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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http://www.yhyd.org/]]></title>
        <link><![CDATA[http://www.yhyd.org/]]></link>
        <description><![CDATA[]]></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pubDate>Fri, 09 Jan 2009 23:21:11 +0900</pubDate>
        <totalCount>429</totalCount>
                <item>
            <title><![CDATA[스페인 영화제: 카를로스 사우라 특별전 (2008. 12. 16. ~ 12. 31.)]]></title>
            <author><![CDATA[영화연대]]></author>
            <link><![CDATA[http://www.yhyd.org/9319]]></link>
                        <description><![CDATA[<div class="xe_content"><FONT size=2><FONT color=#ff0000><FONT color=#000000><img src="http://img.todaystory.net/img/944b8e757391a11ce00b7d410ec59ddf.gif" alt="944b8e757391a11ce00b7d410ec59ddf.gif" title="944b8e757391a11ce00b7d410ec59ddf.gif" width="915" height="250" style="" /><BR /><BR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가 운영하는 시네마테크 전용관 서울아트시네마에서의 서울 상영과 더불어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회원 지역 단체 주최로 전국을 순회하며 상영될 이번 영화제는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주목 받는 스페인의 거장 카를로스 사우라의 대표작을 소개한다.<BR /><BR />심미적이고 양식화된 ‘춤 3부작’ &lt;피의 결혼식&gt;(1981), &lt;카르멘&gt;(1983), &lt;마법사를 사랑하라&gt;(1986)를 만들어 국제적인 성공을 거두어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는 감독 카를로스 사우라는, 실은 고유한 창작론과 예술적 실천으로 프랑코 독재를 정면 돌파한 ‘참여’ 감독이다. 그는 초기의 대표작 &lt;사냥&gt;(1966)에서 현대영화의 진정한 걸작 중 한 편인 &lt;까마귀 기르기&gt;(1975)에 이르기까지 질곡 많았던 스페인 현대사를 은유와 상징 속에 담아내며 프랑코 정권을 비판하는 영화를 꾸준히 만들다, 프랑코 사후 표현의 자유가 확대되자 초년의 관심사로 돌아가 스페인의 전통예술을 스크린에 담아내는 등 다채로운 작품 세계를 펼치고 있다.<BR /></FONT><BR />★시네 토크<BR /><BR /></FONT><FONT color=#006699>12월 20일(토) 14시 &lt;까마귀 기르기&gt; 상영 후 </FONT><BR />폭력과 죽음 -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영화평론가) <BR /></FONT><FONT color=#006699><BR /><FONT size=2>12 월 21일(일) 14시 &lt;사촌 앙헬리카&gt; 상영 후</FONT></FONT><FONT size=2> <BR />역사의 트라우마와 카를로스 사우라의 영화- 임호준(스페인 마드리드대학교 문학박사) <BR /><BR /><FONT color=#006699>12 월 28일(일) 14시 &lt;보르도의 고야&gt; 상영 후 </FONT><BR />고야와 영화 - 한창호(영화평론가) <BR /><BR /><FONT color=#cc6600>※시네 토크는 앞서 상영되는 작품의 입장권을 소지하신 관객에 한하여 선착순 무료입장하실 수 있습니다</FONT> <BR /><BR /><BR /></FONT>
<P><FONT size=2><STRONG><FONT color=#339966>★지역 상영 일정</FONT></STRONG><BR /><FONT color=#666666>(지역 상영주체 사정에 따라 일정이나 상영관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FONT><BR /><BR /><STRONG><FONT color=#cc0033>전주</FONT></STRONG> : 2008년 12월 2일(화) ~ 12월 4일(목), 프리머스 송천 5관 (문의: 063-282-3176) <BR /><FONT color=#cc0000><STRONG>제주</STRONG></FONT> : 2008년 12월 12일(금) ~ 12월 14일(일), 롯데시네마 서귀포 2관 (문의: 064-702-1191, </FONT><A href="http://www.cineisland.org/" target=_blank><FONT size=2>www.cineisland.org</FONT></A><FONT size=2> )<BR /><FONT color=#cc0000><STRONG>대구</STRONG></FONT> : 2009년 1월 5일(월) ~ 1월 11일(일), 대구 동성아트홀 (문의: 053-425-2845, 네이버 · 다음카페 “동성아트홀릭”)<BR /><FONT color=#cc0000><STRONG>대전</STRONG></FONT> : 2009년 1월 14일(수) ~ 1월 18일(일), 대전아트시네마 (문의: 042-472-1138, </FONT><A href="http://www.cinei.org/" target=_blank><FONT size=2>www.cinei.org</FONT></A><FONT size=2> )<BR /><FONT color=#cc0000><STRONG>광주</STRONG></FONT> : 2009년 1월 21일(수) ~ 1월 28일(수), 광주극장 (문의: 062-224-5858, </FONT><A href="http://cafe.naver.com/cinemagwangju" target=_blank><FONT size=2>cafe.naver.com/cinemagwangju</FONT></A><FONT size=2> )<BR /><BR />[상영작품]<BR /><BR />01. 사냥 La Caza (카를로스 사우라 Carlos Saura&nbsp; 1966,84min,스페인,B&amp;W)<BR />02. 사촌 앙헬리카 La Prima Angelica (카를로스 사우라 Carlos Saura&nbsp; 1974,100min,스페인,Color)<BR />03. 까마귀 기르기 Cria cuervos (카를로스 사우라 Carlos Saura&nbsp; 1976,107min,스페인,Color)<BR />04. 카르멘 Carmen (카를로스 사우라 Carlos Saura&nbsp; 1983,102min,스페인,Color)<BR />05. 마법사를 사랑하라 El Amor brujo (카를로스 사우라 Carlos Saura&nbsp; 1986,98min,스페인,Color)<BR />06. 아, 카르멜라! Ay, Carmela (카를로스 사우라 Carlos Saura&nbsp; 1990,103min,스페인/이탈리아,Color)<BR />07. 탱고 Tango&nbsp; 카를로스 사우라 Carlos Saura (1998,115min,스페인/아르헨티나,Color)<BR />08. 보르도의 고야 Goya in Bordeaux (카를로스 사우라 Carlos Saura&nbsp; 1999,107min,스페인/이탈리아,Color)<BR />09. 일곱 번째 날 El Septimo dia (카를로스 사우라 Carlos Saura&nbsp; 2004,103min,스페인,Color)<BR />10. 이베리아 Iberia (카를로스 사우라 Carlos Saura&nbsp; 2005,95min,스페인/프랑스,Color/B&amp;W)<BR />11. 파두 Fados (카를로스 사우라 Carlos Saura&nbsp; 2007,90min,포르투갈/스페인,Color)<BR /><BR /><BR />기타 자세한 상영일정은 </FONT><A class=bold onclick="window.open(this.href);return false;" href="http://www.cinematheque.seoul.kr/"><FONT size=2>http://www.cinematheque.seoul.kr</FONT></A><FONT size=2>&nbsp;참고.<BR /></FONT></P></div>]]></description>
                        <pubDate>Wed, 24 Dec 2008 23:33:46 +0900</pubDate>
                        <category><![CDATA[스페인]]></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008 서울독립영화제 관람기1]]></title>
            <author><![CDATA[영화연대]]></author>
            <link><![CDATA[http://www.yhyd.org/9295]]></link>
                        <description><![CDATA[<div class="xe_content"><P align=center><IMG src="http://img.todaystory.net/img/22adf58d24cfa986d09184c938e2dcde.jpg" align=center><BR /></P>
<P class=bt11>서울독립영화제 2008 '상상의 휘모리'가 개막했다. 오늘은 이 중 단편경쟁 7섹션에 묶인 네 편의 영화를 보고 왔다.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어 이 섹션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단지 시간이 잘 맞았을 뿐이다. 사실 이런 방식으로 영화를 골라 본다는 것 또한 서독제만의 매력이자 특권일 것이다. 낯선 이름의 감독들, 그리고 그보다 더 낳선 제목들, 네 줄을 넘지 않는 시놉시스 등만 가지고는 영화에 대해 거의 알 수 없지 않은가. 물론 영화정보가 더 친절하게 제공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다. 어차피 마음먹고 신작 독립영화를 볼 참이었다면 그저 좌석에 몸을 묻은 채 무슨 영화가 나올지 기다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영화가 자신의 기호나 취향에 부합할지 어떨지는 순전히 운에 맡기면 된다.(그러나 오늘 조간신문에 실린 내 운세는 불행히도 “매사에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말 것”이었다.)</P>
<P class=bt11>교미기-1.기이한 꿈&gt;부터 시작해보자. 장은주 감독이 16mm필름으로 작업한 이 영화는 ‘필름’이 주는 효과를 제대로 활용한 작품이다. 다수의 단편영화가 HD로 제작되는 요즘이기에 필름이 주는 고유한 매력을 살려 신중하게 찍어낸 영상이 더욱 눈에 띈다. 야생다큐멘터리에서나 더 많이 쓰일법한 카메라 워킹, 현실성과 구체성을 삭제한 배경, 소수의 등장인물과 간명한 내용은 역설적으로 다양한 해석과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제목이 주는 특유의 느낌 역시 영화의 톤을 주조하는데 효과적으로 기여하는 듯하다. 그러나 현실과 환상의 모호한 경계를 이야기하던 영화를 다 보고나면 그 꿈에서 깨어난 이후의 순간이 더 궁금해진다. 은유의 대상조차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나로서는 이 영화가 어쩐지 거대서사의 프롤로그처럼 느껴졌달까.</P>
<P class=bt11>가장 유쾌했던 작품은 박성국 감독의 &lt;야설작가 영범씨의 글짓기 지도법&gt;이다. 숨어 쓴 야설로 더 유명한 문학청년이 엉뚱하고 순수한 학생을 과외하면서 겪는 에피소드가 주내용인데 우선 두 배우의 연기가 일품이다. 특히 부잣집 도련님 동재로 출연한 남학생의 ‘해맑은’ 미소는 왠만해서는 잊기 어려울 듯하다. 20분을 갓 넘는 짧은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내러티브가 몇 번의 변곡점을 넘나들며 무리없이, 그리고 깔끔하게 정돈된다. 독특한 인물이나 아이러니한 상황이 건강하게 유머를 구사하고, 다소 과장되기는 했지만 음악이나 대사의 사용 또한 코믹하다. 사실 &lt;야설작가-&gt;는 네 편의 영화 중 장르의 규칙에 가장 충실한, 그래서 가장 모범적으로 보이는 영화였다. 그러나 이 때문에 &lt;야설작가-&gt;는 ‘야설’을 이야기함에도 불구하고 너무 ‘착한’ 영화가 되고 말았다.</P>
<P class=bt11>반면 가장 무겁고 어두운 영화가 &lt;피쉬&gt;다. 일단 이 영화에는 불편한 장면이 잦다. 물고기공포증이 있다는 노홍철이라면 이 영화를 보고 몸서리를 칠지도 모르겠다. 어항에 갇혀있거나 바닥에 내쳐진, 혹은 어탁이 되어(고)있는 물고기와 여러 번 눈을 마주쳐야 하니 말이다. 더욱 무서운 것은 물고기가 상징하는 연약한 인간이다. 이 사회에서 가장 공격받기 쉬운 위치에 있는 인물, 젊은 여성 은진이 영화 속 물고기처럼 관찰되고 이용당하며 내쳐진다. 그리고 누구도 은진을 도와주지 않는다. 때때로 동정할 뿐이다. 다만 영화는 관객에게 은진을 직시하라고 요구한다. 별로 보고싶지 않은 형상의 물고기를 지나치게 자주 봐야하는 것만큼이나 말이다. 빈번한 클로즈업과 (사건이 아닌)인물 중심의 서사가 눈에 띄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또 이러한 태도가 내러티브의 개연성을 떨어뜨리기도 한다. 이렇듯 &lt;피쉬&gt;는 결코 쉽게 볼 수 있는 영화가 아니다. 우리가 발딛고 있는 현실에서 충분히 일어날 법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그 결말이 대단히 비극적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P>
<P class=bt11>추천하고 싶은 작품은 강진아 감독의 &lt;네쌍둥이 자살&gt;이다. 우선 소재나 연출이 무척 신선했다. 또 영화를 볼 땐 언제나 끝(엔딩 크레딧 포함)까지 집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 주기까지 하니 여러모로 반가운 영화다. 달라보이고 싶은, 그리고 실제로도 다른 네쌍둥이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인데 이 네쌍둥이와 병렬적으로 존재하는 여고생들이 있어 영화에 더욱 힘이 실린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결국 똑같은 사람으로 보였던 네쌍둥이의 삶과 죽음은 지나치게 우습지도, 엄숙하지도 않다. 이들을 기억하는, 남겨진 여고생들의 태도 또한 마찬가지다. 고생 끝에 화음을 맞춘 “푸니쿨리푸니쿨라”의 합창소리가 마침내 진혼곡으로 들릴 때, 네쌍둥이의 자살은 그제서야 제 의미를 찾는다. 또 뉴스클립이나 시사다큐멘터리에 대한 패러디 역시 재미와 의미를 모두 성취한다는 점에서 눈여겨 볼만하다. 일단은 이 영화를 한 번 보는게 좋겠다. 초대형 예산이나 스타보다 중요한 것이 결국은 아이디어와 연출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될테니 말이다.(mimi)</P>
<P class=bt11>덧. 서울독립영화제 2008 '상상의 휘모리'는 12월 19일(금)까지 계속됩니다. 바쁜 연말연시, 잠시나마 여유가 생긴다면 꼭 인디스페이스를 찾아가보시길!</P></div>]]></description>
                        <pubDate>Mon, 15 Dec 2008 15:21:46 +0900</pubDate>
                        <category><![CDATA[독립영화가좋다]]></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전쟁을 경유하는 영화들 - 기억의 재구성은 어떻게 유효해지는가]]></title>
            <author><![CDATA[영화연대]]></author>
            <link><![CDATA[http://www.yhyd.org/9276]]></link>
                        <description><![CDATA[<div class="xe_content"><P align=center><img src="http://img.todaystory.net/img/04c02036962376ea45ff4ce30eeffc27.jpg" alt="04c02036962376ea45ff4ce30eeffc27.jpg" title="04c02036962376ea45ff4ce30eeffc27.jpg" width="480" height="679" style="" /></P><BR />
<P class=st11>전쟁을 경유하는 영화들 - 기억의 재구성은 어떻게 유효해지는가<BR />-&lt;바시르와 왈츠를&gt;, &lt;아버지의 깃발&gt;, &lt;이오지마에서 온 편지&gt; 를 중심으로</P>
<P class=bt11 style="MARGIN-LEFT: 25px; MARGIN-RIGHT: 25px">1971년 참호속의 영국병사들, “육안에 제시되는 한 전장은 전체도, 길이도, 넓이도, 깊이도, 차원도 형태도 지니지 않았다. 그것은 무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각 병사 집단은 일반적 상황에 대한 유리하고 행복한 무지 속에 자기의 작은 전투를 계속해서 벌이고 있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종종 그들은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폴 비릴리오,&nbsp;&nbsp;&nbsp; -「전쟁과 영화」55p</P>
