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많은 사람들은 영화가 좋다 싫다 하는 느낌을 금방 받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필자에게 이 영화는 좋다/좋지 않다거나, 재미있다/재미없다 등의 정리된 느낌을 갖는데 힘든 영화였다. 그 이유는 이 영화가 드물게도 여성을 정말 전면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영화이기 때문이고, 그렇기에 영화가 자꾸 예쁘지 않은 대개의 사람들이 놓인 현실과의 비교를 통해 읽혀졌기 때문이다. 이런 어려움을 푸는데 도움을 조금 받을 수 있을까, 떠오르는 좀 다른 이야기를 시작으로 <미쓰 홍당무>(이하, <홍당무>)라는 영화에 접근해 본다.
얼마 전 술집에서 일어난 일이다. 한 테이블에 있던 남자가 뒤로 넘어갔다. 그는 넘어지면서 술집의 인테리어를 건드렸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옆 테이블에 대나무 장식이 쓰러졌다. 그리고 그 테이블에 있던 음식이 그 자리의 한 여자 소맷자락에 튀고 말았다. 사건은 모든 사람들이 그녀가 당한 테러를 깨닫지 못한 채, 뒤로 넘어간 남자의 안위만을 챙겼다는 데에서 일어났다. 소매를 망친 그녀는 단단히 화가 났거나 섭섭했고 급기야 술집직원들과 뒤로 넘어간 남자의 일행들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뒤로 넘어갔던 남자는 자신이 해를 끼친 그 여자 테이블의 술값을 계산해주고 옷 수선도 책임지겠다는 제안을 했으나, 여자의 화는 누그러질 줄을 몰랐다. 실랑이는 계속되었고 커져갔다. 필자의 지인은 이것이 남녀의 차이라며 눈을 반짝거리고 사태를 관찰하고 있었다. 남자는 자기가 끼친 손해의 몇 배를 배상하는 것으로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여자는 그런 걸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자신을 전혀 돌아보지 않았던 것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다. 여기서 상한 것은 그녀의 옷자락이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은 마음을 달래는 것이다. 남자들은 종종 회사에서 여자들과 일하기가 불편한 이유를 여자들이 감정적이라는 데에서 찾는다. 그녀들은 일이 안 풀리거나 안 좋은 말을 들으면 곧잘 울어버린다는 것이다. 사건에 포커스를 맞추기 보다는 기분의 상태로 곧장 옮겨가버리는 것, 그것은 지인의 말대로 정말 여자들의 본성인 것일까. 그렇다면 <홍당무>는 정말 여성적인 방법을 취하고 있는 영화이다.

1. 삽질하기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졸업사진은 영화 전체의 질문거리이다. 그녀는 도대체 왜 튀어 오른 것일까? 이 ‘튀는’ 행동은 심지어 카메라의 프레임에 걸쳐지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그녀의 튀어 오른 행동은 삽질이다. 해결해야 하는 어떤 일과 관련이 없는데 그것이 필요하다 믿고 힘을 쏟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삽질했다고 말하고는 한다. 정의하자면 삽질이란, 어떤 일에 정확히 맞는 일을 수행하지 않고 엉뚱한 방향으로 매진하여 힘을 쏟은 것 즉, 허사, 쓸데없는 짓을 일컫는 말이다. 양미숙의 생활은 이런 삽질들로 둘러싸여 있다. 삽질의 목록을 적어볼까. 우선 영화의 가장 큰 동력이 되는 부분으로, 양미숙은 자신의 고교 담임이었다가 동료가 된 서종철 선생을 짝사랑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유부남이다. 즉 그녀의 사랑은 일종의 삽질인데, 더욱이 그녀는 서 선생도 자신을 사랑한다는 착각에 빠져있다. 완전 삽질. 그녀 양미숙은 애정전선뿐 아니라 직업전선에서도 삐걱대고 있다. 그녀는 러시아어 대신 영어를 가르쳐야 하고, 그 때문에 아침 일찍부터 영어 공부를 하러 학원에 다니고 있는 것이다. 커리어도 삽질중이다. 그뿐인가. 그녀는 지나친 안면홍조를 치료하기 위해 간 피부과에서 정신 상담을 받듯이 자신의 삶을 고백하고 있다. 병 치료 중에도 삽질을 하고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그녀가 벌리는 새로운 일들도 삽질이다. 그녀를 영어교사로 밀어낸 인기 러시아어 선생과 서종철 선생은 잠시 눈이 맞았고, 서 선생이 이혼하고 그 인기녀 이유리 선생과 맺어질까봐 양미숙은 서 선생의 딸과 연합하여 이혼을 막기 위한 전쟁을 벌인다. 짝사랑 상대의 사랑을 막기 위해 그의 부인과 맺어 주려는 양미숙의 노력이라니, 참으로 삽질이다.

