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의 원제는 하늘 오르기Subida al cielo이다. 주인공 올리베리오가 버스를 운전해서 하늘로 오르는 길 정상에 올라 하는 것은 라켈의 유혹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병중에 있는 어머니가 찾는 바람에 초야도 치르지 못하고 어머니가 부여한 임무를 수행하던 중 일어난 사고(?)였다. 라켈은 정사 이후 더 필요한 것이 없냐는 올리베리오의 질문에 ‘내가 원한 것을 얻었다’며 깔끔하게 돌아선다. 그리고 어머니가 찾아가보라던 변호사를 통해 어찌하였든 미션을 해결하고 돌아가자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이 순간 올리베리오는 어째서 죽은 어머니를 마주하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 말하는 라켈을 떠올리는 것일까.
사실 이 영화는 극영화의 전형적인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다. 병중에 있는 어머니에게 재산분배를 강요하는 ‘나쁜’ 형제들과 어머니의 말씀을 잘 따르는 ‘착한’ 올리베리오가 있다. 신혼여행을 가기도 전에 어머니의 부름을 받고 달려온 올리베리오에게 어머니는 유언을 남긴다. ‘죽은 딸의 아들인 손자 추치토에게 멕시코시티에 있는 집을 물려주고 도시에서 교육을 시켜라.’ 그 내용이 법적 효력을 갖도록 하기 위해 지방행정관을 찾았으나 다른 형제들과 짝패인 그는 올리베리오의 부탁을 거절한다. 그 때문에 올리베리오는 집안문제를 처리해주던 도시에 있는 변호사를 찾아가야만 한다. 이상이 사건의 발단이고, 앞에서 언급한 대로 주인공의 미션은 성공한다. 하지만 주인공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버스를 타야 한다.
산업화도 되지 않고 교회도 들어오지 않아 전통을 유지하지만 코코넛 생산으로 풍요로운 마을인 산 제로니미토에서 인근 도시 페탈란으로 가는 유일한 교통수단은 버스이다. 말썽쟁이 두 남매를 둔 어머니, 마을의원議員, 해산하러 도시의 의사를 찾아가는 부인, 땅을 빼앗긴 지주, 올리베리오를 쫓아다니는(?) 라켈에 이르기까지 ‘시골버스’는 떠들썩하다. 출발하자마자 버스는 타이어가 펑크 나고 이어 포장이 되지 않은 안개 자욱한 산길을 위험스럽게 오르다가 반대편에서 오는 차 때문에 멈춰서고 그 사이에 아이가 태어난다. 이제는 별탈이 없다 싶을 때 차는 개울을 건너다 진흙탕에 빠지고 만다. 위독한 어머니의 청에 한시 바삐 페탈란에 가야하는 올리베리오는 애가 탈 수밖에 없다. 야단법석하게 벌어지는 상황들, 그에 대해 이것이 일상이기 때문에 ‘의연’한 기사 실베스트레와 불평 없는 승객들의 태도(물론 멕시코의 발전을 원하는 작은 마을의 정치가의 성미는 그것을 참아내지 못한다)는 올리베리오의 초조함을 영화 한 켠으로 밀어낸다. 그러면서 임무의 중요성을 탈색시키고 그것을 내러티브의 주변부로 이동시킨다.
이 와중에 올리베리오도 서서히 라켈의 유혹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드디어 해석하기에 애로(에로?) 사항이 있는 장면이 등장한다. 올리베리오의 백일몽인 그 장면 때문에 미션의 성공여부에 방점을 두면 간단해질 내러티브는 꼬이기 시작한다. 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라켈과의 정사가 이뤄지는 찰나 어머니가 끼어든다. 다시 시도하지만 이번에는 염소들이(버스에는 동물들도 탑승하고 있다) 방해하고 올리베리오는 자신의 신부新婦인 알비나의 품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알비나인 줄 알았던 여인은 라켈로 변해버리고 그녀는 크게 웃어댄다. 이 장면은 첫 문단에서 제기되었던 의문과 연결고리가 생긴다. 그러나 고백하자면 이어지는 글은 연결고리를 촘촘히 밝혀내지 못한 상태로 쓰여졌다.
