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단상
이름이란, 사회라는 장 속의 인간에게 있어 가장 각별한 상징물임에 틀림없다. 나란 존재는 이름이라는 언어로 불려짐으로써 자신의 상징적 주체를 어느 정도 획득한다. 바꿔 말하면, 사회 구조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인간은 또한 그 안에서 상당 부분 이름이란 상징물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선 '후지이 이츠키'란 이름은 전반적으로 영화의 메인 플롯들을 작동시키는 촉매제가 된다. 남자 이츠키는 같은 반의 또다른 여자 이츠키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는데 그 이유가 바로 같은 이름, 즉 동명이인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여기서 또 다른 이츠키가 '여자'인 것은 (물론 당연히 멜로 영화의 필요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정신분석학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이론에 따르자면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가 무의식적 회귀본능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남자 이츠키는 여자 이츠키를 사랑한다. 이는 지극히 정신적 일체감을 위한 사랑이고 결국 이 사랑은 분열된 인간이 겪어야만 하는 외로움의 산물이기도 하다.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수많은 현대인들이 발산해내는 이 외로움의 산물은 흔히 '플라토닉 러브'라 불리는 것과도 많은 연관이 있는 것 같다. 히로코가 영화 내내 보여주는 그 갑갑한 집착은 얼마나 플라토닉한가.) 이츠키는 또다른 이츠키와의 교감(이것이 '교합'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정신분열증의 원인이 육체보다 정신적 측면에 있기 때문이다)을 통해 자신의 '결핍'을 채우려 한다.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확연히 드러나지만, 여자 이츠키 또한 남자 이츠키의 그러한 대상화 욕구를 거의 동등한 정도로 느끼게 된다.
남자 이츠키의 결핍 메우기 노력은 특별히 성공이라 할 만한 결과를 낳지 못하지만, 또한 특별히 실패라 할 만한 부분도 보여지지 않는다. 여자 이츠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러 간 남자 이츠키의 표정에선 속으로 끙끙대는 소심한 성격의 흔적은 그닥 찾아 보기 힘들다. (솔직히 같은 남자로서 보건대, 이건 정말이지 대단한 경지가 아닐 수 없다.) 그는 그러한 여자 이츠키와의 아슬아슬한 관계에서 아마도 '만족스런 불만족'을 느꼈을 것이고, 그 과정 속에서 모종의 일체감을 느꼈을 것이다. 어쨌든 이것이 바로 영화 속 10대 중반의 한 남자아이가 추구했던 '작은 대상 a(little object a)'를 찾기 위한 나름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이츠키의 이러한 행위를 보면서, 주체와 대상의 간극을 채우기 위한 노력과 방식은 사람, 연령, 문화, 지위 등에 따라서 각각 무수히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리란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간단명료한(?) 이츠키의 인생곡선을 그려보면서, 분열되고 불완전한존재로서의 인간은 결국 무의식의 노리개로서 한평생 사랑을 하고 괴로워하다 다시 태초의 단계로 되돌아가는 법인가 보다, 라는 생각 역시 들기도 하고 말이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러브레터'는, 그야말로 영화 속의 모든 감성 조각들을 우리에게 전달해주는 배달부 역할을 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매개체이다. 두 여자가 주고받는 '편지'들은, 위에서 말한 '이름'과 유사한 역할을 더욱 역동적으로 수행한다. 이츠키라는 이름이 남자 이츠키와 여자 이츠키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폐쇄적 통로였다면, 러브레터는 여자 이츠키와 죽은 이츠키의 연인이었던 와타나베 히로코를 연결시켜주는 다소 자유롭고 감성적인 통로이다. 그런데 이 편지들은 모두 두 여자간에 오고 가는 편지임에도 불구하고 '러브레터'로 명명되어진다. 그 이유는 뭘까? 히로코가 죽은 이츠키에게 보낸 편지는 물론 러브레터다. 그렇다면 여자 이츠키가 히로코에게 보내는 편지는? 그리고 히로코가 후에 여자 이츠키에게 계속해서 보내게 되는 편지는? 이 역시 모두 러브레터다. 