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입하고 나서 글을 올려야 하긴 할것 같은데... 개인적인 사정으로 요새 쓴 글이 없어서... 예전에 썼던 글을 올립니다. 좀 오래된 글이라 스스로 읽고도 부끄러운 점이 많네요.


언론의 강력한 힘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가 알 것이다. 문제는 언론의 힘이 독재라는 힘 앞에서는 항상 2인자였다는 것이다. 언론은 독재에 자세를 낮춰주었고 2인자와 합쳐진 독재의 힘은 그야말로 거슬릴게 없었다. 힘에 기생하는 언론의 태도는 시대가 암울할수록 더욱더 심했다. 일제시대에 그러했고, 군부독재정치 시절에 그러했다. 언론, 지식인 등, 2인자들은 1인자의 횡포를 막아주지 않았고 더러는 앞장서기도 했다. 영화는 이들을 비판하고 있고, 이를 위해 영화 속 대부분의 인물에 상징성을 부여하였다.

사실 필자는 폴란드와 나치에 관련해 언론의 역할이 어떠했는지 모른다. 아마도 우리의 일제 시대와 군부 독재정치를 떠올리며 영화를 봤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독일 영화이고 배경이 폴란드임과 상관없이 필자가 한국의 상황에 맞춰 해석한 것이 무리한 해석이거나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영화를 통해 자신의 문제를 보는 것 역시 영화를 바라보는 하나의 시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스카는 양철북을 쳐 사람들의 주의를 끌고 그 후 소리를 질러 유리를 깬다.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오스카는 언론을, 사람들의 주의를 끌게 해주는 양철북은 언론이 힘을 가지게 해주는 도구를 상징한다. 영화는 오스카의 태도에 따라 힘에 굴복하지 않는 자세를 가진 전반과 힘에 굴복하고 결국은 기생하게 되는 후반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게 된다. 이런 오스카의 변화를 통해 독재 앞에 약해지고 결국 힘을 더해주게 되는 언론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다.

오스카는 세 살 때 스스로 성장을 멈추기를 선택한다. 사회 속에서 성장한다는 것은 사회화된다는 것이고 좀더 솔직해지자면 세상과 타협하는 것이다. 세상과 타협하기를 거부한 언론은 올바른 역할을 행하게 된다. 오스카의 파괴적인 힘을 가진 목소리는 그로부터 양철북을 빼앗으려는 기성 세대로부터 양철북을 지키는데 쓰이고 단어를 따라 반복시키며 일방적인 교육을 하는 교사의 안경을 깨뜨려 마음의 창인 눈으로 직접 세상을 보게 한다. 또 영화는 오스카가 양철북으로 나치의 행렬과 비슷한 모습으로 아이들을 몰고 다니며 시커먼 도깨비가 숨었다는 유리를 깨고 오스카의 무리가 지나갈 때 나치가 멈칫한 후 사람들이 나치에게 돌을 던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언론의 나치 못지않은 영향력과 대중에 미치는 올바른 영향을 표현한 것이다. 총통의 대리인을 환영하는 행사에서는 폴란드를 비하하는 발언을 하는 환영사에서 오스카는 똥을 밟는 행위를 통해 이것을 조롱하고 양철북을 쳐 환영 인파를 선동하여 우스꽝스런 장면을 연출하게 한다. 나치의 군복을 입은 사람은 말없이 자라서 인류에 봉사한다며 감자를 좋아한다고 하고는 글을 가르친다는 오스카에게 읽지도 쓰지도 못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언론의 계몽운동과 나치의 언론에 대한 압박과 전체주의적인 그들의 사고관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오스카의 어머니인 아그네스의 죽음 이후로 오스카는 변화하게 된다. 아그네스는 독일인도 폴란드인도 아닌 카슈비아인으로 독일인의 아내이자 폴란드인의 아내이기도 한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은 중립적 인물을 상징한다. 그녀는 오스카를 낳고 양철북을 사준 인물로 언론의 객관성을 말해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녀가 중립적인 인물인 만큼 그녀의 태도 변화는 당대의 상황 변화를 반영한다. 애초에 그녀는 길거리에 온통 총통의 연설뿐이라며 불평하는 인물이었고 전쟁에 의한 시체를 먹고 자란 뱀장어를 거부하기도 하였으나 결국은 그것을 먹게 되기까지 이른다. 전쟁의 시체는 전쟁 최대의 피해자이고 이 시체를 먹고 자란 뱀장어를 먹는 것은 전쟁에 의해 배를 불리는 행위를 뜻하게 된다. 그녀는 전쟁을 인정하고 그로 인한 이익까지 챙기게 된 것이다.

그녀가 고해성사하는 장면은 당대의 상황을 더욱더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그녀는 신부에게 남자와 죽을죄를 지었다고 하며 그 대가로 견디기 힘든 고통을 얻었다고 한다. 폴란드인을 사랑하고 폴란드인의 아이를 갖게 된 것을 고통스러워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녀가 자살을 택하게 되는 것은 당대 상황이 그만큼 나치의 분위기가 됐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만큼 상황은 나치 쪽으로 기울어지고 오스카는 고장 난 양철북 대신 새 북을 주던 장난감 상인 마커스의 죽음으로 양철북조차 잃게 된다. 고장 나 소리를 낼 수 없는 북을 들고 거리를 걷는 오스카의 옆에서 신문은 여전히 팔리고 있다. 언론의 주체가 힘을 잃은 후 언론을 지배한 것이 누구인지는 안 봐도 뻔한 일이다. 실제로 바로 그 다음 장면으로 모두가 나치의 방식으로 경례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나치가 완전히 단찌히를 점령했음을 보여준다. 언론이 힘을 잃어 가는 모습은 오스카를 통해서도 보여진다. 성당에서 오스카는 아기 예수에게 양철북을 건네주며 북을 치라고 한다. 인류를 구원한 메시아에게 그 힘을 건네주며 상황을 변화시켜 줄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메시아는 북을 치지 않는다.

