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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마을 그리고 엄마와 아들. <마더>가 택한 저릿한 모성애 스토리는 후미진 소도시 마을에서 다시 시작된다. 마더(mother), 신파일까? 의심될 즈음 영화는 으레 상투적일 것만 같은 모자관계의 구도 속에 서스펜스를 끼워 넣는다. 볕 좋은 날,여학생 시체가 발견되면서, 도준(원빈)은 살인 용의자로 구속된다. 알고 있었고 예상 가능했던 엄마의 신파 코드는 도준의 무죄 입증을 위해 요긴하게 쓰이지만, ‘바보 도진이 벌였을? 아니면 다른 제3자가 벌였을 살인행각’에 대한 의심은 그러나 처음에 흘렀던 감정선을 바꿔치기 한다.

봉준호의 ‘실종’ 과 ‘살인’

봉준호는 그가 만든 <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 과 <괴물> 에서 항상 ‘실종’과 ‘살인’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그의 영화에서 핵심적인 모티프는 실종과 살인사건이며, 동물이든 사람이든 없어지고 죽어버렸을 때 살아남은 인물들은 항상 그 미스터리를 풀기위해 백방으로 노력한다. 그런 이유로 세 편의 영화는 진실에 대한 집착을 강하게 드러내면서 한국사회에서 실종과 죽음이 정치적으로 어떻게 알레고리화되어 가는 지 보여주었다. 이는 또한 우리 사회를 복합적으로 고심하게 하는 또 하나의 미스터리를 던져주기도 한다.

그는 <플란다스의 개>와 <괴물>에서 동물(혹은 괴생물체)의 죽음과 파멸을 통해 대도시의 부조리를 드러낸 바 있다. 두 영화에서 동물은 그 존재만으로 인간의 추악한 면모를 효과적으로 제시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반면 <살인의 추억>과 <마더>는 살인사건을 둘러싼 농촌사회의 미스터리를 이용하여, 인간 사이의 공존이 매순간 미끄러질 수밖에 없는 부정적 테제를 드러낸다. <마더> 역시 <살인의 추억>과 맞물려 미제로 끝나버릴 수밖에 없는 살인사건에 대한 끊임없는 애착을 보여준다. 전자가 후자와 비교해볼때 다른 점은 공적인 의미의 사건 수사가 아닌, 사적인 의미를 가진 내러티브라는 점이다. 엄마 혜자가 추진하는 사적인 의미의 수사는 피의자의 보호자인 엄마가 모성애를 끌어안고 수사망에 진입했을 때 그 추진력을 말한다. <마더>는 모성애를 필두로 한 엄마의 추진력을 보여주지만 그 이면에는 예상치 못할 부조리가 숨어있다.

마더, 모성애보다 모자관계

<마더>가 펼쳐놓은 그림들은 봉준호의 이전 영화들을 회상하면, 덜 알레고리적이고 덜 정치적인 느낌이다. 이 영화에서는 유독 엄마와 아들 사이의 묘한 긴장관계를 하나의 살인사건을 빌미로 하여 보여주기 때문이다. 끈끈한 혈연관계가 과연 모성애에 대한 정당성에 대해 떳떳한가, 뭐 그런 질문에는 그다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아들 도준에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까 일거수 일투족을 주시하고 있는 엄마의 눈빛은, 단순히 아들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가짐을 앞선 다른 이유가 있는 듯하다. 예를 들어 아들과 엄마가 함께 잠을 자고, 엄마가 아들에게 닭고기를 먹이고, 한약을 먹이고, 아들이 소변을 볼때 그의 성기를 바라보는 엄마의 모습에서 드러나는 근친상간적 의심은 그런 다른 이유를 뒷받침한다.