양미숙의 일과는 이렇게 엉뚱한 힘쓰기로 둘러싸여 있다. 그러니까 영화 초반에 그녀가 “사람이 비상식적인 행동을 할 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거에요.”라는 대사와 함께 ‘삽질’을 하는 장면은, 아주 친절하게 그녀를 설명해주는 주석이다. 또한 이것은 영화를 한편의 미스터리로 만드는 장면이기도 하다. 스스로도 밝혔듯이 삽질은 알 수없는 취미 생활이 아니라 어떤 이유를 가진 행동인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답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니까 도대체 그녀는 왜 삽질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런 삽질하기는 이 영화를 연출한 이경미 감독의 전(前)작인 단편영화 <잘돼가? 무엇이든>에도 익숙한 것이다. 한 무역회사에서 탈세를 목적으로 한 장부 조작에 두 명의 여성이 동원된다. 지영은 직장이 불만스럽지만 어쩔 수 없이 일을 그만두지 못하고 매사에 자존심이 상하는데, 그녀의 동료 희진은 한심할 정도로 일에 열심이고 충성스럽다. 게다가 희진은 부당한 회사 일에 대한 불만은 제로처럼 보이며, 성과를 내는데서 튀려고 하는지 지영과 그 일의 수행능력을 경쟁하려고 든다. 또 희진은 회사에서 숙식할 정도로 억척스럽다. 지영은 아첨꾼 같고 구질구질한 것 같은 그녀의 주책 혹은 억척스러움을 경멸한다. 지영과 희진이 향해야 할 방향은 자꾸 어긋나 서로를 향한 원망과 생채기만 늘어간다. 이 역시 삽질.

2. 캐릭터 만들기와 맥락의 약화

그런데 이 단편영화는 지영과 희진이 느끼거나 그렇지 못하거나 그들 사이에 형성된 어떤 유대에 닿는다. 그 유대는 젊은 여성 둘이 각자 나름 심각하게 이 현재를 살아가고 있으며, 그 현재가 지금 여기 사는 젊은 여성의 것 같다는 우리의 공감에 기인한다. 주인공 지영은 직장을 막 선택하고 살아가게 되는 우리들의 선택과 그에 따르게 되는 여러 감정들을 보여준다. 지영과 더불어, 실제 생활에서도 종종 있으며 늘 뒷담화와 왕따의 대상이 되는 이기적인 희진 역시 어떤 공통적인 감수성, 즉 우리 모두에게 공통적인 듯한 어떤 무대를 통해 유대의 장으로 흡수된다. 그 무대는 무역회사였고, 노동환경이었으며, 우리의 생활공간이었다. 이 단편이 버스에서 머리를 맞대고 조는 지영과 희진의 뒷모습을 엔딩으로 하며 관객들과 이르게 된 유대는, 그녀들의 피곤함이고 결국 우리들의 피곤함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유대감 속에서 지영과 희진은 우리의 일부로서 사랑스러운 캐릭터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홍당무>는 감독이 말했듯이 이 이해할 수 없이 주책스럽고 억척스러운 희진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이다. 헌데 <홍당무>에는 위와 같은 공통의 무대 자체는 상당히 약화되어 있다. 우리는 그녀가 자신의 외모 탓에 그러한 것인지, 그녀의 성격 때문에 그러한 것인지, 미움 받는 원인에 대해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 졸업사진의 전모가 밝혀지는 것을 가지고 그녀가 처한 상황의 원인을 말할 수는 있다. 양미숙은 왕따였다. 학생들이 그녀를 싫어하는 이유는 그녀가 늘 부스스하고 깔끔하지 못 해서라고 덧붙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는 삽질 성격의 원인이라고 추측할만한 외모지상주의 같은 언급에 몰두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양미숙에게와는 달리 예쁘장한 이유리 선생에게 집적대지만, 이런 힌트들은 우리가 마른 것들(?)/이쁜 것들(?)이라고 하며 외모가 평범한 데서 오는 불이익(?) 혹은 저이익(?)을 투덜대게 되는 무대를 형성하는 데에는 부족하다.
이 영화에서 역시 주된 것은, 양미숙이 외모로 인해 뭔가를 당하는 모습보다는 그녀가 강박적으로 삽질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양미숙이 보이는 삽질은 보통사람과 똘아이의 경계에서 왔다갔다 하는데, 영화가 양미숙이라는 캐릭터에 몰두하여 그녀를 극단적으로 부각시키기 때문에, 그리고 그 원인으로 왕따를 당한 특정 경험을 던져주기에, 왠지 모르게 영화의 전개는 양미숙 혼자만의 고통이자 성격으로 부각되는 면이 있다.