<P class=bt11>&lt;바시르와 왈츠를&gt;(2008)에서 주인공은 1982년 팔레스타인 대학살 현장 속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당시를 기억해내지 못한다. 영화는 주인공이 “자신이 왜 그 때를 기억해내지 못하는가?” 라는 의문에서 시작한다. 그의 기억은 철저히 타자에 의해 재구성되고, 되살아나며, 불현듯 과거 속으로 침잠하게 된다.</P>
<P class=bt11>기계적 매커니즘으로서의 영화는, 어떻게든 ‘현실성’을 담지해내려고 한다. 철저히 픽션이되 오롯이 픽션적으로만 구성되지 않는 형식인 영화. &lt;바시르와 왈츠를&gt;은 그런 점에서 그 리얼리티를 부정한다.(그러나 마지막에서 그 부정은 뒤집어진다) &lt;바시르와 왈츠를&gt;이 선회하는 실제 사건과 개인의 기억은 실제처럼 구성된 애니메이션으로 재현된다. 영화의 주인공은 스스로 결론을 내리지 않은 채 당시 자신이 멈춰서서 응시했던 순간만으로 모든 기억의 재구성을 종결짓는다. 학살에 대한 자의식도, 반성도, 혹은 건조한 사색도 멈춘 채, 인터뷰자들의 목소리로 자신의 체험을 복귀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색된 인물들은 실제 사건에 대한 언술을 포기하지 않는다. 마지막에 붙은 다큐 화면은 인간의 잔인함을 똑바로 볼 수 있도록, 느낄 수 있도록 한다. 그것은 최종적으로 &lt;바시르와 왈츠를&gt;에서 택한 애니메이션의 방식이 (분명 친연성을 갖지 못하기는 하지만) 현실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P>
<P class=bt11>인간의 기억은 제멋대로다. 기억하고 싶지 않다면 자연스레 망각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때에 따라 아니기도 하지만). 경험의 주체인 트라우마화된 신체는 고통을 겪고, 그를 둘러싼 타자의 경험은 기억내부에서 밀려난다. 그만큼 인간은 철저히 이기적인 습성을 가진다. 특히 그 이기성이 가장 비인간적으로 드러나는 때가 바로 ‘전쟁’일 것이다. 전쟁은 한 명의 목숨과 수천, 수만명의 목숨의 의미를 무화시킨다. 그 가운데서 전쟁을 겪는 개별 주체는 ‘기억이 지속될 것’임을 직시하지 못한다. 매 순간 그들은 스스로를 지켜내야 하는, 적을 쓰러뜨리고 살아있음을 증명해야 하는 시공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lt;바시르와 왈츠를&gt;에서 주목할 수 있는 부분은, 전쟁과 학살을 경유했던 주체가 ‘기억이 지속될 것’임을 무의식적인 자기부정에 의해 망각했다가 어떤 계기로 다시 재구성하려는 의지를 드러낸다는 점이다. 숱한 전쟁영화에서 주체는 트라우마를 안고 전쟁을 회상하거나 아픔을 공유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전쟁의 순간순간을 나열한다. 영화 저변에는 ‘나는 한시도 (전쟁)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라는 단단한 대전제가 깔려있다. 전제가 명백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 그것과의 싸움이기 때문이다.</P>
<P class=bt11>모든 전쟁영화에서 인간의 죽음은 처절한 자기애가 투영된 사명감의 표식으로 그려진다. 그것은 당사자에게도 타인에게도 모조리 성립하는 전투의 극단적 결과이기도 하다. 죽음은 인간에게 영웅임을 자인하는 수단이기도 하고, 희생의 결과물로 지칭되기도 한다. 또는 결코 피할 수 없는 제의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처럼 재현된 모든 인간의 죽음은 처절한 싸움을 위한 필수조건에서, 유약한 인간이 마지막으로 버둥거리는 삶의 명예로운 포기로 이어진다. 죽어가는 이들을 지켜보는 주체들은 처절하게 그 순간을 울분으로 대응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전장에 내맡겨진 전사이며 희생자일 뿐 죽음의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철저하게 울상 진 얼굴로 숨진 전우를 버려둔 채 앞으로 전진하며, 자신이 순식간에 그것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죽음은 ‘울분’에서 ‘체현’으로 탈바꿈한다. 이때서야 전장에서 죽음이라는 것은 온전하게 재현되는 것처럼 규정된다.</P>
<P class=bt11>&lt;바시르와 왈츠를&gt;은 죽음에 대한(혹은 학살에 대한) 재현을 위와 같은 방식으로 구성하지 않는다. 주인공 나와 인터뷰자들은 울분 대신 ‘응시’ 와 ‘환상’으로 타인의 죽음을 직시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당시에 벌어졌던 일에 대해 개개인의 기억들이 각각 어떻게 되살아나고 있는지에 주목한다. 주인공은 자신이 망각했던 기억의 순간으로 다가가되, 진실규명은 인터뷰자들 각자의 태도에 맡겨 버린다. 예를 들어, 대학살을 기억하는 결정적인 ‘증언’에 부합하는 론 벤 이샤이 기자의 말은 진실에 가장 가깝지만, 전쟁 당시를 기억하는 카미 크난의 말은 사실보다는 꿈(환상)에 무게가 실려 있다. 철저히 진실에 맞닿으려 하기보다는 개인의 기억 자체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인공이 오히려 생생히 기억하는 부분이 휴가기간이었다는 점은 납득이 된다. 전쟁과 학살이 역사적(공적) 사건 이라면, 휴가는 지극히 개인적인 시간이다. 인간의 무의식 속에서 개인적 기억은 공적인 그것 보다 더 중요하게 자리 잡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가 인터뷰자들의 기억을 더듬으며, 되살아나는 망각했던 기억들은 대부분 가해자이지만 그것을 인정할 준비가 되지 않은, 사소한 개인(들)의 일부 기억임을 깨달을 수 있다.</P>
<P class=bt11>즉 &lt;바시르와 왈츠를&gt;은 하나의 주체가 망각한 전쟁에 관한 기억을 복구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명백하게 자기반성으로 이어질 수 있겠는가’ 에는 의문을 남긴다. 주인공이 레바논 학살 현장에는 있었지만, 직접적 가해자는 아니었기에 그가 응시했던 끔찍한 순간들은 삶의 기억장치에서 서서히 밀려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개인에게 그토록 판단하기 어려운 순간들은 다분히 서사적이고 공적인 시간으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기억장치에서 사적인 기억들로 자리바꾸기가 이루어진다. 또한 그 순간들은 인간이 얼마나 사적 시간을 공적 시간으로부터 방어하고 있는지 알 수 있게 한다. 주인공이자 감독인 아리 폴만은 그런 기억의 복구를, 타자(보아즈)의 꿈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시작한다. 26마리의 개가 항상 보아즈에게 달려와 죽일 듯 짖어댄다는 꿈의 내용은 주인공의 무의식을 건드린다. 이는 분명 망각되어 굳어버린 주인공의 기억 장치를 다시 움직이게 하는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당시 사건을 ‘스스로’ 기억해내지 못한다. 타인의 기억을 통해 불러내는 망각되어버린 기억들. 그것들이 바로 이 영화에서 전쟁을, 학살의 실체를 밝히는 언술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이 비록 개개인의 자의로 벌어진 것이 아닐지라도, 무기력하게 전쟁 자체를 받아들여야 할지라도, 과거형이 되어 버린 무형의 기억들은 살아남은 자들의 발화를 통해서만 재인식할 수 있다. 아리 폴만은 기억으로의 복귀를 ‘재인식의 과정’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채색된 실체에서 인식을 멈추지 않고 실체들(다큐 화면)을 과감히 불러낸다. 스스로의 힘으로 재인식이 불가능하다면, 타인을 통해서라도 망각을 경계하려는 아리 폴만. 그는 그러한 태도에 입각해 자신의 기억을 되살리려 하고, 되살린 기억들을 정리해낸다.</P>
<P class=bt11>&lt;바시르와 왈츠를&gt;이 망각된 기억들을 복구하려 하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면,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2006년과 2007년에 내놓은 &lt;이오지마에서 온 편지&gt;와 &lt;아버지의 깃발&gt;은 전쟁의 기억을 ‘서사화’한다. 두 영화는 전형적인 전쟁영화처럼 보이지만, 1944년 이오지마 섬에서 벌어졌던 미군과 일본군의 전투를 각각 양 쪽의 입장에서 재현해내는 시도를 선보인다.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두 영화를 통해 ‘기억은 기본적으로 추적할 수 있다(해야 한다)’는 전제를 깔아놓는다. 게다가, 같은 시공간에서 벌어졌던 이오지마 전투는 미군과 일본군 개인에게 동일한 기억이 될 수 없는 공적(公的)이면서도 사적(私的)인 기억이 될 수밖에 없다고 결론 내린다.</P>
<P align=center><img src="http://img.todaystory.net/img/6c818d24af62c3f46c299d83296d8f9d.jpg" alt="6c818d24af62c3f46c299d83296d8f9d.jpg" title="6c818d24af62c3f46c299d83296d8f9d.jpg" width="746" height="550" style="" /></P>
<P class=bt11>먼저 &lt;이오지마에서 온 편지&gt;에서 설정한 주인공 사이고(니노미야 카즈나리)가 아내에게 쓴 편지(의 내용은 그의 목소리로 내레이션된다)는 이오지마 전투를 떠올릴 수 있는 기억의 수단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사이고의 편지는 영화적 현재에서 편지 뭉치로서만 비춰질 뿐 편지의 내용은 그것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영화적 과거에서만 등장한다. 영화는 ‘이오지마에서 발견된 편지’가 이오지마에서 사이고가 고국의 아내에게 쓴 편지라는 것을 명시한다. 그러나 그 편지는 그녀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동굴 내부에 서류들과 파묻혀 있다가 꽤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꺼내어진다. 그래서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Letters From Iwo Jima)’ 라는 제목은 의미심장하다. 편지 등이 묻힌 땅을 파는 오프닝으로 시작한 영화는, 육중한 이오지마 전투 서사가 장시간 이어지고, 결말부에 이른다. 어떻게든 살아남은 사이고의 처연한 얼굴 다음으로, 땅에서 파낸 편지 뭉치는 그 출처가 언급되지 않는다. 그렇다 해도 편지뭉치는 이미 중간 서사에서 사이고가 써내려갔던 그 편지들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편지뭉치는 타인에 의해 다시 펴지지는 않고, 그 내용의 부분 부분만이 주인공의 내레이션으로만 전달될 뿐이다. 개인의 기억은 역사적 사건의 현장에서 사적(私的)인 공간으로 ‘전송 되어야 할’ 목적을 지닌 종이 조각으로 인해 구성되지만 그 사이의 간극은 매우 압축적이다. 사이고가 “살아있는 것에 감사해”라는 말을 편지에 적는 동시에 그의 목소리로 내레이션되는 편지 내용은, 사이고라는 주인공이 의도했던 전송 기능을 하지 못한다. 즉 이 영화에서 편지라는 기억 수단은 과거형이 되어버린 시공간을 초월한 채 재등장하지 않은 주체의 기억으로 간주된다.</P>
<P class=bt11>그러면 &lt;아버지의 깃발&gt;은 어떠한가? 미국(군)의 입장에서 전개되는 이 영화는 다층적인 과거형과 현재형으로 이오지마 전투를 둘러싼 또 다른 개인의 기억을 재현한다. 이오지마 전투에서 살아남은 전사 중 한 사람인 노년의 존 닥 브래들리는 쓰러지기 직전 이오지마 전투 당시 죽은 전우의 이름을 부른다. 아들은 그 이름을 추적하는 과정 속에서 아버지가 겪었던 이오지마 섬에서의 일들을 알게 되고, 그의 동료를 찾아 당시 이야기를 듣는다. 본격적인 그 이야기는 영화 내내 플래시백으로 두 겹의 과거형을 넘나든다(이오지마 섬에서의 전투와 미국에 돌아온 직후의 이야기). 아들은 유명한 깃발 사진에 얽힌 기막힌 사연들부터 현재로 이어진 아버지의 삶을 대신 정리한다. 후손들에게 ‘아버지가 꽂은 깃발’의 의미는 전쟁의 승리자임을 자인하는 것과 별개인 전사자들의 생을 기리는 진정한 인간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 역시 죽어가는 브래들리의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가 아닌, 그의 아들이 추적해낸 서사이다. 그 서사는 다시 아버지의 전우인 레니 개그논 등에게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여 재구성된다. 전쟁을 둘러싼 기억은 당사자가 삶을 마감함으로써 후손이 기려야 할 숙제로 남았고, 그것은 &lt;이오지마에서 온 편지&gt;와 마찬가지로 과거형과 무관한 현재 상태에서 다듬어진다.</P>
<P class=bt11>두 영화는 같은 듯 다른 이야기로 양국의 교전과 사연을 토해낸다. &lt;아버지의 깃발&gt;은 할리우드 서사가 가지는 영웅적 속성에 대해 직접적으로 의문을 제기한다. 미국민의 무의식은 정치적 의도에서부터 개인의 욕망까지 꽤 내밀하게 고착되어 있다. 그러나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전형적인 서사의 틀을 완전히 비껴가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쓰인 음악과 후손이 아버지 세대를 추억하는 태도 등은 기본적으로 휴머니티를 상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정서를 내지르는 힘은 모든 이가 공감할 인간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바탕으로 한다. 그래서 아버지가 가진 기억 - 서사는 아들의 조사를 통해 자연스럽게 재구성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lt;이오지마에서 온 편지&gt;의 경우에서는 두 장면으로 요약된(오프닝과 엔딩) 편지뭉치로부터 기억 - 서사를 재구성하는데, 삭제된 편지 뭉치를 들고 있어야할 또 다른 주체는 생략된 채 편지와 서사는 상관관계가 성립한다. 이는 관객이 알아서 추측해야 한다. 그 추측은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며 오히려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할 정도로 편집되어 있다. 그런데 정말로 ‘온, 도착한(from)’ 편지일 수 있는가? 영화는 그 ‘도착’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는다. 누가 펴 읽어 보았든, 중요한 것은 편지의 내용으로 정리하고 재구성한 ‘서사’이다. 클린트이스트우드는 그 서사를 절대로 놓치려 하지 않는다. 그에게 전쟁을 둘러싼 기억이라는 것은 서사와 매개되어야 하며, 과거형을 현재에서 마무리 지어야 하는 당위적인 속성을 지닌다. 조각난 기억의 봉합이 아니라, 회상된 기억을 일일이 맞붙여 놓으려는 자의식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있어 영화적 기억 - 서사의 한 방법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lt;바시르와 왈츠를&gt;의 기억 재구성 방식과는 다르게 이야기의 수단으로 꽤 농밀하게 자리매김한다.</P>
<P class=bt11>가장 시각적이고 스펙터클한 영화적 재현은 어떻게 보면 관객에게, 편의적인 경험 방식일지도 모른다. 시각성에 과다하게 노출되어 있는 요즘 시대에서, 전쟁 재현이 관객에게 가져다주는 효과는 지칠 대로 지칠 만큼 다이내믹하고 잔인한 폭력성의 실체로서 기능한다. 영화매체는 이미 오래 전부터 폭력성을 유발하는 시각 미디어로 자리를 잡았고, 그로 인해 게임 산업이 발달한 것은 물론이다. 청소년은 아무렇지 않게 총기구들을 다룰 줄 알며, 가상에서도 그 유희를 즐긴다. 유희가 된 전쟁은 현 세대에게 더 이상 기억해야 할 필요를 지닌 사건 이상이 아니고, 극소수에 의해 되새김질이 가능할 뿐이다.</P>
<P class=bt11>그렇기 때문에 전쟁에 대한 기억을 재구성한다는 것은 대체로 자기반성의 틀에서 가능해진다. 살펴보았던 세 영화 역시 전쟁에 대한 철저한 개인의 사연들에 입각한 영화이지, 전쟁 주체에 대한 정치적 판단은 드러나지 않는다. 전쟁에 대한 시선은 드러나지만 최종 판단은 유보하거나 피하는 태도로 일관된다. 그만큼 전쟁은 개인에게 맞닿은 희생의 산물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전장에서 극도로 인간애가 과시되는 때는 전우가 죽어가고, 내가 죽어갈 때이다. 죽음은 전쟁에서 가장 필수적으로 고찰해야할 관념적 성질을 가진다. 죽은 자에게는 죽음의 순간을 맞기고, 살아남은 자에게는 죽음의 순간을 기억해야 하는 숙제를 남긴다. 전쟁은 살아남은 자에게 끊임없는 기억의 복구를 로테이션하게 만든다. 왜 전쟁을 주제로 한 영화들이 끊임없이 ‘기억해내려’ 하는지 생각해 보라. 그것은 풀리지도 못할 인간의 과제이며 앞으로도 풀기 힘든 윤리적 과제이다. 그것이 정말 작은 개인에게 촘촘히 분해되는 순간, 스펙터클로, 관념론으로, 오락 등으로 보여주고, 들려주게 된다. 전쟁에 대한 기억은 그것만으로 사색될 수 있을만큼 진중하지만, 그렇지 않기도 하다.</P>
