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많습니다!)

대학 때 만난 한 선배는 파주가 고향이라고 했다. 파주에서도 그 선배가 사는 지역은 북쪽과 맞다있어서 그곳 주민들은 주민등록증을 제시해야지만 들락거릴 수 있다고 했다. 선배에게 들었던 파주시의 한 마을은 국가에 의해 허락을 받아야 움직일 수 있는 곳이었다. 그 마을은 주민이 결정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고, 즉 주민의 것이 아니라 국가의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파주에는 임진각과 땅굴이 있다. 한편 몇 년 새 파주하면 헤이리와 출판단지가 생각나게 되었다. 이 설계 역시 국가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 어떤 분야보다 자유롭다고 하는 예술의 터를 국가가 모으고 전시한 것이다. 어느새 파주는 주민등록증을 내야 하는 동시에 문화적이고 예술적인 공간으로 생각나게 되었는데, 어쨌거나 파주는 우리가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었던 터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두 공간 모두가 우리에게 허락되는 방식은 관광이다. 임진각을 지나 헤이리 예술공원을 도는 관광코스, 결국 파주는 어쨌거나 관광의 도시인 것일까.
그런데 영화 속 파주는 파괴되어 폐허가 되가는 것들의 이미지들이 모이고 중첩되어 있는 파주이다. 임진각을 돌면서 통일의 염원을 빌어보는 곳이기 보다는 운동을 하다 수배자가 된 사람이 있는 곳이며, 예술적인 꿈을 꾸는 곳이기 보다는 생존에 절박함을 느끼는 철거민들의 도시인 것이다. 여기에서 파주는 관광되는 곳이 아닌 겪어내는 사람들의 공간으로써의 모습을 드러낸다. 고통이 맞닥트려질 때 관광은 불편하고 하기 싫은 것이 된다. 어쩌면 영화 <파주>는 광광도시 속에 숨겨진, 우리가 결정할 수 없는 공간을 그려보려는지도 모르겠다.

중식의 사연은 8년 전부터 시작된다. 중식은 수배를 받고 있는데, 함께 운동을 했던 선배이자 첫사랑인 자영의 집에 숨어 있는 처지이다. 그리고 자영의 남편은 교도소에 있다는데 역시 같이 운동을 했던 선배인 것 같다. 그 집에서 자신이 선배의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을 안 중식은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던진다. 그런데 던진 옷이 선배 부부의 아이에게 날아가 아이는 울음을 터뜨린다. 그러자 중식은 옷을 얼른 다시 주워 입고 아이를 안아 달래고 있다. 중식은 영화 속에서 이 첫 번째 상황을 계속 반복하는 것 같다. 그 상황은 계속 커지고 무거워지지만 중식은 이때에처럼 계속 자기 주변에 고통을 안겼다는 자신의 미욱함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는 자영을 탐(?)한 죄(?)로 아이가 화상을 입자, 자신의 미욱함을 처음으로 확인한 서울로부터 도망쳐 파주로 들어온다. 중식이 꿈꾼 운동과 사랑은 모두 파괴되어 돌이킬 수 없는 채 말이다.

한편 은모는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부모님이 물려준 집에서 언니 은수와 살고 있다. 은수는 술에 취해 밤길을 혼자 걸어가던 때에 자신을 걱정해준 중식을 좋아하기 시작하고, 은모는 하나 밖에 없는 언니 은수가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주는 상황이 불안하다.
은모는 중식과 달리 자신이 벌이게 된 일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녀는 언니를 걱정하여 돈을 벌러 가출을 하지만 이때 자신의 실수로 언니가 죽게 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중식은 은모를 보호하기 위해 오해를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벌인 실수의 흔적을 제거한다.

중식의 이야기와 은모의 이야기는 은모가 두 번째로 집을 나가게 된 3년 전 상황까지는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중식의 경우는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벌어지는 사건(아이의 화상과 가스폭발 사고로 죽은 은수의 모습)들의 반복에 대한 책임감? 혹은 죄책감?을 잊지 않고 살아간다. 그건 뭐랄까, 중식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은모가 언니를 지키고 싶다는 마음에서 한 가출이나 중식을 떠나면 안 될 것 같아 집을 떠난 것 역시 소녀의 치기가 아닌 절박한, 그래서 은모에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파주라는 지역과 그곳에서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겹침이 이루어지면서 우리는 파괴되어 폐허가 된 삶의 형태들과 만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영화 <파주>의 이후 전개는 공감하기에는 조금씩, 점점 더 어긋난다. 은모는 보험회사를 통해 언니가 죽은 이유가 교통사고가 아니라 가스폭발 사고였다는 것을 알게 되고, 관객에게는 은모와 중식의 8년이 모두 공개된 뒤 장면에서 은모는 철거 현장을 뚫고 들어가 중식에게 질문한다. 이런 일 왜 하느냐고. 중식은 이제는 할 일이 계속 생겨서 그렇다고 말한다. 그리고 물대포가 쏟아지고 중식은 은모를 감싸않아 보호한다. 그날 저녁, 은모는 다시 질문을 이어간다. 언니를 사랑했느냐. 사랑하지 못했다고 중식은 말한다. 그럼 자신은 어땠냐는 질문에 중식은 너를 사랑하지 않은 때가 없었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은모는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는 거냐고 진실을 알고 싶다고 한다. 이어지는 것은 키스, 그리고 은모는 뛰쳐나와 중식을 보험 사기로 고발한다. 할 일이 계속 생긴다는 것은 은모를 보호하기 위한 것일까? 왜 중식은 은모를 사랑하지 않은 순간이 없다고 하는 것일까?
보험 사기로 감옥에 가며 정작 철거촌도 위기에 휩싸이게 되었을 때, 중식의 지인은 진실을 밝혀야 하지 않느냐고 묻지만, 중식은 철거촌은 괜찮을 것이다, 한 마리의 어린 양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니겠냐, 자신이 미욱했던 것 같다 등의 이야기로 은모의 실수로 생긴 가스폭발 사고의 진실을 밝히지 않는다.