실은 우리 역시 꽤나 삽질하고 살아간다. 쓸데없는 호의에 두근거리고, 작은 것에 큰 기대를 걸고, 쉽게 인정받을 것 같은 낙관에 휩싸이곤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양미숙의 삽질은 남일이 아니다. 양미숙도 남이 아니다. 그런데 에피소드들은 여기저기 이 사람 저 사람과 부딪히면서 나아가기보다는 너무 양미숙이라는 캐릭터만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면도 보이고, 그것을 따라가던 중 생겨나는 갑작스런 해결 공간은 너무 인공적이다. 예를 들어 양미숙의 서 선생을 향한 오해는 흔히 생길 수 있는 것인데, 영화 속에서의 설정은 그런 순간을 불러오기에는 좀 오바스럽게 터무니없어 오히려 대입을 방해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모든 사건이 해결되는 어학실은 대화라는 해결방식을 부각시키려는 의도겠지만 너무 지루하고 방해될 것이 없는 진공적 대화 장소이다. 진공적 상태는 인위적이다. 이러한 점은 양미숙과 그녀를 둘러싼 환경에 대한 거리감을 낳는 요소이다.

어쩌면 양미숙을 보면서 <잘돼가? 무엇이든>의 희진을 떠올리는 것 때문에 이 영화가 어렵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희진을 쓰다듬을 수 있었던 공감을 준 공간, 즉 애초에 이 영화에서도 그런 식으로 굳이 20대 여성이 밀착되는 공간을 보고자 하는 것은 영화 밖에서 발생한 어떤 욕심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간에 이 영화의 주인공 양미숙과 그 일당은 주로 신비화되어 있어 이입할 수 없었던 영화 속 여자 캐릭터들과 다르게 어딘가 나사가 빠져있으며, 그래서 예쁜이 나사가 빠져있는 평범한 우리들의 모습과 비교 대입해 보고 싶은 욕심을 유발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주류 한국영화에서도 정말로 여기 살고 있는 여성의 삶을 좀 더 보고 싶은 갈망이다. 예를 들어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이라는 일본 영화에는 그녀가 속한 사회에 대한 좀 더 세밀한 묘사가 있고, 그 속에서 그녀에 대한 설명 역시 좀 더 탄탄하게 된다. <홍당무>에서 캐릭터가 이끄는 에피소드는 바로 이런 공간에 대한 접근이 부족하고, 이런 면에서 <홍당무>는 <잘돼가? 무엇이든>보다 조금은 더 붕 떠 있고, 그 때문에 조금 덜 이슈적인 된다.

