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한국영화에서 영화스타일을 말할 때, “홍상수 스타일이야”라고 말하는 경우는 이미 흔해졌다. 이제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을 한데 묶어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스타일’의 성립을 말하기도 하지만, 스타일의 변화 역시 포함할 수 있는 말이다. ‘홍상수식 스타일의 영화’ 혹은 ‘이거 홍상수식인데’라고 말하는 그의 스타일은 이렇게 한국영화에서 분명히 대중적이든 아니든, ‘다름’을 가진 형식을 가진 채, 일관성을 유지해 나가는 드문 영화미학을 구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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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홍상수 영화에 대해 고민하고자 하는 부분은 그의 영화 속 인물의 모방과 재현이 말의 패턴, 행위의 패턴 등으로, 시공간 그리고 기억을 오가면서 개별적인 퍼즐을 구성하는 기이한 메커니즘에 관해서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 ‘홍상수’라는 감독의 영화를 이해하려는 과제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영화에 관해 말하려는 본인의 욕망 중 하나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홍상수의 영화에 관한 일련의 모호함을 풀어내려고 노력한 작은 시도이면서, 짤막하게나마 그의 영화 전체를 둘러보는 기회로 삼으려는 일종의 애정 표시이다.

1. 말의 반복과 행위의 반복으로, 행위을 직조하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인물간의 대화와 행동이 기억과 결부된 모방으로 이루어지거나 반복된다는 것이다. 특히 반복된 말과 행동이 캐릭터 구성과 내러티브 구성으로 짜여진다. 이것이 혹, 흔히 말하는 ‘일상성’의 일부분 중 하나라고 규정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생활의 발견>(2002)에서 성우는 경수와 함께 방석집에 앉아 술에 취해 몸을 좌우로 흔든다. 그리고 그는 경수와 명숙이 함께 한 술자리에서도 역시 좌우로 몸을 흔든다. 이 행동은 경수가 경주에 내려가 선영과 술을 마시면서 재현된다. 후에 성우의 습관적 행동은 경수에게 전이되어(혹은 경수가 모방하여) 일시적 인간관계를 지체하는 일부분으로 작용시킨다. 방석집에서 취한 채 몸을 흔드는 성우에게 그의 파트너는 “왜 자꾸 몸을 흔드냐”고 다그치지만, 그는 취해서인지 대답하지 않는다. 그저 몸을 흔들 뿐이다. 그의 행동을 모방한 경수는 선영에게 같은 질문을 받는다. 반면에 경수는 “술 마실 땐, 술이 취하지 않게 하구요. 기분이 무거울 땐, 그냥 앞뒤로 흔드는 것 같아요.”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이 대답은 진지한 대답이 아니다. 영화에서는 그 이전에 오히려 경수의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성우의 행동을 경수가 ‘따라했다고’ 볼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경수의 대답은 그다지 ‘진짜 이유처럼’ 납득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대충 대답한 것처럼 보인다. 왜 경수는 술 마실 때 몸을 흔들었을까. 성우도 그랬지만, 경수 역시 항상 몸을 흔들지는 않는다. 성우가 술이 취했을 때 그랬듯, 경수 역시 술 마실 때 몸을 흔들었지만 술이 취했을 때 흔들지는 않는다. “술이 취하지 않게 하구요”라는 경수의 대답은 오히려 성우의 행동과는 정반대다. 여기서 다시 우리는 캐릭터간 행동의 모방이 결코 단순한 베끼기로 그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의 행동은 영향관계 속에 놓여있다. 그러나 그들이 상대방으로부터 모방한 것은 결코 항상 동일한 방식으로 전이되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차이가 파생되고, 인물간의 동질성이 확보되지 않는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영화에서 설정한 단순한 인물의 대사와 행동이 인물간 갈등구조에 연결되지 않은 가닥이라는 점이다. 영화는 인물이 인물에게 영향받아 전이되는 일련의 복잡한 과정들이 개별적으로 혹은 전혀 반대방향의 성질들로 변하게 되는 모순들을 지적해내고, 그것은 의도된 플롯 배치로 더욱 더 강조된다. 내러티브상의 존립근거를 무색케 하는 이러한 발상들은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가’의 중요성보다는, 객체들의 비합리성에 관한 조소섞인 배열로써 끊임없이 인물들의 말과 행위에 관해 묘사한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캐릭터들의 행동은, 정해진 귀결을 좇지 않는다. 다시 말해 시간적으로 다음 순번을 기약하지 않는다. <돼지가 우물의 빠진 날>(1996)에서 보경은 어쩌지도 못할 자신의 처지를 순간적인 우울로 표현한다. 영화는 이른 새벽, 신문을 보다 말고 천천히 신문 한 장 한 장을 마루에서 베란다 방향으로 깔아놓던 보경이 베란다 창문을 열고 밖을 바라보는 뒷모습으로 끝맺는다. 이 종결되지 않는 주인공의 모습은 <강원도의 힘>(1998) <생활의 발견>(2002)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2004) <극장전>(2005) <해변의 여인>(2006)의 결말과 별반 다르지 않다. <강원도의 힘>에서 상권은 지숙과 (영화 속에서 잠정적인 마지막)섹스를 하고 자신의 일상으로 복귀한다. 새로 부임한 교직을 위해 사무실을 정리하던 중 상권은 키우고 있었던 세숫대야의 금붕어를 바라본다. 그리고 영화는 끝이다. 이 장면은 기이하게도, 영화 초반부 지숙이 강원도 여행 중 산길에서 발견한 금붕어를 산채로 묻어주는 장면과 병치된다. 그런데 이 두 주인공이 마주하는 금붕어는 영화 속에서 어떠한 설명도 거두어내지 않는다. <생활의 발견>의 경수는 어떠한가, 선영을 문밖에서 기다리던 경수는 춘천에서 성우가 말했던 회전문의 전설처럼 천둥과 함께한 장대비를 맞으며 결국 그녀를 만나지 못하고 발길을 돌린다. 그리고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헌준은 선화의 (알 수 없는)행동에 화를 내며 사라지고, 그들과 같이 있던 문호는 우연히 만난 학교 학생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여학생과 여관에서 시간을 보내다 여학생을 보낸 후 홀로 찻길에 휑하니 서 있다. <극장전>의 동수는 여배우와 하룻밤을 보낸 후 선배감독 이형수의 병문안 을 마치고 “생각을 해야 해, 죽지 않고 오래 살 수 있도록...”이라고 중얼거리며 열심히 걸어간다. <해변의 여인>의 문숙은, 서울로 가기 위해 운전대를 잡고 재빨리 해변을 벗어난다. 무엇이 주인공들을 ‘어디로 가야할까’라는 고민에서 자유롭게 하는가. 기실 주인공들은 결코 어떤 뚜렷한 방책도, 계획도 없는 ‘쉬어가는’ 사람들이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극심한 갈등으로 점철된 내러티브가 진척되지 않는 이유는 주인공들의 시덥지 않은 여유를 노출시키는 것 보다는, 느린 걸음으로 걸어가는 캐릭터를 관조하기 때문이다. 홍상수는 캐릭터가 경유하는 시공간에 대해 기억의 모티브를 끄집어내어 해결되지 않을 문제를 다시 도제해낸다. 그 속에서 모방과 반복이 재생산되고, 인물들은 느린 걸음으로 다시 생각한다. 그리고 관객은 다시, 느리게 영화를 사유한다.

