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영화연대 라는 걸 알았네요
그리고 오늘 뷰티풀 마인드 라는 철 지난 영화를 봤고,
뷰티풀 마인드 좀 어이가 없더군요
영화비평 한번 써보고 올려봅니다


A Beautiful Mind

음 이영화 꾀나 감동적이다. 보통 이런걸 휴먼드라마라고 부르지 아마. 광기에 사로잡힌 고단한 삶을 산 수학자가 마침내 한 세대가 지난이후에 성공이라는 것을 현실화하는 노벨상을 수상했다. 어찌 가슴뭉클 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그의 핸디캡을 유지시켜 준 것은 언제나 그를 신뢰하며 사랑하며 함께해준 아내가 함께 했으니, 청소년대상 추천영화 리스트에라도 올려야 만 할 듯 하다.

게임이론을 아시는가. 물론 모를 것이다. 나도 모른다. 아마 스탠포드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빈손으로 벽 전면을 채운 칠판을 5번이나 지우면서 깡수학 공식을 줄줄이 엮어대는 대학원 시절의 계량경제 교수는 아마 알지 않을까. 다만, 수학은 몰라도 그 개념은 설명해 줄수 있다. 행위의 주체가 자신이 할수 있는 최선의 상황을 다하면 된다는 기존의 패러다임을 뒤집어 버린 것이 게임이론이다. 영화에 나오듯이 금발의 미인을 사로잡기위해 모두가 최선을 다해 그녀앞에서 노력하면, 그녀는 그중에서 가장 최선의 모습을 보여준 어느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애덤스미스의 경제학 접근방식이다. 게임이론은 미녀에게도 여러가지 선택가능한 대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애덤스미스적인 접근방식은 현실과 다르다. 금발 미녀는 자신앞에서 맥을 못추는 이들을 보고서는 아무도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있기때문이다. 결국 어느 누구도 미인을 갖지 못하는 상황에 도달한다. 내쉬가 말했듯히 차라리 그냥 테이블에 앉아 있으면 최선이다. 영화에서 그는 그러면 아무도 상처받지 않고 모두 행복하다는 식으로 말했다. 하지만 모두가 미녀 앞으로 나가서 재롱떨 때, 그냥 미녀를 무시하고 있는 남자가 미녀의 마음을 끌 가능성은 꽤 높은 편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경험은 적지 않게 경험해서 잘 안다. 이게 스스로 이쁘다고 생각하는 애들과 그렇지 못한 애들의 차이이다. 자존심. 감히 니가 내 앞에서 재롱을 떨지 않다니. 그리고 그건 1차적인 관심이다.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은 보다 유리한 고지에서 출발할수도 있다.

원래 노벨상은 당연히 내쉬에게 가야한다. 패러다임 시프트를 이뤄낸 수학자에게 상이 가지 않는다는 것은 노벨상의 권위에 대한 실추일 뿐이다. 그런데 영화는 이상하게 자기 멋대로 이야기를 꼬아버린다. 간단히 내쉬를 떠난 그의 아내는 영화에서는 끝까지 남아 내쉬를 ‘보필’ 함으로써 관객의 감동을 엮어내는 중요한 장치가 된다. 노벨상도 마찬가지다. 그건 인간승리를 원인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천재가 정교하게 수학으로 풀어내 버린 개념에 대해서 주는 것이다. 결국 노벨상은 그가 젊은 시절 일궈낸 성과에 대한 보상으로써 주어질 뿐이라는 것이다. 그가 파괴된 삶을 추스리고 난 이후에 연구를 시작해서 받은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인간승리와 노벨상을 연관시키고 있다.

영화는 내쉬의 광기의 원인을 심한 소외감과 열등감에서 찾는 듯 하다. 그의 머리속의 친구는, 곧 내쉬의 또다른 자아는, 내쉬의 경쟁상대에게 자꾸만 내쉬가 더 천재라고 예기하라고 한다. 결국은 내쉬가 내적으로 심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내쉬의 광기의 원인이 진정 이것인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는 현재로서는 알수 없다. 다만, 영화는 결국, 핸디캡을 가진 사람이 정상적인 사람도 하기 어려운 노벨상을 탔으니 이 얼마나 대단한 감동의 휴먼스토리인가 하는 식으로 몰아가 버린셈이다.