<P class=bt11>어쨌든 그러한 방식으로 전쟁 - 기억에 대한 재구성은 ‘유효’해진다. 문제는 기억 주체가 전쟁의 실체를 진정으로 인식하지 못했었다는 전제를 가진 채 재구성해내고 있다는 것이다. 후회하고, 회상하고, 깨닫는 순간은 전쟁 당시에서 훨씬 지난 후인 영화상에서다. 반대로 말하면 인간은 영화상에서라도 재구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쟁의 기억을 떠올리는 데서 그칠 수는 없다. 그래서 &lt;바시르와 왈츠를&gt;이 전쟁을 역설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을 것 같은 애니메이션 방식을 선택한 시도는 의미있게 들여다 볼 수 있다. 어차피 기억을 통한 재현은 실사로 표현한다고 해도 온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여러모로 비할리우드적인 접근 방식을 띤 이 영화는 할리우드 전쟁영화와 더욱 비교하게 하고, 전쟁-기억 재현에 대한 본질을 논하게 한다. 시간적으로도 &lt;바시르와 왈츠를&gt;은 현재 진행형인데, 적어도 이 영화의 전쟁에 대한 태도는 아주 개인적인 기억과 환상으로부터 형성될 수 있다는 작은 의지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반면에, 이 영화에서 조금은 불편했던 점은 주인공이 학살이 벌어진 현장을 쳐다보는 장면 이후, 바로 이어진 실사 다큐 화면이다. 혹자들은 “이 장면으로 인해 끔찍한 전율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애니메이션과 거친 실사 다큐의 결합이 만드는 이질성은 ‘전쟁 다큐 애니메이션’이라는 독특함을 고수하지 않고, ‘실사 다큐’로 이름붙이는 모호한 결과론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애니메이션으로부터 출발한 기억의 재구성 방식을 나름 의미있는 인식 방법으로 볼 수 있었는데, 진실에의 고발을 포기할 수 없었기에 형식 미학을 (어떻게 보면) 포기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감독은 더더욱 ‘언술’이 형식보다 우위에 있고 중요할 수 있다는 태도를 거듭 강조한 셈이다.</P>
<P class=bt11>그런 맥락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 역시 형식상의 실험보다는 충만한 서사로 인간애를 불러오려는 의지를 중요하게 여긴다. 전쟁을 기억하려는 방식 역시 고전적인 방법을 벗어나지 않는다. &lt;이오지마에서 온 편지&gt;가 ‘편지’라는 정서수단으로써 전쟁에 대한 기억을 더듬고 펼쳐내 보였다면, &lt;아버지의 깃발&gt;은 전사(戰士)의 전쟁경험을 그의 아들로부터 끄집어낸다. 모두 현대적이지만은 않은 방법이다. 피로 얼룩진 전쟁터를 기억해 내는 일은 전장에서 살아남은 이들에게는 더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을 안겨준다. 그래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선택한 방법은 그들이 남긴 편지를 통해, 혹은 그들이 남긴 자식들을 통해 만들어낸 생생한 이야기다. 정말이지 그는 당사자의 전언에 거리를 두고, 보다 간접적인 방식으로 당시 이오지마 전투를 재구성한다. 당사자의 슬픔을 위로하고 종용하기 보다는, 그들의 얼굴을 똑바로 비추지 않는 방법으로 전쟁 - 기억에 대해 말한다.</P>
<P class=bt11>숱한 전쟁 영화 중에 기억을 매개로 끈질긴 태도와 집념을 보여준 세 영화는 결코 비슷하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현재, 전쟁 영화를 가로지르는 어떤 힘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기억은 어떤 식으로든 유효하게 재인식되기를 갈망한다. 그것은 인간의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고, 인간 자체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그것은 전쟁이라는 인간의 가장 이기적인 속성이 작게나마 속죄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 아닐까. 전쟁 영화의 재현이 스펙터클을 넘어선 진정성을 반드시 가져야만 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기억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전쟁은, 전쟁 영화는 인간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기억은 재구성을 낳고, 재구성은 또 다시 기억을 낳는다. 적어도 전쟁 영화는 기억의 연속을, 기억의 재구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재구성된 기억이 어떤 식으로든 유효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vovovdh)</P></div>]]></description>
                        <pubDate>Sat, 13 Dec 2008 12:41:19 +0900</pubDate>
                    </item>
                <item>
            <title><![CDATA[전쟁영화, 단지 비극이기를 너머 전쟁 비판을 가능하게 하는 경우들]]></title>
            <author><![CDATA[영화연대]]></author>
            <link><![CDATA[http://www.yhyd.org/9273]]></link>
                        <description><![CDATA[<div class="xe_content"><P class=st11>1. 지속의 시간을 포함한 전쟁 기억의 필요성</P>
<P class=bt11>전쟁은 결코 단절된 과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근대 이후 민족과 국가라는 관념의 성립은 전쟁의 새로운 단위와 형태를 만들었다. 세계 곳곳마다 민족 분쟁과 종교 분쟁 등 이념을 둘러싼 내전이 벌어지고 있으며, 국가 간 주도권 싸움에서부터 독립투쟁에까지 테러와 보복 전쟁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스스로를 세계 경찰로 포장하여 전쟁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20세기 군수산업은 미국을 부흥시킨 일등공신이기도 하고, 우리나라는 국방부 예산으로 많은 세금을 낭비하는 상황이다. 핵무기를 둘러싼 국가 간 긴장 관계, 그 핵무기와 전쟁이라는 공포를 이용한 국가의 통치 등 전쟁은 현대 세계 지배 기제의 일부분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동물들의 생존 경쟁에 대해 우리는 이제 단지 은유적으로만 전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근대 이후 인간 사회는 상품사회로의 전면적인 이념 세계를 맞이했고, 전쟁은 이 이념 세계를 지탱하는 하나의 형식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전쟁은 인간의 본성에 앞서 현대 국가의 지배 도구이다.<BR />한편 과거라는 것은 현재와 단절되어 있을 때 결코 의미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과거는 박제된 과거 자체로 존재할 수 없으며, 현재에 의해 불려졌을 때 비로소 과거로 떠오른다. 그리고 그렇게 불리어져 비로소 과거가 된 옛 시간은 이미 현재와의 지속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쟁을 일시적인 사건으로 기억하는 모든 시도는 전쟁을 설명하는데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전쟁에 대한 오독이기 때문이다.</P>
<P class=bt11>영화의 역사를 훑어보면 우리가 계속 전쟁을 기억해 보고자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수많은 작품들이 전쟁을 보여주고 반성하며 눈물을 흘리고 때로는 전쟁을 설명하려고 해왔다. 그러나 전쟁은 계속 우리의 현재에서 빠져나갔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그 대부분의 영화들이 현재까지 지속되는 전쟁을 기억하기 보다는 지나가버린 이야기로 전쟁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 번이라도 전쟁의 끝을 본 적이 있는가 말이다. 우리는 단지 기억하지 못할 뿐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한국전이 끝났다고 해서 베트남전이 한국전과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지구의 전쟁은 단지 그 격전지를 달리할 뿐 계속되고 있다.</P>
<P class=st11>2. 전쟁을 기억하는데 실패하는 전쟁 영화의 형식들</P>
<P class=bt11>전쟁을 기억하고자 하는 많은 영화들을 떠올려보자. &lt;라이언 일병 구하기&gt;처럼 국가 스포츠를 응원하듯이 자국의 군인들을 영웅화 시키는 영화들이 있다. 이런 영화들은 전쟁에 대해 결코 말하지 않는다. 실상 대부분 빈민가의 아이들로 구성된 미군은 결코 그 혜택을 공유하지 않는 미국 기업의 이익을 위해 싸워주고 있다. 그러나 위의 영화는 이를 은폐하는 국민동일성을 만들고, 이 허구의 동일 집단의 승리에 대해 안도하고 환호하게 하는 시도이다.<BR />이 영화는 한편으로는 전쟁을 스펙타클로 만든다. 그 유명한 초반 20분의 전투 씬 스펙타클은 엄청난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것은 끔찍하지만 동시에 매우 현란하다. &lt;블랙 호크 다운&gt; 같은 경우 이런 스펙타클의 전시를 전면에 두고 있다. 그러나 이는 역시 전쟁을 기억하는데 실패한다. 거기서 전시되는 죽음의 영상에 우리는 눈을 뗄 수 없다. 마치 써커스를 보듯 우리는 전쟁을 단지 감상한다. 그 영상은 전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력하다. 위의 영화들에서 과연 우리는 전쟁의 비극적인 경험을 공감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P>
<P class=bt11>물론 전쟁에 대해 조금 더 고발하는 영화들도 있다. &lt;플래툰&gt;이나 &lt;지옥의 묵시록&gt;은 전쟁의 욕망을 형상화 한다. 여기서 우리는 이전의 것들 보다 조금 더 전쟁을 직시할 기회를 얻는다. &lt;플래툰&gt;은 전쟁이 변화시키는 마음을 다루고 있으며, 전쟁에 대한 순진한 시선이 얼마나 부적절한 것이지, 전쟁이 실제로 얼마나 사람을 돌이킬 수 없게 하는지에 대한 성찰을 통해 전쟁을 고발한다. &lt;지옥의 묵시록&gt;은 전쟁의 영상이지만 오락을 전달하는 스펙타클과는 다르게 전쟁의 영상을 포착하는데 성공한다. 그것은 3시간여에 달하는 여정 속에서 전쟁의 욕망과 현장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다.<BR />이와 함께 허구적 동일성의 함정을 피하고자,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전쟁과는 대립적인 사적 역사를 기억함으로써 전쟁을 고발하는 영화들도 있다. 이들의 대부분은 소위 공적인 역사에 희생당한 사적 개인을 부각시키고, 전쟁에 동원된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자라고 말하며 기존의 전쟁관을 극복해 보려 한다. &lt;피아니스트&gt; 등이 이러한 시도들의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P>
<P class=bt11>그런데 우리는 위를 비롯한 많은 영화들을 싸잡아 전쟁영화가 되는데 실패하고 있다고 말해야만 할 것 같다. 스펙타클은 비극의 전시장이며, 비극은 사적 기억의 흔한 형식이자 내용이고, 많은 전쟁 영화들의 고발들 역시 비극의 드라마로 귀속된다. 여기서 비극성은 전쟁을 반대하는데 필요한 모든 설명을 하지 못하지만, 그러한 부족을 잊기 가장 쉽다는 점에서 전쟁 영화의 실패를 이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쟁은 모두를 비극으로 몰고 간다. 살육의 현장은 승자나 패자 모두에게 씻을 수 없는 비극을 선사한다. 이런 비극의 공유는 마치 전쟁을 반대하는 가장 큰 힘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수많은 사건 사고 뉴스가 곧잘 단지 뉴스거리의 목록만을 증가시키는 것처럼, 전쟁이 주는 비극의 느낌 그 자체는 곧장 전쟁을 반대하는 힘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전쟁은 당연히 비극을 이끌지만, 그 비극이라는 것이 전쟁의 논리나 필요성과는 독립적이기 때문이다.<BR />이어서 이런 독립성은 공적 영역(객관적 역사)과 사적 영역(주관적 역사)을 분리하는 우리의 습관에서 발생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는 결코 사적인 영역에서 다가갈 수 없으며, 비극은 정치라는 공적 영역이 고려하기에는 너무 미천하다. 이런 구분 속에서는 그 많은 비극과 고발이 단지 안타까운 개인들의 사연 이상이 되지 못할 것이다. 비극이나 고발이 전쟁의 본질을 형상화하기 말하기 보다는 잘못된 개인, 잘못된 욕망과 같은 차원에만 머물 때 그것은 역시 이러한 간극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분리 속에 있기에 대부분의 전쟁 영화들은 전쟁의 일부 효과만을 다룰 뿐이다. 그것은 전쟁이 드러내는 장면들이기는 하지만, 전쟁 그 자체에 대한 기억이 되고, 우리가 그것을 비판할 수 있는 전쟁에 대한 설명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P>
<P class=st11>3. 전쟁을 기억하는 영화들 : &lt;알포인트&gt;, &lt;이오지마에서 온 편지&gt;-&lt;아버지의 깃발&gt;, &lt;히로시마 내 사랑&gt;</P>
<P class=bt11>그렇다면 질문을 약간 바꾸어서 영화는 근대 이후 국가의 공통 경험으로서의 전쟁을 기억할 수 있을까? 단지 전쟁이 일으킨 이러저러한 것들을 배치하는 것을 넘어서, 그래서 피해자가 되었다 가해자가 되었다 배치하고 서로 위로하는 차원을 넘어서, 영화는 전쟁이 감싸고 변형시킨 세계 전체를 드러내는 통로가 될 수는 없는 것일까?<BR />&lt;자전거 도둑&gt;의 경우는 위의 많은 영화들에 왜 실패의 딱지가 붙을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우리가 전쟁에서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는 경험이다. 이 영화를 2차 대전 후 전쟁이 지배하는 세계의 모습을 담아낸 거의 첫 번째 영화 기억으로 얘기해도 좋을 것 같다. 전쟁을 다루지는 않지만 이 영화는 전쟁의 세계가 지배하는 풍경을 그리는데 성공한다. 여기서 세계는 전시되지만 스펙타클이 되지는 못한다. 그 구경거리는 결코 우리를 편안한 볼거리의 순간으로 이끌지 않는다. 또한 그것은 비극에서 멈추지도 않는다. 이 영화의 풍경은 우리로 하여금 전쟁이 우리에게 선사한 삶의 시간을 목격하게 하는 것이다.<BR />이 영화가 주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전쟁 자체로 곧장 도약하는 영화, 즉 정말 전쟁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비판할 수 있는, 그래서 진정 전쟁 영화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는 작품이 필요하다.</P>
<P class=st11>&lt;알포인트&gt;, 전쟁의 공허함에 대한 고발</P>
<P class=bt11>이 영화는 공포 장르 속에서 전쟁을 기억한다. 여기서 전쟁은 적을 상실한다. 우리가 흔히 가장 근원(?)적으로 돌아가는 피해자 형상인 소녀와 한 몸이 된 군인은 스스로를 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영화는 결국 아무 적도 없는 1인 전투가 된다. 이 영화에서 우리가 동원되는 전쟁의 중심에는 자살만이 존재하는데, 이는 근대 전쟁이 설정하는 적군과 아군에 부여하는 동일성의 허구적 본질을 고발한다. 이제 우리가 마지막 장면에서 목격하는 것은, 스스로를 향한 총질과 그것을 볼 수 없는 군인(눈에 부상을 입어 보지 못하는 군인만 살아남는다)을 통한 전쟁의 완성이며, 그 폐허의 새벽에 우리가 맞이하는 유일한 적은 바로 전쟁 그 자체가 된다.<BR />이 영화는 장르영화의 전략과 목표를 훌쩍 넘고, 장르를 전쟁의 진실에 닿고 전쟁을 고발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영화는 전장의 재현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 있으며 장르를 빌어 전쟁의 상태를 드러내는데 집중한다. &lt;지옥의 묵시록&gt;이 그러했던 것처럼 &lt;알포인트&gt;는 영상을 전쟁의 해석에 집중시킴으로써 스스로를 전쟁에 대해 강하게 발언하는 영화로 만들고 있다.</P>
<P class=st11>&lt;이오지마에서 온 편지&gt;, &lt;아버지의 깃발&gt; 쌍이 닿는 간접적인 전쟁 기억</P>
