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단상
영화 <콘택트(Contact)>를 통해 본 과학과 종교
- 나에게 종교란, 그리고 ‘종교적’이라는 말의 의미
나는 종교가 없다.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그 종교에의 창시자를, 그가 했던 말을 섬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삶의 가장 큰 원천이 된다는 것이다.
종교를 학문적으로 배우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느님이나 부처님이 있다고도, 그들이 나를 도와줄 수 있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나도 모르게 ‘신(God)’께 기도 엇비슷한 것을 한다. 도와달라고 말이다. 또한 한국 사회에서 뿌리 깊은 ‘민간 신앙’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종교적인 인간이라면 이것은 무슨 뜻일까. 단순히 어떠한 종교의 신자라는 의미에서 종교적이라면 인류의 5%정도는 전혀 종교적이지 않을 것이다. 이는 ‘종교적’이라는 말의 협의(狹義)이다. 종교적이라는 것의 광의(廣義)는 ‘영적’이라는 것이다. 무엇인가에 대한 믿음이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내게 있어 종교란 탐구의 대상일 뿐이며 나는 합리적이면서도 ‘영적’인 존재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동시에 인간의 속성일 것이다.
- 기독교에 대하여
기독교만큼 인류 역사상 중요한 것도 없다. 기독교는 인간과 함께 해왔고, 세상을 만들어왔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기독교의 교리나 세력을 배제한 채 사회를 들여다볼 수는 없다. 그러나 기독교가 긍정적인 역할만을 했다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창시자, 기독교 신자들, 기독교의 교리, 교리의 해석 등 모두를 포함하는 의미에서-는 우리 사회의 윤리 도덕적인 기준을 제시하여 질서를 유지한 동시에,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해서는 안 될 일들을 하기도 했다.
- 영화 속으로
영화 ‘콘택트’의 여주인공 엘리는 스스로를 합리적인 과학자라고 했다. 그렇다. 그러나 그녀가 과학자이기 전에 인간이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1) 아버지를 잃은 후의 엘리, 그리고 그녀의 인생
엘리는 아버지가 돌아올 수 없음을 알면서도 통신수단을 통해 아버지와 소통할 수 있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그녀의 인생의 바탕이 바로 이것이다. 그녀는 외계인이 있다는 ‘믿음’하에 ‘과학적 연구’를 하는 천문학자로서의 인생을 살게 되었다. 그녀는 아버지를 끔찍이 사랑했고, 삶의 이유를 수학 공식처럼 설명할 수 있는 자는 드물다.
2) 외계인이 아버지의 형상으로 나타난 이유
인간은 본래 자신이 믿고 있었던 것에 가장 크게 반응한다. 외계인이 아버지의 형상으로 나타난 것은 엘리에게 ‘진리’를 일러주기 위해서다. 엘리가 온전히 ‘합리적이기만 한’인간일 수는 없다는 것을, 그러나 과학자로서의 엘리도 결코 틀린 것은 아님을.
3) 엘리의 경험은 진실인가
엘리는 정말 외계인을 만난 것일까? 답은 여기에 있다. 잡신호만 나타난 화면-엘리가 외계인을 만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이 18시간 동안 계속되었다-엘리가 외계인을 만났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엘리는 자신이 영적인 존재임을, 동시에 자신의 과학적 연구가 의미있는 것임을 확인했을 뿐이다.
4) 남자주인공, 자스
엘리라는 한 여자를 통째로 사랑한 자스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스는 ‘진리를 믿는다’고 했다. 인간이 영적인 존재임을, 따라서 인류의 대부분이 종교에 의지하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합리적인 과학자임을 자부한 ‘그녀를 믿는다’고 했다. 자스는 종교와 과학에 있어 이상적이고 균형적인 인물임을 알 수 있다.
5) 금발머리의 테러리스트
한편, 국민의 혈세로 만든 시설을 파괴하고 드럼린이라는-못마땅한 인물이긴 하지만-한 인간을 죽인 금발머리의 테러리스트는 종교라는 이름 하에 자행될 수 있는 잘못된 행동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과연 기독교가 그에게 테러리스트가 되라고 했을까? 한 쪽으로 치우친, 맹목적 믿음은 그 어떤 종교에서도 추구하지 않는 바다. 그와 같은 인물이 세상에 여럿 존재함으로서 일어나는 위험한 상황을 막기 위해 우리에게는 바로 과학적 이성이란 것이 있다.
6) 엘리와 자스의 사랑
영화의 마지막 장면. 엘리와 자스는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의지한다. 한 마디로 정리하면 이렇다. 종교와 과학의 아름다운 조화.
- 과학과 종교 그리고 진리
과학과 종교를 논하는 것은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는 것이며 진리를 찾는 일이다. 과학과 종교가 함께 세계를 만들어왔다는 것, 인간은 과학적이면서도 종교적인 존재라는 진리 말이다.
