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단상
"나는 내가 침묵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의 피아노 때문이다."
무엇보다 영화 <피아노>는 언어적 차원에서의 '소통의 방식'을 중요한 소재로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차원에서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는 부분이 바로 주인공 에이다의 '존재성'과 깊게 연관되는, 또하나의 주인공이며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피아노'이다.
그렇다면 한낱 '악기'에 불과한 피아노는 어떻게 에이다의 '존재'와 연관되어지는가? 대개 한 사람의 '존재성' 혹은 '정체성'이란 타자들 간의 '관계' 속에서 그 의미가 발현되고 또 인식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관계라는 장(場)은 일반적으로 '언어'라는 매개물을 필요로 한다. 바로 그곳에서 '자신을 표현'하고 '타인을 수용'하기 위한 일차적 목적을 가지는 언어로서의 기능이 요구되는 것일 터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능에의 요구와 같이, 영화 속에서의 피아노는 '악기'라기보다 '언어'로서 등장을 하며, 그 언어적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기꺼이 에이다에게 협조한다.
"엄마는, 사람들이 쓸데없는 말들만 하기 때문에 말은 할 필요가 없는 거래요."
영화의 주인공인 에이다의 캐릭터는 단순한 '주인공'만의 의미를 뛰어넘어 영화 전체를 그녀 혼자 질질 끌고 가는 듯한 인상마저 준다. 이유인즉, 그녀는 영화의 여러 배경과 사건들 속에서 '만만찮은' 인물로서의 면모를 한껏 발산하고 있는데 결국 그 '발산'의 양태와 재현 방식들이 꽤나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과연 '어떤 여자'이길래 뭐가 그토록 대단하다는 말인가? 심플하게 답변해보자면 에이다는 이런 여자다.
피아노를 통해 '자신의 감정(1)'을 '이야기(2)'하(려 애쓰)는 '여자(3)'.
1. 에이다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확실한 이유는 드러나지 않지만 6살 때부터 '말'을 거부하고 살아온 이 여인에겐, '감정을 숨기는 법' 또한 거부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인상적인 눈빛과 (영화 속 다른 백인 여성들에게서 보여지는 '우아한 척 하는' 모습과는 다르게) 다소 과격하게 보이는 행동은 그 자체로서 그녀가 가지는, '외부적으로 효과적이진 않지만 내면적 감정에 솔직한' 하나의 의미 있는 언어이기도 하다.
2. 이 영화의 주인공에게 중요한 '언어'가 되어주는 행위 방식으로는 대략 '수화', '글쓰기', 그리고 '피아노 연주' 정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에이다는 이처럼 다양한 소통의 방식을 통해 끊임없이 자기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억눌린 현실 속에서도 지속적인 노력과 그에 따른 대가를 감수하는 그녀의 모습은 우리에게도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바가 있다.
3. 여자를 대함에 있어 "당신은 작군, 왜소해."라는 따위의 말이나 할 줄 아는 '남자' 스튜어트는 한편으로 결국 '여자'로서의 에이다에게 '남성성'을 무기로 억압하는 '가부장적 주체'로 인식된다. 이 식민주의 근성이 흘러 넘치는 백인 남편에게 에이다는 어떻게 대항하는가. 결과적으로는 '훌륭하게' 대항한다. 그와의 티격태격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춰본다면 '대항'이라는 표현이 그닥 적합하지 않을 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녀는 결국 자신의 주체를 성취하고야 마는 것이다.
"난 당신을 사랑하오. 하지만 나에게 아무런 감정 없이 온 거라면 제발 돌아가 주오."
베인즈가 에이다에게 내놓는 '계약'은 결국 이들에게 있어 좋은 구실이 된다. 에이다는 피아노를 '연주하기 위해' 베인즈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베인즈는 에이다의 몸을 '만지기 위해' 거래를 제안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둘은 피아노 곡조의 선율 속에서 그리고 서로의 살과 살을 맞대는 행위 안에서 '교감'을 나눈다.
에이다의 입장에서 베인즈는 자신의 언어를 '들어주는' 남자이다. 딸 플로라의 아빠 역시 피아노를 가르치던 가정교사였던 것처럼 그녀는 자신의 피아노 연주를 들어주는 (척이라도 하는) 사람만을 믿을 수 있으며 사랑할 수 있다. 베인즈가 음악에 관해서는 무지몽매한 '원주민'일지라도 그는 그녀를 '피아노 치는' 모습을 통해 점차 알아간다.
