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단상
감성 지수 높은 영웅 신화
인간 주위에는 수많은 신화가 있다. 가장 매혹적인 것은 영웅 신화다. 후광이 번쩍번쩍하는 영웅을 내세워 기적적인 그의 모험들로 가득 채워진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사람들은 영웅의 용맹과 지혜에 넋을 잃어 그를 신봉하게 된다. 한 인간을 신격화하고 이것은 사람들의 굳은 신념을 이끌어내어 지배나 복종의 도구로 쓰이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지배자이자 승리자의 입장에 서 있는 영웅이 주도하고 영웅에 대한 부정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추종자들의 도움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영화일 것이다.
반지의 제왕은 일종의 영웅 신화다. 이야기는 프로도와 아라곤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의리를 피로 맹세한 친구들 - 간달프, 김리, 레골라스, 메리, 샘, 피핀 - 과 환상적인 로맨스를 위한 요정 아르웬도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소위 말하는 ‘사명감’으로부터 에너지를 얻고 불굴의 힘을 발휘한다. 사명감은 일종의 최면이다. 주인공이 느끼는 사명감은 천지창조의 신화를 써 내려가는 사람이 바로 ‘나 ’ 라는 굳은 믿음을 가지게 만든다. 나만이 반지를 옮길 수 있고 , 파괴할 수 있다는 사명감, 나는 곤도르의 왕이며 왕좌를 계승하여 평화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사명감, 수많은 군대를 이끌고 끔찍한 우르크 군대와 싸워 용맹한 인간의 기상을 보여주는 데 앞장서야한다는 사명감이 그들을 최면 속으로 안내한다.
호기심 많은 겁쟁이 호빗이 세상의 운명을 쥐락펴락할 수 있을만한 힘을 가진 반지를 손에 넣게 된 것은 그에게 사명감을 던져 준 사건이었다. 13개월 동안 산전수전을 다 겪어가며 반지를 파괴하기 위해 7전 8기를 거듭한 호빗의 힘은 그로부터 나온 것이다. 반지를 파괴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며 피튀기는 전투를 벌이고 있을 나의 ‘친구들’을 생각하면 다시금 불끈하며 사명감이 복받치지 않을 수 없다.
아라곤을 보라. 전투를 하기 전, 그는 군대를 선동하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군사들을 ‘유혹’한다. 그대 전사들은 명예롭게 죽을 수 있는 고귀한 기회를 얻은 것이라고, 천지를 창조하고 개벽하는데 그대들의 피가 쓰일 것이라며 ‘나를 따르라 ’고 말한다. 오합지졸 군사들이었다 하더라도 이런 ‘ 유혹적인 언어술 ’ 에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인지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벅차오르면서 그들은 용맹스럽게 앞으로 진군하는 것이다. 아라곤 역시 ‘후계자’라는 사명감으로 자신을 무장시킨 뒤 군사들을 유혹하는 것이다.
‘네가 죽으면 우리도 죽는다 ’ 고 말하는 그들의 친구들도 사명감의 이름아래 목숨을 걸고 전쟁터로 나아간다. ‘친구와 함께 죽는 것이라면 좋다 ’ 고 말하며 철퇴를 휘두르고 화살을 쏘아대는 것을 보라. 말로는 딱히 표현할 수 없지만 의리인지 사명감인지가 뒤엉켜 그들의 피를 끓어오르게 한다. 선두에 선 반지원정대 멤버들의 뒤를 따르는 군사들, 동맹군들은 이들이 가진 사명감에 한껏 자극을 받아 사기를 높여간다.
전쟁은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다. 인간의 이성으로 발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감성’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그들의 전쟁을 합당하게 만들고 , 보다 필연적인 사건이었다고 믿게 만들기 위해서, 대군들의 사명감을 보다 효과적으로 이끌어내기 위해서 영웅이 필요하다. 한 사람을 지목하고, 그리고 그보다는 덜 빛나지만 그래도 우수한 기타 몇 사람을 지목해서 ‘ 영웅 ’ 으로 만드는 작업은 사실상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 영웅은 자신이 가진 , 묘사하기 어려운 그 감정을 퍼뜨린다. 그리고 전쟁은 맹렬하고 용감하게 시작되어 승리로 끝나는 것이다.
반지의 제왕은 감정 지수 높은 영웅 신화다. 우리가 반지의 제왕을 보고 웅장하고 장엄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결국 인간은 이기적인 것이다. 자신이 그 사명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사우론이 천지를 악으로 덮어버린다고 해도 건넬 말은 단 하나였을 것이다. “ 하고 싶으면 하라죠, 뭐. ” 그 사명감으로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고 난 뒤에 자신이 영웅이 될 것임을, 그리고 그애 대한 댓가를 어느정도 받을 것임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상상못할 용기가 샘솟는 것이다. 불타는 사명감을 뒷받침해주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계산이다.
다행스럽게도 인간은 이기적이면서도 그 어떤 동물보다도 감정에 약하기 때문에 천지창조, 악의 무리를 제거하는 일과 같은 신화적인 임무를 위한 사명감 조성이 그리 어렵지는 않다. 어떠한 상황이 닥치거나 말로서 유혹을 한다면 쉽게 최면에 빠져들게 되고 불타는 사명감으로 해야 했던 일을 마무리 짓는다.
결과적으로 반지의 제왕을 통해서 우리는 인간의 삶 자체가 이런식으로 만들어져왔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인 견해로 반지의 제왕이 볼만한 영화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반지의 제왕과 톨킨에 대한 수많은 사실과 배경지식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어 주장하게 된 것인지도 모르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은 ‘ 감성지수 높은 영웅 신화 ’ 가 우리에게 던지는 ‘ 인간사 ’ 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이기적이고 눈물나도록 감성적인 인간들이 사명감이라는 유혹으로 만들어내는 인간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