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단상

추억은 아름답다. 선형이 아닌 파편화된 상태로 뇌 속에 저장된 기억은 지치고 어렵던 과거로의 회상을 조각조각 모으면서, 그 안에 숨어있는 따스함을 아련한 추억으로 남겨놓는다. 그래서 추억은 모두 아름답다. 영화 <해적, 디스코왕 되다>는 '고교 얄개'인 세 친구의 우정을 그러한 반추작용을 통해 유쾌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이 영화는 지금까지 한국영화 시장에 있어 흥행코드로 자리하고 있는 '노스탤지어'와 '코믹'을 주축으로 적절한 '액션'의 가미와 '춤'이라는 볼거리를 배합하여 이루어진다. 이처럼 흥행 코드를 알맞게 배치하는 것은 기획영화에 있어서 기본 코스처럼 되고 있다. 사실 유사 할리우드를 지향하는 최근의 한국영화계에서 이러한 경향을 갖는 영화를 찾아보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해적, 디스코왕 되다>는 교복 자율화의 초창기를 학창시절로 지나온 세대에게도 그들만의 추억과 공감대가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똥지게, 병우유, 촌티 나는 의상과 같은 아기자기한 소품의 충실한 재현과 해적(이정진)을 따르는 봉팔(임창정)과 성기(양동근)를 비롯한 개성있는 캐릭터들의 감초 연기는 영화의 재미를 한껏 배가시킨다. 그리고 그러한 어우러짐 속에서 영화는 중동에 일나간 남편과 외로움에 춤바람이 난 아내, 가난으로 인해 술집에 나가는 소녀의 이야기를 보여주면서도 어둡지 않게 그려내고 있다.
또한 <해적, 디스코왕 되다>는 장르영화의 문법을 충실히 따른다. 그래서 내러티브는 인류의 보편적 이야기 양식인 영웅의 모험담을 차용한 익숙한 패턴으로 연결된다. 서술하면 1980년대 초, 평화로운 서울의 달동네에 살던 주인공은 한 여인을 운명적으로 사랑하게 된다. 그 여인은 뜻하지 않은 사건에 의해 악당에게 볼모로 잡힌다. 주인공은 사랑하는 여인을 구하기 위해 악당과 싸우지만 공격받고, 심문당한다. 그래서 조력자를 받아들여 복수를 꿈꾼다. 그리고 결투에 참가한 주인공은 악당을 처벌하고 사랑하는 여인을 품에 안는다.
영화는 이러한 영웅담에 더해 배경 설정에서 흡사 웨스턴 영화를 연상시킨다. 영화에서 달동네의 밖은 존재하지 않는다. 고도 성장기를 상징하는 번화한 시내 중심가나 높이 치솟은 고층 빌딩의 그림자는 찾아 볼 수 없다. 빈민촌에 어울리지 않게 들어선 디스코클럽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영화의 무대는 마치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웨스턴 세트장을 옮겨 놓은 것 같다. 게다가 마을 공동체는 운명 공동체인양 인물들간의 관계가 협소하게 엮여있다. 그래서 영화의 무대는 온전히 고립된 지역이나 셰인이 등장하길 바라는 마을과 같다. 결말에서 '황제디스코클럽'의 큰형님(이대근)이 그토록 애타게 찾던 여인이 다름 아닌 해적의 어머니(김영애)였다는 사실은 이러한 연유로 작위적이라 느끼게 된다.
어떻든 장르영화의 보편적 구조를 취한 이야기는 시작부터 끝까지 모나지 않은 흐름을 타고 이어진다. 관객에게 익숙한 만큼 편안함을 주며 그들이 펼치는 모험담은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무엇보다 '디스코'라는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은 관객의 기대감에 근거한다. 하지만 영화는 관객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영화의 제목 '해적, 디스코왕 되다'가 제시하듯, 디스코 경연대회에서 해적의 춤은 영화의 압권이어야 함을 말해준다. 하지만 일주일간의 피나는 연습이 무색할 정도의 춤 실력은 관객에게 싱거움을 전해준다. 음악의 리듬과 상관없이 추어대는 해적의 춤은 영화가 지금까지 끌고 왔던 재미를 한순간에 허물어버리는 것이다. 사실 영화 전체에 있어 압권이 반드시 클라이맥스에 위치할 필요는 없다. 영화의 흐름 안에서 특정 장면의 효과적 연출이 영화 안에서 십분 발휘되어서, 보는 이에게 충분한 호소력을 지니면 압권에 해당하는 부분이 생동감있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압권을 설정하는 것은 관객의 몫인 것이다. 하지만 <해적, 디스코왕 되다>는 영화의 구조상 디스코 경연대회에서 선보일 해적의 춤에 대해 관객의 기대감을 한껏 높여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러한 기대감을 충족시켜지 못한 것은 대중영화의 의무를 저버린 것이다. 결국 토요일 밤의 열기를 기대한 관객은 압도하지 못한 압권에 실망한다. 차라리 해적의 싸움장면보다 춤장면을 시각적으로 살려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본격적인 댄스영화를 표방하고 나왔던 <댄스 댄스>(1999)에서 보여지듯, 춤을 소재로 했던 한국영화들의 기대 이하의 완성도는 멋진 춤사위로 풀어놓을 또 다른 영화의 탄생을 미완의 과제로 남겨놓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