이 편지들은 죽은 이츠키에 대한 기억 속으로 보내지는 것이고, 결국 히로코와 여자 이츠키 각각의 자신에게로 보내지는 편지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보내는 러브레터. 이렇게 잃어버린 기억을 찾기 위해 발송되는 편지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히로코에겐 억압적인 무의식으로부터의 조심스런 탈피를, 그리고 여자 이츠키에겐 기억의 근저에 깔려있던 옛사랑에 대한 무의식의 발현을 돕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의 러브레터에 대한 비중은, 죽은 이츠키를 매개로 하여 히로코의 노이로제 치료 과정과 여자 이츠키의 옛 추억에 대한 병에 걸리기 시작하는(이는 영화의 결말쯤에서야 암시되는 바가 크긴 하지만) 과정, 이 둘에 적당히 배분되어 있는데 영화의 제목이 괜히 '러브레터'가 아닌 것처럼 이 두 여자의 관계가 사실상 남자 이츠키와의 관계들보다 더욱 흥미롭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말인지도 모르겠다. 또한 내게 있어 그것보다 더 흥미로운 점은 바로 히로코와 이츠키의 억압된 무의식이 치료되는 과정인데, 그들의 치료 과정이 바로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전이(transference)'와 '대화 치료(talking cure)'로서의 형태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히로코는 죽은 이츠키의 시신이 묻힌 산에서 한동안 가만히 누워있다. 이토록 대놓고 죽음을 입증하는 성묘 장소에서조차 그를 잊지 못하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정도로 히로코의 초기 상태는 아주 심각하게 출발한다. 그리고 곧 '치료'가 시작된다. 히로코의 경우 또 하나의 이츠키와 주고받는 러브레터뿐만 아니라 항상 옆에서 그녀를 이끌어주는 아키바와의 관계 역시 중요한 치료의 과정이 된다. 예컨대, 여자 이츠키의 영역으로 옛 연인을 떠나보내는 행위뿐 아니라, 산장의 친구 집에서 남자 이츠키가 죽기 전 불렀던 노래를 공유하는 사람들을 보며 무언가를 느끼는 것 따위가 중요한 과정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러한 치료는 곧 히로코 자신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불러오게 된다.
반면 여자 이츠키의 무의식 또한 상당 부분 억눌린 영역을 갖고 있는데 그게 바로 아버지에 대한 무의식에서 드러난다. 그녀는 이츠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동시에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기억을 드디어 끌어올린다. 그리고는 그동안 쌓여왔던 마음 깊숙한 곳의 억압이 분출된다. 그녀의 계속되던 감기는 이러한 무의식적 열병(아버지가 죽게된 이유 또한 감기에 있다)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그녀는 지독한 감기로 쓰러지고 히로코와 같이 새로운 전환점을 맞는다.
이 즈음에서 두 여자의 전환점을 대변하는 장면의 대사가 바로 그 유명한 '오겡끼데쓰까? 와따시와 오겡끼데쓰.'이다. '잘 지내고 있나요?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이 혼잣말로써 여태껏 자신을 구속해왔던 억압들을 떠나보내는 것이다. 결국 타자의 도움을 받아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자신을 해방시킴으로써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떠난 그들의 과거로의 여행은 막을 내리게 된다. 물론 앞으로도 또 다른 병들의 접근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말이다.
현대 미국문학 작가인 커트 보네거트는 그의 작품 속에서 인간의 정신분열증 적인 속성이야말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중요한 위안이 된다고 피력하였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분열증이 결국 문명화를 야기했고 현대 사회를 이룬 근간이 되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어찌됐든 돌고 도는 이러한 인간과 사회 구조의 정신분석학적 접근법의 한 가운데에는 무의식과 욕망이란 이름의 소용돌이가 조용히 일고있는 것이다.
trinity(박수련): 안녕하세요. 정말 훌륭한 글이네요. 러브 레터에 관한.-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07/21-18:23]-
trinity(박수련): 그런데 마지막 문장의 두 학자의 말들은 논란의 여지가 있군요. 생각해 봐야겠어요. 반응, 보여주시겠어요? 이멜로. ^^ -[07/21-1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