어머니의 재산-현실적 권력을 원하는 다른 형제와는 다르게 올리베리오는 어머니의 품-애착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가정을 세울 수 있다. 어머니는 올리베리오와 알비나의 결합을 방해한다. 게다가 어머니가 신혼여행을 중단하면서까지 내린 임무는 올리베리오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조카를 위한 것이다. 올리베리오는 어머니에게 충실하지만 어머니의 애정은 그에 미치지 못하고 그것이 불만을 낳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어머니는 라켈과 연장선상에 있다. 라켈은 올리베리오에게 원하는 것을 얻어낼 때까지 육탄공세를 가했지만 결국 받아내고는 냉정하게 뒤돌아선다. 우여곡절 끝에 미션을 해결했지만 떠나버린 어머니처럼 라켈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올리베리오를 ‘이용’하고 만 것이다. 올리베리오의 백일몽은 알비나와의 결합을 방해하는 두 여인에 대한 반응의 산물 혹은 뒤집어 알비라 대신 붙잡히지 않는 두 여인을 원하는 올리베리오의 욕망을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영화는 효자 올리베리오의 임무 수행과 성공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산 제로니미토에서 페탈란까지 아슬아슬하게 움직이는 버스와 같이 걷잡을 수 없는 욕망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절정에 다다르면(하늘로 오르는 길의 정상에 도착하면) 얻은 것 같지만 아침이면 금세 사라지는 것이기도 하다. 후기에 이르면 보다 세련되게 다듬어지지만 멕시코 시기에서부터 살아있는 부뉴엘식의 해학은 욕망에 관한 문제를 내러티브에 자연스럽게 얹어 놓는 듯 하다가 잡히지 않는 방향으로 틀곤 한다. 그러한 점이 영화의 해석에 막힘을 제공하곤 한다.
어머니와 라켈의 욕망은 또한 도시와 연결 지을 수 있다. 어머니는 손자를 도시에서 교육시키길 원하고, 라켈은 도시에 당도하자 태도를 바꾸어 의원에게로 돌아선다(라켈은 이미 차림새부터 도시를 향해 있다). 아마도 도시에서 편하게 지낼 수 있는 끈으로 올리베리오보다는 의원이 적합할 것이다. 심지어 알비나조차도 신혼여행 길에 멕시코시티에 있는 시어머니의 집을 탐냈고, 올리베리오의 형제 펠리페 또한 어머니에게 도시에서 살고 싶으니 그 집을 물려달라고 간청한다. 도시로 향하는 마을의원은 산업화, 민주화를 떠들어댄다. 영화를 시작하는 나레이션은 산 제로니미토의 전경을 훑으며 그곳의 평화로움을 말하는데 이는 반어적인 설명이었음이 드러난다. 결혼식을 치른 후 무인도 ‘천국의 섬’에서 초야를 치르는 마을의 전통 의식(알비나와 올리베리오의 신혼여행)을 중단시키는 것도 도시로 향한 욕망(어머니의 유언) 때문이었다. 도시로 향하는 욕망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버스가 도시로 도착할 때까지 여러 가지 난관들에 부딪히는 것은 멕시코의 전근대성 탓이라고 할 수 있다.
버스가 지나가는 길은, 그러나 그러한 욕망을 품은 눈으로 비춰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부뉴엘 특유의 유머가 만들어내는 궤적이기도 한데, 도시를 향한 욕망과 단순 대조를 이루지 않으면서 비판적인 힘을 가진다. 도시를 목적지로 삼고 다급히 달리는 마음들에 대책 없는 여유를 보이는 버스기사의 모습이 그에 대한 부분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힘이 미약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실베스트레는 술에 취해 페탈란까지 가지 못하고 자신의 어머니 집에 주저앉아 신세타령을 한다. 그리곤 자신의 삶(버스)을 올리베리오에게 넘긴다.
드디어 올리베리오는 하늘로 오르는 길을 통과하여 조카의 미래를 보장받을 서류를 받아들고 마을로 돌아가 임수를 완수한다. 하지만 영화는 무언가가 해결되었구나하는 카타르시스를 주지 않는다. 올리베리오와 형제들과의 불화는 이어질 것이고, 알비나와의 관계는 과연 어머니와 라켈의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인가? 올리베리오가 형제들에 대한 분노를 표명하고 조카를 잘 키우겠다는 다짐을 한 후 알비나와 돌아서는 마지막은 장면은 불길하기만 하다... (by dela6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