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름>은 상황설정과 인상적인 캐릭터가 조화를 이룬 작품이다. 영화에서 정돈될 것 같지 않은 머리, 깊은 슬픔이 느껴지는 공허한 눈, 생기없는 입술을 가진 선영의 얼굴은 이전까지 보아온 장진영이란 배우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선영이란 캐릭터는 다중적인 성격을 지닌다. 남편의 모진 학대를 견뎌내는 아내이자 어린 아들을 죽게 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엄마이며, 어느 정도 남자에게 구속되길 원하는 여인이자 필요에 따라 남자를 이용하는 교활함을 갖춘 악녀적 이미지도 보여진다. 이처럼 중첩된 성격을 내포한 선영을 연기하는 것은 배우의 에너지를 완전히 소진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만큼 감정선의 기복이 크다. 물론 그 기복의 폭이 크다거나 작다고 해서 그것으로 연기력의 우열을 가리는 것은 온당치 않으며, 무엇보다 배우가 등장인물과 동일한 이미지를 관객에게 심어주게 하는지가 연기의 중요한 실체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장진영은 표면상이 아닌 인물 안에서 움직인다. 특히 대사처리보다 두 손을 호주머니에 찌른 채, 눈을 내리깔고 서 있는 신체언어에서 그녀가 선영에 몰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쨋든 맡은 배역이 갖는 감정선의 기복을 적당한 호흡으로 소화해내는 것이 배우의 연기를 평가하는 기본이라면, 선영을 연기한 장진영은 캐릭터의 이미지 구축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주목받는 배우로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사실 <소름> 이전의 장진영은 전작품을 통해 일관된 역을 해왔다. 따뜻한 심성을 가진 사랑스런 여자의 이미지는 그녀가 가꾸어온 이미지일 것이다. 타입 캐스팅의 관점에서 보면 <싸이렌>에서 준우(신현준)의 곁을 지키는 이타적 유전자를 소유한 예린, <반칙왕>에서 대호(송강호)에게 겉으로는 모질게 대하지만 속으로는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는 민영은 클로즈업 자체가 연기가 되는 무난한 배역이었다. 또 한편으로 영화에서 그녀의 역할 비중은 부각되지 않아 왔다. 이는 그녀가 핀-업(pin-up)의 대상이 되기에도 약간의 거리가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요소는 그녀에게 절호의 기회를 준 것이기도 하다. 상대 역할에 가려 적은 비중으로 위치지음은 관객에게 그녀에 대해 고착화되지 않은 이미지를 갖게 했으며, 밝게 웃는 명랑한 얼굴에서도 우울한 그림자를 수반하는 그녀의 생김새에서 그 우울함의 시작을 보여줄 수 있는 토대를 만든 것이다.
지난 몇 년간 한국 영화산업의 급격한 변화는 영화시장의 합리화와 상품화를 동시에 진행시켜 왔다. 하지만 합리화는 다양성의 공존보다 획일화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영화 생산에 있어 무리한 편식을 동반하였다. 또한 에이전시 대형화에 따라 스타 시스템이 진화하고 토털엔터테인먼트 구조를 이루어 가는 미디어 시장에서 한 배우가 자신의 색깔을 세워나가는 것은 사실상 어려워 보인다. 이는 영화의 흥행 성공이나 스타를 제조해내는 매스미디어와 에이전시의 협업 노력이 스타 이전의 배우를 키워내는 토양임을 말해준다. 더욱이 과거부터 자신의 굵직한 연기 패턴을 유지하지 못한 배우들에게는 새로운 시도나 영역확장을 원하기는 현실적 어려움이 상존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진영이 자신의 입지를 다졌다는 것은 그녀 자신에게나 관객에게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오보 더 레인보우>나 <국화꽃 향기>의 이미지는 그녀가 과거의 타입 캐스팅으로 회귀해 버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는 한국영화의 획일화된 제작 방향이 큰 원인일 수도 있지만, 그녀 스스로가 <소름>에서 보여준 가능성의 단초를 살리지 못하고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흥행성을 담보로 이루어지는 영화제작 경향에서 캐스팅 자체가 효과적인 연기를 이루도록 하는 구조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연기의 폭이 넓다거나 성격파라는 호칭을 얻는다는 것에 의해 그 배우의 연기력을 평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입장표명의 이유는 안전함을 꿈꾸는 배우는 그 생명력이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과 장진영이란 배우의 소름 돋는 연기를 스크린에서 다시 한번 보고자하는 바램의 접점인 것이다. <싱글즈>의 개봉이 다가오는 지금, 그녀의 차기작 <청연>에서 가능성을 다시 한번 볼 수 있기를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