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단상
영화 초반을 장식하는 행콕의 기행들 그리고 PR 전문가 레이와의 우연한 만남을 보면서 내심 기대했던 이야기란 것이 있다.
그것은 결국 행콕이 어떻게 변해서 우리들에게 어떤 영웅이 되는지를 보고 싶었던 것인데, 그가 쫄쫄이 수트를 입고 무장 은행 강도를 물리칠 때만해도 영화가 지금까지 쌓아놓았던 기대감들이 조금씩 해결되는 통쾌함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영화는 이런 식으로 나가야만 했다. 엄청난 능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답답한 행콕이 속 시원하게 영웅 노릇을 하게 되길 바라는 것이야 말로 가장 자연스런 관객의 반응이 아닐까?
하지만 정말 <행콕>은 행콕스럽게도 이런 기대를 무자비하고도 순식간에 깨버린다. 진짜 영웅이 되는 첫걸음을 내딛는 순간, 엉뚱하게도 새로운 수퍼히어로가 나와 이야기의 중심을 흐트려 놓는다. 알고보니 세상에 딱 한 명 더 있는 수퍼히어로가 바로 레이의 아내 메리였던 것. 그녀가 생뚱맞게 냉장고를 던져버리는 순간, <행콕>은 완전히 다른 영화가 되어 버렸다. 이걸 과연 하나의 영화라 할 수 있을지 당혹스럽다.
위태로움은 또 다른 곳에서도 발견된다. 행콕과 메리의 첫 만남을 보면 그 둘 사이에서 왠지 모를 이상 기류가 흐른다. 이것은 메리가 나중에 수퍼히어로라는 걸 암시하기 보다는 마치 둘 사이에 불륜의 싹이 피어날 것 같은 엉뚱한 예감이다. 유부녀와 수퍼히어로 간의 미묘하게 오가는 시선이라니. 도대체 어울리지 않는다. 수퍼히어로 영화의 공식을 그대로 따라 달라는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는 커다란 내러티브은 따라줘야 할 것 아닌가. 메리가 냉장고를 던져버린 상황도 마찬가지다. 그녀가 냉장고를 던져 버린 것은 행콕과의 미묘한 관계를 청산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불륜의 키스가 무르익으려 하자. 그녀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 숨겨왔던 영웅적 본색을 드러내고 냉장고를 던져 버린다. 사실 이 때 들었던 생각은 정말이지 '뭥미'였다. 가정을 지킨다는 명목하에 가정 필수품인 냉장고를 던져 버리다니!
이런 가정/영화 파탄적인 내러티브를 수습하고 싶었는지 아니면 이렇게라도 하면 그래도 잘 짜인 이야기가 되겠다 싶어는지 냉장고 사건 이후 영화는 위태로운 내러티브에 덕지덕지 땜방을 가한다. 행콕과 메리가 만나게 된 것은 몇 천년 동안 그들이 이어온 부부의 연이 서로를 자석처럼 끌었기 때문이고, 그 둘이 함께 있으면 초능력이 사라진다는 또 다시 뜬금없는 설정을 보태 위기를 만들어 낸다. (행콕은 게다가 기억상실증까지 있다!) 이쯤되면 도대체 <행콕>의 이야기가 뭔지, 뭘 말하려는 건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가족 드라마를 쓰고 싶었던건지, 영웅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지. 뭥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