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두 달이 다 되어가는 것같은데, 텔레비젼에서 영화를 한 편 보았다. 제목: '위대한 산티니', 주연: 로버트 듀발('대부'에서 변호사 톰 역할을 맡았던 사람). 제목이 암시하는 것과는 달리 '위대한 산티니'는 미국 해병대 전투기 조종사다. 그것은 별명인데, 위대하다면, 전쟁 영웅이라서 위대할 뿐이다. 아, 그리고 진급이나 윗 사람의 인정같은 것은 신경쓰지 않는다거나, 군인 정신이 투철하여 민간인들의 피해를 막고자 자신을 희생시킨다는 점에서 위대하다고 할 수도 있다. 어쨌건, '위대한 산티니'는 남태평양이나 아프리카 어느 곳의 추장은 아니다.
우리 까페에 영화 감상문을 올리려면 줄거리를 확인해 보아야 하겠기에 포탈 싸이트 '엠파스'에 들어가 검색창에 영화 제목을 쳐넣었다. 예상대로 몇 가지 항목이 검색되었다. '위대한'도 많이 등장하고, '사만타'도 몇 항이 나왔으며 심지어 '위대한 사만타'도 몇 항이 나왔다. 그런데 이게 왠 일인가? 놀랍게도 '사만타'는 '화엄경'에 나오는 '보현보살'이라고 하지 않는가? 보살님이라니? 약간 무식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 미국 군인이 그렇게까지 위대하다는 말인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전혀 간파해내지 못한 심각한 의미가 그 영화에 숨어 있었다는 말인가? 내가 그렇게까지 엉터리로 영화를 보았다는 말인가?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물론 이것은 틀린 생각이었다. 어쩌다가 나는 '위대한 산티니'를 '위대한 사만타'라고 잘못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영화는 심각한 의미를 담고 있는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그저 미국 군인을 가장으로 둔 한 가족의 소소한 가정사를 그리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특별히 심각한 의미 같은 것은 담고 있지 않은 그저 그런 영화를 한 편 본 것이되, 바로 그 점을 장황하게 보고하고 싶은 것이다. 그 일이 나에게는 보통 일이 아닌 특별한 일이기 때문이다. 근래 들어 영화 한 편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영화관에 가본 지는 정말 오래 되었다. 내가 나에 관한 이런 사실을 알아 차린 것은 얼마 전이다. 그리고 그 때 나는 이 사실이 심각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도 알아 채고 말았다. 그 심각한 의미라는 것은, 다름 아니라, 내가 늙어 버렸다는 것이다. 영화 한 편 볼 수 없을 정도로 늙어 버린 것이다. 젊었을 때에는 우리도 영화를 얼마나 많이 보았나? 그러던 것이 이렇게 되고 말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 친구들이 없지 않겠지? 물론 벌어 먹는 데 바빠서 시간을 내지 못한 탓도 있지만, 원인은 바깥에만 있지 않다. 우리는 벌어 먹는 일에 직접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면 눈길조차 주지 않는 그런 마음 가짐 -- 한 마디로, 여유없는 마음가짐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런 게 늙은 것, 즉 '아저씨'가 된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나? 물론, 우리는 쉬기도 한다. 주로 텔레비젼을 보면서 쉬는데, 텔레비젼에서는 그토록 흔하게 영화를 틀어주는데도 우리는 영화를 보지 않는다. 그 대신 코메디프로나 'VJ특공대' 같은 것을 본다. 어째서 그럴까? 이런 프로는 몇 분, 길어야 10여분 만에 하나의 이야기가 종결되어 버리거든. 이런 프로와 비교해 볼 때 영화는 두 시간은 끌잖아. 그리고 두 시간 동안 우리의 집중을 요구하잖아. 앞 부분을 보지 않았다면 등장 인물 누가 누군지를 알 수 없고, 무슨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알 수 없는 것이지. 그래서 우리는 골치 아프게 집중할 것이 아니라 그냥 짧게 끝나고 마는 쪽으로 채널을 돌리는 것같다. 이런 것이 역시 늙은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나? 요컨대, 우리는 한편으로는 벌어 먹는 데에 직접 관련되는 일에 집중하며, 또 한편으로는 전혀 집중하지 않고 맥을 놓아 버리는 것이다. 최소한 나는 그런 것같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면 되는가? 답은 간단하다. 영화를 보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결심을 단단히 한 채 '위대한 산티니'를 보기 시작했고, 끝까지 보아내었다.
