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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놈놈>(2008)이 개봉하면서, 이제 김지운 영화의 리스트에는 웨스턴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추가되었다. <놈놈놈>의 엔딩 크레딧에서는 ‘western by kim jee woon’이 마지막으로 띄워지면서 영화 스스로 재차 강조하기까지 한다.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일련의 작품들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시도를 하고 있지만, 그 다양성 속에 일관되게 흐르는 김지운 감독만이 부여할 수 있는 독특함이라든가, 특징들은 쉬이 찾아보기 어렵다. 아마도 그 점은 앞으로 진행될 김지운의 작품들이 추가될수록 관심의 화두로 떠오르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런 점을 염두에 두었을 때, 이미 현재 한국영화의 지형 속에서 <놈놈놈>은 웨스턴 장르를 부활시켰다는 의미만으로도 값진 성과일 수 있다. 게다가 칸 영화제에 출품함으로써 해외시장에서 매우 긴장되게 이 영화를 눈여겨보았고(또 기록적 마케팅으로 11개국에 배급시켰으며), 한국영화의 오락적 가능성의 입지를 굳히기도 했다. 여기서, 단지 한국식 웨스턴 장르를 부활시켰다는 점에만 의미를 둘 것이 아니라, 김지운이라는 감독이 한국영화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장르의 시도’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속단일지도 모르겠지만) 주목할만한 감독이라는 점은 상기해 두어야 할 것이다.

<조용한 가족>(1998), <반칙왕>(2000), <쓰리>(2002), <장화, 홍련>(2003), <달콤한 인생>(2005), <놈놈놈>(2008)까지. 과연 그는 ‘오락성’으로 기대할 수 있는 영화적 가치를 실현하려는 감독일까. ‘김지운에 대한 화두’는 사실 그 점에만 집중하게 되면, 미끄러질 수밖에 없는 허무함에 봉착할지도 모른다. 이번 특집에서 그 부분은 가장 정리가 어려운 부분이었으나, 오히려 <놈놈놈>이라는 영화를 통해 복귀해볼 가치를 따질 수 있는 감독임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서두가 길었는데, 본인은 이 글에서 언급했던 부분들을 전제로 하고 짚어볼 수 있는 영화적 물음을 통해 김지운 감독을 조망하려고 한다. 그의 장편영화에서 단 하나, 관통하는 일관된 ‘의문’은 존재하는데 그것은 바로, 영화 결말에 대한 문제이다. 개별 영화들은 각기 다른 장르를 표방하고 있기는 하지만, 영화를 마치는 방식이 장르 공식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터무니없거나, 설명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 굳이 불투명한 의미를 만드는 장면화로 일관하여 스토리의 완결을 이루지 않는다든가 응당 밝혀져야 할 부분이 숨겨진 채 모호한 결말을 만들어냄으로써 정서적 여운을 강조한다. 도대체 이러한 결말이 가져다주는 효과는 무엇일까? 왜 김지운은 이런 방식의 결말로 해석의 여지를 남기려는 것일까?

1. <조용한 가족> 과 <장화, 홍련>의 마지막은 '공포'를 위한 결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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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가족>의 오프닝은 카메라가 안개산장의 내부 2층에서부터 1층 데스크를 훑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프롤로그격인 이 오프닝 장면은 카메라가 형식적으로 안개산장 내부를 ‘보여주기’에 그친다고 하기에 애매한 점이 있다. 화면은 경쾌한 가요와 함께 산장 2층에서 계단을 통과해 1층 데스크까지 머물렀다가 다시 시선은 그대로 둔 채 백업하여 다시 계단을 통과해 2층 내부로 올라간다(처음 시작지점에서 내려갔다가 다시 제자리에 돌아온 셈). 화면은 객실 문 바깥을 비추다 암전되고, 그 다음으로 ‘조용한 가족’의 막내딸 미나(고호경)의 모습을 비춘다. 여기서 TV를 보던 미나는 무료한 표정으로 뒤척이다 천장(카메라)을 바라본다. 물론 카메라는 천장에서 미나를 내려다보는 하이앵글이다. 미나는 천장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불편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는데 바스트숏으로 클로즈 업 하면, 그때 “시내에서 이곳 산장으로 옮긴지 벌써 13일이나 지났다...” 라는 미나의 내레이션이 들린다. 어쨌든 이 오프닝은 ‘코믹잔혹극’임을 표방한(코미디와 공포의 결합) 영화분위기를 시각성과 사운드의 결합으로 표현한다. 그런데 도대체 미나의 불편한 시선은 왜 엔딩크레딧이 끝나도록 충분히 설명될 수 없는 것일까? <조용한 가족>의 핵심은 바로 미나의 시선처리에 있다. 미나의 불편한 시선으로 인해, 영화는 관객에게 뭔가 미심쩍은 불안감을 안겨준다. 이 영화의 주체는 미나로 설정되어 있다. 그녀는 위의 내레이션 다음으로 “아무 일도 없었다. 평소 친분이 있던 마을 이장아저씨의 소개로, 산장을 싼값에 구입해, 생전 해보지도 않던 숙박업을 시작한 것이다. 처음 우리 식구들은 부푼 꿈을 안고 열심히 새 단장 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다. 어쨌든 그런 꿈은 하루하루 지나가면서 무참히 깨져가고 있었다.” 라고 영화의 시작지점을 설명해준다. 그러나 미나의 내레이션은 이 부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심지어 결말에서도 미나의 내레이션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야기를 시작한 주체자는 안개 산장을 뒤로 하고, 불안한 시선을 관객에게 고정하며 프리즈 프레임된 채 엔딩 크레딧을 맞이한다.

