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단상
1.
이 글은 물론 영화 <올드 보이> 자체에 대한 옹호의 글은 아니다. 다만 나는 <올드 보이>에 대해 satira님이 취한 오락영화 감별단식의 비평에 반론을 살짝 제기함과 동시에, 나아가 영화라는 하나의 '텍스트'와 이에 대한 '비평'의 사회적 공공성 내지 정치성의 효용 가치에 관해 생각해보자는 차원에서 자판을 두드리려 하는 것이다.
2.
먼저, satira님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대략 이렇다. "영화 <올드 보이>는 '잘 만들어진 각본', 즉 근친상간이라는 '자극적 테마', 시공간과 캐릭터의 주변 요소들끼리의 '대비 효과', 그리고 관객의 눈길을 딴 곳으로 돌리지 못하게끔 만드는 '치밀한 플롯' 등이 제작진의 뛰어난 솜씨와 결합해 태어난 '충실한 오락영화'이다. 때문에 이 영화는 궁극적으로 감각적인 카타르시스의 제공 정도에 그 가치가 존재하며 결국 사회적 공공성에 기여해야 하는 영화의 소명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는 '영화를 위한 영화'로 구분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소위 헐리우드 산업이라고도 불리우는 '상상력 산업'의 산물일 뿐인 것이다."
우선 나는 이러한 주장의 '개론적' 성격에 상당 부분 동의한다. 나는 지난 학기 학부 과정에서 철학과 전공 과목을 몇개 수강한 적이 있는데 수업을 들으며 갖게 되었던 문제의식들 중 하나가 바로, 철학을 공부하는 많은 학생들이 '인간, 일상, 사회를 위한 철학'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순진하게도 '철학을 위한 철학'에만 몰두하려 한다는 점이었다.
하긴, 여담이지만, 자족적 내재주의 성격의 몹쓸 굳건함을 갈수록 깊이 품어가고 있는 것들이 이 땅에 어디 그 뿐이랴. '영어를 위한 영어', '정치를 위한 정치' 따위들은 어떤가. 아니, 차라리 '철학을 위한 철학'은 그나마 남에게 피해 안주며 스스로의 발전 가능성을 품은 채 '순진한 수양'의 결과라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후자의 것들보다 훨씬 나아 보인다. 본연적 존재 의미를 망각해가고 있는 그들, 그리고 그들의 '주인'인 우리들. 이 모든 이들에 대한 작은 분노가 satira님과 나의 마음 속엔 똑같이 작용하고 있는 듯 하다.
3.
그렇다면 여기서 나는 문제의 초점을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흘려보고자 한다.
과연 '인간을 위한 영화'는 어떤 영화인가? 사실, 이러한 물음은 우문이다. 그렇기에 일단 나도 단도적으로 어리석게 답해본다. '인간을 위한 영화'는 '비평이 되는 영화'이다. 물론 여기서 '비평이 된다'는 말은 지극히 긍정적 표현이다. 이 점을 우선적으로 염두에 두어야 하겠다.
satira님은 그러한 점에서 <올드 보이>를 '비평이 안되는 영화'라고 주장하고 있다. <올드 보이>에 관해 글을 쓰고는 있지만 이는 <올드 보이>가 '비평이 되는 영화'라서 비평을 하고있는 게 아니라 '비평이 안되는 영화'이기 때문에 비판을 하고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올드 보이>에 대한 내 생각을, 뭐 이게 그닥 중요하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지금 말해두는 게 좋겠다. 나는 박찬욱 감독의 신작은 '비평이 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영화 자체에 대한 분석은 나의 몫에서 일단 제쳐놓기로 하지만, 여러 매체에 기고된 <올드 보이>를 '좋게 본' 사람들의 평들만으로도 내 생각의 근거 정도는 대략 유추해 볼 수 있을 거라 본다.
그런데,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비평이 된다'의 의미는 보다 명확히 규명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나의 이런 어슴프레한 정의를 적잖은 부분 뒷받침해줄 수 있는 근거로는, 영화평론가 강소원이 BFC 소식지에 기고한 <조폭 마누라 2>에 대한 글을 제시하고 싶다. 그러나 전문을 시시콜콜 다 얘기할 필요는 없을 테고, 그가 평한 글의 제목과 첫 두세 문장 정도를 인용해 보겠다.
제목은 '조폭의 시장, 무용한 비평', 서두는 다음과 같다. "영화이기를 포기한 영화, 영화에서 벗어난 영화, 영화도 아닌 영화가 확실히 있긴 있다. 하지만 그것도 영화로 불린다는 사실을 별수 없이 인정하고 나면 비평 역시 별수 없어진다. (...) <조폭 마누라 2 : 돌아온 전설>에 비평이 필요할까?"