그의 영화에서 인물의 행위가 대사를 통해, 행동을 통해 모방되고 반복되는 것은 외려 기승전결의 이야기 구조가 아닌 비(非)장르적 성격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홍상수의 영화는 스펙터클하거나, 이야기에 깊이 빠질 수 있는 매력은 없다. 그래서 그의 영화를 보고 나면, 특정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든가, 캐릭터의 세부적인 행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지고지순한 사랑도 없고, 애틋한 멜로도 없으며, 캐릭터 상호간의 믿음이나 신뢰도 두각되지 않는다. 정말로, 인물간의 의사소통 그리고 관계에 관한 영화다. 인물이 서로 가지는 관계를 말할 때,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틈새를 포착하는 것, 그것이 말과 행위를 탐구하는 데 더할 나위 없는 가볍고도 무거운 가치인 것이다. 정리해 보면, 홍상수가 영화를 통해 보여주는 것은 관계를 맺는 인물들의 시시껄렁함이다. 그들은 한마디로 ‘거창하지’ 않다. 반복과 모방을 할 뿐이다. 그들은 공간 속에 놓여 있으며, 약간의 이동을 할 수 있고, 말을 하고 약간의 행위를 할 뿐이다. 그 뿐이다.

2. ‘기억’으로 현재를 지속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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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잖은 동창(이하 동창): 그래도 너 영화보러 온 거 보면, 너랑 형수선배랑 친하긴 친했다 그지?

동수: 학교 다닐 때 그랬지, 나도 안본 지 오래돼.