<조용한 가족>의 오프닝과 결말은 중심 이야기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어려움에 빠지도록 내버려 둔다. 오프닝에서 미나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더더욱 미나의 마지막 임무는 중요하다. 그런데 영화는 왜 미나의 목소리는 중단시킨 채 이미지만 남도록 내버려 둔 것일까? 이 영화의 엔딩은 미나의 이상한 시선으로 인해, 잔혹하지만 코믹했던 해프닝을 미심쩍고 더욱더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조용한 가족>은 코미디와 공포를 결합한 신선한 시도임에는 분명하지만, 분명치 않은 결정적인 부분으로 인해 이야기의 불투명성을 증폭시킨다. 김지운은 이러한 불편한 ‘시도’를 이 영화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음, 그다음 영화에서도 반복함으로써 재생산한다.

<장화, 홍련>의 설정은 <조용한 가족>과 여러모로 유사하다. <조용한 가족>의 공간은 산장이다. 일상생활과 꽤 유리된, 여가와 쉼터의 공간인 그 곳은 등산하는 여행객을 위한 산 중턱에 위치해 있다. 공포영화가 갖고 있는 기본적 전제조건에 충실한 설정이다. 이는 현실과 유리된 공간에 등장인물들이 모여 있도록 함으로써 외부세계와의 긴장감을 유발시킨다. <장화, 홍련>에서, 수미(임수정)의 계모 은주(염정아)가 무현(김갑수)과 꾸리고 있는 집 역시 <조용한 가족>의 산장과 유사한 풍경 속에 위치해 있다. 마치 전원주택처럼 한적한 외곽에 위치한 2층 집은 내부가 더 화려하고 고풍스럽다. 이 집 근처에는 어떤 집도,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가까이에는 저수지가 있을 뿐이다. 이 영화의 공간감이 주는 여운은 <조용한 가족>에 이은 (그리고 <쓰리>의 ‘메모리즈’이후) ‘안개산장’의 후속 편처럼 느껴진다. 수미가 들어갔던 은주의 집(편의상 그렇게 이름 붙이기로 하겠다)은 <조용한 가족>의 등반객들이 잠시 거쳐가는 곳처럼, 수미(와 수연)에게 결코 아늑한 공간일 수 없다. 오히려 외부에서 한적한 시골마을로 ‘진입’하게 된 수미(와 수연)는 스스로의 의사와 상관없이 억지로 은주의 집에 발을 들여놓는다. 계모 은주가 불편할 수밖에 없는 수미는 오히려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는다. 오로지 은주만이 눈엣가시다.

그런데 <장화, 홍련>의 결말부에서 모든 것이 수미의 환영이었음이 드러나는 순간, 그리고 수연이 옷장에 깔리는 장면에서 마지막 엔딩까지. 미심쩍은 것은, 왜 수미가 수연의 죽음을 직시하지 못하고 은주의 집을 (그것도 후문으로) 박차고 나가야 하냐는 것이다. 그녀는 은주와 말다툼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갈대밭이 펼쳐진 은주의 집 후문을 열고 나간다. 힘차게 걷던 수미는 뭔가 수상한 듯 뒤를 돌아 (은주가 2층문으로 열고 수미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 은주의 집, 즉 은주를 바라보지만 이내 안도한듯 다시 가던 길을 걸어가는데 그때 이 장면은 프리즈 프레임된다. 그리고 페이드아웃 후 페이드인되는 수미와 수연의 저수지 첫 장면. 그 장면은 수미가 홀로 저수지를 바라보며 앉아있는 장면으로 바뀌어 있다. 그리고 영화는 마침내 끝이 난다.

