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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는 포유류 중에서 유일하게 날 수 있는 동물이라고 하지만 자유로운 이미지보다는 오직 자신의 이익에 치우쳐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는 기회주의자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그래서 박쥐는 동물 우화에서 유일하게 쫓겨난 동물이기도 하다. 박쥐는 유일하게 날 수 있는 포유류이지만 그 날개는 다른 생에 치명적이며, 그래서 박쥐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반면 뱀파이어는 매우 매혹적이다. 그것이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갈 만큼 치명적이게 될 때는 말뚝으로 저지해야 하지만 어쨌든 뱀파이어가 자아내는 분위기는 매우 우아하다. 뱀파이어의 힘과 능력은 아름다우며 위협적이다. 그런데 그런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뱀파이어가 박쥐로 뿅 하고 변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갑자기 그 공포가 잊혀지고 피식 웃음이 나고야 만다. 영화의 제목이 뱀파이어가 아니라 박쥐인 데는 남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또한 동시에 이 영화의 영문 제목은 ‘thirst’ 즉, 목마름, 갈증, 갈망 등의 뜻을 가진 말이기도 하다. ‘박쥐’와 ‘갈증’은 마치 서로를 보완해주고 있는 제목 같다. 박쥐가 우리의 발가벗겨진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면, 갈증은 그만큼 우리가 애타하는 욕망을 생각나게 한다. 박쥐는 우리가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취하는 어떤 형태인 것처럼 보인다. 갈증 앞에 솔직해졌을 때 그것은 생을 파괴하기에, 우리는 뱀파이어가 될 수 없으며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금지된 것이다. 그러나 그 갈증을 포기할 수 없어 대신 우리는 박쥐처럼 숨어서 기회를 엿보고 자신을 변호하며 우리의 목을 축이고는 하는 것이다.

상현의 욕망 : 박쥐의 욕망은 갈등한다

아프리카에서 기도하듯이 상현은 모두가 혐오하는 가장 밑바닥을 선택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 기도의 화답은 모든 욕망을 알고 그것을 취할 힘을 가진 뱀파이어로의 환생이다. 그의 환생은 성스러운 듯하지만 매우 속되며, 그의 힘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흡혈하고 그렇게 목숨을 앗아감으로써 유지되는 것이다. 즉 사람들이 그를 향해 구원의 희망을 품을 때, 그것은 파멸을 향한 기도인 것이다. 상현은 이러한 자신의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는 소원하던 대로 가장 더러운(?) 존재가 되었으니 그는 어떻게 여기서 구원을 일굴 수 있을까?

상현은 우연히 어릴 적 친구 강우와 그 엄마 라 여사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집에 거의 갇혀 사는 강우의 부인 태주를 만난다. 상현은 그녀에게 끌리며 그녀를 구원하려 한다. 그리고 강우를 살해하기에 이른다. 무엇보다 상현은 그렇게 자신의 저주받은 환생도 구원한다. 그러나 상현은 계속되는 난관에 봉착한다. 그는 그를 보살펴 온 신부님이 자신의 피를 통해 오래 전 멀어버린 눈을 뜨고자 하는 욕망에 집착하는 것을 보며, 후에는 결국 그 신부를 죽여 버린다. 상현은 노신부를 구원해주지 않았다. 태주는 자신을 사랑하고 구원했다 믿고 있는 상현의 앞에서 또 다시 지루해하고, 급기야 남편이 자신을 폭행한다고 했던 것은 그녀의 거짓말이었음이 드러나게 된다. 그리하여 서로가 서로를 부정하고, 모든 것을 부정하며 악다구니를 내다가, 상현은 태주의 목을 비틀어 버린다. 우리는 그 욕망의 속살을 남김없이 목격한다. 그것은 처절하고 볼품없다.

