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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아 장커의 영화들에서 ‘사라짐’은 상실이라고 단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노스텔지어를 수반하지 않는다. 그의 초기작에서 등장인물들은 주로 ‘청춘’들이었다. 지아 장커는 그들에게 어떤 역동성도 부여하지 않는다. 청춘들의 희망은 생동하지 못하는 일상의 반복 속에서 서서히 피어나거나 정체된다. 지극히 느린 관조적 (카메라)시선은 청춘들과 텅 빈 공간을 대상화 하지만 결코 주변화하지 않는데, 지아 장커에게 인물들과 공간은 항상 매개되어 있으며, 현재의 위치에서 끊임없이 꺼내어지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이르러, 지아 장커의 주된 영화적 의식은 변화한 듯 보인다. <무용> <24시티>를 보면, 현대 중국에 대한 통찰은 젊은 청춘들에게서 노동자로 옮겨갔고, 그 내러티브의 순환성은 다큐멘터리를 통해 실제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나 특유의 롱테이크적 시선은 대상의 변화와 상관없이 일관된 태도를 증명하는 영화적 의식이다.

1. 시선의 힘이 발휘되는 롱 테이크

후 샤오시엔이 의도하는 롱테이크(long take)가 개인사와 역사의 맥락을 가로지으려는 고정성에 있다면, 지아 장커의 그것은 단절된 개인사를 지형성과 이동의 맥락에서 불러오려는 의도로 사용된다. <소무>(1997) <플랫폼>(2000) <임소요>(2002)에서 롱 테이크는 개인과 공간의 극명한 연관성 속에서 힘을 발휘하며, 그것은 항상 팬(pan)과 수반되는 경우가 많았다. 롱 테이크가 단순히 고정된 시선으로만 일관되지 않는다는 것은, 화면에 부여된 공간과 인물이 결코 ‘정체’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플랫폼>의 배경인 편양에서 극단생활을 하는 문예 노동자들이 공간을 배회하며 (청춘의)미숙함을 드러낼 때, 그들을 바라보는 카메라 시선은 그들의 미숙함이 ‘어떻게 보이는지’ 확실히 보여주기 위해 건조한 성곽의 모습과 대비시킨다. 결국 미숙한 청춘을 통해 부여하는 교훈은 카메라 시선으로 그것을 담아낸 전지적 시선으로 그 공간적 함의를 추측할 수 있다. 성곽에서 한시라도 가만히 서 있지 못하는 인물들(따오와 추이밍량의 경우)을 그렇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이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는 혼란스러운 방황하는 청춘이기 때문이다(그들이 속해있는 공동체는 유랑극단이다. 결국 떠나게 되어 있고, 그들도 헤어지게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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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 라이프>(2006)에서 카메라 시선은 중국의 현재를 가늠할 수 있는 ‘산샤’에서 두 사람의(셰홍과 산밍) 발걸음에 초점을 맞춘 채, 은유의 피날레를 장식한다. 산샤는 16년 전 떠나버린 아내를 찾아 이미 산밍에게 낯설음과 위태로움을 안겨주는 장소다. 우여곡절 끝에 만난 부인과 허물어진 건물구멍에서 내려다 본 건물 밖 다른 건물의 허물어짐은 그 큰 구멍만큼이나 위악스러운 도시의 공포처럼 느껴진다. 이보다 더 공포스러운 산업화의 몰골이 어디 있겠는가? 이 장면에서 인물은 무너져 내리는 건물을 응시하고, 카메라는 다시 이 두 인물의 뒷모습을 조용히 비춘다. 산밍과 그의 부인은 그러한 공포스러운 순간에서도, 침착한 응시로 일관한다. 시선의 힘은 이러한 순간에 인물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이 장면에서 프레이밍은 두 겹으로 되어 있다. “무너지는 건물<그 건물이 보이는 또 다른 건물의 (파괴된) 구멍< 그 구멍을 통해 ‘무너지는 건물’을 바라보는 두 인물< 이 모든 것을 프레이밍하는 카메라 시선” 파괴된 구멍과 카메라 시선은 동질적인 프레임이라고 하기는 힘들지만, 궁극적으로 인물이 그 화면 속에서 결국 관조자가 될 수밖에 없도록 설정한 인물을 가운데에 둔 이중적 프레임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결국 지아 장커는 이 장면을 통해 (카메라)시선의 힘이 어떤 효과를 발산할 수 있는 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분명히 의도된 시선이지만, 그것이 인물(일종의 매개물)로 하여금 어떤 효과를 불러일으키게 하는 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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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 라이프>의 근간이 되는 다큐멘터리 <동>에서 한 인물 (프레이밍과 관련된)이 등장한다. 다름 아닌 화가다. 이 화가는 산샤에서 노동하는 인물들을 자신의 의도에 맞게 배치시켜놓고 그림을 그린다. 그림에서 노동자들은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연출되었다. 화가는 그림을 그려놓고, 노동자 중 한 명의 가족을 직접 방문해 그림을 보여준다. 이런 와중에 화가는 노동자든, 그의 가족이든 디지털 카메라에 그들과 자신의 모습을 담는다. 화가는 그림뿐만 아니라 ‘실제’인물의 인상까지 놓치지 않으려 애쓴다. 화가는 끊임없이 ‘기록한다’. 그리고 나아가 타자에 의해 ‘기록된다’. 기록되는 화가의 모습과 이동은 화가가 쳐다보고 기록하는 세계와 그것 모두를 담아내는 다큐멘터리적 시선이 모두 담겨져 있다. 즉 <동> 역시 <스틸 라이프>의 구조와 맞물려서, 이중 혹은 다중적 시선이 함께 녹아있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시선의 다중성과 함께 풍경과 인물의 다층적 의미도 함께 섞여 있다.