<장화,홍련>은 수미의 환영이었다고는 하지만, 아까 던졌던 의문에서부터 시작해 은주의 집을 나갈 때 다시 한 번 뒤돌아보는 순간에 대한 해명은 찾아볼 수 없다. 즉, 영화에서 수미는 결코 수연의 죽음을 은주의 말대로 “이 순간을 후회할” 수 있어야 하는데 후회하지 않은 채 끝난다. 관객은 수연의 죽음을 온전히 알게 된다. 그러나 등장인물은 알지 못한다. 이는 그 흔한 맥거핀기법이라고 할 수도 없다. 트릭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연의 죽음은 이 영화에서 매우 중요한 순간이며 사건이다. 수미가 그동안 자신이 보았던 것, 생각했던 것이 관객에게 공포의 순간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수연의 죽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는 수미 자체의 문제는 아니다. 등장인물로 하여금 그것을 깨우치지 못한 채, 흐르지 않는 저수지 앞에 놓은 채 막을 내린다는 설정은 이미 이야기의 흐름이 인위적으로 가두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지운의 공포는 이렇듯 두 편의 영화에서 유사성을 드러내는데, 이상하게도 그 유사함은 동일한 관점에서 터득할 수 있다. 두 편의 가족군을 통해 공포가 만들어지는 핵심은 이기주의와 혈연주의이다. 그것이 단지 여성 등장인물을 통해 모호하고 미심쩍은 결말을 유도하는 ‘공포심’이라면 불온전한 의미를 통한 공포라고 결론내릴 수 있을 것이다. 모호한 의미가 불투명한 이야기의 전말에 대한 중심축이라 한다면, 오리무중에 대한 암묵적 심증이 알 수없는 공포를 야기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김지운에게 공포영화란, 이야기구조 내에서 발생하는 불안감과 두려움이라기보다는 온전치 않은 결말이 유도해 내는 ‘여운의 공포’다.

2. <반칙왕> <달콤한 인생> <놈놈놈> 영화적 기법이 가져다주는 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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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칙왕> 결말에서 대호(송강호)는 유비호(김수로)에게 마스크가 찢긴 후 병원신세를 진다. 회식 후 돌아가는 부지점장(송영창)에게 난데없이 나타난 대호는 갑자기 내리는 눈발때문인지(?) 그에게 달려들다 자빠진다. 그가 자빠지는 순간 프리즈프레임되는 결말이 주는 여운은 진정 <반칙왕>이 드러내는 소시민의 허탈감에 대한 표지이다. 유독 김지운은 프리즈프레임이 주는 이상한 여운을 즐긴다. 그만큼 영화적 스토리텔링에 치중한다기 보다는 영화적 기법을 통해 ‘보는 정서’에 대한 쾌감을 우선시 한다.

<달콤한 인생>에서 선우(이병헌)는 오프닝의 (상황모를)내레이션을 시작으로, 자신이 겪었던 엄청난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 영화를 시작한다. 그런데 마지막 반전을 보자. <장화,홍련>에서 처럼, 그 엄청난 끔찍한 일들이 자신의 상상이었던 것으로 마무리된다. 쉴새없이 훅, 쨉을 날리는 이병헌의 어두운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좀처럼 이 이야기가 (영화적)현실이나마 될 수 없음을 한탄할 수밖에 없다. 상상속에 가두어진 끔찍하고도 세련된, 그러나 유치한, 조폭들의 자존심을 오히려, 조롱하는 것일까? 어떤 관점에서 이 영화는 ‘한국형 느와르’가 아니라(리얼리티를 부정했으므로 느와르라 하기엔 무리가 있다) 좀 다른 맥락의 조폭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폭세계의 허위와 과잉된 동기부여가 초래할 결과를 끝내 벗어날 수 없는 주인공 선우를 통해 간접투사한 것인데,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러한 ‘고인 물’의 이야기는 궁극적으로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에 관한 물음에 온당한 답변을 추측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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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놈놈>에서 태구(송강호)는 그나마 자신이 처한 운명에 대해 관대하게 스스럼없이 밀고 나간다. 자신이 차지한 줄 알았던 ‘보물’, 그것은 일본 군사들에 의해 포위된 채 즐거움만을 느껴야 하는 아이러니한 등가물이다. 어쨌든 그는 현상금이 몇 배로 오른 수배자 이상으로 자유로운 영혼이다. 그가 이 영화에서 시종일관 폭소만발의 캐릭터이면서, 이면에 극악무도한 손가락귀신이었다는 과거형 캐릭터임은 <조용한 가족>에서 코믹함과 잔혹함의 양면성을 동시에 가지는 정서의 맥락과 맞닿아 있다. 여기서 역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한 가지 있다. 영화에서는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부분인데(필요하다고 느끼지 않는 것 같다) 손가락 귀신이었던 태구가 어떻게(!) 영화상 드러나는 작금의 성격으로 변했는가이다. 단지 환골탈태한 과거의 태구였다 할지라도, 창이(이병헌)가 그토록 앙심을 품을 수 있는 명백한 이유가 존재할 것이다. 도원(정우성)이 그 부분을 규명할 수 있는 적절한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규명하지 않는다.

