 있다는 점은 우리에게 소중한 경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이 영화는 75년 타계한 감독이 거의 마지막으로 작업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감독의 마음을 자꾸 추측케 만든다. 앞서가는 인영의 명랑한 뒷모습을 보면서 못 따라가는 것이 안타깝고 돈을 주지 못해 걱정되는 눈빛의 동수 표정은 감독 자신의 것이 아니었을까... (by gipsymo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