강소원은 <조폭마누라 2>에는 '상상력'이나 '치밀한 플롯'조차도 없다고 비난하고 있으며 오히려 이 영화의 반페미니즘적 '보수성'까지 지적하고 있다. 물론 '대강' 보더라도, satira님이 비판한 <올드 보이>가 <조폭 마누라 2>보다 더 나은 영화라고 할 수도 있을 테지만, 이러한 사회의식적 비평의 측면에서 제대로 보기 시작한다면 <올드 보이>와 <조폭마누라 2>의 소위 질적 차이는 더욱 현저히 멀어지기 시작할 것이다.
4.
분명, 관객들이 작품으로 '몰입'하도록 하기 위해 온 전력을 다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그 현란한 영화 속으로 쉽게 '빠져들도록' 만든 상업용 영화는 확실히 벤야민이 기대했던 영화예술로서의 '예술의 정치화' 전략에 역행하는 노선 위에 놓일 가능성이 많다. 하지만 반대로 그러한 '영화의 힘'을 통한 사회적 진보에 대해 지나친 기대를 품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문화적 진보에 역행하는 양상을 띨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역설하고 싶은 것이다.
이와 더불어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비평의 힘'이라는 거다. 먼저 물음 하나. 대한민국에서 (영화, 문학, 미술, 음악까지 통틀어) 비평의 영역, 즉 힘은 어느 정도, 얼마까지 그 진정한 몫을 충분히 차지하고 있는가. 내가 보기에는, '너무나' 형편없다. 매체도 그렇고 관객들도 마찬가지다. '비평적 태도'를 가지고있지도 않고, 더 문제는 그것을 가지려 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어쨌든 나는 이렇게 단언하고 싶다. 만약 우리가 '인간을 위한 영화'를 원한다면 이는 결국 '인간을 위한 비평'을 통해 완성되어야 한다고. 그리고 이는 또한 결국 현실 속의 비평, 생활 속의 비평적 자세에서 우러나와야 한다고. 지금 내가 뭐 거창한 것을 얘기하는 것처럼 들릴 진 모르겠지만, '와아, 이 영화 열라 신나!'의 태도와 '으음, 이 영화 상업영화군.'의 자세 사이에서 '좀만더 생각하며 영화보기'의 관점을 찾아보려고 노력하자는 말 정도로 들린다면, 뭐 결국 그런 말이 될 수 있겠다.
"벤야민에게서 원문은 번역을 통해 순수한 언어로 상승하고, 비평은 작품 이후가 아니라 작품의 성립과 동시적이며, 복제는 원작의 권위를 위협한다." (진중권, '현대미학강의'에서)
그렇다. 비평은 작품의 '끄나풀 사업'이 아닌 '동시적 사업'으로 가야한다. 사실, 비평에 대한 이런 강조는 전혀 흔치않은 사업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내 눈엔 아직 '비평의 영역'이 너무도 협소해 보이기만 한다.
5.
<매트릭스> 시리즈에 대해 엇갈리는 양상으로 퍼부어지는 영화평들이 나는 즐겁다. 그 이유는, 이러한 갖가지 비평들이 <매트릭스>라는 '비평이 되는 영화'(나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를 '상당 수준'에서의 비평이 가능한 영화라고 본다)를 단지 '짬뽕식 액션영화', 혹은 정반대로 '위대한 철학영화'와 같은 극단적 평가들 사이에서 관객으로 하여금 자꾸만 무언갈 생각하게끔 만든다는 것이다.
한두마디 더 내놓아보자면, 궁극적으로 비평은 '모든 곳'에, 즉 문화와 예술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 '동시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이며 때문에 비평의 성격은 지금보다 더 '자유로워져야' 할 것이다. 영화를 본 관객 모두가 서로의 비평을 쉽게 접하고 논할만한 공간도 보다 무진장 많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며, 비평에 대한 메타비평의 중요성도 앞으로 나날이 더욱 커져가야만 할 것이다. 아마도 '인간을 위한 영화'에 반대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적을 것이다. 우리 모두 일단은 비평의 힘을 믿자. 그리고 비평이란 것을 '제대로' 써먹기 위한 고민에 박차를 가하자. 끝으로, 만약 <올드 보이>란 필름 자체를 하나의 '내용'으로 봤을 때 이를 제대로 보기 위해 필요한 첫번재 '형식'이 결국 비평이 될 수 있다는 나의 주장에 대해서도 고민해보도록 하자.