<P class=bt11>한편 겸손하고 지혜로운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전형적인 드라마 형식 속에서 공통적 이야기를 소개한다. 수류탄으로 자결한 이들의 시체와 고문당한 미군의 모습은 서로 다른 해석 속에 있지만 같은 전쟁의 모습이다. 무엇보다 일본군의 할복은 미군의 영웅주의 모습과 만나면서 비로소 비판 가능한 전쟁 관념이 된다. 영웅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동료와 살아남기 위해 싸웠던 미군들은, 수류탄으로 자살하는 동료들을 배신하고 살아남은 일본군의 이기(?)와 그런 병사를 살리기 위한 장교의 배려와 만난다. 그 둘은 전혀 다른 서사를 가지며 전혀 다른 풍경이지만 옳다고 생각할 때에만 목숨을 내놓으라고 하는 명제를, 그리고 그들의 삶과 죽음은 전쟁을 결코 옳다고 보여주지 않음을, 오히려 그들의 전투는 전쟁에 자신이 희생되기를 강력히 저항하고 있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BR />우리는 이 두 편의 전쟁 영화를 통해 전투에서 대립했던 양자가 도달할 수 있는 공통 기억과 경험을 추출할 수 있다. 그 내용은 국가의 이익을 위한 영웅이라는 말로는 전쟁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죽음을 포장할 수 없으며, 국가가 부여하는 영웅이라는 칭호에 우리들의 삶을 내맡길 수 없다는 성찰일 것이다.</P>
<P class=st11>&lt;히로시마 내 사랑&gt;, 전쟁 기억으로의 도약</P>
<P class=bt11>&lt;히로시마 내 사랑&gt;은 위의 영화들과는 다른 차원에서 전쟁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영화는 히로시마에의 원폭 투하를 보았다고 주장하는 프랑스 여자와 그녀는 히로시마에서 아무 것도 못 봤다고 반박하는 일본 남자의 대화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히로시마에 떨어진 핵폭탄으로 인해 후유증을 겪고 있는 도시와 사람들에 관한 기록물 위로 흐른다. 이 시작은 아마도 가장 영화의 오프닝 중 가장 훌륭한 작품 중의 하나일 것이라 말하고 싶을 정도로 의미심장하며 핵심적이다. 이 남녀의 대화에는 관객들도 곧 연루되는데 우리는 가장 객관적이라고 할 만한 기록물에 기대어 히로시마의 모습을 보고 있지만, 정말은 히로시마를 보는 것이 아니라는 남자의 반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러한 의심은 영화라는 매체 전체에 해당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정말로 보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경험과 그에 대한 시각적 경험 사이에는 무엇이 있는가, 또는 기록물의 기억은 경험을 보존 하는가 등을 말이다. 남자는 그녀가 히로시마를 경험하지 않았으므로 그 비극을 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자는 어째서 자신이 히로시마를 안다고 자신하는 것일까? 우선 그녀가 보았다고 하는 히로시마의 병원, 박물관, 뉴스, 생존자 등은 경험과의 간극에 대한 의심을 해소시켜주는데 부족하다. 그러나 그녀는 시종일관 히로시마를 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P>
<P class=bt11>이 영화는 다른 작품들이 주로 취하는 것, 함께 눈물 흘리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공감의 형태로 여자의 주장을 뒷받침하지 않는다. 첫 장면 이후에 영화는 더 이상 히로시마의 전쟁 피해를 보여주지 않는다. 이제 회상되는 것은 오직 여인이 경험한 2차 대전이다. 그녀는 프랑스의 작은 마을 느베르에서 독일군과 사랑에 빠지고 함께 도망가기로 한다. 그러나 도망가기로 한 날은 종전의 날이었으며 그날에 그녀는 총살당하는 독일군을 지켜보게 된다. 그녀가 경험한 전쟁은 심지어 전장도 아니었으나 그녀의 전쟁은 종전 후에 더욱 전면적이 된다. 그녀는 마을 사람들에게 배척당하며 그녀 역시 세상을 배척한다.<BR />이렇게 영화는 더 이상 전쟁의 경험을 직접 연결하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이러한 배치가 오히려 우리를 전쟁의 지속으로 곧장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첫 장면에서 히로시마의 시위 장면을 보고 그것이 한 국가가 다른 국가에게 강요하는, 한 인종이 다른 인종에게 강요하는, 한 계급이 다른 계급에게 강요하는 불평등에 대한 분노라고 말한 것처럼 그녀의 경험은 여러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전쟁의 흔적을 기억한다. 또한 오픈 크레딧에서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흔적을 배경으로 보고 있어야 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이 영화에서 결코 잊혀 질 수 없는 전쟁의 흔적을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P>
<P class=bt11>영화의 마지막 장면, 여자는 남자에게 당신의 이름은 히로시마라고 말하며 남자는 여자에게 당신은 느베르라고 말한다. 여자와 남자는 영화 속에서 이름을 갖지 않다가 그 마지막 장면에서 이름을 얻는다. 이 나지막한 부름은 그러나 큰 전율을 일으킨다. 이제 히로시마와 느베르는 사적인 개인과 공적인 역사 사이의 구분을 넘어서 있는 우리 경험의 차원에 이른다. 여자는 독일군과 일본인을 구별할 수 없으며, 당신을 잊을 수 있다는 그녀의 외침은 누구를 향한 것인지 어떤 기억을 말하는 것인지조차 구분하기 힘들다.<BR />영화의 첫 장면에서 우리는 가장 객관적인 기록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 박물관의 기록물을 보고 있었지만 히로시마는 볼 수 없는 것이라는 의심을 없앨 수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는 이제 그런 기록이라는 매개는 필요가 없다. 그들은 호텔이라는 사적 공간에서 단지 서로 만을 마주한 채로도 느베르와 히로시마, 그리고에 이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의 경험을 지우거나 희생시키지 않은 채 불평등을 강요하는 국가의 전쟁에 휘말린 연인이 된다. 이 연인은 우리에게 지속되고 있는 전쟁을 망각하지 못하게 하는 가장 강렬한 기억의 경험을 제공한다.</P>
<P class=bt11>이 영화에는 사적인 시간과 공적인 시간이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하나로 통일 되어 있지도 않다. 각각의 시간들은 오롯이 각자의 것일 뿐이다. 그런데 이것들이 전쟁이라는 전체를 형성한다. 2차 세계대전은 완벽하게 그녀 안에 내재한다. 느베르와 독일, 느베르와 그녀가 전쟁을 벌이고, 그러한 한에서 히로시마는 그녀 안에 있고 그녀는 히로시마를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 남자와의 시간이 독일군과 2차 대전을 기억나게 하는 만큼 전쟁은 지속되고 있다. 전쟁의 기억이란 그러한 방식으로 우리 삶에 함께 한다. 우리는 전쟁의 경험에 지배받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도 전쟁을 살았고 살고 있다는 속에서 그러한 것이다.<BR />&lt;히로시마 내 사랑&gt;은 그렇게 도처에 지속되는 전쟁과, 전쟁과 분리불가능성의 세계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라는 공통의 장소로 도약한다. 전쟁에 사로잡힌 우리들은 이 영화의 방식 속에서 히로시마를 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심심한 위로나, 비극의 공감도 넘어선다. 이 영화에서 전쟁은 비로소 기억되고 있으며, 그렇기에 이 영화를 통해 우리는 전쟁을 겪었으며 아직도 겪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P>
<P class=st11>4. 전쟁의 비판을 위하여</P>
<P class=bt11>&lt;인생은 아름다워&gt;라는 영화를 보면 유태인인 주인공은 자신의 아내와 아들을 수용소에서 빼내기 위해 독일 장교와 관계를 맺는다. 그런데 그 장교가 기대에 찬 주인공에게 다가와 매우 신변잡기적인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는 장면이 있다. 그때의 주인공의 표정을 쉽게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광대처럼 모두에게 위로가 되는 존재였지만 그때 그 독일 장교에게는 환한 웃음을 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마도 우리 역시 위로만으로는 전쟁을 피할 수 없음을 고통스럽게 기억해야 할 것 같다.<BR />클리트 이스트우드는 이해하기 쉬운 전통적인 서사체로 전쟁이라는 공통 기억을 간접적으로 엮어내고 있으며, &lt;알포인트&gt;는 장르를 통해 전쟁의 본질을 정의한다. &lt;히로시마 내 사랑&gt;은 그 자체로는 가장 희박한 서사를 가지지만 그 어떤 영화보다 강렬하게 전쟁의 세계에서 지속되는 우리들의 시간을 그려낸다. 아마도 우리가 기억이라고 해야 할 것은 이러한 시도들일 것이다. 이 영화들은 어떤 비극적인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며 현재의 평화(?)를 안도하는 눈물을 생산하지 않는다. 대신 이 영화들은 전쟁의 본질을 기억하기 때문에 현재에도 지속되는 전쟁의 세계를 폭로하고, 현재의 슬픔을 이야기 하며, 그러므로 현재와 미래에 이러질 전쟁을 비판할 수 있는 힘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gipsymoon)</P></div>]]></description>
                        <pubDate>Sat, 13 Dec 2008 12:00:07 +0900</pubDate>
                    </item>
                <item>
            <title><![CDATA[<바시르와 왈츠를> 전쟁에 대해 말한다는 것의 책임]]></title>
            <author><![CDATA[영화연대]]></author>
            <link><![CDATA[http://www.yhyd.org/9267]]></link>
                        <description><![CDATA[<div class="xe_content"><IMG height=573 src="http://www.yhyd.org/still/bashir_01.jpg" width=760><BR />
<P class=bt11>&lt;바시르와 왈츠를&gt;이 칸에서 주목을 받았다던 소식을 올 봄에 듣고 개봉되기를 은근히 기대했더랬다. 모 영화 주간지의 칸 결산보고에 따르면, 황금종려상이 발표될 직전에 세계 각국의 기자들이 &lt;바시르와 왈츠를&gt;을 외쳤다고 한다. 이후 국내 영화제에서 소개되며 간간이 들려오는 소식 중 인상적인 것은 이 영화가 전쟁 ‘가해자’의 시점에서 진행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영화를 접하고 드는 생각은 영화 속 주인공이기도 한 감독은 학살의 원인이나 책임에 관해 말하는 것을 회피한다는 것이다. 완전히 망각된 기억을 추적하며 감독이 결론적으로 전달하는 메시지는, 자신은 레바논 전투 중 사브라-샤틸라의 민간인들을 쏘지 않았다는 것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P>
<P class=bt11>감독은,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사건에 대한 기억에 악몽을 꾸는 친구를 만난다. 친구와의 만남을 통해 그는, 자신 역시 레바논 전투에 참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영화 초반부에 소개되는 이와 같은 감독의 실제적인 경험이 영화를 만들게 한 계기였던 것이다. 감독은 당시 동료 병사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진술에 도움 받아 자신의 사라진 기억을 복귀시키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전쟁의 참상,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참전자들이 전쟁에서 얻은 고통에 대한 기억이 영화 속에서 펼쳐진다.</P>
<P class=bt11>참전자들은 전장에서의 불안과 공포가 만들어냈던 꿈들에 대해서도 들려준다. 이 장면들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감독이 애니메이션이라는 형식을 택하였다면 그것은 수긍이 간다. 하지만 이에 대한 비평계의 찬사는 대단히 공허하게 들린다. 형식의 변화가 일으킨 놀라움이 어떤 사건에 대한 인식이나 태도의 전환을 불러왔을 때 그런 영화에 찬사를 보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lt;바시르와 왈츠를&gt;이 이에 해당되는가? 나는 이 질문에, 앞에서 밝힌 대로 영화가 책임을 회피했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고 본다. 망각의 저편에 놓였던 사브라-샤틸라 학살 사건을 꺼내놓는 것만으로, 혹은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을 모르는 이들에게 사건의 내막을 알린 것만으로도 훌륭한 역할을 해냈다고 말할 것인가? 감독이 이스라엘의 열악한 영화산업 조건에서 이러한 영화를 만들어서 대단하다는 식의 칭찬으로 또는 애니메이션과 다큐멘터리를 결합한 점을 강조하는 형식 문제의 겉핥기로 영화를 두둔할 것인가? 어쩌면 나는 &lt;바시르와 왈츠를&gt;이라는 영화 자체에 딴지를 걸고 싶은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요즘 들어 계속적으로 마주치는 비평계의 일률적인 나이브한 접근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일 게다. 이는 지난 번 &lt;미쓰 홍당무&gt; 특집의 서문에서도 언급된 부분이다.</P>
<P class=bt11>그러나 역시 문제시 되는 것은 비평만이 아니라 원인과 책임에 대한 질문까지 나아가지 못한 &lt;바시르와 왈츠를&gt;이다. 잃어버린 기억을 찾는 것으로 그 기억이 잔인했다는 것으로 끝낼 것인가? 전쟁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원인이 있고 누군가의 책임이 있다. 그 원인과 책임을 군대의 최고 명령권자에게 돌리고, 자신은 명령대로 조명탄을 쏘았을 뿐이라고 말하기 위해 기억을 더듬는 그 고통스러운 일을 했단 말인가? 전쟁 혹은 학살의 책임을 물을 때 윗선의 명령에 절대복종해야만 하는 일개 병사였던 개인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것은 부당할 수도 있다. 그것은 사법적인 처벌을 받는 등의 직접적인 책임을 지는 문제에선 그렇다. 하지만 역사에 대한 책임에서 완전히 발을 빼려 드는 것은, 역사가 지배층의 힘만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 다름없다. 깡그리 사라진 기억을 불러내고자 하는 한 사람의 절실함이 개인적 사건에 그치지 않고 전쟁이라는 집단적 문제에 닿아 있다. 더욱 나아가 그러한 지점을 영화를 통해 다수의 사람들에게 보여주고자 했을 때에는 위의 문제들에 대해 성찰할 책임이 있다고 본다.</P>
<P class=bt11>글을 맺기 전에, 전쟁을 포함한 사회적, 역사적 사건들의 책임에 관해 철학적으로 접근한 가라타니 고진의 『윤리 21』을 언급하고 싶다. 고진은, 책임을 진다는 윤리적인 행위는 공동체의 도덕률을 따르는 것과 다르다고 말한다. 한 공동체 안에서 선하다고 인정받는 행위가, 이를테면 내가 이스라엘 군에 지원하여 팔레스타인을 공격하는 것은 이스라엘 군을 포함한 어떤 집단 내에서는 애국 행위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공동체, 즉 팔레스타인 쪽에서 보았을 때는 악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책임을 지는 것의 한 방법으로서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부당하게 요구하는 차원을 인식해야만 한다. 고진이 이와 함께 강조하는 것은 원인을 일면적으로 파악하여 한 개인을 겨누어 희생양을 만들거나 죄책감으로 자신이 모든 것을 떠안으려는 방식의 위험성이다. 원인을 따져나가다 보면 누구, 누구, 누구의 문제로 환원되는데, 원인을 밝히는 것과 책임을 묻는 것은 구별되어야할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P>
<P class=bt11>여기서 좀 더 분명하고자 하는 것은 이 글은 &lt;바시르와 왈츠를&gt;을 만든 감독에게 레바논 전투에 잘잘못이 있음을 따지고자 쓰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만약 감독이 그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죄책감에 시달리며 너무 많은 책임을 스스로에게 돌렸다면 오히려 글조차 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한 태도는 세상이 자기 뜻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오만에서 비롯된 자기 비난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다시 정리하자면, 내가 이 영화를 비판하는 것은 영화가 전쟁의 원인과 책임을 말하는 것에 비켜선 채 개인적인 고통이나 전쟁의 참상을 폭로하는 것에 그쳤기 때문이다. 전쟁이 끔찍하다는 것을 너무도 많이 보여줘서 오히려 해가 되는 마당에 말이다.</P>
