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단상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워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이 시를 읽고 박찬옥 감독은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 영화를 보는 동안 내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영화 자체가 집중해서 볼 수 있지는 않았지만 미묘한 질투의 심리전을 잘 그려냈기 때문이다. 내가 편집장과 원상의 관계에서 오이디푸스 신화 혹은 콤플렉스를 보았다면 억지일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아들이 생기면, 그 아들은 장차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다는 설정이지만 여기서는 어머니와 아들과의 관계는 아니다. 하지만 나이는 분명 연상이다.
“누나, 그 사람이랑 자지 마요. 나도 잘 해요. 그 사람이랑 자지 않는다고 나랑 약속해요.” 라고 말하는 원상. 그의 콤플렉스는 부와 성과 관련된 것이다. 여자를 유혹할 수 있는 현대의 권력은 여전히 물리적인 힘과 돈이기 때문이다.
콤플렉스와 질투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그의 콤플렉스는 여기저기서 드러난다. 국회도서관에서 사서의 불친절을 엘리베이터 안에서야 조그맣게 내뱉는 말 한마디 “나쁜 년”
이것은 콤플렉스를 가지지 않은 사람이라면 절대 말할 수 없는 얘기이다. “저 사람은 분명히 집도 부자일테고, 공부도 많이 했을 거에요.”라고 말하는 원상의 질투는 아주 뿌리깊게 보였다.
또한 자신의 여자친구를 뺏긴 원상은 그와 그의 애인이 박성연(배종옥)에게 접근한다. 그는 빼앗긴 걸 다시 뺏기 위해 닮음을 선택한다. 한윤식(편집장)이 가진 힘에 굴복하고 그를 모방한다. 혹자는 애인을 빼앗은 사람에게 붙어있는 원상이 이해가 가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논리이다. 장인 어른이 아끼는 담배, 한윤식이 자꾸 권하던 양주들... 그것은 어쩌면 돈과 힘의 상징일지도 모른다.
결국 원상은 누가 뭐뭐 하라고 얘기해준 적이 없다는 말과 함께 편집장의 말을 잘 듣는 착한 아들이 된 것 같았다. 한윤식을 따르면서 그는 점점 자기를 잃어가고 자기를 포기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겐 가장 인상깊은 장면
에스페로 8704 차를 세워놓고 그는 모래를 자기 얼굴 위로 뿌리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 차는 제 게 아니에요. 전 주인이 아니에요.”
원상은 이 때 자기를 원망하면서 한윤식의 힘은 이미 자신이 넘어서기에는 너무 큰 절대권력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박해일은 이 시의 마지막 부분에 딱 맞는 역을 무리 없이 소화했다.
마치 아빠 때문에 엄마를 넘볼 수 없는 아들처럼...
그 대상을 포기하고 힘의 논리에 따라 아빠의 행동과 가치를 따르게 된다는 프로이트의 논리는 중학교 때 처음 접했을 때의 생경함과는 달리 일상에서도, 영화에서도 이제는 그럴 수 있다고 보여진다. (tinagir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