지아 장커의 시선은 점점 진화하고 있다. 데뷔작에서부터 찬찬히 밟아온 그의 시각은 매체의 감각을 자신이 화두로 삼고자 하는 것에 피상적인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비록 결론에 있어서는 과감한 단정을 피하고는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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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2007)과 <24시티>(2008)에서 시선의 힘은 다시 한 번 압도적으로 발휘된다. <무용>에서 닫힌 (공장내부)공간을 보여주는 롱 테이크는 시선의 방식보다는 시선 안에 선택된 인물들의 모습이 중요하게 처리된다. 의류공업공장 내부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모습은 이 영화가 주제로 삼은 ‘옷’과 관련하여 동시에 등장한다. 떠도는 유령과 같은 시선으로 공장 내부와 노동자들을 비추더니 잠시 후 식당으로 이동하여 식사하는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보건소에서 진료받는 사람들의 모습, 보건소 침대에서 피로를 푸는 사람의 모습등을 담아낸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말 그대로 다큐멘터리적 속성을 노출한다는 것이다. 인물들은 무심하게 움직이는 카메라를 의식하고 때때로 쳐다본다. 카메라는 이에 대해 관조한다. 그러나 디자이너 마케의 스토리로 진입하고 나서는 이러한 의식이 사라진다. 마케는 자신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다는 것을 직시하고 있다. 인터뷰어와 말끔하게 인터뷰하고, 자신의 입장을 또박또박 드러낸다. 그리고 영화는 파리에서 그녀의 의상전시까지 꼼꼼히 기록한다. 그러고는 마케가 차를 몰고 편양으로 진입하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그녀는 자신이 디자인하는 의상에 대한 소신을 위해, 도시화되지 않은 시골의 모습을 통해 잃어버린 기억같은 것을 되새기러 편양으로 간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영화는 그런 그녀의 차를 뒤로 하고 그곳의 허름한 인물을 따라 편양에서의 옷 수선집의 나른한 모습들을 화면에 담아내기 시작한다.

<무용>에서 쓸모없는 것에 관한 시선은, 특히 디자이너 마케에 대한 기록의 시선은 앞과 뒤(화남의류공장과 편양의 옷수선집)의 시선과 완벽히 다른 종류의 시선으로 연출되어 있다. 의류공장과 옷 수선집에서 ‘옷’은 상징이 아니다. 생계의 일부분일 뿐. 그런데 마케에게 있어 옷은 디자이너로서 진지한 태도로 자신의 생각을 집어넣어야 하는 존재적 의미를 담아내고 있다. 그런데 그녀의 전시 제목은 무용(無用)이다. 그녀의 전시가 지아 장커의 같은 제목의 영화와 어떻게 같고 다른지는 편양에서의 옷 수선집에서 인물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비로소 알 수 있다. 편양에서 수선집은 생계형으로도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수준으로 전락한 상태다. 남성 노동자들은 새까만 탄광가루를 뒤집어 쓸 수밖에 없다. 잃어버린 기억을 찾는다는 디자이너 마케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이 우리는 편양의 사람들의 일상을 관조할 수 있다.

