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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미숙은 어디로 가버리나? <미쓰 홍당무>

- 우주에서 날아오지 않은 놀랍지 않은 코미디

갈수록 한국영화의 여성캐릭터는 “‘여성성’을 전면에 두고 어떻게 하면 저것에서 달아날 수 있을까?”를 연구하는 듯하다. 멜로영화에서 드러났던 청순가련 이미지를 가진 여성캐릭터에게서는 감흥도, 위안도 받지 못해서인지, 유독  이전에 없는 새로운 캐릭터를 요구하고 있다. <미쓰 홍당무>를 두고 ‘전대미문의 캐릭터영화’라든지, ‘놀라운 데뷔작!’ ‘우주에서 날아온~’이라는 수식어로 영화바깥을 감싸는 이유는 그만큼 한국영화의 캐릭터의 다양성문제가 시급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냉정하게 말해서, <미쓰 홍당무>는 괴작은 아니다. 놀랍지도 않고, 새롭지도 않으며 신선한 캐릭터영화도 아니다. 단지 새롭고 신선한 코미디영화로 느껴질 뿐이다. 영화는 관객을 웃음으로 이끌며, 관객은 왕따 캐릭터 양미숙을 들여다보고 웃을 뿐이다.

‘홍조증’은 캐릭터의 겉치레에 불과한가?

이 영화를 소개할 때, 주인공 양미숙을 설명하는 수식어구로 “안면 홍조증을 앓고 있는~”이란 말은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다. 안면 홍조증이 어떤 병(?)인지부터 시작해, 양미숙을 설명하는 주된 요소로 설정된 이 피부병은 증상만으로도 양미숙이라는 여자가 어떤 이미지의 여자인지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안면 홍조증을 앓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금만 당황하면 빨개지는 얼굴색 때문에 대부분 굉장히 소극적인 성격이거나, 내성적이다. 그것은 주위의 시선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마음상태가 얼굴색으로 민감하게 두드러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홍조증을 ‘고치기’ 위해서 찾아간 피부과 의사에게, 미숙은 자신이 고등학교때부터 짝사랑했던 서선생 이야기부터 시작해, 이유리(황우슬혜), 서종희(서우)와의 복수와 결탁을 구구절절 설명한다.(결코 소극적이지도, 내성적이지도 않다) 이 상담 장면에서 역시 양미숙은 누구도 동감할 수 없는 착각들을 털어놓는다. 그녀가 ‘생각을 해봤다는’ 이야기들은 자기합리화이상이 아닌, 사회적 약자이기에 겪는 고통도 아닌 정말 개인적 착각 그 자체다. 안타까운 점은 양미숙을 받아들이는 피부과 의사의 태도다. 이 영화가 양미숙으로 하여금 동감을 이끌어내려는 의도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피부과 의사가 양미숙을 바라보며 짓는 웃음의 의미를 양미숙이 모르면 안 된다. 그만큼 양미숙은 피부과의사를 통해 조언을 구하기보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낼 수 있는 유일한 상대로 그를 대한다. 그러나 오히려 양미숙이 피부과 의사에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라고는 "홍조증은 고칠 수 없다, 약도 없다"는 말뿐이다. 이 말을 들을 때 그녀는 허망한 표정을 짓는다. 게다가 양미숙이 홍조증과 관련한 증상을 피부과 의사와 상담하는 장면은 이 영화에 존재하지 않는다. 고칠 수 없다는 답변만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즉, 홍조증을 빙자하여 양미숙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는 장을 만들기 위한 방편으로 피부과의사와 대면한 셈이다. 양미숙에게 안면홍조증보다도 더 고민되는 것은 바로 서선생과의 관계를 진척시키는 일이다. 결국 양미숙이라는 캐릭터를 설명해주는 ‘안면 홍조증’은 단순히 그녀의 이미지만 만들어주는 ‘증상’일 뿐이다. 양미숙은 방법이 없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나서, 그런 자기 자신을 질책하거나 결코 고민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열심히 이유리선생에 대한 증오를 증폭시킨다. 그렇게  '안면 홍조증'은 양미숙이 피부과의사를 만나기 위한 수단 정도로만 기능한다. 영화 내내 그녀는 홍조증으로 고민하지 않는다.