결국 이런 상황을 이기지 못하고 오스카는 변화한다. 오스카가 북을 놓고 할머니의 치마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은 앞으로 그가 변화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북을 놓는다는 것은 언론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치마 속으로 들어가는 행위는 남성으로서 여성과의 성행위에 집착하게 될 것이란 것을 암시한다.

이제 세상과 타협을 거부했던 그의 목소리는 마리아에 대한 사랑의 연가를 부르는데 이용되고 유리를 깨는 능력은 유리잔에 하트를 그리는 꼼수로 이용된다. 처음에는 총통의 입성을 환영하는데 북을 치던 오스카는 결국 전쟁의 최전선에서 위로 공연을 하기까지 이른다. 정권에 완전히 동조하고 그로 인해 그는 부유한 생활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가 베브라의 곡예단에 들어가 위로 공연을 한다는 것은 이 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다. 베브라는 절대 왕정시대의 절정의 전제군주였던 루이14세의 직계 후손이라 자신을 소개한다. 가장 강력했던 독재자의 후계자의 밑에서 그와 함께 공연을 하는 것이다. 독재 정권과 결탁한 언론의 행동은 그야말로 우스꽝스런 구경거리 이상이 되지 못한다.

영화가 언론에 대해서만 이런 비판을 가하는 것은 아니다. 우체국에서 일하는 폴란드인인 얀 브론스키와 코비엘라는 지식인을 상징하고 이 둘의 비교를 통해 정권과 결탁한 지식인 역시 비판한다. 오스카가 얀을 우체국에 데려갔을 때 코비엘라는 오스카에게 새 양철북을 주려다 독일군의 총을 맞고 죽게 된다. 옳은 지식인이 언론에게 그 힘을 다시 찾아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변화한 오스카는 이것을 촛불을 올려놓는 것으로 이용하고 얀과 함께 카드놀이로 돈내기를 한다. 전쟁으로 국가의 존폐가 앞에 있음에도 기득권자들은 그 안에서 아웅다웅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카드로 쌓은 성이 독일군의 총알 한방으로 무너지듯 폴란드가 패함으로써 얀은 총살을 당하게 된다. 하지만 포로로 잡혀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여성이 그려져 있는 카드 한 장을 들고 웃음을 짓는 얀의 모습은 기득권자의 최후가 더욱 우스워 보이게 만든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오스카는 독일의 패전 후 그 책임을 독일인에게 돌린다. 나치의 휘장을 아버지에게 넘겨 그가 소련군에 의해 죽게 만드는 것이다. 나치의 전쟁의 최전선에서 동조를 하다가 그 책임을 독일인에만 넘기는 오스카의 행위는 마치 한국의 몇몇 언론을 떠올리게도 한다.

결국 오스카는 양철북을 무덤에 버리고 다시 성장하기로 결정한다. 여기서 그의 아들인 쿠르트가 성모 마리아 상과 오스카에게 돌을 던진다. 쿠르트는 옳은 역할을 하던 오스카의 어릴 때와 같다. 성모 마리아의 기도하는 그림과 아그네스의 모습을 교차해주어 보여주었던 장면을 떠올렸을 때 이것은 중립적이었으나 나치의 편으로 돌아선 인물과 그런 언론에 돌을 던지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쿠르트는 새로운 세대를 상징하고 그들은 나치에 동조했던 자들을 비판하는 것이다. 오스카는 무덤에 빠지고 다시 성장하기 시작한다. 세상에 타협한 그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다가 독일이 패전하자 겉으로도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제 언론의 역할을 하는 오스카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또한 영화는 미국에 대해서도 비웃는 듯 하다. 방화범이었던 오스카의 할아버지는 미국으로 도망쳐 갑부가 되었다고 한다. 헌데 그 소문을 들어보니 좀 이상하다. 캐나다에서 원목을 수입하고 성냥공장을 가졌고 화재보험으로 성공을 했다고 한다. 방화범이 화재의 원인인 나무와 성냥을 가지고 화재보험으로 성공했다니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아마 현재 미국의 부의 이면에 있는 여러 횡포들에 대한 비웃음이 아니었을까. 전쟁을 일으키는 주체가 전쟁을 일으킬 위험이 있다며 공격을 하는 모습이 묘하게 떠오르기도 한다.

의사가 의학지에 쓴 데로 언론은 파괴적인 힘을 가졌으며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현대와 같은 미디어 사회에서는 더욱더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누구를 위하여 북을 쳐왔고 누구를 위하여 북을 칠 것인가는 생각해봐야 할 문제일 것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결국 오스카를 무덤에 빠뜨리고 언론으로서의 역할에 종지부를 찍은 건 새로운 세대인 쿠르트가 던진 돌이라는 것이다.

글: 김성민 (vividqg@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