그러면 <24시티>에서 관조적 시선은 어떤 방식으로 자리하고 있을까? 이 영화의 시작은 <무용>과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역시 역사속의 공장으로 기억될 청두의 군수공장을 조감하며, 공장 정문에 운집한 노동자들의 모습은 사회주의 중국의 면면이 아직 남아있음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닫힌 공장 내부를 보여주는 카메라 시선은 훨씬 여유있는 패닝을 포함한 롱테이크이다. 그러나 다시 공장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인물 하나 하나를 카메라 앞에 고정시킬 때,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고, 인물들의 개인사에 침잠하게 된다. 어느새 우리는 실제 인물과 허구 인물을 섞어 접하게 되고, 진실과 허구를 중첩시켜 공장 노동자들의 소사(小事)를 공장과 청두라는 도시와 결부시켜 이해하게 된다. 마지막, 자오 타오가 (연기하는) 눈물어린 다짐은 비록 허구이고 연출된 내용들이지만 진실에 입각하여 영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들을 수밖에 없는’ 차원이 된다. 더불어 그녀를 통해 좀 더 변화하는 청두에 대해 혹은 이 시선을 갖고 있는 영화 <24시티>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지아 장커의 시선은 농밀한 롱테이크의 단선적인 의미에서 좀 더 복잡한 구조의 시선으로 변화했다.

2. 변화하는 현대 중국

<24시티>에서 영화 마지막을 장식하는 하나의 문장은 마치 영화의 주제어처럼 느껴진다. “너는 사라졌지만, 너로 인해 나의 삶은 찬란해졌다” 지아 장커는 이 문장으로, 자신이 지금까지 꾸준히 말해왔던 변화되어가는 중국의 모습, 혹은 사라지는 모든 것들에게 찬사를 보낸다. 끊임없이 무너지고 재건되는 공간은, 비움으로 남지 않고 채움으로 성장해간다. 우리가 <소무>와 <플랫폼> <임소요>에서 무수히 보았던 반쯤 무너져 내린 벽돌더미는 <세계>의 미니멀한 메트로폴리스를 향한 준비 단계로 상징된다. 그렇다고 그의 시선이 메트로폴리스 자체로 향하는 것은 아니다. 지아 장커의 시선은 다시 <스틸 라이프>에서 산샤의 개발지역 공간으로 이동한다. 무너져 내리다 못해 물에 잠겨버리는 공간은 개인에게 변화를 종용한다. 혹은 그것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한다. 지아 장커가 항상 카메라를 들고 배회했던 화두는 현대 중국이 직면하고 있는 변화의 이면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매번 ‘개인사’에서 시작되며, 개인사의 조립으로 거대 서사를 암시하고 간파한다.

