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사정으로 영화연대를 부득이 탈퇴했다가 여유가 생겨 다시 재가입했습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앞으로 틈틈이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


평화. 우리는 평화를 매우 긍정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세계 정치와 같은 분야에 있어서 평화는 가장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상태다. 그러나 평화가 항상 아름답기만 한 것일까?
남편의 애정어린 돌봄에도 불구하고 버지니아 울프의 행동과 사고의 흐름 하나 하나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무치는 불안감을 느끼게 한다. 남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아들과 함께 케익을 만드는 1951년의 로라부인 역시 내적 갈등에 휩싸인 듯 보인다. 전 애인 리처드의 문학상 수상을 축하하기 위한 파티를 준비하는 2001년의 클래리사는 ‘나를 위한 시간’은 어디로 간 걸까라고 자문한다.
부모님들이 가장 소망하는 것은 아마도 자식들이 평탄한 삶을 사는 것일 테다. 직장을 얻고, 가족을 꾸리고, 엄마 또는 아빠가 되어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누리면서 사는 평화로운 삶 말이다. 시대가 많이 바뀌었다고들 하지만, 이 점에 있어서 딸을 가진 부모님들은 더 그런 것이 사실이다. ‘팔자가 드세’서 삶이 굴곡진 것보다는 안락하고 평온한 삶을 권장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평화의 다른 면을 살펴보자. 영화 『디 아워스(The Hours)』에서 버지니아 울프, 로라 부인, 클래리사의 하루는 왠지 모를 우울함마저 안겨준다.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이 세 명의 여인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탐구’를 하고 있는데, 이것은 바로 평화의 이면 때문이다. 평화롭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아무것도 새로울 것이 없는 ‘권태로움’을 뜻한다. 어제 하던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당연하게 오늘 또 하는 것. 세 여인을 관통하는 하나의 생각, “과연 나는 어떤 존재인가?”이다. 계속되는 평화 속에서 어느 날 그들은 고인 물처럼 움직이지 않는 스스로의 인생을 발견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시도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페미니즘적인 성격을 띄고 있다. 과거에서나 현재서나 평화는 남성들보다는 여성들에게 권장되는 것이고, 일반적으로 그 평화라는 것은 남성의 보호막 아래서 실현될 수 있다고 여겨져 왔다. 세 여인이 이러한 평화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려고 한다는데서 우리는 이 영화의 페미니즘적 성격을 찾을 수 있다. 어쩌면 평화란 여성의 자유로운 사고와 행동을 얽매는 보이지 않는 감옥이었는지도 모를 일인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소설가로서 한 평생을 사는 동안 여성에 대한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 끊임없이 반항하며 도전했다. 그러나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할 수 밖에 없었다. 로라부인은 용감하게 스스로의 삶을 찾아 나섰지만 그녀의 아들은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게 된다. ‘나의 시간’이 어디로 증발해버린 것인지 고민하게 된 클래리사. 그러나 그녀는 가장 영광스러운 날 자살을 택하는 로라의 아들 리처드의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세 주인공은 평화에 묻혀 별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매우 예민하고 민첩한 자아의 세계를 지녔다. 그러나 그 댓가로 타인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누리는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포기하고 아픔을 겪어야만 했던 것이다. 과연 나는 누구이며, 내 삶은 어떠한 가치가 있는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평화에 대해 반항하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자세는 결코 쉽게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평화라는 것의 양면 중에서 영화 『디 아워스(The Hours)』의 세 사람은 평화를 거스르는 쪽을 택했고, 따라서 다른 측면의 평화를 잃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평화라는 이름 안에 갇혀있던 여성들이 정체성을 찾는 모습에서 영화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또한, ‘잔잔한 페미니즘’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또 다른 여성주의에의 기대를 갖게 한다. 결국, 영화는 우리에게 특히 여성들에게 고통스럽더라도 ‘자아’를 찾아 나서라고 말한다. 키에르케고르와 그릴파르의 처는 ‘자아에 대한 계속적인 방해’가 싫었고, ‘자기 내부에 있는 고독에의 요구’를 채우기 위해서 약혼을 파기했다고 하지 않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