천재의 삶은 고단할 수 있을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러한 천재의 고단한 삶을 다루지는 않고 있다. 언급했듯이 장애인의 인간승리 같은 드라마로 만들었다. 그것도 대부분의 픽션을 가져와서 말이다. 게다가 픽션은 여기 저기 관객의 감동을 가슴뭉클하게 이끌어내기위한 장치를 노골적으로 만들어 놓는데 사용되었다. 날조된 진실과 다름없음이다. 그래서 불쾌함이다.

형식적으로 영화는 스릴러로 한번 들어간다. 하지만 형식 혹은 장르야 혼합되면 어떠하겠는가. 그것이 보다 효과적이고 그래서 적절한 것이었으면 될 것을. 그러나 영화는 내쉬의 내면세계를 보여준다는 핑계아래, 단지 관객에게 긴장감을 주는 수단으로 스릴러를 사용해 버렸다. 내쉬라는 한 인간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갑자기 난데없는 스릴러로 변해 장황하게 이야기를 한다. 내쉬의 머릿속 세계라는 걸 알려주는 장면에서는 관객들이 영화의 극적인 반전에 탄성이라도 지를것을 또한 스튜디오는 기대했으리라. 내쉬의 내면이 그러하다는 것은 필요하지만 이건 지나치다. 그렇게 오랜기간을 끌고 갈 필요는 없었다. 천재의 삶은 고단하다. 그러니 당연히 미치는게 맞다. 이 논리가 아니라면, 왜 그가 미쳐가야 할까. 영화를 보기전에 가진, 천재의 삶이 어마나 고단한 것이면 미쳐버릴까 에 대한 답을 기대하는 건 잘못된 것이었다.

반전은 성공했지만, 왜 이 영화에서 그런 시답잖은 반전이 들어가야 할까 라는 의문을 남긴다. 차라리 왜 내쉬가 미쳐가는지에 대해서 다소 파고드는 건 어떨까. 영화는 그저 감동, 감동 오로지 가슴뭉클 감동에 초점을 맞춘다. 헐리우드 스튜디오의 실패의 위험을 무릅쓰지 않기 위한, 일종의 규범화된 시나리오 전략이 맞아떨어지는 순간이다. [동료교수들이 내쉬의 테이블에 펜을 두도록 하자. 그러면 관객은 가슴뭉클해질 거야]. [그래, 멋진 생각이야]. 이런식의 제작과정에서의 대화가 오갔으리라 예상된다.

그냥 짜맞춰진 장치를 섞어 관객의 가슴뭉클한 감동을 만들어 낼려면, 완전히 픽션에 의존할 것이지 왜 위대한 수학자이자 경제학자를 희생물로 삼아 마치 난픽션 인 것 처럼 몰아가느냐의 문제 또한 제기할 수 있다. 논픽션은 일단 감동의 측면에서, 픽션보다 몇 발짝 앞서서 출발하기 때문이리라. 마치 게임이론에서 주체가(영화제작측) 상대방(관객)의 전략을 고려한 선택과 같다. 내쉬가 실존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해 보자. 스튜디오는 천재의 삶이 궁금해서 영화관을 찾았던 관객들은 최소한 잃을 것이다.

아카데미는 이런 영화를 좋아한다. 한편으로 인간승리이고, 그래서 잔잔하게 감동적이고, 게다가 가족의 가치를 전면에 담고 있는 따뜻한 영화. 그리고 이따금씩 아카데미는 진정한 수작을 발견해 작품상을 주기도 한다. 가령 The Silence of the Lambs 나 Unforgiven같은. 그러나 뷰티풀마인드. 이건 아니다. 날조된 장치에 투표위원들이 너무 감동받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