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라져 가는 휴머니즘 지키기 >

나는 전쟁영화를 좋아한다.
<태극기를 휘날리며> 1000만 돌파 기념 삼아 글을 끄적어본다.


<태극기 휘날리며>수작임에는 틀림없다. 한국영화 신기록을 모두 깨버린 ‘대박’영화다.
5년간에 걸친 영화제작은 그야말로 강 제 규 감독의 집합체이다.
<쉬리>, <단적비연수>에서 보여준 그의 연출은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출부분에서 미흡점이 조금 있기 하지만 영화의 무게에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카메라의 초점은 진태와 진석을 떠나지 않는다.
집요하리만큼-나는 여기서 지루하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싶다-초점은 그들을 쫒는다.
이는 영화 전체의 주제의식을 드러내기 위한 감독의 ‘수작’인 것이다.
분단된 우리민족의 아픔을 요약, 축약 해놓은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이 점이 영화의 단점이라고 말하고 싶다. 영화적인 설정이라 하여 진석과 진태는 ‘람보’가 되고 ‘영웅주의‘의 망토를 두른 듯 하다.
총 한번 쏴보지 못한 진태는 명사수가 되고 공부밖에 모르는 진석은 적진에 뛰어들어 깃발부대를 용감하게 무찌른다.
진태와 진석 그 형제의 초점을 따라가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나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사실 강 제 규 감독은 형제의 주변 인물들을 나름대로 부각시키려고 했으나 무리였다.
극장을 나올 땐 민족의 아픔을 느꼈다기 보다는 진태와 진석의 아픔, 슬픔, 비애, 형제애 그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실미도는 시선이 너무 난잡하여 억지 감동을 일으키는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하지만 <태극기...>는 6.25라는 큰 맥락 속에서 좀더 큰 관점에서 큰 시점에서 바라보고 제작에 임했다며 좀더 낳은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건방진’생각을 가져본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사라져 가는 시대와 잊혀져 가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20세기 마지막 진혼곡이었다.
비록 지금은 구식이고 진부하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아직은 숭고한 이념이 살아 있었고 그 신념을 위해 젊은이들이 값진 목숨을 바쳤던 시절-<라이언...>에서 스필버그는 다시 과거의 그때로 되돌아가, 20세기와 작별하기 전에 우리가 구해야 할(saving)것이 무엇이며, 21세기에도 여전히 간직해야 할(saving)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성찰한다.
그래서 한 분대가 자신들의 목숨을 바쳐 찾아 내고 구해 내는 ‘라이언’은 단순한 한 인간이나 하찮은 일등병이 아니라, 우리가 부단히 그 존재를 탐색하고 보호해야 하는 소중하고 값진 어떤 것의 상징이 된다.
*바로 여기서 <태극기...>의 형제의 초점의 ‘오류’를 언급할 수 있겠다.
<라이언...>역시 밀러 대위의 구조대의 초점에 머물러 있다. 허나 이 초점은 매우 포괄적이다. 그들의 시점만으로도 감독이 표현하고자 했던 것 그리고 전쟁의 비극성이 충분히 드러나 있으며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한 가지 덛붙힌다면 스필버그는 관객의 시점을 잊지 않았다-베컴은 총알이 난무하고 폭음이 고막을 찢을 듯한 전장에서 방황하며 공포에 시달린다.
바로 관객의 시선이며 우리들인 것이다. 여기서 전쟁의 비극성의 표형은 한층 성숙된다.

물론 <태극기...>와 <라이언...>을 비교하고자 하는 의지는 없다.
단지 <태극기...>의 초점이 아쉬웠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라이언...>는 오늘날 21세기 최첨단 테크놀로지와 효율적인 경영 마인드에 의해 20세기 속한 구식 학문 취급을 받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급속도로 사라져 가는 ‘문학과 인문학 구하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라이언...>은 우선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벌어지는 초반부의 너무나 리얼하고 끔찍한 전투장면으로 관객들을 압도한다. 스필버그는 헐리웃 전쟁영화사상 가장 긴박하고 리얼리티 넘치는 전투장면을 현장감 있는 디지털 서라운드 사운드 (DTS)를 동원하여 보여 줌으로써 관객들에게 잊을 수 없는 충격을 주고 있다.
전례 없이 강력한 오프닝 신을 통해 스필버그는 2차대전이 결코 리얼리티가 없는 환상 속의 전쟁이 아니었음을 웅변하고 있다.