과학적 지식과 종교적 지식은 결코 상충하지 않으며 그래서는 안 된다. 종교는 인간의 영적인 속성에 관여한다. ‘A는 B이다’라는 식의 논리를 말하지는 않지만,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제시하고 참된 사회 질서를 구현하는데 일조한다. 윤리와 도덕, 그리고 올바른 가치관이 없다면 인간 사회는 유지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한, 과학적 지식과 이성에 대한 맹목적 믿음으로 인한 인간 사회의 추락을 막는다. 더욱이 버트란드 러셀의『종교와 과학』에서 우리는 과학적 지식의 성립이, 많은 경우, 종교적인 즉, 영적인 이유에서 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토마스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을 설명하면서 과학적 지식도 가변성을 지녔음을 역설했다.
그렇다면 과학적 지식의 역할은 무엇인가? 믿음의 출발은 신성한 것이었으나, 인간 사회에서 종교라는 이름 하의 믿음은 완벽하지 않으며 언제든 왜곡될 수가 있다. 과학적 지식은 첫째, 종교가 그들의 권위를 이용하여 사람들에게 만행을 저지르는 것, 둘째, 인간의 이성의 힘을 등한시 하여 사회의 기술적 진보를 방해하는 것을 막는다. 칼 세이건은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이라는 저서를 통해 반과학을 고발하면서 잘못된 믿음 속에서 과학은 ‘어둠 속의 작은 촛불’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인간 이성의 역사’에 있어 암흑기였던, 종교의 이름으로 마녀사냥이 자행됐던 중세 시대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는 기독교가 탄압에도 불구하고 의술을 이용해 사람을 치료했고, 많은 과학적 지식을 성립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예수가 진리를 원한다’고 믿는 진정한 인간이었다.
- 과학과 종교 그리고 나 (myself) - 커다란 우주 속의 나
과거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통해 우주는 광대하고, 지구는 태양계의 수많은 별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하느님이 만들었다고 하는 인간이란 존재는 미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기독교인들은 혼란과 광분에 휩싸였고 기독교적 질서가 무너질 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우주의 크기와 원리를 깨달았다고 해서 인간의 존재와 존엄성이 평가절하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인간은 주변 환경과의 비교를 통해 자아 또는 정체성(identity)을 확립해나가고 나아가 과학과 종교를 아우르며 역사-과거, 현재, 미래-의 주역이 된다. 나의 세계를 알고, 종교의 세계를 알고, 이성과 합리의 세계를 알고 이 셋을 조화롭게 만들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이 진리이며 인류가 해야 할 일이다.
- 나에게 종교란, 그리고 ‘종교적’이라는 말의 의미
나는 종교가 없다.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그 종교에의 창시자를, 그가 했던 말을 섬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삶의 가장 큰 원천이 된다는 것이다.
종교를 학문적으로 배우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느님이나 부처님이 있다고도, 그들이 나를 도와줄 수 있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나도 모르게 ‘신(God)’께 기도 엇비슷한 것을 한다. 도와달라고 말이다. 또한 한국 사회에서 뿌리 깊은 ‘민간 신앙’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종교적인 인간이라면 이것은 무슨 뜻일까. 단순히 어떠한 종교의 신자라는 의미에서 종교적이라면 인류의 5%정도는 전혀 종교적이지 않을 것이다. 이는 ‘종교적’이라는 말의 협의(狹義)이다. 종교적이라는 것의 광의(廣義)는 ‘영적’이라는 것이다. 무엇인가에 대한 믿음이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내게 있어 종교란 탐구의 대상일 뿐이며 나는 합리적이면서도 ‘영적’인 존재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동시에 인간의 속성일 것이다.
- 기독교에 대하여
기독교만큼 인류 역사상 중요한 것도 없다. 기독교는 인간과 함께 해왔고, 세상을 만들어왔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기독교의 교리나 세력을 배제한 채 사회를 들여다볼 수는 없다. 그러나 기독교가 긍정적인 역할만을 했다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창시자, 기독교 신자들, 기독교의 교리, 교리의 해석 등 모두를 포함하는 의미에서-는 우리 사회의 윤리 도덕적인 기준을 제시하여 질서를 유지한 동시에,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해서는 안 될 일들을 하기도 했다.
- 영화 속으로
영화 ‘콘택트’의 여주인공 엘리는 스스로를 합리적인 과학자라고 했다. 그렇다. 그러나 그녀가 과학자이기 전에 인간이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1) 아버지를 잃은 후의 엘리, 그리고 그녀의 인생
엘리는 아버지가 돌아올 수 없음을 알면서도 통신수단을 통해 아버지와 소통할 수 있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그녀의 인생의 바탕이 바로 이것이다. 그녀는 외계인이 있다는 ‘믿음’하에 ‘과학적 연구’를 하는 천문학자로서의 인생을 살게 되었다. 그녀는 아버지를 끔찍이 사랑했고, 삶의 이유를 수학 공식처럼 설명할 수 있는 자는 드물다.