에이다 또한 '원시적'이지만 '남성적'이지만은 않은, 부드러운 베인즈에게 끌린다. 사실 베인즈라는 인물이 암시하는 성격은 우리에게 던져주는 바가 크다. 우리가 무심히 생각하기에 '역겨운 남성성'이란, '원주민'들에게서 가장 잘 나타날 것만 같은 '원시성'으로 대변될 수 있는 속성일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백인들에 의해 지배받기 이전부터 뉴질랜드 땅에 정착해 살아 온 마오리족 원주민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은, 영화 속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문명인 스튜어트가 보여주는 권위적이고 강압적인 성격과는 거리가 멀다. 원주민과 같이, 원주민으로서 살아가(고 싶어하)는 백인 남성인 베인즈는 '영어'라는 언어로 여전히 백인들과 소통을 하면서도 결코 '백인다운' 어법은 사용하지 않으며 또한 에이다와의 관계에서도 '백인 남성다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난 그녀가 말하는 걸 머리 속으로 들었어. 이젠 꿈을 깨고 싶어."
영화의 후반부는 상당히 의미 있는 두 개의 사건이 일어난다. 그 첫번째가 바로 스튜어트의 죽음(자살)인데, 지쳐있던 에이다를 힘으로 정복하려던 그는 결정적인 순간 그녀의 눈을 통해 '무언의 말'을 듣는다. 그리고선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 베인즈를 찾아가 마지막으로 속내를 토로하고는 죽음을 택한다. 그의 말처럼 정말로 '남성적 신화 안에서의 꿈'을 불행히도 '깨게' 되는 것이다. (당대 대영제국 최고의 기치였던 '개척정신'이란 남성성을 그저 자기 안으로 내면화한 죄밖에 없는 스튜어트는, 그러고보면 참 불쌍한 사람이다. 그리고 이 한국땅 위에도 그런 사람들 참 많다.) 스튜어트가 들었던 '무언의 말'은 베인즈에게도 에이다와의 잠자리에서 언뜻 들리게 되는데, 이 '마음으로 말하는' 언어 역시 그녀가 가진 위대한 소통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두 번째로 눈 여겨 봐야할 점은 에이다와 베인즈가 새 집으로 이사를 가는 배 위에서의 장면에 있다. 에이다는 갑자기 싣고 가던 피아노를 바다에 던져버리기를 요구하고, 피아노가 바다로 침수해 들어가는 순간 자신도 그 피아노에 묶여있던 밧줄에 다리를 감기도록 하여 함께 바다 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결국 에이다는 도중에 밧줄에서 빠져 나와 수면 위로 떠오른다.
에이다 그녀에겐 이제 피아노만이 유일한 자기 표현, 소통의 언어가 아니다. 에이다는 새로이 '말'을 배우기 시작한다. 어찌 보면 그 피아노 역시 하나의 '전략적 도구'로서 기능할 뿐이기에, 언제나 피아노만을 통해 자신을 '예술적으로(?)' 표현하며 살아갈 수만은 없는 노릇일 테니 말이다. 물론 그녀는 이제야 '한 단계' 나아갔을 뿐이다. 그러나 그녀만의 '언어'로 세상의 억압에 맞서, 혹은 그 억압의 결을 타고 '여성'으로서의 주체화를 꾀했고 이는 상당 부분 적중했다. 또한 남성의 언어, 식민주의의 언어를 거부하며 끝까지 '고집'을 부린 그녀가 결과적으로 나름의 '현명한 여성'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지금까진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가 내려져 왔고, 더불어 앞으로 이런 차원에서의 보다 현실적인 고민이 더욱 활발히 생겨났으면 하는 생각도 해본다.
p.s
그렇다. 역사적 맥락과 시스템 따위를 거쳐 종국에 남는 것 중 하나는 역시나 그 '빌어먹을 남성성'인 것이다. 지금 내가 거들먹거리고 있는 '남성성'이란 개념은 우리 사회를, 우리 머릿속을 지배, 압박하는 '위대한' 멘털리티이다. 이 땅의 핵심적인 메이저급 이데올로기들을 강력하게 떠받쳐주고 있는 이 '남성성'의 힘. 죠기 저 귀여운 7살난 여자아이조차 '남성성'을 강요받아야 하는 이 사회에서, 이러한 힘은 여전히 대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