<P class=bt11>공동체의 해악은 개인의 선택과 행위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그리하여 우리는 전쟁이라는 그 잔인한 폭력으로부터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전쟁에 대한 발언은 계속 되어야 하지만, 그 발언에 책임이 부과되는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다. (by dela68)</P></div>]]></description>
                        <pubDate>Sat, 13 Dec 2008 11:46:11 +0900</pubDate>
                    </item>
                <item>
            <title><![CDATA[<192-399 : 더불어 사는 집 이야기> 더불어 '산다'는 것]]></title>
            <author><![CDATA[영화연대]]></author>
            <link><![CDATA[http://www.yhyd.org/9088]]></link>
                        <description><![CDATA[<div class="xe_content"><P align=center><img src="http://img.todaystory.net/img/5b53342a416181c97f92ded2198cb6d4.jpg" alt="5b53342a416181c97f92ded2198cb6d4.jpg" title="5b53342a416181c97f92ded2198cb6d4.jpg" width="400" height="266" style="VERTICAL-ALIGN: middle" /></P>
<P class=bt11>굶는 아이의 아비는 남아도는 빵을 훔칠 권리가 있다는 프랑스 신부의 주장에 동의하는가. 혹은 땅이 없는 농민은 놀고 있는 지주의 땅을 경작할 권리가 있다고 명시한 브라질 헌법을 존중할 수 있는가. 장편 다큐멘터리 &lt;192-399, 더불어 사는 집 이야기&gt;(이현정, 2006)이 다루고 있는 빈집 점거는 바로 이 당당한 전제에서 출발한다. 스쾃(squat)이라는 말로도 많이 알려져 있는 빈집 점거 운동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주거권 및 도시공간의 사적 전유가 오랫동안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우리 사회에서는 그동안 스쾃에 그리 주목하지 못했다. 영화가 기록하는 '더불어사는집'의 행보는 도시빈민의 한국 최초 빈집점거 사례라는 점에서도 단연 눈길을 끈다.</P>
<P class=bt11>더불어사는집은 빈민운동가인 양연수 고문(호칭이 매우 중요하다!)과 몇몇 노숙인들이 함께 살면서 자활을 도모하는 노숙인 생산공동체다. 이 공동체는 청계천에 위치한 삼일아파트에서 처음 시작됐는데 당시 송재희 대표, 허칠기, 박승석, 정화숙, 임채희 등의 창립멤버와 삐약이(닭), 보랭이(강아지)가 함께 생활했다. 2005년 5월의 청계천 팔가의 풍경을 리드미컬하게 보여주는 오프닝 시퀀스 때문인지 이들의 삶은 그리 신산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여러 명이 모여살다보니 다소 부산할 뿐이다. 내가 기억하는 청계천 팔가는 밤낮으로 철거투쟁이 한창 진행되던 격렬한 공간이었는데 영화 속 청계천 팔가는 훨씬 밝고 건강해보였다. 물론 '뿌연 헤드라이트 불빛에 덮쳐오는 가난의 풍경'(노래 '청게천 팔가'의 가사)은 여전했다. 그러나 청계천 팔가의 사람들은 '가난한 사랑을 위하여' 사는 '비참한 우리'가 아니었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설파하지도 않았다. 다만 이들은 열심히 살고 있었다. 청계천이 (제멋대로) 복원된 후, 제반환경이 적지않게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여전히 '물샐틈 없는 인파로 가득한 땀 냄새 가득한 거리'에서 노점판매나 고물수집 등에 열중하고 있었다. 마땅히 잘 곳 하나 갖지못한 이들에 대한 영화의 시선은 이렇듯 참 담백하다. 빈민에 대한 동정과 연민의 시선을 거두고 빈곤의 문제, 정확히는 주거권의 문제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것이다. ARS 모금을 촉구하는 공중파 방송 등의 연극적 태도와 사뭇 구분된다는 점에서 영화는 다큐멘터리의 컨벤션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사실 다큐멘터리라면 응당 주목할만한 현상, 특이한 사건을 다룬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그 속에서도 어딘가 나와 비슷한 모습을 발견하기 마련이다. 화면에 포착된 인물, 혹은 사건이 특이성과 보편성을 모두 내재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의 생활방식이 남다를 수는 있어도 삶에 대한 태도(어쩌면 삶의 본질)만큼은 여느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기에 관객은 더불어사는집과 적당한 거리를 둔 채 이들을 공정하게 바라볼 수 있다.</P>
<P class=bt11>더불어사는집의 주요 활동은 매주 월요일 점심, 청계천 부근에서 진행되는 무료급식이다. 이는 더불어 사는집이라는 공동체를 알리는데에도 목적이 있지만 노숙자가 노숙자에게 점심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더욱 이채롭다. 이 공동체의 존립목적이 노숙자의 자립에 있음을 대외적으로 강조하는 것이니 말이다. 나아가 더불어사는집의 구성원들은 노숙자 자립을 조직적으로 담보해줄 수 있는 전국실업자연맹의 창립을 진지하게 논의한다. 그러나 배식을 끝낸 구성원들이 언론사의 기념사진에 담기는 순간, 각 개인들이 더불어사는집에 모여있던 각기 다른 이유들은 모두 자립으로 환원된다. 프리즈 프레임이 가둔 다양성, 혹은 프리즈 프레임이 강요하는 집단성은 곧 '더불어사는집은 데모하는 데'라는 통념으로 이어지고 많은 구성원들이 이를 불편해마지 않는다. 게다가 뉴스에 이들의 급식 활동이 방송된 후, 정화숙, 송재희 등이 공동체를 떠난다. 사실 더불어사는집은 운동단체라기보다는 나름의 확고한 규율을 갖춘 생활공동체에 가까워 보인다. 가입원서를 받고 식사시간을 엄수하며 청소 등의 집안일을 구성원들이 분담한다. 이들은 보통의 사람들이 집에서 그러하듯 편안하게 드러누워 TV를 보고, 믹스커피를 타먹거나 과일을 깎아먹는다. 다만 가족이 아닌 이들이 모인 공동체라 다소 낯선 풍경도 있는데, 함께 시레기국을 끓여먹고 담배를 나누어피며 연애를 하는 중년남녀의 모습 등이 그렇다. 물론 일반적인 운동단체의 활동이 전무한 것도 아니다. 전노련 활동가들의 주도 아래 변증법적 유물론을 주제로 한 철학 세미나를 열기도 한다. 그러나 논의가 채 진전되기도 전에 왜 배우냐는 질문, 과연 이런 공부가 필요하냐는 질문이 쏟아진다(사족 하나, 맑스와 무척 비슷하게 생긴 할아버지의 질문이라 더욱 아이러니했다). 내가 사는 이 세상, 그리고 지금의 내 처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라는 대답이 만족스러울리 없다. 이들이 요구한 것은 오직 '생활에 필요한 지침'뿐이었으니.</P>
<P class=bt11>아니나다를까 더불어사는집은 정릉집으로의 이전투쟁을 치루며 격렬한 내분을 겪게된다. 삼일아파트의 철거로 인해 새 주거지를 물색하던 더불어사는집이 2005년 9월에 본격적으로 점거투쟁 계획을 세우면서 그동안 봉합됐던 문제가 가시화된 것이다. 이들이 목표한 새 주거지는 정릉에 있는 다세대 주택으로 서울시가 임대주택 사업의 일환으로 매입했으나 거주자 하나 없이 비어있는 공간이었다. 바로 정릉동 192-399번지. 이들은 칠흙같은 밤에 점거를 감행한다. 그리고 다짐하듯 힘주어 말한다. 우리의 목적은 주거일뿐, 그들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 점거투쟁이 있기 직전 몇몇이 떠났으며 점거에 성공한 후에도 일부 식구들은 몇 가지 이유를 들어 삼일아파트에 남는다. 사람의 온기가 부족한 탓일까, 새로운 보금자리는 무척이나 외로워 보인다. 날이 밝자 때마침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고 전기나 수도 문제는 좀처럼 해결이 쉽지 않다. 게다가 이들의 점거 사실이 알려진 후, 원 소유주인 도시개발공사는 건물사용에 대한 일방적인 협상을 제안했고 관할경찰서는 치안문제 때문인지 즉각 철거를 요구했다. 또 매번 해오던 월요급식도 더 이상 어려울 정도의 재정적 적자에 봉착한다. 이에 양 고문은 민노당 등을 찾아다니며 연대투쟁을 요청하지만 양고문의 막무가내식 태도에 모두가 답답해 할 뿐이다. 물론 예전부터 동사무소나 시청 등에서 공무원과 끊임없이 분란을 일으켰던 양고문이기에 별 새삼스러운 모습도 아니다. 다만 더불어사는집 식구들이 더 이상 양고문과 더불어 살 수 없게 된 것이 문제다. "왜 저런 사람하고 같이 다니냐"는 공무원의 지청구에 "그래도 뒤끝은 없는 분이에요."라며 웃어넘기던 이들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것이다.</P>
<P align=center><img src="http://img.todaystory.net/img/18fe4d18deb3f4b0a724ada8d163f2c8.jpg" alt="18fe4d18deb3f4b0a724ada8d163f2c8.jpg" title="18fe4d18deb3f4b0a724ada8d163f2c8.jpg" width="548" height="365" style="VERTICAL-ALIGN: middle" /></P>
<P class=bt11>사실 양고문은 누가봐도 특이한 인물이다. 그는 삼일 아파트에서도, 정릉에서도 식구들과 온전히 함께 생활하지 않으며 비정기적으로 들러 자신의 말만 쏟아낸다. 썰렁한 추석을 보내고 있는 더불어사는집 식구들이 배를 다 깎아 먹었다고 잔소리를 해대거나 왜 이기지도 못할 술을 마시냐며 핀잔을 준다. 그러다가도 빈민운동은 무조건 개기거나 싸워야 한다고 일장연설을 하기 일쑤다. 구성원들과 전혀 융합되지 못하고 권위적으로 자신의 입장만 강변하는 그는 타인의 문제제기를 전혀 들으려 하지 않는다. 편의에 따라 자기가 듣고싶은 말만 골라듣는 것이다. 아마 그에게있어 이 세상 모든 문제는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것'과 '이해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만 구분될 것이다. 카메라의 시선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느껴지는 순간도 오직 양고문을 비출 때 뿐이다. 궤변을 늘어놓는 양고문, 그리고 거짓을 사과하는 황우석의 TV 영상이 나란히 배치될 때 주는 묘한 감정은 분명 의도된 편집효과에 기인할 것이다. 이렇듯 더불어사는집 식구들은 지금껏 그의 권위에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양고문 앞에 항의하고자 섰을 때에도 이들은 여전히 무력하고 순종적일 뿐이다. 결국 도시개발공사와의 협상이나 적자 문제 등은 양고문의 방식대로 해결된다. 수직적이고 비민주적인 소통구조는 오히려 견고해지고 공동체의 내부문제는 다시 봉합된 것이다. 더불어사는집 구성원들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억압을 예전과 마찬가지로 그저 맥없이 감내할 수 밖에 없다. 대신 "지금이야 아쉬워서 여기 들어와 있지만" "날풀리고 살만하면" 당장 떠날 것이라는 환상으로 자신을 위무한다. 이들이 처음으로 카메라를 거부한 순간은 바로 술기운을 빌어 예의 그 스트레스를 마음껏 풀어내는-울거나 욕하면서- 마지막 장면이다. 정릉집의 불켜진 창만 보이는, 무미한 화면 위로 그들의 술취한 목소리가 겹쳐진다. 그러나 이 건조한 장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알수 있는게 있으니- 더불어'산다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지에 대한 감각적인, 그러나 지극히 정확한 답이다.</P>
<P class=bt11>허공에 끊임없이 온갖 기호를 송출하는 라디오와 TV는 영화의 또 다른 등장인물이다. 화면과 전혀 맞지않는 음색과 내용의 소리들이 무작위로 들릴 때, 그래서 이물감이 더욱 두드러질 때 배가되는 리얼리티의 위력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까닭이다. 이국의 달콤한 멜로디를 들으며 궁색한 방을 걸레로 홈치는 순간은 꽤 많은 이들이 겪어보았을 것이다. 사실 이 영화는 소리에 집중하지 않으면 그 내용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기도 하다. 도저히 달변가라고는 볼 수 없을 등장인물들의 숱한 말을 경청해야만 이들이 왜 웃거나 화를 내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말, 그것도 노숙인의 말을 집중해서 듣는 경험은 분명 진귀하고 특별한 것이다. 편의성을 이유로 사투리마저 표준어로 바꿔 자막처리하는 공중파 다큐멘터리의 방식에 익숙해져 있는 요즘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 진지한 다큐멘터리의 미덕은 바로 여기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사회적 의제를 다루면서도 쉬이 호기롭지 않고 지나치게 주저하지 않는 태도는 문제의 본질을 자연스럽게 대중에게 폭로하기 마련이다. 정치적인 것을 표방한 많은 독립영화들이 추상성과 쇄말성이라는 양극단에서 길을 잃고있는 요즘, 이 영화가 성취한 정치성은 분명 수준 이상의 것이다. 여기에 &lt;192-399, 더불어 사는 집 이야기&gt;가 제기한 주거권 문제가 대단히 시의적절한 것임을 다시금 강조하고 싶다. 집을 얻을 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생존의 권리 자체를 박탈당한 빈민들의 삶에 그 누가 무심할 수 있을까. 남한 인구의 상위 1%가 우리나라 전체 사유지의 51.5%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 현실(2007년 행자부 발표)이다. 선정적 문구도 좀 빌려오자면 한국땅을 다 팔 경우 캐나다를 두 번 사고도 남는다. 이 황폐한 공간에서 "우리는 어디에나 있다"를 외치며 빈집을 점거하는 스쾃터들의 저항은 분명 유의미하다. '모두'의 공간이 응당 갖춰야 할 공공성이란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최소한의 권리인 까닭이다. 집도 절도 없는 신세지만 '재테크에 미쳐'야한다고 강요받는 20대라면, 부디 부동산 광풍에 휩쓸리지 말고 조용히 귀를 기울여보길. '더불어사는집'의 나지막한 말소리에 반응하는 순간, 어느새 이들과 대화하고 싶어질테니 말이다. (mimi)</P>
<P class=bt11>덧. &lt;192-399, 더불어 사는 집 이야기&gt;는 2006년 서울독립영화제 대상 수상작입니다. 이미 발매된 DVD로 만나보실 수 있어요. 한국영상자료원 홈페이지의 영상자료실(http://library.koreafilm.or.kr/)에서 VOD 서비스를 이용할 수도 있겠네요. 곧 서울독립영화제 2008(12월 11일~19일, 서울 인디스페이스)이 열립니다. &lt;192-399, 더불어 사는 집 이야기&gt;처럼 소중한 영화를 또 다시 발견할 수 있기를, 빌며! 믿으며!</P></div>]]></description>
                        <pubDate>Thu, 04 Dec 2008 20:19:10 +0900</pubDate>
                        <category><![CDATA[독립영화가좋다]]></category>
                    </item>
                <item>
            <title><![CDATA[Issue :<미쓰 홍당무>(2008)에게 보내는 진심어린 제언]]></title>
            <author><![CDATA[영화연대]]></author>
            <link><![CDATA[http://www.yhyd.org/8915]]></link>
                        <description><![CDATA[<div class="xe_content"><img src="http://www.yhyd.org/image/hong_1.jpg" alt="hong_1.jpg" title="hong_1.jpg" width="760" height="506" style="" /><BR /><BR />
<P class=bt11>이번 특집은 이경미 감독의 장편 데뷔작 &lt;미쓰 홍당무&gt;로 정했습니다. 이 영화는 이제까지의 한국영화에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왕따 여선생’이라는 여성캐릭터를 전면에 배치하여 이야기를 구성합니다. 포스터에서도 볼 수 있듯이, 누구도 호감갖지 못할 이 여성은 남들의 경멸적인 시선에 아랑곳 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갑니다. 영화상으로 보면 그 당당함은 어디서 연유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특유의 비상식적 코드로 그 당당함을 유지하는 듯 보입니다.</P>