상현은 자신의 욕망을 그대로 수용할 수만은 없는 자이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위해 남을 해쳐서는 안 되며, 도리어 만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수도자의 윤리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상현이 빠져있는 함정이기도 하다. 그는 태주가 폭행당했기 때문에, 신부님이 과욕을 부렸기 때문에, 죽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배고픈 사람 돕기를 좋아했던 환자의 마음을 알기 때문에, 흡혈을 하고 사람을 죽였다고 믿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고 믿는 것, 그것은 자신의 욕망을 포장하는 효과적이고 한편 군색한 수단이다. 그런데 상현은 이런 포장으로 자신을 보전하거나 해방시키지 못한다. 그는 죄의식과 욕망의 사이에 끼인 존재이다. 그는 성스러운 성인도 아니며, 매혹적인 뱀파이어도 아니고, 오직 이리저리 처신을 바꾼 박쥐, 날개를 가졌지만 흡혈로 생을 유지하기에 해롭고 보잘 것 없고 슬픈 박쥐였던 것이다.

그래서 태주가 폭주(?)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거울임을 알았을 때, 그는 자신의 속됨을 만천하에 공개하고, 자신을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는 온 몸으로 성스러운 포장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초라한 속살을 드러내면서 스스로를 고발하였고, 그리고 이 세상을 등지며 자신이 세상에 취할 수 있는 최상의 구원을 행하였다. 욕망은 그렇게 드러나며, 그와 동시에 죽어가야 할 우리의 양날의 검인가. 상현은 바로 이 가장 더러운 곳, 가장 어두운 곳에 숨어있는 인간의 박쥐같은 모습을 온 몸으로 받아들여 공개하였던 것이다.

태주의 욕망 : 갈증(Thirst)은 모든 것에 앞선다

그런데 태주의 경우, 그녀의 욕망은 조금 다르다. 태주는 어릴 적부터 라 여사의 세계에 철저히 갇혀 매우 제한된 삶은 살아왔다. 그녀가 할 수 있던 유일한 것은 맨발로 골목길을 달려보는 것이었을 뿐이다. 태주에게 엄마이면서 시어머니인 라 여사는 철저한 혈연 중심의 사람이다. 태주는 결코 동등한 자식이 될 수 없다. 밀려난 자의, 소외된 자의, 사랑받지 못한 자의 자유로움일까. 그녀는 뱀파이어가 되었을 때 파괴를 반성하지 않는다. 상현은 자신의 허벅지를 때려가면서 뱀파이어가 되어 생겨난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려고 했다. 그는 신부로서의 자신과 뱀파이어로서의 자신 사이에서 죄책감에 휩싸인다. 그런데 그를 움직이는 이러한 죄책감이란 것이 태주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태주는 늘 체념했으며 늘 분노했고 늘 제어된 채였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어떤 것이라도 필요했던 사람이었으나,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제어할 장치만은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고, 그녀는 욕망을 취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것을 즐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주에게 욕망은 오직 해방으로만 존재할 뿐, 죄의식은 들어설 여지가 없다. 아마도 상현이 보고 싶어 했던, 가장 낮은 곳은 태주의 자리였을 것이다. 그녀는 그 욕망에 대한 천진난만함 때문에 그만큼 혐오스럽다. 그리고 이러한 그녀의 욕망은 결국에는 제어되어 그녀는 결국 살해당한다. 그것이 모두를 위해 정당하다. 심지어 그것은 존엄한 죽음 따위는 선택할 수 없는 태주에게도 가장 깔끔하고, 그런 의미에서는 그녀에게도 정당하다. 상현은 모두를 위해 가장 낮은 곳의 진실을 삭제한다. <올드보이>에서 모든 것이 꿈일 뿐이라고 망각하는 것과 비슷한 시도일까. 한 줌 재도 남기지 않고 가장 혐오스러운 욕망은 감춰지고, 우리의 기억은 지워지려고 한다. 상현의 구원은 인류를 위한 것이어서 정말로 혐오스럽고 천진난만하고 무지한 악을 지옥으로 끌고 가고자 한다.