이 글은 물론 영화 <올드 보이> 자체에 대한 옹호의 글은 아니다. 다만 나는 <올드 보이>에 대해 satira님이 취한 오락영화 감별단식의 비평에 반론을 살짝 제기함과 동시에, 나아가 영화라는 하나의 '텍스트'와 이에 대한 '비평'의 사회적 공공성 내지 정치성의 효용 가치에 관해 생각해보자는 차원에서 자판을 두드리려 하는 것이다.
2.
먼저, satira님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대략 이렇다. "영화 <올드 보이>는 '잘 만들어진 각본', 즉 근친상간이라는 '자극적 테마', 시공간과 캐릭터의 주변 요소들끼리의 '대비 효과', 그리고 관객의 눈길을 딴 곳으로 돌리지 못하게끔 만드는 '치밀한 플롯' 등이 제작진의 뛰어난 솜씨와 결합해 태어난 '충실한 오락영화'이다. 때문에 이 영화는 궁극적으로 감각적인 카타르시스의 제공 정도에 그 가치가 존재하며 결국 사회적 공공성에 기여해야 하는 영화의 소명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는 '영화를 위한 영화'로 구분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소위 헐리우드 산업이라고도 불리우는 '상상력 산업'의 산물일 뿐인 것이다."
우선 나는 이러한 주장의 '개론적' 성격에 상당 부분 동의한다. 나는 지난 학기 학부 과정에서 철학과 전공 과목을 몇개 수강한 적이 있는데 수업을 들으며 갖게 되었던 문제의식들 중 하나가 바로, 철학을 공부하는 많은 학생들이 '인간, 일상, 사회를 위한 철학'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순진하게도 '철학을 위한 철학'에만 몰두하려 한다는 점이었다.
하긴, 여담이지만, 자족적 내재주의 성격의 몹쓸 굳건함을 갈수록 깊이 품어가고 있는 것들이 이 땅에 어디 그 뿐이랴. '영어를 위한 영어', '정치를 위한 정치' 따위들은 어떤가. 아니, 차라리 '철학을 위한 철학'은 그나마 남에게 피해 안주며 스스로의 발전 가능성을 품은 채 '순진한 수양'의 결과라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후자의 것들보다 훨씬 나아 보인다. 본연적 존재 의미를 망각해가고 있는 그들, 그리고 그들의 '주인'인 우리들. 이 모든 이들에 대한 작은 분노가 satira님과 나의 마음 속엔 똑같이 작용하고 있는 듯 하다.
3.
그렇다면 여기서 나는 문제의 초점을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흘려보고자 한다.
과연 '인간을 위한 영화'는 어떤 영화인가? 사실, 이러한 물음은 우문이다. 그렇기에 일단 나도 단도적으로 어리석게 답해본다. '인간을 위한 영화'는 '비평이 되는 영화'이다. 물론 여기서 '비평이 된다'는 말은 지극히 긍정적 표현이다. 이 점을 우선적으로 염두에 두어야 하겠다.
satira님은 그러한 점에서 <올드 보이>를 '비평이 안되는 영화'라고 주장하고 있다. <올드 보이>에 관해 글을 쓰고는 있지만 이는 <올드 보이>가 '비평이 되는 영화'라서 비평을 하고있는 게 아니라 '비평이 안되는 영화'이기 때문에 비판을 하고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올드 보이>에 대한 내 생각을, 뭐 이게 그닥 중요하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지금 말해두는 게 좋겠다. 나는 박찬욱 감독의 신작은 '비평이 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영화 자체에 대한 분석은 나의 몫에서 일단 제쳐놓기로 하지만, 여러 매체에 기고된 <올드 보이>를 '좋게 본' 사람들의 평들만으로도 내 생각의 근거 정도는 대략 유추해 볼 수 있을 거라 본다.
그런데,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비평이 된다'의 의미는 보다 명확히 규명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나의 이런 어슴프레한 정의를 적잖은 부분 뒷받침해줄 수 있는 근거로는, 영화평론가 강소원이 BFC 소식지에 기고한 <조폭 마누라 2>에 대한 글을 제시하고 싶다. 그러나 전문을 시시콜콜 다 얘기할 필요는 없을 테고, 그가 평한 글의 제목과 첫 두세 문장 정도를 인용해 보겠다.
제목은 '조폭의 시장, 무용한 비평', 서두는 다음과 같다. "영화이기를 포기한 영화, 영화에서 벗어난 영화, 영화도 아닌 영화가 확실히 있긴 있다. 하지만 그것도 영화로 불린다는 사실을 별수 없이 인정하고 나면 비평 역시 별수 없어진다. (...) <조폭 마누라 2 : 돌아온 전설>에 비평이 필요할까?"