<P class=bt11>이번 특집을 &lt;미쓰 홍당무&gt;로 기획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대략 두 가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한국영화의 여성캐릭터 변화에 관한 고찰의 계기로서 입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진행된 한국영화의 양상 속에서, 과연 여성 캐릭터들은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가의 문제에 &lt;미쓰 홍당무&gt;는 반드시 짚어야 할 영화임엔 틀림이 없습니다. 언젠가, 멜로영화의 전형성으로부터 탈피한 20대 젊은 여성 캐릭터들은 '엽기'로 방향전환을 하게 되고, 기존의 예쁘고 가냘픈 여성적 이미지에서 자꾸 탈피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영화 속 남성들이 위로받는 여성 캐릭터의 이미지 역시 조폭영화의 영향관계 속에서 조금씩 변화합니다. 청순함과 강인함(폭력성)을 두루 갖춘다든가, 모성애 지극한 할머니상, 너무 커버린 미혼여성, 뚱녀에서 미녀로 탈바꿈하는 여성 등등 기존 이미지와는 다른 여성캐릭터를 통해 공감을 이끌어내려고 합니다. &lt;미쓰 홍당무&gt;는 그런 의미에서 영화 속 누구에게도 위안으로써의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호감을 과장하여 타자를 밀어냅니다. </P>
<P class=bt11>두 번째 이유는, 이 영화의 특이성을 두고 모 저널에서 “전대미문의 캐릭터 영화”로 규정하고 열렬한 지지를 쏟아내는 관점에 의문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영화고, 신선한 캐릭터를 발굴했다는 데 의의를 삼을 수는 있지만, 그 정도의 찬사는 너무 앞선 것이 아닌가가 저희 필진들의 한 목소리였습니다. 그 글들을 보면, 마치 &lt;미쓰 홍당무&gt;가 이경미라는 신인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한국영화의 지평을 바꾼 엄청난 괴작처럼 믿게끔 합니다. 대부분의 평론가들은 이 영화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습니다. 엄격한 비판론은 아주 소수에 불과합니다.</P>
<P class=bt11>그래서 더욱 이 영화에 관해 이견을 제시해야 하지 않을까, 좀 더 꼼꼼히 영화를 뜯어봐야하지 않을까라는 문제의식이 생겼습니다. 과연 비호감이기도 하고, 피곤하기도 한, 이 양미숙 캐릭터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이번 특집에서 그 부분은 꽤 세밀하게 다루어질 것입니다. 먼저 mamoro는 &lt;미쓰 홍당무&gt;에 대한 ‘캐릭터 영화’라는 규정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더불어 토드 솔론즈의 &lt;인형의 집으로 오세요&gt; 그리고 이경미감독의 단편 &lt;잘돼가? 무엇이든&gt;과 비교하면서 양미숙 캐릭터의 허전함과 아쉬움에 대해 의견을 피력합니다. 그리고 dela68은 &lt;엽기적인 그녀&gt;와 비교하면서, &lt;미쓰 홍당무&gt;의 캐릭터의 특이성, 즉 엽기에 대한 강조보다는, 안하무인인 주인공이 제자와 관계를 맺으면서 타인의 감정을 받아들이고 이를 통해 다시 스스로 살아갈 용기를 얻는 과정에 주목해야한다고 말합니다. vovovdh의 경우, mamoro의 입장과 동일 선상에서, 비정상성을 여성캐릭터에 부여한 의도를 추적함으로써 영화상의 모순을 지적하고, 결말부 주인공의 최종선택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gipsymoon은 삽질을 할 수밖에 없는 양미숙의 모습을 통해 루저(looser)와 여성유대가 어떻게 조응할 수 있는지에 대해 다른 영화들과 비교하고 있습니다.</P>
<P class=bt11>이번 특집은 &lt;미쓰 홍당무&gt;에 대해 전반적으로 아쉬운 관점을 드러내고 있기에 걱정이 앞서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만큼 한국영화, 또한 이 영화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기에 나올 수 있는 목소리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듯합니다. 한 영화를 두고 평가하는 다양한 시각은 꼭 필요할 것입니다. &lt;미쓰 홍당무&gt; 영화를 넘어서서, 한국 영화의 여성캐릭터에 대해 심도있게 고찰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P>
<P class=bt11><FONT color=#2266aa><STRONG><A class=" editor_blue_text" href="http://www.yhyd.org/voice/8913">양미숙은 어디로 가버리나? - 우주에서 날아오지 않은 놀랍지 않은 코미디.</A></STRONG></FONT></P>
<P class=bt11><FONT color=#2266aa><STRONG><A class=" editor_blue_text" href="http://www.yhyd.org/voice/8910">&lt;미쓰 홍당무&gt; 허전한 "전무후무할 ‘비호감’ 캐릭터"</A></STRONG></FONT></P>
<P class=bt11><FONT color=#2266aa><STRONG><A class=" editor_blue_text" href="http://www.yhyd.org/voice/8908">&lt;엽기적인 그녀&gt;와 &lt;미쓰 홍당무&gt; - 누가 네 모든 걸 다 받아준다고 그래?</A></STRONG></FONT></P>
<P class=bt11><FONT color=#2266aa><STRONG><A class=" editor_blue_text" href="http://www.yhyd.org/voice/8906">&lt;미쓰 홍당무&gt;의 지령, 삽질의 미스터리를 풀어라</A></STRONG></FONT></P></div>]]></description>
                        <pubDate>Sat, 08 Nov 2008 17:53:18 +0900</pubDate>
                        <category><![CDATA[미쓰홍당무0811]]></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양미숙은 어디로 가버리나? - 우주에서 날아오지 않은 놀랍지 않은 코미디]]></title>
            <author><![CDATA[영화연대]]></author>
            <link><![CDATA[http://www.yhyd.org/8913]]></link>
                        <description><![CDATA[<div class="xe_content"><img src="http://www.yhyd.org/image/hong_4.jpg" alt="hong_4.jpg" title="hong_4.jpg" width="760" height="507" style="" /><BR /><BR />
<P class=st11>양미숙은 어디로 가버리나? &lt;미쓰 홍당무&gt;</P>
<P class=st11>- 우주에서 날아오지 않은 놀랍지 않은 코미디</P>
<P class=bt11>갈수록 한국영화의 여성캐릭터는 “‘여성성’을 전면에 두고 어떻게 하면 저것에서 달아날 수 있을까?”를 연구하는 듯하다. 멜로영화에서 드러났던 청순가련 이미지를 가진 여성캐릭터에게서는 감흥도, 위안도 받지 못해서인지, 유독&nbsp; 이전에 없는 새로운 캐릭터를 요구하고 있다. &lt;미쓰 홍당무&gt;를 두고 ‘전대미문의 캐릭터영화’라든지, ‘놀라운 데뷔작!’ ‘우주에서 날아온~’이라는 수식어로 영화바깥을 감싸는 이유는 그만큼 한국영화의 캐릭터의 다양성문제가 시급하다는 것을 반증한다.</P>
<P class=bt11>냉정하게 말해서, &lt;미쓰 홍당무&gt;는 괴작은 아니다. 놀랍지도 않고, 새롭지도 않으며 신선한 캐릭터영화도 아니다. 단지 새롭고 신선한 코미디영화로 느껴질 뿐이다. 영화는 관객을 웃음으로 이끌며, 관객은 왕따 캐릭터 양미숙을 들여다보고 웃을 뿐이다. </P>
<P class=st11>‘홍조증’은 캐릭터의 겉치레에 불과한가?</P>
<P class=bt11>이 영화를 소개할 때, 주인공 양미숙을 설명하는 수식어구로 “안면 홍조증을 앓고 있는~”이란 말은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다. 안면 홍조증이 어떤 병(?)인지부터 시작해, 양미숙을 설명하는 주된 요소로 설정된 이 피부병은 증상만으로도 양미숙이라는 여자가 어떤 이미지의 여자인지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안면 홍조증을 앓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금만 당황하면 빨개지는 얼굴색 때문에 대부분 굉장히 소극적인 성격이거나, 내성적이다. 그것은 주위의 시선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마음상태가 얼굴색으로 민감하게 두드러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홍조증을 ‘고치기’ 위해서 찾아간 피부과 의사에게, 미숙은 자신이 고등학교때부터 짝사랑했던 서선생 이야기부터 시작해, 이유리(황우슬혜), 서종희(서우)와의 복수와 결탁을 구구절절 설명한다.(결코 소극적이지도, 내성적이지도 않다) 이 상담 장면에서 역시 양미숙은 누구도 동감할 수 없는 착각들을 털어놓는다. 그녀가 ‘생각을 해봤다는’ 이야기들은 자기합리화이상이 아닌, 사회적 약자이기에 겪는 고통도 아닌 정말 개인적 착각 그 자체다. 안타까운 점은 양미숙을 받아들이는 피부과 의사의 태도다. 이 영화가 양미숙으로 하여금&nbsp;동감을 이끌어내려는 의도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피부과 의사가 양미숙을 바라보며 짓는 웃음의 의미를 양미숙이 모르면 안 된다. 그만큼 양미숙은 피부과의사를 통해 조언을 구하기보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낼 수 있는 유일한 상대로 그를 대한다. 그러나 오히려 양미숙이 피부과 의사에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라고는 "홍조증은 고칠 수 없다, 약도 없다"는 말뿐이다. 이 말을 들을 때&nbsp;그녀는 허망한 표정을 짓는다. 게다가 양미숙이 홍조증과 관련한 증상을 피부과 의사와 상담하는 장면은 이 영화에 존재하지 않는다. 고칠 수 없다는 답변만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즉, 홍조증을 빙자하여 양미숙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는 장을 만들기 위한 방편으로 피부과의사와 대면한 셈이다. 양미숙에게 안면홍조증보다도 더 고민되는 것은 바로 서선생과의 관계를 진척시키는 일이다. 결국 양미숙이라는 캐릭터를 설명해주는 ‘안면 홍조증’은 단순히 그녀의 이미지만 만들어주는 ‘증상’일 뿐이다. 양미숙은 방법이 없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나서, 그런 자기 자신을 질책하거나 결코 고민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열심히 이유리선생에 대한 증오를 증폭시킨다. 그렇게&nbsp; '안면 홍조증'은 양미숙이 피부과의사를 만나기 위한 수단 정도로만 기능한다. 영화 내내 그녀는 홍조증으로 고민하지 않는다. </P>
<P class=st11>얻은 것도, 잃은 것도 없는 양미숙</P>
<P class=bt11>양미숙은 바쁜 스케줄을 소화해 내고서라도, 이유리와 서선생을 떼어놓으려고 한다. 그렇다고 자신이 이유리 옆자리를 대신할 수 있을 지 확신하지 않은 채 말이다. 이는 서선생의 딸 서종희의 심정과 무관하지 않다. 서종희는 이유리선생이 자신의 아빠와 만났기 때문에 부모님이 이혼하게 생겼다. 이런 상황에서 양미숙이 서종희와 맺는 동맹은 여러모로 누이좋고 매부좋은 계획이다. 문제는, 이 동맹관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결과가 무엇일까 하는 점이다. </P>
<P class=bt11>어학실 씬에서 성은교(방은진)는 양미숙에게 “이제 어쩔 셈이야?”라고 묻는다. 그런데 양미숙은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 “그동안 너무 바쁘게 살다보니 미처 거기까지 생각지 못했다”는 양미숙의 대답은 허탈하기 까지 하다. 그런데 그 지점에서 역시 폭소는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 관객은 끊임없이 양미숙의 엉뚱함과 답답함에 웃음을 보낸다. 그 이유는 양미숙이라는 캐릭터를 십분 이해하여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서가 아니라, 정말 나와는 다른 인간이어서 웃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웃을 수는 있지만 웃음의 의미를 찾다보면 씁쓸해진다. 쓴 웃음은 뒤로 하고라도, 양미숙은 우리에게 ‘열심히 살아야 했던 증거’를 보여주어야 했다. 결국 양미숙이 서종희와 손을 붙잡고 찾아간 ‘이’는 누구인가? 자신 몰래 이사한 피부과 의사 박찬욱이다. 도대체 양미숙은 왜! 피부과의사를 다시 찾아간 것일까. 왜 이 영화의 결말은 그를 쳐다보며 웃는 양미숙의 얼굴일 수밖에 없는가.</P>
<P class=bt11>한국사회를 살아가는 20대 후반 여성들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 보다도 팍팍한 인생을 살고 있다. 결혼에의 압박, (고학력자들의)취직에의 압박, 외모에의 압박, 경제력에의 압박 등등. 그나마 양미숙은 어엿한 (선생이라는 최고의 직업) 평생 보장 직장이 있다. 물론 (양미숙의 논리에서) 이유리 때문에 중학교 영어교사로 강등당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세상이 공평할 거란 기대를 버리고 남들보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그녀의 신조대로, 그녀는 더 열심히 살면 된다. 그러나 그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말의 의미는, 경제적, 목표지향적인 ‘열심’의 그 ‘열심’이 아닌 듯 하다. 양미숙이 고등학교 러시아어교사가 될 수 있었던 배경은 이 영화에서는 삭제되어 있다. 그렇다면 추측컨대, 그 전까지 그녀는 경제적, 목표지향적인 의미에서 열심히 살아왔던 것일까? 그러나 그녀가 씩씩거리며 땅을 파고 있는 초반 장면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녀가 열심히 살아왔던 이유는 ‘서종철선생’에 대한 짝사랑때문은 아니었을까?</P>
<P class=bt11>이경미 감독의 인터뷰를 참고하자면, 이 양미숙캐릭터는 전적으로 감독의 ‘상상만으로 만들어진 캐릭터’라고 한다. 그렇다면 양미숙캐릭터는 탄생 가능하다. 다행일지도 모른다. 상상만으로 만들어진 캐릭터니까 말이다. 양미숙은 상상 속의 인물이기에 결과적으로 다시 피부과의사를 찾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결말을, 아무리 우주에서 날아온 캐릭터(라고 할만큼 획기적인)라 할 수 있을지라도 이해할 수 있는 근거는 찾을 수 없다. 이야기 상대는 분명히 찾았고(서종희) 양미숙이 그나마 어학실에서 이제까지의 자기 자신을 깨달을 수 있었던 순간일 수 있었다면, 서종희를 통해서라도 스스로가 무얼 하려고 했던가는 생각해볼 수 있었다. 결국 양미숙은 서선생을 얻지도 못했고(오히려 그의 딸을 얻었고), 그의 가족으로부터 위로도 받지 못한채, 궁극적으로 자신이 언제부터 어떻게 그 지경이 됐는지도 알지 못한다.</P>
<P class=bt11>양미숙은 자신의 처지를 “나도 알어, 내가 별로라는거. 그냥 나니까, 나니까 싫어하는거잖아” 라고 설명한다. 본인 스스로를 떳떳하게 내세운 채, 어떤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그냥 나’라고 일축한다. 그리고 당당하게 ‘착각’을 사실로 규정한다. 그런데 그녀는 그것을 끝까지 온전하게 깨닫지 못한다. 아무도, 그것을 올바르게 설명하지 않는다. &lt;미쓰 홍당무&gt;가 아쉬운 점은 그 구체성이 축약되어 있다는 것이다. 홍당무는 왜 홍당무인지 설명하지 않으며, 그녀가 가는 방향을 가도록 내버려 둔다. 그런데, 어차피 현실적인 방향과는 거리가 있다. 양미숙은 그렇게 깨닫지 못한 채 그대로, 무수한 피부과의사의 표정을 받아들이며 끝까지 착각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P>
<P class=st11>비정상성을 여성캐릭터 안으로 끌어들이는 순간</P>
<P class=bt11>한국영화의 여성캐릭터는 수난에, 고전을 거듭하고 있다. 그 가운데 남성성을 극도로 표출시키는 장르영화들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멜로영화의 잇단 실패는 제작의 위축으로 여성캐릭터의 부재를 잇도록 만들었고, 천편일률적인 멜로영화 속 여성캐릭터들은 이제 관객으로부터도 공감을 이끌어 내지 못한다. 그러한 기운 속에서 조폭영화에서 바통을 이어받은 남성성의 기운은 다행히도 여성캐릭터 대신 위안받는 존재가 된다. 이러한 불균형은, 어쩌면 &lt;미쓰 홍당무&gt;와 같은 영화를 더욱 기다리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정상에서 벗어난 캐릭터를 통해 공감을 유도하는 방식은 철저히 ‘웃음’과 매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웃을수록 캐릭터는 살아나는 것처럼 보이고, 스토리는 캐릭터에 묻히게 된다. 결국 영화는 ‘재미’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는 것이다. &lt;미쓰 홍당무&gt;를 코미디 영화로 규정한다면,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은 단연 양미숙캐릭터일 것이다. 역시 양미숙은 정상은 아니다. 한국영화에서 양미숙과 같은 캐릭터가 출현한 것이 처음일 뿐이지, 양미숙이 결코 새로운 기록을 남길 정도의 ‘전대미문’은 아니다. 어떤 관점에서 보든 차이는 있겠지만 명백히 말할 때, 양미숙은 캐릭터가 온전하지 않은 편이다. 설명되지 않거나 모순된 부분이 많다. 그냥 이미지상으로, 에너지 철철 넘치는 인물로 그려낸 적극적인 인물이라고만 강조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류의 캐릭터가 만들어낸 모순은 모두, ‘코미디’라는 속성 속으로 일갈되어 버리면 거기서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캐릭터’영화라고 규정하게 되면, 응당 짚어야 되지만 그러지 않아도 될 부분들이 무마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섣불리 캐릭터영화로 규정하는 것은 위험하다)</P>