그러한 근친상간적 의심은 가족 이기주의의 한 부분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래서 맹목적인 내리사랑이라는 '모성애' 자체는 오히려‘모자관계’로 설명되어야 하는 이해방식을 요구한다. 이 영화에서 엄마와 아들은 늙은 육신과 미숙한 정신으로 짝지어진, 지워진 섹슈얼리티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모성애를 말하기에 앞서 '모자관계'를 먼저 말해야 하는 이유는 기이한 근친적 모자관계가 모성애를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봉준호는 자칫하면 뻔한 스토리에 캐릭터(김혜자)만 앞세운 영화가 될 소지가 농후했는데도 불구하고, 엄마를 아들의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과정 내부로 끌고 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실 아들의 살인행위를 인정하지 않는 엄마의 그릇된 모성애적 의식이다. 그릇된 엄마의 의식이 아들로 하여금 자신의 사랑을 일깨우려 하지만, 아들은 자꾸 엄마의 행위를 읽어내지 못한다. 이 기묘한 엄마와 아들의 관계는 엄마가 아들에게 전하는 모성애의 의미를 자꾸 퇴색되게 만든다. (어쩌면 애초부터 기이한 모자관계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바보’ 도준이 말 그대로 바보로 여겨지는 순간 적어도 엄마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러나 도준이 엄마의 모성애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순간(예를 들어 어렸을 적 엄마가 자신을 농약이 든 박카스병을 마시게 해 죽이려고 했다는 것을 기억해 낸 순간)에는 다시는 자신을 보러 오지 말라고 엄마를 밀어낸다. 이때 도준에게 붙어있던 ‘바보’라는 호칭은 엄마에게 옮겨간다. 아들의 무죄를 발벗고 나서려는 순간이 이때이기 때문이다. 엄마는 아들과의 관계 회복을 위한 다짐에 총력을 기울인다. 이 끈끈한 혈연관계에서 줄곧 미끄러질 수밖에 없는 대상은 어머니-엄마다. 그녀는 아들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것일까.

도준과 혜자는 상투적인 사고방식으로 이해될 수준의 모자관계이지만, 그렇다고 명확한 이야기를 갖춘 모자관계도 아니다. 도준의 기억력이 복귀되는 순간 알게 된 수년전의 사건, 그것은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벌어진 비극적 사건일 것이다. 그 사건은 모자 관계에서 어린 아들에게 지워진 기억이었을 것이라고 자부하는 어머니의 치부중 하나이다. 엄마가 아들과 동반 자살을 행하려고 했다는 것이 아들에게는 단지 생명의 위협이었으며, 그것을 기억해 낸 순간 엄마는 모성에의 위협을 느낀다. 결국 악착같이 아들의 무죄를 규명해보려고 하지만 결국 아들의 유죄를 재확인하는 형국에 이른다. 엄마는 ‘바보’엄마가 되고, 온전한 엄마로서의 역할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해진다. 그녀가 숲에서 춤을 출 수밖에 없고, 그 숲이 정체를 잃은 공간으로 처연히 펼쳐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되짚는다면 언제까지나 그것은 실패한 모성애의 자의식에 비롯된 것일지 모른다. 우리는 보지 않았고 알 수 없지만 그렇게도 아들에 대한 집착을 보이는 엄마의 추진력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도준이 그랬듯, 엄마도 '우발적'이라는 단어 아래 포섭될 것인가? 도대체 이들 모자가 궁극적으로 살아가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 처연하고도 가여운 모자는 왜 살인이라는 비윤리적 행위에 의해 서로가 서로를 들여다볼 수밖에 없을까. 그러고 보면, 이 영화는 '마더'이기 보다는 '아들과 엄마' 이다.

정치적 부조리의 재설정

봉준호가 그렇게 부여잡고 있는 모티프의 궁극적 목표는 미스터리를 규명해내는 것이 아니다. 줄곧 그래왔다. 실종이나 죽음은 그의 영화에서 유비관계처럼 보인다. <마더>에서 공식적으로 공론화되지 못한 채 끝맺어지는 결말의 의미는 그래서 눈여겨 볼만 하다. 여기서 등장하는 농촌 사회 혹은 농촌이라는 공간은 결코 공적인 화두로 꺼내어지지 않은 채 사적인 영역에서, 모자관계(가족 내부)에서 심리적 갈등과 좌절로 끝을 맺고 만다. 과연 이를 농촌사회의 불안이자 알레고리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인가? 이제까지 봉준호의 영화에서 볼 수 있었던 정치적 의미의 부조리는 <마더>에서 사적인 가족구조 내부의 부조리로 재설정된다. 모성애라는 숭고한 인간애는 엄마에게만 존재할 수도, 아들만이 존재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엄마와 자식의 결합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좀 더 큰 테두리의 사회적 맥락에서 살인행위를, 가족 내부에서 발견하고 자연스럽게 숨겨야 할 수밖에 없는 행위로 치환할 수밖에 없는 행위. 이것을 이 영화에서 모성애라고 칭한다면, 모성애는 "죄의식에 내재된 사랑인가, 사랑을 전제로한 죄의식인가" 의문을 갖게 한다. 윤리적 정당성에 맞서지 못하는 <마더>에서의 모성애는 결국 스스로 그것의 한계를 드러내는 엄마의 춤사위로 승화된다. 실종과 살인을 전면에 내세우고 그것을 끊임없이 미결로 만드는 봉준호의 화법은 모자관계의 존재 가능성 마저도 위협적 결말로 안내함으로써, 가족 이데올로기에 대한 새로운 부조리를 설정한 것은 아닐지.
by 김다현(vovovd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