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남궁달(봉태규)는 학교부적응자 중에서도 최고의 부적응자로, 집중적인 치료를 받고 새로이 학교에 등교한다. 학교에 등교하는 남궁달의 유일한 목표는 왕따의 멍에를 벗고 남부럽지 않게 평범한 고교생활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바람은 등교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무너지고, 우연의 연속 속에서 여러 사건에 휘말리며 전학 온 학교의 짱과 방과 후 옥상 결투를 남겨 두게 된다.

<방과 후 옥상>과 같은 류의 영화에 대해 글로서 무언가를 말한다고 하면, 사실 가혹하리만치 한심하고 천박한 영화로서 ‘역시 상업영화’라며 살짝 자본주의 속의 영화에 대해 씁쓸해 해주며, 현실을 개탄하는 것이 기본 공식(!)이다.

그리고 이런 식의 상업영화에 대한 평가는 해당 상업영화가 흥행을 하면 할수록 가혹해지는 것으로, 가장 최근의 예로는 <가문의 영광>의 속편 <가문의 위기>의 기대하지 않은 흥행 때가 가장 심했는데, 대부분의 평가가 영화와 영화의 흥행 모두에 ‘동의할 수 없음’을 외쳤었다.

지금 말하는 영화 <방과 후 옥상>에 대해서도 나 역시 기본적인 태도는 ‘역시 상업영화’라는 만만한 태도이다. 하지만 그렇게 단호하게 정리해 버리기에는, 예전과는 다르게 요즘은 <방과 후 옥상>과 같은 류의 영화를 ‘도마’ 위에 올리는 것에 여러 불편한 생각이 동시에 든다.

불편한 이유의 첫째는 그렇게 상업영화를 비판하는 것이 많은 경우 매우 무용한 일이 아닌가 싶어서다. 이미 <방과 후 옥상>의 영화를 즐겨 찾는 관객들에게 상업영화로서 가해지는 여러 매체의 비판과 냉소는 오래전부터 무시의 대상이 이었고, 이런 영화를 제작하는 제작자에게도 항상 그들은 그렇게 떠들어댄다고 무시한지 오래이다. 이런 상업영화에 대한 가혹한 비판은 그에 대한 관객에게 메시지를 주기 보다는 오히려 이런 취향에 동의하지 않는 다른 관객에게 자신의 취향에 대한 확신을 북돋아 줄 뿐이다.

두 번째로 동시에 이런 비판은 그 비판이 스스로 의도하지 않았지만 어딘지 상업영화의 즐거움을 찾는 것을 주눅드는 일로 여기게끔 한다는 것이다. 관객의 복잡한 사연은 일그러지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비판은 많은 경우 무기력한 동어반복을 할 뿐이게 된다.

사실 이런 불편한 평행선이 지속되는 주된 원인의 하나는, 서로 다른 여러 취향이 공존할 수 있는 물리적․정신적 영역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영화 좋아하냐”는 말의 의미는 자신이 서 있는 취향의 좌표에 따라 너무 다르며, 더러는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처럼 뭉텅거려 묶여 불리면서 불편의 비극은 반복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금 보다 많은 영화적 취향이 공존할 수 있다면, 오락적 상업영화 외의 다른 취향의 영화들이 유통되고 보여지고 읽혀지고 그래서 취향의 폭이 넓어지고, 다른 취향 간에 의미를 설득할 수 있는 풍부한 토대가 된다면, 이런 불편한 평행선은 많이 줄어들 것이다. 아니 이런 맥락에서 상업영화의 얄팍함을 말하는 것은 보다 풍부한 의미를 지닐 것이다.

<방과 후 옥상>이 주는 즐거움에 동의하는 관객이던 동의하지 않으며 즐거워하는 관객이던 불편한 관객이던 모두가 자신의 취향의 의미를 가리는 구조를 상상한 것. 지금 이 순간 어느 쪽 모두에게든 필요한 고민일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