그런데 태주는 전혀 뉘우치지 않는다. 그녀는 재미있었다고 말한다. 잘 놀았다고, 이제 끝이라고 한다. 왠지 모르게 그녀의 여정은 억울하다. 상식이 없어 더욱 무서운 뱀파이어인 태주는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파렴치한-쪽가위로 피를 내는 모습을 보라- 연쇄살인마인데, 그래서 짠하다. 그녀는 그렇게 사라져줘야 하는 존재라서 그녀의 갈증은 무섭지만 짠하다. 그녀가 갈증 앞에 박쥐조차 될 수 없이 천진난만하다는 것과 그렇기에 그 악이 사라져줘야 함이 그렇다. 상식을 배우고, 죽음을 선택하여 존엄할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상현과 비교했을 때, 태주의 모습은 왠지 씁쓸하다. 어디선가 싸이코패스도 잘 자라면 엄격한 지도자가 된다 했던가. 그녀는 잘 자라지 못해 연쇄살인마가 된 싸이코패스 같다. 상현은 연기할 수밖에 없었던 그 마지막 퍼포먼스가 태주에게는 삶 자체라는 것도 짠하다. 대부분에게 있어 폭력은 감춰지고 은밀하지만, 태주는 가장 더럽고 혐오스럽게도 욕망의 폭력과 마주한다. 그러니까 상현은 태주에게 마지막 구원의 공연을 펼친 것이다. 그 속됨을 드러내는, 그리하여 우리의 성스러운 희망을 무너뜨리고 폭로하며 초라하게 만든 것은 태주를 기억하기 위해 바쳐진 것이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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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여사의 욕망 - 치명적인 것은 강우이며, 엄마의 시선은 죄의식을 수단으로 강우를 보호한다

그런데 태주가 짠한 것은 영화 내내 가장 공포스러운 엄마 라 여사의 욕망과 그 시선 때문에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라 여사는 자기 핏줄이며 아들인 강우에게는 매우 극진하지만, 핏줄이 아니며 딸인 태주에게는 그 수발을 들게 할 뿐이다. 그녀는 아들을 숭배하며, 순수한 혈통을 숭배한다. 그녀는 뿌리 깊게 이어져 왔던 어떤 억압을 구체화시키고 있는 존재 같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마비되어 오직 시선과 정신만 남았을 때 그 힘은 더욱 커진다. 이제 상현과 태주는 그 시선에 사로잡힌다. 상현과 태주를 향해 쉴 새 없이 깜박이는 눈, 그리고 상현이 태주를 죽이고 피를 나누는 때 부릅뜨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눈은 그 어느 장면들보다도 섬뜩하다. 그리고 그 시선은 매우 결정적이다. 라 여사의 시선은 벗어날 수 없는 무서운 것이 되어 우리를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상현이 스스로 자신의 생을 포기하며, 태주를 끌어들여 함께 사라져 갈 때, 라 여사는 웃는다. 그 시선이 웃는다. 오직 여사의 눈만 남아 있는데, 그 눈이 매우 크게 눈웃음 짓는다. 마치 승리했다는 듯이. 그것은 매우 사악하고 섬뜩하게 그녀의 살아있음을 우리에게 환기시킨다.

여사의 눈웃음이 주는 사악함은 영화에서 매우 중요하다. 만약 이러한 눈웃음이 없었다면, 상현의 죽음은 우리에게 욕망과 죄의식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윤리만을 남겼을 것이다. 이는 감독의 이전 복수 영화들에서 마지막에 남는 듯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죄의식의 승리였다. 그런데 오직 그러한 제어 즉 금기를 당연한 운명으로 느끼며 주인공들의 여정이 끝나간 뒤에, 우리는 <박쥐>에서 라 여사의 시선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 시선은 갑자기 무언가를 환기시킨다. 그것은 그녀가 지배하고 있는 어떤 것에 대한 환기일 것이다. 그것은 순수한 피를 숭배하는 여사의 억압에 대한 환기이다.