동창: 그래도 서로 닮은 게 많잖아.

동수: 뭐가 닮았어?

동창: 뭐, 쿨한 척 하는 것도 그렇구, (피식 웃으며) 또 여자도 많이 좋아하고. 그리구 이번에 하려던 영화도, 비슷하지 않아?

동수: (피식 웃으며) 치, 자식, 난 하여튼 니네 집에서 해준 갈비찜만큼(이 때 줌 아웃하는 카메라. 동창과 동수의 투숏에서 옆에 앉은 친구의 아내까지 잡힌 쓰리숏으로) 맛있게 먹은 갈비찜이 없었어 진짜.

동창: 무슨 갈비찜? 아아, 그게 몇 년 전껀데에..

동창처: 아아, 그걸 기억하세요? 아 역시,(멋쩍게 웃으며) 아직도 그런 걸 기억하시는 구나.

동수: 진짜 맛있었는데, 살이 이렇게(두 손을 올려 고기가 양쪽으로 쪼개지는 모양을 만들며) 완전히 살살 녹았어.

하하 (다들 웃음)

동수: (동창을 바라보며) 너 근데 너 갈비찜 먹으면서 니 와이프 칭찬 몇 번 했는줄 알아?

동창: 갈비찜 먹으면서?

동창처: 그랬어요? 당신이?

동창,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동창처와 친구를 번갈아 본다

동수: 여섯 번이다. 내가 그때 세 봤거든. 여섯 번을 칭찬하더라고 니가.

동창:(어처구니 없다는 듯 웃으며 손가락질한다) 별걸 다 기억한다니까.

다들 소리 내어 웃음. 그 때 동수에게 원숏으로 다시 줌인.

동수:(아래를 쳐다보고 웃으며 말한다) 난 누가 그렇게 음식 칭찬하는 거 첨 봤거든. (얼굴이 굳어지며 두 손으로 얼굴을 부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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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대화는 <극장전>에서 우연히 만난 동수와 그의 동창이 점심식사를 하는 중화요리 집 씬 중 일부이다. 여기서 이들의 대화를 살펴보면, 동수는 동창이 형수선배(전반부 영화의 감독)와 자신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자, 바로 동창에 대한 기억으로 화제를 돌린다. 동창이 떠올리는 기억은 동수와 형수선배와의 유사점들인데 이 기억은 사람과 사람을 기억할 때 가장 평범하게 각인되는 것들이다. 반면 동수의 동창에 대한 기억은 몇 년 전 동창이 아내의 음식 솜씨를 ‘몇 번’ 칭찬했는지다. 동창의 기억은 과거, 현재를 아우르는 연속성이 부여된 것이라면, 동수의 기억은 그 자체로 단절될 수밖에 없는 기억이다.(중화요리집에 와서 몇 년 전 먹은 갈비찜이 떠오른다는 것 역시 의아하다) 동창의 칭찬으로 인해 당시 다른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동수의 언급은 그걸로 중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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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장면은 식사를 마친 후 음식점 문 밖에서 이루어진다. 어쨌든 동수와 형수선배와의 연관성은 단정적으로 동수의 입으로 동수의 입장에서만 정당화된다. 제 3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동수와 형수선배의 취향은 단지 ‘비슷했을 뿐’인 것처럼 보이는데 동수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형수선배가 자신을 따라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오!수정>(2000)과 같은 기억의 차이가 논해질 것처럼 보이지만, 병상에 누워있는 이형수의 입으로는, 그의 시각으로는 언급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가 철저히 동수에 관한 이미지임을 자각해야한다. 여기서 형수의 기억따위, 제 3자의 기억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그냥 인간의 기억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전반부영화에서 상원과 영실이 있던 호프집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다시 사랑한다면’은, 동창모임에 참석하려는 동수가 남산을 올라가며 휴대폰으로 듣게 된다. 그리고 동수는 모임에 참석한 배우 영실에게 그 노래를 신청함으로써 다시 반복하여 들을 수 있게 된다. 이는 영화 밖을 빠져나온 관객(우리)이 너무 자연스럽게 상기해버릴 수 있는 감상적 기억들 따위와 동일한 것이다. 홍상수는 대단한 기억에 대해 말하지 하지 않는다.