해병대 중의 해병대인 산티니 중령은 해군 조종사와의 비행 경쟁에서 이긴 후 장교 클럽에서 부하들과 떠들썩하게 자축연을 벌인다. 너무 소란스럽게 구는지라 장군 한 사람이 산티니에게 주의를 준다. 물론 산티니는 보복을 하는데...... 산티니는 장군들과 그 부인들이 있는 곳으로 비틀거리면서 걸어가 가슴 속에 숨겨 두었던 버섯 통조림을 쏟아버리면서 마치 오바이트를 한 것처럼 연기를 한다. 부인들은 기겁을 하지만, 아직 쑈가 다 끝난 것은 아니다. 산티니의 부하들이 숟가락을 들고 달려 들어 흥건하게 쏟아져 있는 그 허여멀건 음식물을 맛있게 퍼먹는다. 통조림인 것을 아는 나도 비위가 상했으니, 그 사실을 모르는 영화 속의 장군들과 부인들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웃음을 참기 어렵다.
산티니가 집에 돌아 오는 날, 가족들이, 산티니가 탄 공군 수송기를 기다리며 도열해 있다. 린제 와그너(소머즈)를 닮은 부인, 큰 아들, 딸, 딸, 그리고 막내 아들. 부인은 아이들에게 군인 가족답게 부동 자세로 선 채 아버지를 맞이하자고 말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아이들은 달려가 아버지에게 매달리고 끌어앉는다. 그렇다고 하여 가족 간에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아버지는 큰 아들이 자기처럼 해병대 조종사가 되어 주기를 원하지만 아들은 그럴 마음이 없다. 매사를 군대식으로 하려는 아버지와 큰 아들을 비롯한 가족들 사이에 여러 가지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이들 가족은 전근하는 가장을 따라 다른 고장으로 이사를 가는데, 가장은, 차가 덜 막힌다는 이유로, 자는 아이들을 깨워 새벽 3시에 출발한다. 이것도 아마 작은 갈등의 예가 될 것이다.
영화의 끝에 가서, 비행기 사고로 죽은 아버지 대신 가장 역할을 하게 된 큰 아들이, 동생들의 불평에도 아랑곳 없이, 새벽 3시에 차를 몰고 그 마을을 떠난다. 이것 이외의 주요한 에피소드는 모두 그 마을에서 일어나는 것들이다. 큰 아들은 고교 농구부에 들어 가 다른 마을 고등학교와 시합을 하며 이 과정에서도 군대식 아버지와 심한 갈등을 겪게 된다. 가정부로 들어 온 흑인 여자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는데 이 순박한 흑인 청년은 마을의 백인 청년들과 다투다가 죽게 된다.
그러나,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이들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이 아니다. 어느 날 큰 아들은 그 흑인 청년과 친구가 되어 흑인 청년이 사는 마을 변두리로 놀러 나간다. 낚시를 하러 간 것이었다. 두 젊은이는 장화를 신은 채 낚싯대는 둘러 매고 뜰채나 망태기는 손에 들고 걸음을 걸었던 것같은데, 그 장면이 느린 화면으로 처리되지는 않았지만, 나에게는 꿈처럼, 환상처럼 남아있다. 뭉게 구름이 피어 오르며, 복숭아 꽃, 살구 꽃이 바람에 날리고, 흰 나비, 노란 나비에, 빨간 잠자리 떼도 날고, 이름 모를 새소리도 잔잔하게 들리고 말이야. 때는 60년대야. 쿠바 사태라던가 케네디 암살 사건 같은 것이 영화의 배경이 되고 있어. 이런 배경에 비추어 보아서 그런지 두 청년이 낚시하러 가기 위해 길을 걷던 그 장면이 더욱 환상적으로 보였어. 아스라한 슬픔이라고 할까, 지나간 시절을 그리워하는 싸한 통증이라고 할까, 하여간 무슨 그런 느낌도 있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