지아 장커의 영화들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은 “현대화의 중국, 혹은 도시화된 중국”에 대해서 라기 보다는 “현대화되기 직전의 중국, 도시화되기 직전의 중국”에 대해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어떤 영화에서든 자신의 의견을 드러낸 적은 없다. 그러나 도시화를 위시한 중국의 현재에는 분명 관심이 있다. 그가 매번 다루는 주제의 핵심은 변화하는 장소(지역)에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청춘들과, 변화를 맞이해야 할 수밖에 없는 인물들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종종 의미심장한 감독의 태도는 드러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임소요>에서 남자 주인공 두 명은 개인적 문제로 인해 다툼을 벌이다가 많은 사람들이 텔레비전 앞에서 모여 2008년 올림픽 개최지가 어디가 될지 시청하는 장면에서 사람들과 섞인다. 개최지는 중국 베이징으로 발표되고, 많은 사람들은 환호하며 개최지가 자국임을 기뻐하는데 이때 두 남자 주인공은 무표정한 얼굴(전혀 기쁘지 않다는 듯)로 텔레비전을 응시한다. 이때 카메라는 그들을 그대로 둔 채, 폭죽을 터뜨리고 기뻐하는 사람들에게 패닝한다. 두 주인공에게는 올림픽 개최지가 자국인 소식이 어떤 동요도 불러일으키지 않을, 무관심한 소식일 뿐이다. 그런데 영화는 이에 대해 기뻐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비춤으로써 숏을 마무리 한다. 두 청춘에게 국가적 행사를 개인의 기쁨으로 치환할 만큼 ‘변화하는 중국, 발전하는 중국’은 개인의 문제와는 이질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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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도시는 청춘들이 희망을 품을 수 있을 만큼 그들에게 적합한 도시일까. ‘변화된, 도시화된 중국’ 역시 그들에게 희망을 담보하지 못한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자살을 시도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들이 자살에 실패한다고 해서 미래가, 결심이 담보될 수 있는 것일까. <세계>에서 보여지는 결말의 여운이 마치 청춘의 희망적 태도라고 섣불리 단정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몸담고 있는 대도시의 기운이 가상 도시 이상의 의미를 내재하고 있는지 물었을 때 돌아오는 대답이다. 주인공 따오의 외로운 걸음걸이를 뒤로 하고 펼쳐지는 애니메이션의 등장 장면을 상기해 보라. 휴대폰 문자 메시지의 가상 공간 속으로 유영하는 듯, 회색빛 현실이 유채색 컬러로 뒤바뀌는 순간 그것을 청춘의 희망이라고 직시할 수 있을까. 물론 그리 부정적으로만 볼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장면이 자꾸 채색된 실체임을 부인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또 있다. 그 장면이 판타지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따오와 따이셩이 공존하고 있는 공간이 이미 ‘세계 공원’ 내부이기 때문이다. 가상현실이 작동되는 그 공간은 어떤 ‘현실적(realistic)임’과도 어울리지 않을, 그러나 ‘현실적임’으로 드리워져 있는 대도시 속 모방의 공간이다. 지아 장커에게 그러한 현실은 청춘/인물이 종속되어 있는 공간이며 그것이 중국의 현재성을 보여주는 임의의 공간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스틸 라이프>의 결말 장면은 하늘과 건물이미지가 하나의 공간적 의미로 판타지화되어 드러나기도 한다.

지아 장커가 항상 고민하는 화두는,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그러나 이미 변화된 공간과 인물에 대해 아직 집중하지는 않았다. 그는 변화될, 그것을 목전에 두고 있는 공간과 인물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그런데, 사실 중국은 현재, 급속도로 변화를 받아들이고 있고, 진행중이며, 세계의 관심사다. 지아 장커는 세계의 관심사인 중국 - 가장 대표적인 시대적 흐름을 꿰고 있는 -에 결코 시선을 두지 않는다. 중국의 현대를 꿰뚫는 시선에는 그와 같은 이면이 있다는 것을 반드시 상기해야 할 것이다.