2) 외계인이 아버지의 형상으로 나타난 이유
인간은 본래 자신이 믿고 있었던 것에 가장 크게 반응한다. 외계인이 아버지의 형상으로 나타난 것은 엘리에게 ‘진리’를 일러주기 위해서다. 엘리가 온전히 ‘합리적이기만 한’인간일 수는 없다는 것을, 그러나 과학자로서의 엘리도 결코 틀린 것은 아님을.
3) 엘리의 경험은 진실인가
엘리는 정말 외계인을 만난 것일까? 답은 여기에 있다. 잡신호만 나타난 화면-엘리가 외계인을 만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이 18시간 동안 계속되었다-엘리가 외계인을 만났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엘리는 자신이 영적인 존재임을, 동시에 자신의 과학적 연구가 의미있는 것임을 확인했을 뿐이다.
4) 남자주인공, 자스
엘리라는 한 여자를 통째로 사랑한 자스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스는 ‘진리를 믿는다’고 했다. 인간이 영적인 존재임을, 따라서 인류의 대부분이 종교에 의지하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합리적인 과학자임을 자부한 ‘그녀를 믿는다’고 했다. 자스는 종교와 과학에 있어 이상적이고 균형적인 인물임을 알 수 있다.
5) 금발머리의 테러리스트
한편, 국민의 혈세로 만든 시설을 파괴하고 드럼린이라는-못마땅한 인물이긴 하지만-한 인간을 죽인 금발머리의 테러리스트는 종교라는 이름 하에 자행될 수 있는 잘못된 행동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과연 기독교가 그에게 테러리스트가 되라고 했을까? 한 쪽으로 치우친, 맹목적 믿음은 그 어떤 종교에서도 추구하지 않는 바다. 그와 같은 인물이 세상에 여럿 존재함으로서 일어나는 위험한 상황을 막기 위해 우리에게는 바로 과학적 이성이란 것이 있다.
6) 엘리와 자스의 사랑
영화의 마지막 장면. 엘리와 자스는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의지한다. 한 마디로 정리하면 이렇다. 종교와 과학의 아름다운 조화.
- 과학과 종교 그리고 진리
과학과 종교를 논하는 것은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는 것이며 진리를 찾는 일이다. 과학과 종교가 함께 세계를 만들어왔다는 것, 인간은 과학적이면서도 종교적인 존재라는 진리 말이다.
과학적 지식과 종교적 지식은 결코 상충하지 않으며 그래서는 안 된다. 종교는 인간의 영적인 속성에 관여한다. ‘A는 B이다’라는 식의 논리를 말하지는 않지만,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제시하고 참된 사회 질서를 구현하는데 일조한다. 윤리와 도덕, 그리고 올바른 가치관이 없다면 인간 사회는 유지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한, 과학적 지식과 이성에 대한 맹목적 믿음으로 인한 인간 사회의 추락을 막는다. 더욱이 버트란드 러셀의『종교와 과학』에서 우리는 과학적 지식의 성립이, 많은 경우, 종교적인 즉, 영적인 이유에서 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토마스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을 설명하면서 과학적 지식도 가변성을 지녔음을 역설했다.
그렇다면 과학적 지식의 역할은 무엇인가? 믿음의 출발은 신성한 것이었으나, 인간 사회에서 종교라는 이름 하의 믿음은 완벽하지 않으며 언제든 왜곡될 수가 있다. 과학적 지식은 첫째, 종교가 그들의 권위를 이용하여 사람들에게 만행을 저지르는 것, 둘째, 인간의 이성의 힘을 등한시 하여 사회의 기술적 진보를 방해하는 것을 막는다. 칼 세이건은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이라는 저서를 통해 반과학을 고발하면서 잘못된 믿음 속에서 과학은 ‘어둠 속의 작은 촛불’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인간 이성의 역사’에 있어 암흑기였던, 종교의 이름으로 마녀사냥이 자행됐던 중세 시대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는 기독교가 탄압에도 불구하고 의술을 이용해 사람을 치료했고, 많은 과학적 지식을 성립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예수가 진리를 원한다’고 믿는 진정한 인간이었다.
- 과학과 종교 그리고 나 (myself) - 커다란 우주 속의 나
과거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통해 우주는 광대하고, 지구는 태양계의 수많은 별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하느님이 만들었다고 하는 인간이란 존재는 미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기독교인들은 혼란과 광분에 휩싸였고 기독교적 질서가 무너질 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우주의 크기와 원리를 깨달았다고 해서 인간의 존재와 존엄성이 평가절하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인간은 주변 환경과의 비교를 통해 자아 또는 정체성(identity)을 확립해나가고 나아가 과학과 종교를 아우르며 역사-과거, 현재, 미래-의 주역이 된다. 나의 세계를 알고, 종교의 세계를 알고, 이성과 합리의 세계를 알고 이 셋을 조화롭게 만들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이 진리이며 인류가 해야 할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