얻은 것도, 잃은 것도 없는 양미숙

양미숙은 바쁜 스케줄을 소화해 내고서라도, 이유리와 서선생을 떼어놓으려고 한다. 그렇다고 자신이 이유리 옆자리를 대신할 수 있을 지 확신하지 않은 채 말이다. 이는 서선생의 딸 서종희의 심정과 무관하지 않다. 서종희는 이유리선생이 자신의 아빠와 만났기 때문에 부모님이 이혼하게 생겼다. 이런 상황에서 양미숙이 서종희와 맺는 동맹은 여러모로 누이좋고 매부좋은 계획이다. 문제는, 이 동맹관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결과가 무엇일까 하는 점이다.

어학실 씬에서 성은교(방은진)는 양미숙에게 “이제 어쩔 셈이야?”라고 묻는다. 그런데 양미숙은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 “그동안 너무 바쁘게 살다보니 미처 거기까지 생각지 못했다”는 양미숙의 대답은 허탈하기 까지 하다. 그런데 그 지점에서 역시 폭소는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 관객은 끊임없이 양미숙의 엉뚱함과 답답함에 웃음을 보낸다. 그 이유는 양미숙이라는 캐릭터를 십분 이해하여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서가 아니라, 정말 나와는 다른 인간이어서 웃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웃을 수는 있지만 웃음의 의미를 찾다보면 씁쓸해진다. 쓴 웃음은 뒤로 하고라도, 양미숙은 우리에게 ‘열심히 살아야 했던 증거’를 보여주어야 했다. 결국 양미숙이 서종희와 손을 붙잡고 찾아간 ‘이’는 누구인가? 자신 몰래 이사한 피부과 의사 박찬욱이다. 도대체 양미숙은 왜! 피부과의사를 다시 찾아간 것일까. 왜 이 영화의 결말은 그를 쳐다보며 웃는 양미숙의 얼굴일 수밖에 없는가.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20대 후반 여성들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 보다도 팍팍한 인생을 살고 있다. 결혼에의 압박, (고학력자들의)취직에의 압박, 외모에의 압박, 경제력에의 압박 등등. 그나마 양미숙은 어엿한 (선생이라는 최고의 직업) 평생 보장 직장이 있다. 물론 (양미숙의 논리에서) 이유리 때문에 중학교 영어교사로 강등당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세상이 공평할 거란 기대를 버리고 남들보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그녀의 신조대로, 그녀는 더 열심히 살면 된다. 그러나 그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말의 의미는, 경제적, 목표지향적인 ‘열심’의 그 ‘열심’이 아닌 듯 하다. 양미숙이 고등학교 러시아어교사가 될 수 있었던 배경은 이 영화에서는 삭제되어 있다. 그렇다면 추측컨대, 그 전까지 그녀는 경제적, 목표지향적인 의미에서 열심히 살아왔던 것일까? 그러나 그녀가 씩씩거리며 땅을 파고 있는 초반 장면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녀가 열심히 살아왔던 이유는 ‘서종철선생’에 대한 짝사랑때문은 아니었을까?

이경미 감독의 인터뷰를 참고하자면, 이 양미숙캐릭터는 전적으로 감독의 ‘상상만으로 만들어진 캐릭터’라고 한다. 그렇다면 양미숙캐릭터는 탄생 가능하다. 다행일지도 모른다. 상상만으로 만들어진 캐릭터니까 말이다. 양미숙은 상상 속의 인물이기에 결과적으로 다시 피부과의사를 찾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결말을, 아무리 우주에서 날아온 캐릭터(라고 할만큼 획기적인)라 할 수 있을지라도 이해할 수 있는 근거는 찾을 수 없다. 이야기 상대는 분명히 찾았고(서종희) 양미숙이 그나마 어학실에서 이제까지의 자기 자신을 깨달을 수 있었던 순간일 수 있었다면, 서종희를 통해서라도 스스로가 무얼 하려고 했던가는 생각해볼 수 있었다. 결국 양미숙은 서선생을 얻지도 못했고(오히려 그의 딸을 얻었고), 그의 가족으로부터 위로도 받지 못한채, 궁극적으로 자신이 언제부터 어떻게 그 지경이 됐는지도 알지 못한다.