<해변의 여인>에서 문숙과 선희는 각각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눈물을 보인다. 그리고 중래는 전 부인의 나쁜 이미지와 문숙의 과거이미지 사이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중이다. 이들의 기억은 영화에서 보여주지 않은 것이며, 인물들은 각각 영화 속 현재에서 혼자 갈등을 겪는다. 이에 반해 영화 속 인물들 간의 간극을 채워주는 회상씬을 집어넣은 경우를 보여주는 영화가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이다. 헌준과 문호는 둘 다 그들이 함께 앉아있는 시퀀스에서 각자가 자리를 비운 사이, 창문 너머의 같은 여자를 보고 그들의 과거 여자 선화를 떠올린다. 즉 하나의 시퀀스 안에서 두 개의 회상씬이 끼워져 있는 셈이다.

각자의 기억으로 회상된 씬들은 <오!수정>에서처럼 각기 다른 시점의 동시간을 경유하지 않고, 철저히 분리된 시공간을 기억하는 것으로 처리되어 있다. 그 후 영화는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문호로 하여금 헌준과 선화의 관계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오게 하며, 놀이터에 앉아 난데없는 나르시스적 환상에 사로잡히게 한다. 이 시퀀스에서 문호가 두르게 된 빨간 목도리의 주인인 여학생은 술자리 후 문호와 함께 여관에 가게 된다. 이제 헌준과 선화와의 어떤 관련도 맺어지지 않은 채, 오롯이 문호의 독립된 이야기로 집중된다. 그리고 영화의 결말 역시 문호의 서성거림으로 일단락된다. 영화 초반부, 열심히 헌준과 문호의 회상으로 이들을 ‘이야기’하던 영화는 오히려 헌준과 선화의 미래에 집중하기는커녕, 제3의 인물(처럼 보이는) 문호의 이야기로 후반부 힘을 싣는다. 사실 ‘기억’이란 것은 홍상수의 영화에서 중요한 모티브이지만, 그의 영화에서 좀 더 중요한 것은 물 흘러가듯이 흘러가야만 하는 영화 속 현재-자체인 것이다. 헌준과 선화의 관계는 거기서 끝, 문호와 선화의 관계 역시 거기서 끝이다. 헌준은 미국에서 돌아와 ‘무엇을 해야 할 지 결정해야’ 하지만, 문호는 진행형을 살고 있는 인물이다. 그래서 오히려 문호의 욕망이 영화 속 후반부에 배치된 것은 아닐까. 선화의 현재는 어쨌든 헌준과 문호의 회상 속에 존재했던 과거의 사람으로서, 그리고 이미 그들의 기억 속을 지배하는 예전의 선화가 아니다.

홍상수는 도통, 영화 속 인물이 ‘기억하는 것’을 내러티브의 결정권 속으로 밀어넣지 않는다. 기억은 기억일 뿐이다. 다만 그들의 기억을 용의주도하게 ‘배치하는 것’에는 관심을 보인다. 그래서 그는 처절하게 기억의 상이함으로 영화 구성의 모티브를 만든다. <생활의 발견>에서 경수가 선영에게 다가서는 이유는 선영의 기억 속에 자리잡고 있는 중학교 시절의 기억 때문이 아니다. 겨우겨우 그녀의 손동작을 기억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정말로 기억하고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러한 기억이 내러티브를 결정한다면 즉시 회상씬을 배치해야 하지만 결코 회상씬 따위는 나오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홍상수가 말하는 인간의 기억이란 것은 영화라는 매체 속으로 들어오게 되면, 현재를 말할 수 있는 모티브 중 하나가 되지만, ‘현재’의 짧은 순간 속에서 괄목할 만한 단서로 기능하지는 않는다.

홍상수의 모든 영화가 ‘긴 시간’을 설정하지 않는 ‘말하기’ 방식을 취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보통 영화가 규정하는 방대한 시간성은 끊임없이 지나쳐가는 대과거/과거/이른 과거 등을 만들게 되는데, 그렇다면 온전한 영화적 현재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에 대한 논의를 펼치는 영화로 <극장전>을 들 수 있는데, 홍상수는 방대한 시간성의 간격을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전반부)와 온전한 영화적 현재로 구성되는 동수의 이야기를 이음매 없이 이어 붙임으로써, 시간의 단절을 좁히게 된다. 동수의 기억으로 말해지는 ‘말보로’담배와의 시간적 간극과, 자신의 행위를 모티브화 하여 영화(전반부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그의 말은, 회상으로 복귀하지 않고, 말의 일시성으로 환기될 뿐이다.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위에서 언급했던 <생활의 발견>에서 경수의 날듯 말듯한 기억 역시 마찬가지다. 그의 영화에서 대과거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회상씬과, <극장전>의 1부 영화라고 볼 수 있는데, 이 역시 온전한 영화적 과거는 아니다. 잠정적으로, 홍상수의 영화에서 영화적 현재를 중심으로 ‘과거’는 현재를 향한 모티브로, 연속적인 시간성을 용인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의 영화는 철저하게 시간을 분리시킴으로써 그것이 현재의 시.공간과 얽매이지 않도록 하는 방법론을 구사한다. 인물의 기억과 시간의 상관성은 오로지 ‘영화’에서, 그것이 ‘영화’일수 있도록 조직될 수밖에 없다.