초반부의 처절한 전투장면이 끝나면 화면은 곧 수많은 전사통지서를 타이핑하는 여자 군속들의 모습을 비춘다. 미군 합참의장 조지 마샬 장군은 라이언가의 세 아들이 이미 전사했고 넷째아들마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투입되어 생사를 알 수 없다는 보고를 맞자, 그 넷째아들을 찾아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은 홀어머니에게 돌려보내라고 명령한다. 물론 군법에는 글한 조항이 없다. 그러나 구조 작전의 무모함을 지적하는 부하 장교들에게 마샬 장군은 남북전쟁 당시 다섯 아들이 전사한 보스턴의 빅스비 부인에게 링컨 대통령이 보낸 위로편지를 읽어 준다. 링컨을 등장시킴으로써 이 영화는 다시 한 번 미국 민주주의 이념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링컨의 편지는 마샬 장군의 명령과 더불어 살벌한 전장에 피어나는 감동적인 인간애이자 따뜻한 휴머니즘의 상징이 된다.
스필버그에 의하면 2차대전의 목적은 바로‘라이언 일병 구하기’즉 ‘휴머니즘 구하기’였다.

다시 말해 2차대전은 결국 나치 독일의 광기와 학살로부터 인간과 세상을 구하기 위한 전쟁이었는데, 이는 곧 라이언 일병을 구해 어머니의 품에 되돌려 보내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밀러 대위의 구조대가 마치 연합군처럼 다양한 인종들로 이루어져 있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밀러 대위의 구조대는 적의 습격을 받아 전우를 잃는 등 온갖 고초를 겪은 끝에 드디어 적지에서 라이언 일병을 찾아 낸다. 그런데 뜻밖에도 라이언 일병(맷 데이먼)은 자기만 상아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 동안의 고생이 무위로 돌아가자 대원들은 잠시 분노하고 허탈해하지만 곧 라이언의 뜻에 따르기로 결정한다.
다시 한 번 살벌한 전장에 아름다운 휴머니즘의 꽃이 핀다.
스필버그는 이 마지막 전투를 다시 한 번 영화 초반부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병치시킨다. 그래서 이번에는 공격자와 방어자의 위치가 바뀌었을 뿐, 마치 2차대전 전체를 축소한 것 같은 치열하고 끔찍한 전투장면이 또 한 번 화면 가득 펼쳐진다. 이 전투에서 밀러 대위의 구조대는 라이언을 구하기 위해 전원 전사한다.(마지막에 밀러 대위에 편지를 전해주는 한 사람만이 살아 남는다)처음부터 전쟁과는 어울리지 않았던, 교사 출신이자 손에 경련까지 있는 밀러 대위 역시 라이언 일병 옆에서 임무를 마치고 장렬하게 전사한다.
21세기에 사는 새로운 세대들은 이제 더 이상 전쟁의 숭고한 목적을 인정하지 않는다. (전쟁이란 어떠한 목적으로도 용납되지 않는 그러한 존재인가?)그들에게 전쟁은 다만 정치가들과 지배문화의 음모이자 이데올로기이며 담론일 뿐이다.
또 그들에게 전쟁은 현실이라기보다는 컴퓨터 화면의 그래픽이자 하나의 최첨단 전자게임일 뿐이다. 그러한 그들에게 휴머니즘은 다만 기성세대의 낡은 가치관일 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라이언...>는 그들의 아버지 세대는 바로 그 휴머니즘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고,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세대를 지탱해 주는 것도 사실은 바로 그들이 흘린 피, 그리고 그들이 목숨을 바쳐 구해 낸 바로 그 ‘휴머니즘’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다른 전쟁영화와 구별되는 특징이 드러난다 하겠다.
전쟁이 가져다주는 공포감과 인간성 상실 혹은 비애...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전쟁의 비극성과 함께 인간성 상실에 대한 안타까움의 시선으로 그 상실되어갈 인간성 즉 ‘휴머니즘’을 되찾으려 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스필버그식 휴머니즘은 많은 영화인들 혹은 관객들에게 찬사를 빚어냈으며 젊은 세대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할 수 없을 것이다.
개인주의가 편협한 세상에 던져주는 하나의 ‘선물’이라 할 수 있겠다.
영화<라이언...>는 상실된 휴머니즘(save)을 되찾아야 한다는 스필버그의 주제의식
이 영화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찾아 볼 수 있다는 반면 <태극기...>는 진태와 진석, 그들의 시점에서 주제의식을 드러내려 한다는 것에 한계가 드러나 보인다.
그들의 아픔이 분단된 조국의 현실의 전체의식을 반영하려고 하였던 강 제 규 감독의 의도는 “영화의 리얼리티와 압축된 형제애의 비극이 관객의 감정을 농락 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 혹은 의심을 감히 품어본다.




by 조 영 재 (newcho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