<P class=bt11>&lt;엽기적인 그녀&gt;(2001)에서부터 시작된 여성캐릭터의 진화는, 억세고 웃긴 할머니들 &lt;마파도&gt;(2005)에 이르기까지, 과히 ‘엽기’라는 수식어를 달아놓고 웃게 만든다. 관객들은 ‘엽기성’을 받아들이기 꺼려하면서도, 시종일관 웃음을 유발한다면 오케이다. &lt;달콤살벌한 연인&gt;(2006)에서 괴상망측한 청순가련 여성캐릭터가 칼을 들 때, 땅을 팔 때, 관객은 그 기이한 양면성에 호감을 갖는다. &lt;미녀는 괴로워&gt;(2006)에서 여주인공 한나가 뚱녀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많은 웃음을 선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들 영화에서 드러난 여성캐릭터들은 하나같이 코믹함을 안고 있는 정상적이지만은 않은 캐릭터들이다. 이런 캐릭터들이 사랑받을 수 있었던 데에는 분명 각각의 캐릭터들이 가진 비범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단 미모의 여성들이기 때문이다. 청순한 미모의 여성들이 펼치는 엽기적인, 비범한 모습들은 단순한 웃음 이상의 비주얼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놓치면 안 된다.</P>
<P class=bt11>그런 점에서 &lt;미쓰 홍당무&gt;의 양미숙은 결코 예쁘지 않다. 그런데 그녀는 스스로를 가꾸지도 않는다. 자신 스스로 ‘별로’라고 인정하는 가운데, 보다 예쁜 이유리가 경쟁상대임에도 불구하고 거울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홍당무 양미숙에게 외모는, 털어놓아야 할 수다보다 중요한 것이 못된다. 그녀는 단 한번도 서선생앞에서 여성성의 자태를 뽐내려들지 않는다. 그런데 이 점을 양미숙 캐릭터의 신선함으로 꼽을 수는 있을까. 자신을 가꾸지 않으면서도 사랑받으려는 제스처. 양미숙은 그 이상 못해서가 아니라, 안하고 있다. 이 점은 주목할 만한 캐릭터상의 문제다. 이 문제를 건드리지 않으면 우리는 양미숙을 ‘그런 사람’이라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스스로를 들여다보지 않는 사람이사랑받으려 하는 존재라는 설정 자체가 의문이다. 그래서 '양미숙'일 수밖에 없는 건가. 결국 그녀가 서선생한테 어떤 점에서 매력을 느끼고 있는 지도 영화에서는 언급된 적이 없다. 다만, 서선생(!)이기에 양미숙의 찜인 것이다. 이대로 보면 이 영화는 도대체 양미숙은 왜 자신의 외모를 들여다보지 않으며, 왜 서선생을 좋아하는지를 말해주지 않고 있다. 그런 양미숙을 새로운 캐릭터의 등장인양 마냥 기뻐할 수 있는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얘도 우리의 소중한 캐릭터(영화)를 만드는 것들 중 하나야!’라고 외친다면 그것은 분명 억지 변론밖에 되지 않는다. 그들이 양미숙을 ‘놀라움’으로 받아들이는 관점은 다분히 비정상성에 대해 그만큼 오인하고도 아니라고 부정하는 격이다.</P>
<P class=bt11>전반적으로 &lt;미쓰 홍당무&gt;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했는데, 이런 뉘앙스가 만들어지게 된 이유는 과찬이라고 할 법한 평자들의 관점 때문이었다. 이 영화가 미덕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데뷔작이라는 면죄부를 준 채 캐릭터에만 혈안이 된 균형잃은 글들은, 영화에서 무엇을 들여다보려는지 애매하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정한석이 이 영화에 대해 꼼꼼히 지적한 부분들은 그나마 비어버린 관점을 채우는 역할을 겨우 해낸 듯하다. “우리도 양미숙과 놀고 싶다!” 놀고 싶지는 않아도 이해는 하고 싶다. 오히려 영화는 양미숙의 부분을 전시하는 데 그쳤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양미숙으로 하여금 피부과 의사에게 가도록 한 저의가 도대체 뭘까 상당히 불편하다. 양미숙은 끝까지 착각 속에 살아야 하고, 우리는 그녀를 보면서 그냥 웃기만 해야 할 만큼 철없는 20대 후반 여선생에 불과한 인물인가? 그런 점에서 감독은 양미숙을 거둬들이지 않는다. 그런 홍당무 양미숙을 보면서 나도 행복하지 않다.&nbsp; 결론적으로 &lt;미쓰 홍당무&gt;는 우주에서 날아오지 않은 슬픈 코미디다.(vovovdh)</P></div>]]></description>
                        <pubDate>Sat, 08 Nov 2008 17:50:11 +0900</pubDate>
                        <category><![CDATA[미쓰홍당무0811]]></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미쓰 홍당무> 허전한 "전무후무할 ‘비호감’ 캐릭터"]]></title>
            <author><![CDATA[영화연대]]></author>
            <link><![CDATA[http://www.yhyd.org/8910]]></link>
                        <description><![CDATA[<div class="xe_content"><img src="http://www.yhyd.org/image/hong_5.jpg" alt="hong_5.jpg" title="hong_5.jpg" width="760" height="507" style="" /><BR /><BR />
<P class=st11>1. 캐릭터 영화</P>
<P class=bt11>필름2.0의 “한국영화사에 전무후무할 ‘비호감’ 양미숙 캐릭터”라는 설명이 따를 정도로 &lt;미쓰 홍당무&gt;는 캐릭터 영화라는 사실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이 영화를 이야기하는 다른 글들 또한 이야기의 논의는 양미숙이라는 캐릭터로 수렴된다. 양미숙 캐릭터로의 수렴은 대체적으로 호의적이다. 모처럼 밋밋한 한국영화계에 꽤 걸출한 캐릭터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아니 더 나아가 놀라운 반응을 보이며, 양미숙 캐릭터에 환호도 한다.</P>
<P class=bt11>한국영화에서 여성영화라 불릴만한 영화도 적고, 안면홍조증이 전면에 내세워지는 것 등, 분명 양미숙같은 캐릭터가 주인공으로 전면에 등장한 것은 이례적인 상황임에 틀림없다. 우선은 여성이 전면에 있는 영화가 드물다. 여성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캐릭터 자체가 무난한 타협을 하는 여타의 경우에 비교한다면 주목받을 만한 경우임에는 사실이다.</P>
<P class=bt11>그렇다고 지금의 분위기 만큼 이 캐릭터에 주의를 둬야하는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비교하자면 나홍진의 &lt;추격자&gt;가 흥행을 이어가고 저널들의 평가도 호의적이었던 순간, 내가 직접 확인한 &lt;추격자&gt;의 기대와 허전함 만큼 &lt;미쓰 홍당무&gt;에도 대입되는 것 같다. (실제로 이 영화에는 ‘&lt;추격자&gt;이후에 한국영화의...’라는 비교가 따르는데, 어쨌든 그 비교는 적당한 듯싶다.)</P>
<P class=bt11>양미숙 캐릭터에게서 허전함을 받는 점은 이 영화의 결말부이다. 그 전까지 그래도 한국영화에서는 독특하다는 캐릭터를 끌고오던 양미숙이 이상한 결말을 재촉하고, 그 순간에 나는 이 영화가 ‘아, 맞다. 이것은 양미숙이라는 비호감 캐릭터를 공효진이라는 배우가 연기한 것이지’라는 자각을 할 수 있었다.</P>
<P class=bt11>제작비의 규모 면에서 보면 10억 정도의 저예산이라는 규모에 바탕한 &lt;미쓰 홍당무&gt;는 감독이 밝혔듯이 처음부터 저예산으로 기획되었기 때문에 예산의 투입에 따른 기대부응의 압력으로부터 보다 자유롭다고 했다. 이경미 감독은 또한 ‘갈 때까지 가보는’ 식으로 양미숙 캐릭터를 진행하였다고도 했다. 이런 감독들의 말이 주는 기대 수준이라는 것이 나랑은 달랐던 것인지, 양미숙이 영화의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은 분명할 것 같던 캐릭터에 애매함을 더해줬고, 감독의 의중도 의아하게 느껴졌다.</P>
<P class=bt11>이런 내 느낌을 해결할 방법은 ‘캐릭터 영화’라는 수식어라는 것은 명확하게 제한적인 말이었다고 이해해야 하는 방법뿐이다. 양미숙이라는 캐릭터는 이 전체 매트릭스에는 어쨌든 저쨌든 결국에는 해가 되지 않는 문자 그대로의 ‘캐릭터’일 뿐이라고 여겨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자 그대로의 캐릭터로 양미숙을 한정하는 순간, 여러 저널들의 양미숙 캐릭터에 대한 호의와 환호가 부담스럽다. 한국의 저널들이 한국영화에서는 제한적인 의미의 캐릭터를 두고, 그 중에 좋은 캐릭터를 골라야 하며 그리고 평가해야하는 암묵적 합의가 형성된 것인가. 캐릭터 영화라는 &lt;미쓰 홍당무&gt;와 독특한 캐릭터라는 양미숙을 대하는 저널들의 반응이 한참 의아하기만 하다, 나는.</P>
<P class=st11>2. &lt;인형의 집으로 오세요&gt;</P>
<P class=bt11>비겁한 비교일 수도 있겠지만, &lt;미쓰 홍당무&gt;를 보면서 연상한 영화는 토드 솔론즈의 &lt;인형의 집으로 오세요&gt;(1995, 미국)이다. &lt;인형의 집으로 오세요&gt;는 ‘작고 뚱뚱하며 도수 높은 안경의’ 돈 위너(Dawn Wiener)가 이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과 만나 세파를 겪는 내용의 영화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중1소녀 돈 위너에게 세상은 ‘안면홍조증’의 양미숙에게 제시된 세상처럼 가혹하기만 하다. 물론 두 영화는 제작한 나라도 시기도 다르며, 각각 주인공의 세대도 다르며, 장르도 다르다는 점에서 분명 차이가 있는 영화이다. 그럼에도 이 두 캐릭터가 각각의 영화에서 각개전투를 벌이는 모습은 묘한 연장선상에 있다. 아니, 개인적으로는 &lt;미쓰 홍당무&gt;를 보는 내내 돈 위너가 크면, 양미숙이 되어 이런 상황과 곤경에 처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상상이 가득했다.</P>
<P class=bt11>이런 엉뚱한 ‘연장’의 상상은 차라리 양미숙이 선택한 결말에 동의를 주는 것 같다. &lt;인형의 집으로 오세요&gt;의 결말이 팍팍한 세상살이의 고된 눈빛을 가득 앉고 버스에 오른 돈 위너의 모습으로 영화는 끝나는데, 이것의 연장에는 그가 커서 어른이 되어 교사가 된다면 그래서 다시 버스를 타게 된다면 어딘가 있을 ‘행복’을 찾아가는 것도 나름 충분히 설득이 될 것 같았다.</P>
<P class=bt11>바꿔 말하면, 양미숙이 택한 마지막 버스 여행은 어딘지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어학실에서의 ‘재판극’을 부단히 치루고 나선 양미숙인데, 그렇게 쉽게 여행을 갈 수 있을까 싶었다. 만약 그렇게 여행을 갈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쉬운 결정이 아니라면 보다 타당한 이전 사연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야 했다. &lt;인형의 집으로 오세요&gt;의 돈 위너 정도는 되는 전언 말이다.</P>
<P class=st11>3. 사연 : 잘돼가? 무엇이든</P>
<P class=bt11>&lt;인형의 집으로 오세요&gt;가 양미숙의 이전 사연이라는 것은 나의 허망한 상상이라면 이경미 감독이 만든 &lt;잘돼가? 무엇이든&gt;은 엄연히 존재하는 양미숙의 이전 사연이다. 이경미 감독의 단편 &lt;잘돼가? 무엇이든&gt;은 무역회사에 여직원으로 일하는 지영과 희진이라는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로, 양미숙이 학교에서 숙식을 하듯 희진은 무역회사에서 숙식을 하고 지영에 대한 강한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으며 “적일 수록 가까이 두고 배워야 한다”는 문구를 책상 앞에 붙여 놓는 행동 등 양미숙이 희숙과 일정정도 연장되어 있다는 것이 명확하다.</P>
<P class=bt11>&lt;잘돼가? 무엇이든&gt;, 그리고 &lt;미쓰 홍당무&gt;를 통해 파악되는 이경미 감독의 심상은 ‘남을 해치는 재주’는 부족하지 않나 추측된다. &lt;잘돼가? 무엇이든&gt;의 지영은 가슴에 칼을 품는데 다른 사람과 부딪쳐 자신이 칼에 베이는데 이것이 그냥 꿈이고, 희진은 사장이 ‘불타 죽었으면’ 해서 정말 불이 나는데 애써 죄의식을 갖는다. 양미숙 또한 사람이 이상한 행동을 할 때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논리로, 이상한 행동으로 불만을 승화시키고, 그래도 해소되지 않는 불만은 안면홍조 얼굴에 인상을 찌푸리는 것으로 대신한다. 아무도 해치지 않는다.</P>
<P class=bt11>&lt;미쓰 홍당무&gt;를 &lt;잘돼가? 무엇이든&gt;의 연장으로 보았을 때, 좋아진 점은 익숙한 배우가 등장하고 화면이 밝아졌고 이야기도 코메디로 밝아졌다는 것이다. 반면 나빠진 점은 &lt;잘돼가? 무엇이든&gt;에서 지영은 분명하게 욕을 하고, 희진은 사장이 불에 타길 희망하지만 양미숙은 치과의사를 찾아 여행을 떠난다는 것이다. 이경미 감독의 아무도 해치지 않는 심성은 더욱 강화된 것인데, &lt;잘돼가? 무엇이든&gt;의 지영이 욕이라도 했다면 양미숙은 철저하게 캐릭터로 남길 도모한다.</P>
<P class=st11>4. 씨ㅂ</P>
<P class=bt11 align=center><img src="http://img.todaystory.net/img/e791c252a92ecda7f45f09b1e0d2f417.jpg" alt="e791c252a92ecda7f45f09b1e0d2f417.jpg" title="e791c252a92ecda7f45f09b1e0d2f417.jpg" width="500" height="369" style="" /></P>
<P class=bt11>결과적으로 &lt;미쓰 홍당무&gt;에서 나의 온 신경이 모인 것은 양미숙의 마지막 결말부 선택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결말부 여행은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양미숙은 사실 공효진이었고, 실제 비호감이 아니라 비호감 캐릭터를 연기한 것이라는 것을 한 순간 자각하게 만들어 주는 장면이었다.</P>
<P class=bt11>&lt;잘돼가? 무엇이든&gt;에도 나에게는 비슷한 느낌을 주는 장면이 있는데, 지영이 직설적으로 ‘씨발’을 남발하며 온갖 녀석들을 욕하는 장면이다. 순간, 이경미 감독에게는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영화’라는 사실을 관객이 자각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고, 무엇보다 한참 대한민국을 달궜던 유인촌의 ‘씨ㅂ'도 생각났다. 유인촌의 ‘씨ㅂ'이 아니었다면 지영의 화법이 품격없는 직설화법으로 보였을 것 같은데, 유인촌의 ‘씨ㅂ'을 겪어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품격‘있는 화법은 아닌지 싶었다.</P>
<P class=bt11>그리고 이쯤되니 나의 마음도 복잡해 진다. 이경미 감독의 남을 해치지 못하는 심성을 고려하면 &lt;미쓰 홍당무&gt;의 양미숙 캐릭터의 (나에게는) 이상한 결말에 이르른 것을 과감하게 허전하다고 말하기에는 나도 마음이 걸린다. 그래서 준비한 것이 &lt;잘돼가? 무엇이든&gt;의 지영이 말한 ‘씨발’로 돌아가는 것이 양미숙 캐릭터의 온전한 완성이 아닌가라고 &lt;미쓰 홍당무&gt;를 해치지 않는다면 말하고 싶다. 국감에서 장관이 ‘씨ㅂ'도 하는데, 영화에서 양미숙이 이정도 해줘도 되는 것 아닌가. &lt;미쓰 홍당무&gt;의 허전함을 &lt;잘돼가? 무엇인가&gt;에서 채워가며, “품격”있는 욕설을 향후 이경미 감독 영화에 주문해 본다.(mamoro)</P></div>]]></description>
                        <pubDate>Sat, 08 Nov 2008 17:43:27 +0900</pubDate>
                        <category><![CDATA[미쓰홍당무0811]]></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엽기적인 그녀>와 <미쓰 홍당무> - 누가 네 모든 걸 다 받아준다고 그래?]]></title>
            <author><![CDATA[영화연대]]></author>
            <link><![CDATA[http://www.yhyd.org/8908]]></link>