은모가 한 마리의 어린 양이 되는 순간 영화는 이상한 불편함을 준다. 그 대사 이후 은모는 사라지고, 그 순간 중식은 유일하게 할 일이 주어진 사람으로, 짐을 짊어진 사람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과연 중식은 은모가 실수로 꽂은 가위가 실수인 것을 아는가? 실은 이 질문은 하등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실수이든 아니든 모든 것을 떠안으려는 중식은 다른 사람에게 그럴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혹은 떠안을 만큼 알 수나 있는 것인가? 어쩌면 중식이 감옥에 혼자 앉아 무거운 어깨를 늘어뜨리는 마지막 장면은, 그 불가능성에 대한 좌절로 인한 어두움일 것이다.
그런데 중식은 자신이 미욱했다고 말한다. 그의 미욱함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가 은모를 어린 양이라고 하는 순간이 바로 미욱하게 느껴진다. 만약 그가 좌절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가 어린 양을 보호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중식의 무겁고 어두운 어깨는 과연 어떤 좌절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었을까?

또 은모가 확인하려고 하는, 그리고 확인해야만 한다는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그녀는 왜 반복적으로 계속해서 파주를 나가고 파주로 돌아오는 것일까? 영화가 이렇게 결말로 치달아 갈 때, 영화 <파주>는 소통이 불가능하고 파괴를 막을 수 없기에 폐허로 낳는다기 보다는 잘못된 소통과 잘못된 반성으로 인해 불가능해진 폐허를 보여주고 있는 느낌이 든다. 중식과 은모는 결국 스스로의 밖으로 한 번도 나서지 않고, 그러고자 하지도 못했다는 느낌인 것이다.
그래서 좀 가혹하게 뱉어보자면 중식 역시 파주의 파괴된 이미지를 생산하는 또 하나의 얼굴처럼 느껴진다. 중식이라는 인물이 주는 답답함은 파괴되는 것 앞에서 그것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자의 것만이 아니다. 영화 속 파괴의 답답함은 중식이 움직이는 방식 자체가 생산해내는 것이기도 하다. 은모의 눈물도 그러하다. 아무 것도 감지할 수 없도록 만들어 지는 방식, 아무 것도 공유되지 못하는 방식이 초래하는 눈물인 것이다.

영화를 보고 한동안은 은모의 도피는 소녀의 도피로만 느껴졌는데, 그 도피가 낳는 결과란 철거 투쟁의 큰 축이자, 반대 편 조폭 용역 입장에선 걸림돌이었던 중식의 사라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얻어낸 성과란 은모가 부모님 집을 안정적으로 얻어냈다는 것이다. 사라지는 파주 속에 우뚝 남을 은모의 집. 그리고 얇게 미소짓는 자는 이경영이 분한 조폭 사장이다. 이경영이라는 많은 관객들에게 인지될 배우가 이 짧은 분량에 할애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그러한 무게를 가져야 하는 것일까. 마치 은모의 도피를 탓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필자는 이 영화에서 은모의 행동을 소녀의 치기로 평가하는 것이 이 영화가 회자되고 뻗어나간다면 이를 결론적 이미지로 느껴진다.

여기서 다시 중식의 답답한 얼굴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느끼고 말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왜 그는 은모를 한 마리 어린 양으로, 진실에서 소외되어야 하는, 그렇게 보호되어야 하는 자로 만들고 있는 것일까?

필자는 바로 이러한 방식이 무기력을 생산하는 지점 자체라고 생각한다. 이 세계를 대상으로 대하는 방식. 주체들의 움직임이 아니라 오직 자신만을 주체로 놓고 세계를 대상화하는 방식, 그로부터 느끼는 고통과 그로부터 기인하는 자책, 그리고 그로부터 도달하는 무기력. 이것은 중식이 도달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것처럼까지 느껴진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이 바로 파주라는 공간을 더욱 더 우리가 결정할 수 없고, 허락받아야만 하는 곳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모호하다고 읽혀지는 영화에서 필자가 모두와 함께 묻고 싶은 것은, 과연 중식은 무엇으로부터 은모를 보호하려고 하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중식은 실은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진실로부터 도망가고 싶은 것은 자기자신인 것이 아닐까? 실수를 했기에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의 삶을 보호하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어린 양이 되어야 하는 ‘할 일’은 적어도 이 시대에 적절한 책임감이 아닌 것 같다. 은모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진실을 함께 볼 수 있어야 한다. 중식이 해야 하는 반성은 개인으로 남아있는 죄책감에 대해서다. 그리고 중식이 반복적으로 직면하는 좌절은, 아무도 그렇게 제 손에 남아 있을 만큼 어린 양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gipsym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