3. 끊임없이 닫힌 시공간을 유영하다

목적이 뚜렷하지 않은 여행에서, 인물들은 술을 마시고 만난 지 몇 시간 안 되어 스스럼없이 섹스를 한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단 한 번도 취하지 않은 적이 없다. 느슨해질 수밖에 없게 만드는 술의 기운은, 반대로 인물간의 관계 설정이 견고해지는 데 도움을 준다. 단지 홍상수의 영화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술을 마시면서 대화의 진전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술을 마시는 상황 속에서 일련의 포인트가 구축되는 것이다. <오!수정>의 재훈은, 술자리를 통해 수정의 이름을 알게 되고 그녀와 가까워질 수 있는 동기를 만든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역시 헌준과 문호는 둘의 술자리에서 각각 선화를 떠올리게 되고, 즉흥적으로 그녀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인물들은 뚜렷한 기약없이 행동한다. 그래서 더욱 ‘길거리’를 돌아다닐 수밖에 없게 되고, 술을 마시거나, 여관에 갈 수 밖에 없다. 간혹 누군가의 ‘집’에 들른다고 할지라도, 역시 목적은 섹스이거나 쉬어가는 페이지의 일부분이다. 홍상수 영화에서 영원히 정착할 수 있는, 혹은 묶여있는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자연스럽게 시간 역시 얽매이지 않는 흐름 속에 놓여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시간에 걸친 이야기를 풀어놓을 여력은 없다. 역으로 말해, 시간과 공간은 산, 바닷가, 도시 속에서 배회할지언정 배회의 지점에 연결된 사다리와 같은 탈출구는 없다. 이들의 행위가 어느 순간 매우 건조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은 바로 그 점을 발견한 순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남녀의 행위에는 논리적이지 않은 대화, 술, 기다림 등뿐만 아니라 ‘섹스’가 반드시 포함되어 있다. 남녀가 가까워지는 순간은 술을 마시는 장소에서 이루어지지만 육체관계를 통해 또 하나의 의미없음을 만드는 순간은 남녀가 여관방에 공존하는 그 순간이다. 역시 끊임없이 무의미의 공간을 상정시키는 섹스씬에서 그들은 결코 ‘사랑’이라는 애틋함이 왠지 제대로 표현되지 않는다. 아니 표현하지 못한다. 이들 남녀가 벌이는 일종의 일탈은 어떤 의미에서 그 가치의 유무를 판단하게 할 수 있는가. <생활의 발견>의 명숙의 말처럼, “이제 거짓말하지 말자”라는 말은 정말로 솔직한 제스처인가. <오!수정>의 수정과 재훈을 제외하고, 나머지 영화들에서 남녀는 결합되기만 하면, 거짓말하지 않고 섹스를 한다. 그들의 밀착되어 있는 육체들처럼, 영화는 좀 더 닫혀있는, 은밀한 공간 속에서 행위를 전개시킨다. 그런 면에서 보면 홍상수의 영화는 굉장히 미시적인 성격을 가진 영화이다. <해변의 여인>에서는 어떤가. 아예 해변가 숙박업소와 음식점 몇 군데로 한정된 인물들은 또한 이제까지의 영화들 중 가장 좁은 공간들 속에서 이야기를 풀어낸다. 홍상수는 데뷔작부터 일관되게 짧은 시간동안 인물들의 움직임을 그려내는데, 이제 점점 그 영화적 시간은 단축되고 있다. 동시에 사건 역시 점점 줄어든다. 점점 분절되는 시간들은 공간 속에서 천천히 유영하고, 끊임없는 지체 속에서 동작을 반복, 구성한다.