                        <description><![CDATA[<div class="xe_content"><img src="http://www.yhyd.org/image/hong_3.jpg" alt="hong_3.jpg" title="hong_3.jpg" width="760" height="507" style="" /><BR /><BR />
<P class=bt11>&lt;미쓰 홍당무&gt;가 개봉하고 엽기적인 그녀 리메이크판인 &lt;마이 쌔시 걸&gt;이 그 뒤를 잇자, 자연스럽게 엽기라는 단어가 떠오르며 그녀들의 특성이 이 단어에 묶여졌다. 하지만 양미숙의 엽기성과 엽기적인 ‘그녀들’의 행태는 발생과 양상 면에서 사뭇 다르게 영화 속에 표현되어 있어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 해도 다른 해석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P>
<P class=bt11>엽기적인 그녀가 할리우드로 건너건 &lt;마이 쌔시 걸&gt;은 순화(?)되어 엽기적이라고 하기 민망할 정도인데 그녀의 엽기성이 빠지자 영화는 그렇고 그런 멜로물이 되어버렸다. 골격을 그대로 들고 가서 엽기적인 행각과 관련된 몇몇 장면만 수위를 낮추거나 뺐을 뿐이건만, 그렇다면 원작 자체가 엽기성을 빼면 별 볼일 없다는 말로 귀결될 수 있는 것일까? 이는 물론 성급한 진단이다. ‘엽기’라는 말이 한국사회를 강타한 조건에 &lt;엽기적인 그녀&gt;를 위치시킨다면 한국의 문화적 코드가 미국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리메이크작이 엽기를 뺀 상태에서도 원작의 ‘모든 것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에 대한 환상’이라는 모티브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면, 엽기는 그저 환상을 살짝 덮어주는 가리개 역할일 뿐이었다는 것을 짚어낼 수 있다. 어쩌면 이것이 한국 사회에 엽기가 등장한 무의식과 상통할지도 모르겠다.</P>
<P class=bt11>내가 아무리 상식적인 수준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여도 받아줄 상대가 곁에 있었으면 하는 바람은 어째서 문제시 되어야 하는가? 환상 자체에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 역시 윤리적으로 문제시될 수 있겠지만, 이 환상이 영화 속에서 재현되었을 때 드러나는 양상에 대해서는 가치 평가를 내릴 수 있다고 본다. 우리는 그녀(전지현)의 엽기적인 행동을 보고 웃지만, 그녀가 일방적인 것은 눈감아준다. 그녀를 받아줘야 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견우(차태현)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은 미모와 전前 남자친구의 죽음이다. 예전의 멜로물에서라면 처연함 혹은 신파로 표현되었을 여주인공의 상황이 단지 엽기적인 행각으로 치환되었을 뿐이다. ‘불쌍한 그녀들’이 ‘엽기적인 그녀’로 변신하면서 예전에는 불가능했던 상황, 남자들의 배려 없는 행동들을 크게 꾸짖을 수 있는 허락을 받지만, 맨 정신으로는 견우나 때리고 괴롭힐 따름이다. 예전 영화에서는 상실감이 신파로 과장되었다면, 이러한 장치들로 인해 &lt;엽기적인 그녀&gt;에서는 아픔이 해프닝으로 전락한다. 그런 고통을 겪은 당사자 스스로의 힘으로 떠안을 용기나 책임에 관해서 영화는 침묵하거나 무시한다. ‘뭐 내가 힘들어 망가져도 받아줄 사람이 있으면 만사 OK’라는 노예근성(강마에 톤으로 읽으면 딱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엽기도 그럴듯한 조건 - 예뻐야 하고, 애절한 사연이 있어야 하고, 제일 중요한 것은 엽기적인 행각은 일시적일 것 -을 충족시켜야 봐줄만하다는 전제가 들러붙어있다는 것, 현실은 누구나 봐주지 않는다는 것이다.</P>
<P class=bt11>양미숙(공효진)은 엽기적이지만 ‘모든 것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에 대한 환상’을 이루는 것에 대한 해당사항이 없다. 양미숙 양은 일단 상대를 잘 못 골랐다! 그녀의 사연은 엽기적인 그녀보다 더욱 절절하지만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종류의 것이고, 그녀를 촌스럽게 만드는 안면홍조증은 현대의학으로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이다. 결정적으로 엽기적인 그녀의 엽기는 받아주다가 기다려주면 회복될 일시적인 것이지만, 양미숙 양의 그것은 성격 그 자체로 굳어진 상태이다. 딱 봐도, 그녀를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게 보인다. 영화는 캐릭터를 통해 ‘모든 것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에 대한 환상’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다. 대신 동병상련의 연대감을 만들어내는데, ‘미숙-종희(서우)’ 관계는, 결과가 어찌되었던 간에 하나의 전환점으로 볼 수 있다. 종철(이종혁)과 잠자리를 가진 후부터는 양미숙 양의 안하무인에다 맹목적인 성향에는 종희에 대한 미안함이 비집고 들어온다. 그러면서 그녀는 종희의 처지와 감정을 살필 수 있게 된다. 두 사람은 &lt;엽기적인 그녀&gt;보다 훨씬 비상식적인 상황들을 만들어가며 가까워졌지만, 일방적인 환상으로 구축되지 않은 상호적인 관계로 보인다. 미숙이 종희를, 종희가 미숙을 발견한 틈은 쉽게 닫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당장에는 그들도, 세상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한 발견이 새로운 힘으로 발휘될 수 있기를.</P>
<P class=bt11>자신의 모든 것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그것은 부모, 형제도 해줄 수 없는 일이며, 그것을 못해 준다고 해서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사랑은 무조건 받아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욕망을 드러내고 으르렁 거리도 하고 물러나기도 하는 어찌 보면 전쟁터라 할 수 있다. 전쟁터에서 부상을 당해도 결과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져야 사랑이 보인다는 것. 상대방을 탓하거나 세상을 탓하거나 구원만을 바라고 자신을 방치해둔다면 혹은 구원해줄 수 있다는 오만을 가진다면(견우) 자신 안에 갇혀 사랑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20살 초반의 나르시시즘적인 사랑과 그보다 훨씬 피곤한 29살 양미숙의 사랑을 보고 얻은 짧은 단상이었다. (by dela68)</P></div>]]></description>
                        <pubDate>Sat, 08 Nov 2008 17:38:55 +0900</pubDate>
                        <category><![CDATA[미쓰홍당무0811]]></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미쓰 홍당무>의 지령, 삽질의 미스터리를 풀어라]]></title>
            <author><![CDATA[영화연대]]></author>
            <link><![CDATA[http://www.yhyd.org/8906]]></link>
                        <description><![CDATA[<div class="xe_content"><IMG height=506 src="http://www.yhyd.org/image/hong_2.jpg" width=760 editor_component="image_link" &gt;<br /> <BR />
<P class=bt11>어쩌면 많은 사람들은 영화가 좋다 싫다 하는 느낌을 금방 받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필자에게 이 영화는 좋다/좋지 않다거나, 재미있다/재미없다 등의 정리된 느낌을 갖는데 힘든 영화였다. 그 이유는 이 영화가 드물게도 여성을 정말 전면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영화이기 때문이고, 그렇기에 영화가 자꾸 예쁘지 않은 대개의 사람들이 놓인 현실과의 비교를 통해 읽혀졌기 때문이다. 이런 어려움을 푸는데 도움을 조금 받을 수 있을까, 떠오르는 좀 다른 이야기를 시작으로 &lt;미쓰 홍당무&gt;(이하, &lt;홍당무&gt;)라는 영화에 접근해 본다.<BR />얼마 전 술집에서 일어난 일이다. 한 테이블에 있던 남자가 뒤로 넘어갔다. 그는 넘어지면서 술집의 인테리어를 건드렸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옆 테이블에 대나무 장식이 쓰러졌다. 그리고 그 테이블에 있던 음식이 그 자리의 한 여자 소맷자락에 튀고 말았다. 사건은 모든 사람들이 그녀가 당한 테러를 깨닫지 못한 채, 뒤로 넘어간 남자의 안위만을 챙겼다는 데에서 일어났다. 소매를 망친 그녀는 단단히 화가 났거나 섭섭했고 급기야 술집직원들과 뒤로 넘어간 남자의 일행들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뒤로 넘어갔던 남자는 자신이 해를 끼친 그 여자 테이블의 술값을 계산해주고 옷 수선도 책임지겠다는 제안을 했으나, 여자의 화는 누그러질 줄을 몰랐다. 실랑이는 계속되었고 커져갔다. 필자의 지인은 이것이 남녀의 차이라며 눈을 반짝거리고 사태를 관찰하고 있었다. 남자는 자기가 끼친 손해의 몇 배를 배상하는 것으로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여자는 그런 걸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자신을 전혀 돌아보지 않았던 것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다. 여기서 상한 것은 그녀의 옷자락이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은 마음을 달래는 것이다. 남자들은 종종 회사에서 여자들과 일하기가 불편한 이유를 여자들이 감정적이라는 데에서 찾는다. 그녀들은 일이 안 풀리거나 안 좋은 말을 들으면 곧잘 울어버린다는 것이다. 사건에 포커스를 맞추기 보다는 기분의 상태로 곧장 옮겨가버리는 것, 그것은 지인의 말대로 정말 여자들의 본성인 것일까. 그렇다면 &lt;홍당무&gt;는 정말 여성적인 방법을 취하고 있는 영화이다.</P>
<P class=st11>1. 삽질하기</P>
<P class=bt11>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졸업사진은 영화 전체의 질문거리이다. 그녀는 도대체 왜 튀어 오른 것일까? 이 ‘튀는’ 행동은 심지어 카메라의 프레임에 걸쳐지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그녀의 튀어 오른 행동은 삽질이다. 해결해야 하는 어떤 일과 관련이 없는데 그것이 필요하다 믿고 힘을 쏟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삽질했다고 말하고는 한다. 정의하자면 삽질이란, 어떤 일에 정확히 맞는 일을 수행하지 않고 엉뚱한 방향으로 매진하여 힘을 쏟은 것 즉, 허사, 쓸데없는 짓을 일컫는 말이다. 양미숙의 생활은 이런 삽질들로 둘러싸여 있다. 삽질의 목록을 적어볼까. 우선 영화의 가장 큰 동력이 되는 부분으로, 양미숙은 자신의 고교 담임이었다가 동료가 된 서종철 선생을 짝사랑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유부남이다. 즉 그녀의 사랑은 일종의 삽질인데, 더욱이 그녀는 서 선생도 자신을 사랑한다는 착각에 빠져있다. 완전 삽질. 그녀 양미숙은 애정전선뿐 아니라 직업전선에서도 삐걱대고 있다. 그녀는 러시아어 대신 영어를 가르쳐야 하고, 그 때문에 아침 일찍부터 영어 공부를 하러 학원에 다니고 있는 것이다. 커리어도 삽질중이다. 그뿐인가. 그녀는 지나친 안면홍조를 치료하기 위해 간 피부과에서 정신 상담을 받듯이 자신의 삶을 고백하고 있다. 병 치료 중에도 삽질을 하고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그녀가 벌리는 새로운 일들도 삽질이다. 그녀를 영어교사로 밀어낸 인기 러시아어 선생과 서종철 선생은 잠시 눈이 맞았고, 서 선생이 이혼하고 그 인기녀 이유리 선생과 맺어질까봐 양미숙은 서 선생의 딸과 연합하여 이혼을 막기 위한 전쟁을 벌인다. 짝사랑 상대의 사랑을 막기 위해 그의 부인과 맺어 주려는 양미숙의 노력이라니, 참으로 삽질이다.</P>
<P class=bt11>양미숙의 일과는 이렇게 엉뚱한 힘쓰기로 둘러싸여 있다. 그러니까 영화 초반에 그녀가 “사람이 비상식적인 행동을 할 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거에요.”라는 대사와 함께 ‘삽질’을 하는 장면은, 아주 친절하게 그녀를 설명해주는 주석이다. 또한 이것은 영화를 한편의 미스터리로 만드는 장면이기도 하다. 스스로도 밝혔듯이 삽질은 알 수없는 취미 생활이 아니라 어떤 이유를 가진 행동인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답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니까 도대체 그녀는 왜 삽질을 하고 있는 것일까?</P>
<P class=bt11>이런 삽질하기는 이 영화를 연출한 이경미 감독의 전(前)작인 단편영화 &lt;잘돼가? 무엇이든&gt;에도 익숙한 것이다. 한 무역회사에서 탈세를 목적으로 한 장부 조작에 두 명의 여성이 동원된다. 지영은 직장이 불만스럽지만 어쩔 수 없이 일을 그만두지 못하고 매사에 자존심이 상하는데, 그녀의 동료 희진은 한심할 정도로 일에 열심이고 충성스럽다. 게다가 희진은 부당한 회사 일에 대한 불만은 제로처럼 보이며, 성과를 내는데서 튀려고 하는지 지영과 그 일의 수행능력을 경쟁하려고 든다. 또 희진은 회사에서 숙식할 정도로 억척스럽다. 지영은 아첨꾼 같고 구질구질한 것 같은 그녀의 주책 혹은 억척스러움을 경멸한다. 지영과 희진이 향해야 할 방향은 자꾸 어긋나 서로를 향한 원망과 생채기만 늘어간다. 이 역시 삽질.</P>
<P class=st11>2. 캐릭터 만들기와 맥락의 약화</P>
<P class=bt11>그런데 이 단편영화는 지영과 희진이 느끼거나 그렇지 못하거나 그들 사이에 형성된 어떤 유대에 닿는다. 그 유대는 젊은 여성 둘이 각자 나름 심각하게 이 현재를 살아가고 있으며, 그 현재가 지금 여기 사는 젊은 여성의 것 같다는 우리의 공감에 기인한다. 주인공 지영은 직장을 막 선택하고 살아가게 되는 우리들의 선택과 그에 따르게 되는 여러 감정들을 보여준다. 지영과 더불어, 실제 생활에서도 종종 있으며 늘 뒷담화와 왕따의 대상이 되는 이기적인 희진 역시 어떤 공통적인 감수성, 즉 우리 모두에게 공통적인 듯한 어떤 무대를 통해 유대의 장으로 흡수된다. 그 무대는 무역회사였고, 노동환경이었으며, 우리의 생활공간이었다. 이 단편이 버스에서 머리를 맞대고 조는 지영과 희진의 뒷모습을 엔딩으로 하며 관객들과 이르게 된 유대는, 그녀들의 피곤함이고 결국 우리들의 피곤함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유대감 속에서 지영과 희진은 우리의 일부로서 사랑스러운 캐릭터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P class=bt11>&lt;홍당무&gt;는 감독이 말했듯이 이 이해할 수 없이 주책스럽고 억척스러운 희진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이다. 헌데 &lt;홍당무&gt;에는 위와 같은 공통의 무대 자체는 상당히 약화되어 있다. 우리는 그녀가 자신의 외모 탓에 그러한 것인지, 그녀의 성격 때문에 그러한 것인지, 미움 받는 원인에 대해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 졸업사진의 전모가 밝혀지는 것을 가지고 그녀가 처한 상황의 원인을 말할 수는 있다. 양미숙은 왕따였다. 학생들이 그녀를 싫어하는 이유는 그녀가 늘 부스스하고 깔끔하지 못 해서라고 덧붙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는 삽질 성격의 원인이라고 추측할만한 외모지상주의 같은 언급에 몰두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양미숙에게와는 달리 예쁘장한 이유리 선생에게 집적대지만, 이런 힌트들은 우리가 마른 것들(?)/이쁜 것들(?)이라고 하며 외모가 평범한 데서 오는 불이익(?) 혹은 저이익(?)을 투덜대게 되는 무대를 형성하는 데에는 부족하다.<BR />이 영화에서 역시 주된 것은, 양미숙이 외모로 인해 뭔가를 당하는 모습보다는 그녀가 강박적으로 삽질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양미숙이 보이는 삽질은 보통사람과 똘아이의 경계에서 왔다갔다 하는데, 영화가 양미숙이라는 캐릭터에 몰두하여 그녀를 극단적으로 부각시키기 때문에, 그리고 그 원인으로 왕따를 당한 특정 경험을 던져주기에, 왠지 모르게 영화의 전개는 양미숙 혼자만의 고통이자 성격으로 부각되는 면이 있다.</P>
<P class=bt11>실은 우리 역시 꽤나 삽질하고 살아간다. 쓸데없는 호의에 두근거리고, 작은 것에 큰 기대를 걸고, 쉽게 인정받을 것 같은 낙관에 휩싸이곤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양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