이러한 시선의 살아남음을 보게 된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그 수많은 피와 그 화려하던 욕망의 풍경들은 결국 죄의식 앞에 고개를 숙이고 혀를 잘랐고, 욕망의 모습이 그럴싸하고 설득력 있을수록 죄의식 앞에 주인공의 무력하기만 했다. 여기서 금기는 운명일 뿐이다. 그렇기에 그것을 탐한 자들은 망설임 없이 죄책감에 사로잡힐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라 여사의 시선을 함께 봄으로써 우리는 그 낮고 더러운 욕망을 더러워하거나 심판하지 않을 수 있는 선, 즉 운명적인 것만은 아니며 단지 뿌리 깊을 뿐일 수 있는 어떤 억압의 선을 비로소 함께 기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욕망에 의해 치명적으로 파괴되는 것은 오직 혈통일 뿐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제 이 세 번째 욕망이 있음을 확인했을 때, 우리가 치명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보편적인 인간 일반이 아닌, 강우였음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상현과 태주가 죽어가야 했던 것은 그들이 강우에게 치명적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피가 섞이는 것은 더럽다. 그리고 그 욕망은 추악하다. 그것은 누구의 목소리인가. 피와 피의 나눔을 두려워하고 그것의 힘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애초에 억압하는 것이 있었음을, 그리하여 그것에게 치명적인 것이 피와 피가 섞이는 것임을 알게 되었을 때, 상현과 태주의 죽음은 비로소 짠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 때 우리는 가장 더러운 것을 비로소 편들고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우리는 그 초라함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라 여사가 없다면, 모든 위계가 사라진 욕망의 향연만이 영화에 남을 것이다. 그때의 욕망이란 생의 파괴와 닿아 있어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네 욕망의 배치는 그렇게 추상적이거나 모호하거나 평평하지 않은 것 같다. 실로 우리네 욕망은 위계 속에서 배치되고 해석되어 왔다. 그래서 상현이 스스로 초라한 모습을 연기하고 기꺼이 초라해짐을 택했을 때, 그것은 진정 가장 낮을 곳을 구원하기 위한 공연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낮은 곳의 욕망은 철저히 억압되었기에 반대로 솔직한 채로 보존되었고, 상현의 공연으로 그것은 우리 눈앞에 정면으로, 전면적으로, 소개될 수 있었다.

어쨌든 파괴되었어야 할 시선은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 그러나 어느 박쥐들의 죽음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욕망이 그들 내부에 도사린 위험요소가 아니라 그들 외부에서 그들을 억압하는 것들을 향한 위험이라는 진실이다. 무언가를 파괴한다는 것은 내부에 도사린 충동이라기보다는 어떤 분노이고 이 분노는 정당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감독은 마치 그 말을 하고 싶다는 양 여사의 살아남은 시선을 보여주었다. 이 때문에 <박쥐>는, 현실의 운명이란 상현과 태주의 여정을 짧은 일탈로 매듭짓게 할 수밖에 없으나, 한편 그것이 라 여사가 꿈꾸는 운명일 뿐임도 폭로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죽음을 정말로 슬퍼해야 할 것 같다. 이제 욕망이란 단지 내부의 어두운 충동이고 억제되어야 하는 보편 윤리로써 해석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순수한 혈통의 지배를 깨는 즐거운 섞임의 과정이라는 것을, 때문에 욕망이 야기하는 파괴란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일 수 있음을 생각해 봐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실로 인간의 역사에서 지난한 세월동안 우리 중 대부분은 인간으로서의 격을 갖추지 못한, 단지 더럽고 무지한 존재로 머물기를 강요당하고 있었지 않은가 말이다. 그것은 욕망의 독점이었던 것이다. 그 지난한 전통의 라 여사 시선 속에서 다수는 실은 인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니 피의 섞임이란, 그 처절한 나눔이란, 혐오스럽기보다는 즐거운 것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비로소 라 여사가 아닌 우리를 인간이 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라 여사는 정녕 파괴되어야 할 역사이며, 그러므로 이제 박쥐임을 인정하는 것은 혐오를 위한 것이기 보다는 솔직하고 즐겁게 도래하는 인류의 역사를 향한 것이 될 때이다. (gipsym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