여러모로 <놈놈놈>의 결말은 그나마 김지운 영화의 결말 중에서 그가 취했던 모호성을 걷어낸 편이다. 좀 더 투명하단 얘기다. 오히려 문제 삼을 만한 장면은 엔딩크레딧에 등장하는 스틸컷들이다. 그것은 영화 스스로가 어떤 여분의 이야기를 보듬고 있는지 상세히 보여주고 있다. 사실 이는 영화의 뒷이야기를 궁금해 할 서비스차원의 에필로그이다. 김지운의 작업 중에서 이러한 에필로그격 컷들은 그만큼 영화제작이 센세이셔널함 자체였음을 강조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결말이 주는 여운은 이제 영화텍스트 외부의 센세이션으로 자리바꾸기를 시도한다. 장르의, 영화의 바깥까지 끌고 들어오는 방식들은 사실 요즘 한국영화 작금의 몇몇 방식들에 의해 영향받았는지 모르겠다. 그만큼 김지운의 영화는 시대성을 함유하는 방향을 고수한다.

이 세 영화를 덧붙여서, 앞에서 거론했던 두 영화까지 아울러 김지운의 영화를 관통하는 코드는, 장르를 위시한 정서적 결말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분명 정서적 결말에는 ‘고인 물’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공포감의 여운으로, 허탈감의 표지로, 절대 삐져나오지 못할 욕망의 닫힌 문으로 표출되는 이상한 정서는, ‘여운’으로 남게 되는 영화적 기법(프리즈 프레임, 점프컷 등)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더 나아가서 김지운은 투명하거나(<달콤한 인생>) 불투명한(<조용한 가족> <장화,홍련> 등) 액자구조를 통해 영화의 리얼리티에 대한 모호한 기준을 스스로 만든다. 다시 말하면 장르영화로서 온전히 즐길 오락적 기준을 마지막에 다시 한 번 뒤집는다든가 불투명한 논리를 남겨두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의 영화는 한국영화의 장르개척에 일조를 했다고 할 수 있지만, 반대로 장르 영화의 전형성을 스스로 파괴한다. 그의 영화에서 등장하는 난데없음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영화적 관점의 시야를 열어두거나 그것을 용인하는 수밖에 없다.

<조용한 가족>이 공포를 위시한 코믹극이 되는 이유는 가족들 개개인들이 감은 붕대안에 상처에 숨겨져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자초한 연쇄살인이 (가족)이기주의적 명분을 위한 ‘해프닝’에 그쳤기 때문이다. 공포조성의 방식은 사회일반문제가 끌어들여짐으로써 가족공동체의 존립 여부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공동체가 파괴되는 순간은 분명 이기주의가 발각되는 순간일 것이다. 주인공 미나가 보내는 시선이 그 발각의 순간을 두려워하는 의미를 가진다면, 이 영화의 닫힌 결말은 끈끈한 가족이기주의를 굳힌다는 의미 또한 포함한다. 그런 맥락에서 잔혹한 사건들은 결코 조용한 가족에게 피식 웃음짓게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반칙왕>의 대호가 서글픈 코미디의 주인공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그를 보며 웃을 때 그것이 유쾌한 웃음이 아님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이들 영화의 결말을 하나의 감정선으로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에 분명치 않은 모호함 또한 거론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점은 <장화, 홍련>에서, <달콤한 인생>에서 역시 정서적으로 어떤 감정으로 마지막장면을 수긍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만든다. 김지운영화의 결말은 표현양식과, 정서사이에서 뻔하지만 복잡한 구조를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따라 결론의 갈래가 나뉘어진다. 어쨌든 그의 영화에서 분명히 노출하고 있는 불투명성과 모호함은 분명 정서에 호소함으로써 가려져 버릴 소지가 크다. 그 점은 김지운 영화를 통과하는 주제는 될 수 없고, 특징으로서만 남아도 안될 것이다.  (by vovovd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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