양미숙은 자신의 처지를 “나도 알어, 내가 별로라는거. 그냥 나니까, 나니까 싫어하는거잖아” 라고 설명한다. 본인 스스로를 떳떳하게 내세운 채, 어떤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그냥 나’라고 일축한다. 그리고 당당하게 ‘착각’을 사실로 규정한다. 그런데 그녀는 그것을 끝까지 온전하게 깨닫지 못한다. 아무도, 그것을 올바르게 설명하지 않는다. <미쓰 홍당무>가 아쉬운 점은 그 구체성이 축약되어 있다는 것이다. 홍당무는 왜 홍당무인지 설명하지 않으며, 그녀가 가는 방향을 가도록 내버려 둔다. 그런데, 어차피 현실적인 방향과는 거리가 있다. 양미숙은 그렇게 깨닫지 못한 채 그대로, 무수한 피부과의사의 표정을 받아들이며 끝까지 착각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비정상성을 여성캐릭터 안으로 끌어들이는 순간

한국영화의 여성캐릭터는 수난에, 고전을 거듭하고 있다. 그 가운데 남성성을 극도로 표출시키는 장르영화들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멜로영화의 잇단 실패는 제작의 위축으로 여성캐릭터의 부재를 잇도록 만들었고, 천편일률적인 멜로영화 속 여성캐릭터들은 이제 관객으로부터도 공감을 이끌어 내지 못한다. 그러한 기운 속에서 조폭영화에서 바통을 이어받은 남성성의 기운은 다행히도 여성캐릭터 대신 위안받는 존재가 된다. 이러한 불균형은, 어쩌면 <미쓰 홍당무>와 같은 영화를 더욱 기다리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정상에서 벗어난 캐릭터를 통해 공감을 유도하는 방식은 철저히 ‘웃음’과 매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웃을수록 캐릭터는 살아나는 것처럼 보이고, 스토리는 캐릭터에 묻히게 된다. 결국 영화는 ‘재미’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미쓰 홍당무>를 코미디 영화로 규정한다면,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은 단연 양미숙캐릭터일 것이다. 역시 양미숙은 정상은 아니다. 한국영화에서 양미숙과 같은 캐릭터가 출현한 것이 처음일 뿐이지, 양미숙이 결코 새로운 기록을 남길 정도의 ‘전대미문’은 아니다. 어떤 관점에서 보든 차이는 있겠지만 명백히 말할 때, 양미숙은 캐릭터가 온전하지 않은 편이다. 설명되지 않거나 모순된 부분이 많다. 그냥 이미지상으로, 에너지 철철 넘치는 인물로 그려낸 적극적인 인물이라고만 강조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류의 캐릭터가 만들어낸 모순은 모두, ‘코미디’라는 속성 속으로 일갈되어 버리면 거기서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캐릭터’영화라고 규정하게 되면, 응당 짚어야 되지만 그러지 않아도 될 부분들이 무마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섣불리 캐릭터영화로 규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엽기적인 그녀>(2001)에서부터 시작된 여성캐릭터의 진화는, 억세고 웃긴 할머니들 <마파도>(2005)에 이르기까지, 과히 ‘엽기’라는 수식어를 달아놓고 웃게 만든다. 관객들은 ‘엽기성’을 받아들이기 꺼려하면서도, 시종일관 웃음을 유발한다면 오케이다. <달콤살벌한 연인>(2006)에서 괴상망측한 청순가련 여성캐릭터가 칼을 들 때, 땅을 팔 때, 관객은 그 기이한 양면성에 호감을 갖는다. <미녀는 괴로워>(2006)에서 여주인공 한나가 뚱녀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많은 웃음을 선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들 영화에서 드러난 여성캐릭터들은 하나같이 코믹함을 안고 있는 정상적이지만은 않은 캐릭터들이다. 이런 캐릭터들이 사랑받을 수 있었던 데에는 분명 각각의 캐릭터들이 가진 비범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단 미모의 여성들이기 때문이다. 청순한 미모의 여성들이 펼치는 엽기적인, 비범한 모습들은 단순한 웃음 이상의 비주얼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놓치면 안 된다.