4. 풀리지 않는 의문들은 꼬리를 물고 미완성의 지도를 그린다

미시적인 이야기 구성은 사실 영화적 현재에 충실히 집중하는 장점을 가진다. 그래서 홍상수의 개별적인 영화 속에서 등장하지 않는 이미지, 혹은 이야기(일회적인 말로써 증발되는 것들)가 부재했을 경우 그 여백이 크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만큼 홍상수의 영화는 러닝 타임 속에서 꽉 찬 구성적 시간을 갖추고 있으며 흥미로운 시공간의 배열을 조직한다. 그러나 풀리지 않는 오브제들이나 대화들이 그러한 배열구조 속에 녹아 있다는 것은 반대로 미시적 시공간의 배열이 낳은 모순은 아닐까라는 의문이 들게 한다. <극장전> 전반부에서 영실이 상원에게 갑자기 “첩해줄까?”라고 제안한다든지, <해변의 여인>에서 중래는 해변에서 만난 개 ‘돌이’를 무서워 하지만, 주인이 버리고 간 후 마주친 ‘돌이’를 무서워하지 않는데, 그러자마자 중래가 다리를 다치게 된다. 이 엉뚱하고도 비인과적인 인물 행위의 결과는 비어있는 내러티브라는 구석진 공간에 침잠되는 상황의 일부이다. 그런데 이러한 말-행위는 결코 플롯 구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는, 있는 그대로 묻어둘 수밖에 없는 매개고리들이다.

이 풀 수없는 모순된 상황들은 끝까지 왜?를 물어보지 않고, 그 자체로 비워둔 채 영화 안으로 포섭된다. 홍상수 영화를 말하면서 가장 풀리지 않는 숙제가 이러한 부분들일 것이다. 그것은 마치, <극장전>의 동수가 행했던 것처럼, 끊임없는 모순과 모방적인 상황을 재현하는 인간들의 알 수없는 움직임들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실제 순간들에서 감지한 채 우리의 은연 중 의식 속에 자리잡은 일부분이다. 영화 속 캐릭터가 영화 속 시간과, 실제 러닝타임 속에 귀속되어 미니어처처럼 작동되고 있는 동안 우리도 의식되지 않은 불균질한 상황들이 연출된다. <생활의 발견>의 경수가 선영에게 섹스가 잘 이루어지지 않자, “우리 같이 죽을까요?”라고 말하거나, <극장전>전반부에서 상원이 영실에게 “깨끗이 죽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이 역시 후반부, 동수가 배우 영실에게 하는 말로 전이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영화는 주인공이 결심하려는 죽음에 관해 설명하지 않는다. 결국, 영화에서 집중하는 것은 결코 주인공이 죽음을 결심하는 이유는 아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죽음은 그들 자신에게도, 심지어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도 납득이 되지 않거나 설명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존재 의미 그 자체다. 홍상수가 던져놓고 결론짓지 않는 것들 중 하나는 바로 이러한 설정들이다. 반드시 드러내주어야 하는 것들이 드러나지 않는 것. 바꿔 말하면, 왜 그렇다면 그것들은 전부 말해져야 하는가? 라는 말로 치환된다. 어차피 홍상수의 영화는 처음부터 미수에 그친 이야기를 반복하는 중이다.(<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상기해 보라. 등장인물들이 비로소 ‘깨닫는 것’은 무엇이었나?)

5. 결론의 부재

홍상수의 영화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욕망에 대해 집착적일 정도로 집중한다. 그래서 그의 영화가 항상 같은 얘기만 한다고 느끼게 된다. <오!수정>부터 시작된 인물구도(남-여-남)는 대체적으로 <해변의 여인>에 이르기까지 거의 변하지 않는데, 인물들의 말, 행동 등 역시 거의 변하지 않는 패턴으로 이어간다. 그런데도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영화 속 인물들은 거창하게 행동하는 인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갇혀 있지 않는다. 나는 이글에서 홍상수의 영화를 ‘시공간을 유영하는 기억들이 반복과 모방의 행태로 재현되는 것’으로 요약하고 있는데, 이 점은 홍상수 영화에서 가장 눈여겨 들여다봐야 할 뼈대이다. 그는 정말 인간들이 놓치고 있는 무수한 소일들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그것은 역설이기도 하고, 냉소이기도 하며, 일침이기도 하다. 왜 굳이 우리는 스펙터클에 시야을 노출시켜야만 하는가. 나이기 때문에 내가 들여다보지 못할 부분들, 그것은 나 자신을 위한 확대경이다. 그가 반복하고, 모방하며, 촉수를 곤두세우며 욕망에 집착하는 것은 자신을 더 잘 들여다보기 위해서다. 그래서 그의 영화에는 결론이 존재하지 않는다. 김다현(vovovd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