3. 유대감 쌓기와 정서적 사건

그런데 이 영화가 도달한 해법은, <잘돼가? 무엇이든>보다 좀 더 직접적으로 유대라는 공통적인 경향을 부각시키기도 한다. 이 영화를 보고 떠오른 <여고괴담1>이라는 또 다른 영화가 있다. 여기서 소녀 귀신은 온갖 편견과 차별로 인해 죽어갔으나 복수를 위해 이승에 머물지 않는다. 그녀는 평범하게 그저 친구들과 속닥거리며 학교를 다녀보고 싶었을 뿐이다. 이 소녀 귀신의 소망은 너무나 소박하여 더욱 슬펐고, 영화는 더 이상 호러가 아니라 슬픈 드라마였다. 늘 궁금했던 것은 어째서 이 소녀 귀신은 문제의 발생을 비켜난 소망을 키운 것이냐는 점이었다. 그리고 <홍당무>에서 양미숙은 유령처럼 학교에 숙식하면서 사람들 사이를 휘젓고 다니며, 그녀의 고백 역시 소녀 귀신의 것과 유사한 점에 도달한다. 또 다른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주인공 소녀들은 마치 호적을 파듯이 가족을 뒤로 하거나 이미 가족을 모두 잃어 없는 상태로 이곳을 떠난다. 오직 그녀들의 유대만을 지니고서 말이다. <잘돼가? 무엇이든>에서도 그녀들이 고개를 맞대고 졸고 있는 마지막 장면은 그들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은유가 된다. 사건은 어딘가에서 일어났고 그녀들 각자를 짓누르지만 그녀들은 친구를 얻는다. 해결은 오직 이 지점에서만 일어난다.
친구와의 유대의 중요성은 남성적이라고 하는 영화에서 역시 강조되고는 한다. 남성들의 유대는 주로 의리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런데 그들의 의리는 어떤 사건을 직접적으로 만들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그런데 여성들의 유대의 성격은 좀 다르다. 그녀들의 유대는 사건의 밖에 있다. 이것들은 맨 처음 술집에서 벌어진 일에서 보인 것처럼 단지(?) 기분을 달래는 유대이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여기서 사건은 금전적인 척도가 아니라, 정서적인 척도에 의해 설명되게 된다. <홍당무> 역시 그 유대가 여성적 감수성을 드러낸다는 의미라면 여성영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홍당무>에는 많은 여성들이 있다. 그리고 그녀들 역시 순탄치는 않다. 양미숙의 친구가 되는 서 선생의 딸 서종희는 그녀와 꼭 닮은 거울이다. 서종희는 양미숙처럼 자괴감에 쌓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나친 공주병 때문에 왕따가 된다. 그리고 인기녀 이유리 선생은 막상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본 적이 없다. 8년 연하와 결혼한 서 선생의 아내 역시 남편의 불륜으로 마음이 차갑기만 하다. 여기서 영화는 그녀들의 만남에 집중하면서 해법을 찾는다. 영화는 처음 삽질 장면처럼 노골적으로 대화의 장을 만들어 문제를 풀어보고자 한다.
그리고 양미숙은 어딘가에 끼이고 싶어 한다는 자기 욕망을 발견한다. 삽질하느라 바빠서 정말 원한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서 선생 가족이 끌어안고 화해의 분위기를 조성하자 그녀는 자기도 거기에 끼워달라고 말한다. 그리고 엔딩에서 그녀는 종희와 함께 새로운 삽질에 나선다. 양미숙은 이제 피부과 의사를 찾아가 맥락 없이 자신에 대한 그의 마음(?)을 물어보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이렇게 사람들의 편견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양미숙이 스스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과정으로 넘어간다.
여기서 계속되는 대화와 함께 강조되는 것을 곁가지로 말해보자면, 그것은 양미숙과 서종희의 부르튼 입술이다. 그것은 그녀의 삽질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보여준다. 전작의 영화에서 희진이 공감되었던 요소 중 하나 역시 이런 식의 애씀이었다. 양미숙의 푸석푸석하고 건조한 얼굴과 부르튼 입술은, 그녀의 거울 서종희의 부르튼 두터운 입술까지 더해져 안타까움을 이끌어내는데 톡톡히 역할을 한다. 그녀들은 계속 어필하고 그 때마다 그녀들의 허옇게 일어난 입술이 눈에 밟히며 짠한 마음을 일으킨다.

4. 루저 캐릭터와 여성 유대가 보여줄 수 있는 가능성

결국 그녀의 삽질은 ‘나 좀 봐주라’, ‘나 사랑받고 싶거던?’ 하는 어필을 원인으로 하는 신경질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영화는 포스터나 예고편 등에서 강조되었던 외모로 인한 고생에 대한 문제제기가 아니라, 문제가 있어 보이는 이들의 자기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혼자가 아니라 어떤 유대로 인해 생겨난다. 그 유대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조금 상투적이지만 미숙과 종희가 공연하는 장면은 모든 이의 감동 속에서 문제 해결에 이르는 장면이 아니라, 그녀들이 스스로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장면일 뿐이다. 이렇게 보면 이 영화는 <잘돼가? 무엇이든>의 희진에 관한 성장영화일 것이다. 이 영화가 꾀하는 해법은, 여자들이 모여서 수다를 떨 때 오는 마음의 위로 같은 것이다.