그런 점에서 <미쓰 홍당무>의 양미숙은 결코 예쁘지 않다. 그런데 그녀는 스스로를 가꾸지도 않는다. 자신 스스로 ‘별로’라고 인정하는 가운데, 보다 예쁜 이유리가 경쟁상대임에도 불구하고 거울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홍당무 양미숙에게 외모는, 털어놓아야 할 수다보다 중요한 것이 못된다. 그녀는 단 한번도 서선생앞에서 여성성의 자태를 뽐내려들지 않는다. 그런데 이 점을 양미숙 캐릭터의 신선함으로 꼽을 수는 있을까. 자신을 가꾸지 않으면서도 사랑받으려는 제스처. 양미숙은 그 이상 못해서가 아니라, 안하고 있다. 이 점은 주목할 만한 캐릭터상의 문제다. 이 문제를 건드리지 않으면 우리는 양미숙을 ‘그런 사람’이라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스스로를 들여다보지 않는 사람이사랑받으려 하는 존재라는 설정 자체가 의문이다. 그래서 '양미숙'일 수밖에 없는 건가. 결국 그녀가 서선생한테 어떤 점에서 매력을 느끼고 있는 지도 영화에서는 언급된 적이 없다. 다만, 서선생(!)이기에 양미숙의 찜인 것이다. 이대로 보면 이 영화는 도대체 양미숙은 왜 자신의 외모를 들여다보지 않으며, 왜 서선생을 좋아하는지를 말해주지 않고 있다. 그런 양미숙을 새로운 캐릭터의 등장인양 마냥 기뻐할 수 있는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얘도 우리의 소중한 캐릭터(영화)를 만드는 것들 중 하나야!’라고 외친다면 그것은 분명 억지 변론밖에 되지 않는다. 그들이 양미숙을 ‘놀라움’으로 받아들이는 관점은 다분히 비정상성에 대해 그만큼 오인하고도 아니라고 부정하는 격이다.

전반적으로 <미쓰 홍당무>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했는데, 이런 뉘앙스가 만들어지게 된 이유는 과찬이라고 할 법한 평자들의 관점 때문이었다. 이 영화가 미덕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데뷔작이라는 면죄부를 준 채 캐릭터에만 혈안이 된 균형잃은 글들은, 영화에서 무엇을 들여다보려는지 애매하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정한석이 이 영화에 대해 꼼꼼히 지적한 부분들은 그나마 비어버린 관점을 채우는 역할을 겨우 해낸 듯하다. “우리도 양미숙과 놀고 싶다!” 놀고 싶지는 않아도 이해는 하고 싶다. 오히려 영화는 양미숙의 부분을 전시하는 데 그쳤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양미숙으로 하여금 피부과 의사에게 가도록 한 저의가 도대체 뭘까 상당히 불편하다. 양미숙은 끝까지 착각 속에 살아야 하고, 우리는 그녀를 보면서 그냥 웃기만 해야 할 만큼 철없는 20대 후반 여선생에 불과한 인물인가? 그런 점에서 감독은 양미숙을 거둬들이지 않는다. 그런 홍당무 양미숙을 보면서 나도 행복하지 않다.  결론적으로 <미쓰 홍당무>는 우주에서 날아오지 않은 슬픈 코미디다.(vovovd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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