3. 변화를 전제하는 ‘사라짐’에 대하여

<스틸 라이프>에서 무너져 내리는 건물들, 일부러 망치로 두드려 가루로 만들어지는 콘크리트 잔해들은 현대화를 향한 일종의 시행착오이지만, 그것은 또다시 파괴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현대화된 도시에서 재건에의 욕망은 가시적 성과와 맞물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지아 장커는 변화되는 것, 그것이 전제하는 ‘없어지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일까? 실로, <스틸 라이프> <무용> <24시티>에서 그것은 중심 화두이다. <스틸 라이프>에서 그것은 역시 어떤 목소리라기보다는 은유적 상징으로 결론 내려졌으므로 조각난 인생을 붙여보려는 개인의 노력으로부터, 사라지고 마는 지역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지는 추측이 가능하다. <24시티>에서 그 추측은 꽤 긴밀한 구성으로 <스틸 라이프>과 궤를 같이 하는 연장선상의 태도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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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식 건물로의 탈바꿈을 시도하기 직전에 유수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군수공장. 시끄러운 기계음으로 역사를 상기하는 대신 노동자들의 언술을 통해 듣는 공장의 히스토리는 마치 미시사(微視史)적 연구를 하듯 그들의 얼굴에 시선이 맞추어진다. 웃다가도, 울다가도 생계의 역사는 개인에서 가족으로, 노동에 얽힌 공동체로 자리를 옮기며 청두라는 지역에서의 공장이 의미하는 바를 찬찬히 알게 해준다. 사실 8명의 인터뷰가 진행되는 시간은 공장이 문을 닫는데 점점 가까이 하는 시간에 다름 아니다. 이들의 이야기가 결국 공장의 사라짐과 어떻게 연관될 수 있을 것인가? “노동을 하면 천천히 늙는다”라고 말하는 어떤 여성의 말을 염두에 둔다면, 이들의 인터뷰는 시간을 지연시킨다. 개인의 시간은 노동이 아닌 ‘회상’ 때문에 공장을 둘러싼 노동의 기억을 환기하고 향수어리게 만든다. 인물들은 각각 앞으로 사라질 공장을 곁에 두고, 개인사를 나열해 나간다. 이것은 개인에게는 ‘지연된 시간’이며 공장으로서는 불필요한 시간이다. 노동이 수반되지 않기 때문이다. <24시티>가 전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청두에 있는 큰 공장 하나가 없어지는 것 뿐만이 아니다. 공장이 없어지고, 노동이 없어지며, 생계수단이 없어지고 인간관계가 사라지는 것이다. 현대화를 위해 희생되는 것들은 실로 엄청나다. 이에 대해 코멘트하는 인물들에게 태도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사적인 내러티브로 진행되고, 인터뷰시간은 공장자체와 거리가 멀어진다. 인터뷰의 목적은 결국 공장 자체에 대한 소회가 아니었던 셈이다. <24시티>를 맞이하게 될, 공장 노동자들의 개인사와 다짐 그 이상이겠는가.

중국 6세대 감독들의 전반적인 공통점은 중국의 개인과 사회적 변화를 동시에 결부시켜 논한다는 점이다. 지아장커, 로우 예, 왕 샤오슈아이 등과 같은 감독들이 보여주는 일련의 영화들은 5세대 감독들이 과거를 통해 현재를 가늠하려는 노력들과 달리 철저히 현재와 개인의 관계에 시선을 집중한다. 그것은 개인 간의 관계와 사랑, 아이들, 노동과 당연히 관련된다. 6세대 감독들은 결코 5세대 감독들이 선택한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지아 장커가 선택한 태도는 인민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그것은 현실을 바라보는 어떤 극단적 태도가 아니다. <플랫폼> <임소요> <세계> 등에서 볼 수 있듯, 지아 장커가 개인과 현실에 대해 말하는 태도는 항상 유보적이다. 물론 그의 영화에서 중국의 현실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고, 문제를 파악하지 아니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관점이 직설적이거나 비판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는 청춘을 통해 그들 자체를 보여주려 하였고, 중국의 이면을 직시하려 노력했다. 예를 들어 <소무>의 마지막 장면에서 소무가 마지막으로 돌려받은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해 보자. 그 장면은 주인공 소무가 처음으로 체화된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순간이며, 동시에 사람들이 능동적으로 멈추어 서서 한 개인에게 시선을 모으는 장면이다. 감독은 자신이 만들고 싶은 시선을 주인공과 타자의 시선의 교환으로 보여준다. 정체된 개인(쭈그려 앉은 소무)과 집단의 시선이 맞교환되는 순간, 엔딩 크레딧으로 넘어가는 이유는 소무의 우스꽝스러움을 부각하려는 것도,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대한 엉뚱함을 부여하려는 것도 아니다. 개인과 집단이 시선을 교환하는 순간은 분명 위계가 성립되기 마련이다. 소무가 그것을 느꼈을지, 그 집단이 소무라는 개인에 대한 어떤 생각이 오갔을지는 알리 만무하다. 어쨌든 이 행위적 관계는 해프닝에서 필요에 의한 시선교환으로 바뀌었고 그 다음은 예측 불가능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시선을 만들어낸, 또는 이 순간에 영화를 끝내버린 감독의 태도이다. 지아 장커는 결론을 미리 정해두지 않는다. 그는 끊임없이 ‘어떻게’에 대한 영화적 고민이 앞서있는 감독이다. 시선이든, 변화든, 사라짐이든 모든 것은 태도 속에 담겨있다. 그것은 하나의 풍경으로, 응시로 대상화될 뿐이다.
by 김다현(vovovd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