강소원은 <조폭마누라 2>에는 '상상력'이나 '치밀한 플롯'조차도 없다고 비난하고 있으며 오히려 이 영화의 반페미니즘적 '보수성'까지 지적하고 있다. 물론 '대강' 보더라도, satira님이 비판한 <올드 보이>가 <조폭 마누라 2>보다 더 나은 영화라고 할 수도 있을 테지만, 이러한 사회의식적 비평의 측면에서 제대로 보기 시작한다면 <올드 보이>와 <조폭마누라 2>의 소위 질적 차이는 더욱 현저히 멀어지기 시작할 것이다.
4.
분명, 관객들이 작품으로 '몰입'하도록 하기 위해 온 전력을 다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그 현란한 영화 속으로 쉽게 '빠져들도록' 만든 상업용 영화는 확실히 벤야민이 기대했던 영화예술로서의 '예술의 정치화' 전략에 역행하는 노선 위에 놓일 가능성이 많다. 하지만 반대로 그러한 '영화의 힘'을 통한 사회적 진보에 대해 지나친 기대를 품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문화적 진보에 역행하는 양상을 띨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역설하고 싶은 것이다.
이와 더불어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비평의 힘'이라는 거다. 먼저 물음 하나. 대한민국에서 (영화, 문학, 미술, 음악까지 통틀어) 비평의 영역, 즉 힘은 어느 정도, 얼마까지 그 진정한 몫을 충분히 차지하고 있는가. 내가 보기에는, '너무나' 형편없다. 매체도 그렇고 관객들도 마찬가지다. '비평적 태도'를 가지고있지도 않고, 더 문제는 그것을 가지려 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어쨌든 나는 이렇게 단언하고 싶다. 만약 우리가 '인간을 위한 영화'를 원한다면 이는 결국 '인간을 위한 비평'을 통해 완성되어야 한다고. 그리고 이는 또한 결국 현실 속의 비평, 생활 속의 비평적 자세에서 우러나와야 한다고. 지금 내가 뭐 거창한 것을 얘기하는 것처럼 들릴 진 모르겠지만, '와아, 이 영화 열라 신나!'의 태도와 '으음, 이 영화 상업영화군.'의 자세 사이에서 '좀만더 생각하며 영화보기'의 관점을 찾아보려고 노력하자는 말 정도로 들린다면, 뭐 결국 그런 말이 될 수 있겠다.
"벤야민에게서 원문은 번역을 통해 순수한 언어로 상승하고, 비평은 작품 이후가 아니라 작품의 성립과 동시적이며, 복제는 원작의 권위를 위협한다." (진중권, '현대미학강의'에서)
그렇다. 비평은 작품의 '끄나풀 사업'이 아닌 '동시적 사업'으로 가야한다. 사실, 비평에 대한 이런 강조는 전혀 흔치않은 사업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내 눈엔 아직 '비평의 영역'이 너무도 협소해 보이기만 한다.
5.
<매트릭스> 시리즈에 대해 엇갈리는 양상으로 퍼부어지는 영화평들이 나는 즐겁다. 그 이유는, 이러한 갖가지 비평들이 <매트릭스>라는 '비평이 되는 영화'(나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를 '상당 수준'에서의 비평이 가능한 영화라고 본다)를 단지 '짬뽕식 액션영화', 혹은 정반대로 '위대한 철학영화'와 같은 극단적 평가들 사이에서 관객으로 하여금 자꾸만 무언갈 생각하게끔 만든다는 것이다.
한두마디 더 내놓아보자면, 궁극적으로 비평은 '모든 곳'에, 즉 문화와 예술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 '동시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이며 때문에 비평의 성격은 지금보다 더 '자유로워져야' 할 것이다. 영화를 본 관객 모두가 서로의 비평을 쉽게 접하고 논할만한 공간도 보다 무진장 많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며, 비평에 대한 메타비평의 중요성도 앞으로 나날이 더욱 커져가야만 할 것이다. 아마도 '인간을 위한 영화'에 반대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적을 것이다. 우리 모두 일단은 비평의 힘을 믿자. 그리고 비평이란 것을 '제대로' 써먹기 위한 고민에 박차를 가하자. 끝으로, 만약 <올드 보이>란 필름 자체를 하나의 '내용'으로 봤을 때 이를 제대로 보기 위해 필요한 첫번재 '형식'이 결국 비평이 될 수 있다는 나의 주장에 대해서도 고민해보도록 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