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단상
예전에 타짜를 보고 써 본 글인데, 회원레벨이 8로 올라간 기쁨에 글을 올립니다 ^^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열흘 동안 붉은 꽃은 없다는 것을 이르는 말로 흔히 권세의 무상함을 뜻한다. 인구에 회자될 만큼 세상을 손바닥 위에 놓고 쥐락펴락하던 권력도 인간의 유한한 수명보다 짧은 경우가 다반사다. 대를 이어 자자손손 용비어천가를 부르는 것이 1세기가 넘어가는 경우는 보통 왕족에 해당하고, 호위호식을 누리는 것이 3대가 넘는 것은 보통 양반네에 해당한다. 뒤 배경 없이 맨 땅에 헤딩하는 필부필부에 속하는 경우라면 그 자신이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권세를 누린 것만으로 큰 복을 타고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개인이 누릴 수 있는 권세의 기간도 현대에 들어서서 주기가 빨라졌다. 속도가 세상을 지배하는 오늘날, 권불십년이라고 하면 참으로 질기게 권력의 끈을 부여잡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룻밤 새에 판이 뒤집어지는 꼴을 우리는 수도 없이 목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힘이 가진 마력은 거세고 화려한 기세로 일순간에 인간을 황홀경에 빠뜨리는지라 어리석은 중생은 권세의 덧없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몸을 지옥 불에 던지기 일쑤다. 불을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드는 불나비처럼 말이다. 영화 <타짜>가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것과 동시에 터져 나왔던 노래 ‘불나비 사랑’이 한대수의 가슴팍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목소리에 담겨 듣는 이의 가슴에 아스라이 전해져 오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이성이 지배하는 머릿속은 단호히 거절 의사를 밝혔는데도 손은 뇌의 명령보다도 빠르게 불을 향해 움직인다. 타짜가 눈보다 빠른 손을 가졌다는 것은 괜한 농이 아니다. 번지르르한 미사여구도 아니다. 빠른 손을 갖추지 못하면 타짜라 불릴 수 없다.
허나 타짜가 어디 빠른 손만을 갖춘다고 되는 것인가. 기술은 노력으로 보상된다. 그러나 개패를 가지고도 구라를 칠 수 있는 배짱과 연기력의 9할은 타고난 것이다. 고니의 대사처럼 늑대가 개 밑으로 들어 갈 수 없듯이 꽃들의 전쟁터에서는 타짜로 성장할 수 있는 타고난 늑대가 존재한다. 될 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보는 법! 삼천리금수강산에 아호를 드높인 평경장은 싹수가 노란 고니를 단박에 알아본다.
고기(肉)는 뭍에서 놀고, 고기(魚)는 물에서 놀아야 활개를 치듯이 씨도 싹을 트이는 곳에 따라 탱자와 귤 사이를 넘나든다. 타짜의 길로 들어서자마자 고니도 제 세상 만난 것처럼 가진 재주를 만개한다.
특히 이대 나온 배꽃(정마담)과 쌍으로 파리 떼를 꾀면서 타짜의 정점을 달린다. 자고로 꽃이라 함은 벌과 나비를 꾀야 할진대, 파리 떼가 꼬이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배꽃이 아니라 태생이 끈끈이주걱 같은 식충식물로 사료된다. 또한 그것이 싫증이 났을 때는 가지치기를 해 난(화란)에게 옮겨 가는 것도 가능하다. 하이라이트에 이르러서는 화투계의 아귀라 불리는 화왕과의 결투까지, 일장춘몽도 이렇게 화려한 꿈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열흘 붉은 꽃은 없다고 했다. 고니도 어차피 지고 말 꽃에 불과하다. 비록 영화의 주인공이라는 독특한 지위상 다른 꽃들이 다 진 마당에도 지고지고 또 피는 무궁화 같은 생명력으로 마지막까지 살아남았지만 말이다. 현실의 타짜의 삶은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언젠가는 나도 다치거나 죽는다. 그게 타짜이니까.”라고 고니가 했던 말이 씨가 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한대수의 ‘불나비 사랑’이 더 짠하게 가슴팍을 아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