이는 마치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소녀들이 굿바이를 하며 이곳을 떠나간 것처럼, 어떤 사건 자체보다는 자신들의 세계에 몰두하고자 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여고괴담1>의 소녀 귀신조차 그러했던 것처럼, 그녀들은 복수보다는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유대를 다시 만드는데 더욱 간절하다. 이는 <홍당무>라는 영화가 보여준 캐릭터와 유대라는 해법이 주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이렇게 문제 자체를 무화시키기란 쉬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의 구축에 대한 의지와 결합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가족사진에서 자신을 파내고, 아예 가족이 없는 친구와 함께 날아가 버리는 것은 새로운 해법이다. 그녀들은 가족이라는 문제틀에 연연하지 않았다. 아예 다른 판을 만들어 버리려는 것이다. 미숙과 종희의 공연은 그래서 영화의 완성도나 맥락과는 별개로 어떤 방법을 소개한다. 이 영화는 <100분 토론> 같은 합리적 문제의 장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자리를 정서로 옮겨놓고 해법을 찾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해결은 생각보다 흔하지 않다. 왕따를 그대로 왕따로 두는 방식은 생각보다 흔하지 않은데, 보통 영화들은 왕따 당해서 그랬다거나 왕따 시킨 이들의 반성을 보여주거나 왕따의 성격이 비뚤어질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 이유 등을 제시하여, 작위적으로라도 원인을 만들고 억지로라도 그 갈등을 봉합시켜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하는데 주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강박에서 벗어나 있다. 여기서 졸업사진 찍을 때 그녀가 왕따 당하는 장면이 없었더라면 더 나았을 지도 모르겠다. 그 장면은 정말 왕따라는 이유를 말하기 위한 인위적 설정으로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양미숙은 반성이나 합당한 설명을 통해 일어서기 보다는 정서적 해소를 중심에 두고 있다. 그녀는 이루고자 했던 짝사랑보다 더 간절한 유대를 향해 자신의 목표를 수정했고, 이는 그녀가 감정에 집중할 줄 아는 솔직한 존재였기 때문에 얻게 된 그녀 자신의 진심이다.

한편 이런 일어섬이 더욱 설득력 있으려면 앞서 <잘돼가? 무엇이든>과 관련한 이야기 등에서 언급한 것처럼 어떤 탄탄한 공간 역시 필요하다. 그것은 그녀들이 억압받는 공간이고 모순적인 공간이다. 또한 그녀들이 맞설 공간이다. 우리들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감정을 가진 것이 아니라 자신이 딛고 있는 곳으로부터 발생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소매를 망친 여자가 히스테리녀가 되지 않고 원하는 감정적 보상을 받을 수 있으려면 적절한 상황설명과 설득 또는 싸움, 그리고 관철시킴이 동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뒤돌아서서 전화로 친구한테 하소연 하는 방식이라면 기분은 해소되지만 억울한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영화의 해법은 여성들의 해소 방식을 재현하는데 자유로웠고 그런 면에서 새로운 이해의 장을 주지만, 한 공간이 발생시키는 것들을 통해 문제의 설득력과 정서적 공감도를 높이는 데는 아쉽다. 이것 역시 아이큐 테스트를 하면 공간 지각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여성적 특징인가? <잘돼가? 무엇이든>을 보면 그러한 것 같지는 않다. <홍당무>에서 기대했던 것과 영화가 보여준 가능성은 우리가 가진 어떤 공통적인 감수성이기에, 탄탄한 공간의 구축을 통한 이해가 더욱 요구되고 그래서 못내 아쉬운 것이다. 즉 <홍당무>에는 <잘돼가? 무엇이든>에서의 무역회사 같은 공간이 희미한 것이다. 수다를 떨 때 가장 쿵짝이 잘 맞고 카타르시스가 절정에 다다를 때는, 모두가 비슷한 상황에 처했거나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어 여기저기서 “나두 나두” 하면서 추임새를 쳐주는 때이다. 그런 깊은 공감이 가능한 공간은 한편의 영화에서 어떻게 하면 드러날 수 있을까? 어쨌건 잘 말해지지 못하던 여성적인 감수성이 소개되는 자리는 그만큼 더 반갑다. 그리고 영화 한편이 다 끝내지 못했더라도 그 시작을 이어 다른 영화들에서도 생기있는 추임새들과 창의적 해법들이 이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gipsy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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