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단상
인간 중심주의의 해체-팀 버튼의 영화 『혹성탈출』
1. 인간중심주의
인간은 자기와 같은 것을 좋아하고 다른 것은 기피한다. 그 현상을 심리학적으로 잘 설명한 프로이트에 따르면 현대의 인간에게는 히스테리와 불안이 존재하는데, 이 이유는 스스로가 기피하는 '자신과 다른 것'이 자신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다른 것은 이제껏 스스로가 중심을 가지고 있던 위치에서 변두리로 물러나 버렸기에 느끼는 불안이며 히스테리인데, 프로이트가 지적하는 것은 먼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의 충격이다. 이제껏 우주의 중심은 인간이라고 믿었던 인간들이 단지 태양을 도는 하나의 행성(혹성)이라는 사실에 엄청난 히스테리를 느낀다는 것이다.
주위를 돌아 보라. 얼마나 많은 현대인들이 그 히스테리에 빠져 허우적대는지...
아직도 해가 뜬다고 믿는 이들은 철저히 인간중심의 사고에 빠져있다. 심하다면 이렇게 둘러 말할 수 있다. 아직 어설픈 시인의 감성을 소유했다고...
두 번째로는 다윈의 진화론의 충격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인간은 신학적으로 창조주의 특별한 은총으로 창조된 피조물이다. 그러나 진화론 이후 인간은 자연계에서 진화해 온 존재라는 사실이 대두되며, 더 이상 이 자연계에서 어떠한 주도권도 우선권도 가질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히브리어의 단순한 한글적 번역어인 성서의 "정복하라"는 말이 더 이상 "정복"이 아니라, "배려"라는 언어로 바뀌어야 함을 눈치채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간이 느끼는 히스테리는 심리학자답게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든다. 즉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무의식에 의해서 지배된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러한 사실들이 인간을 불안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자신의 인식 범위밖에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마음, 부처님 손바닥의 손오공처럼 모든 것이 자기 인식의 위계에서 서열을 가지고 존재해야하는 심리적 구도!
어쩌면 제국주의란 '힘있고/불안한' 현대인이 스스로의 돌파구로 이 지구상에서 찾아낸 것이 아닌가 싶다. 다른 존재를 자신의 인식 범위 하에 놓아두려고 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고는 못 배기는 심리의 표출이 그러한 지상의 정치, 경제적 권력을 만들지는 않았을까? 이러한 인간 중심주의를 재미있게 해체한 영화가 있다. 바로 팀 버튼 감독의 『혹성탈출』이다.
2. 인간의 혹성 탈출
영화에 관한 분석은, 가령 사상 최고의 이상한 삼각관계(주인공-여자행성인-여자원숭이)라는 투의 어설픈 구성도 있지만, 그래서 원작의 그 놀라운 충격을, 비록 팀 버튼 특유의 유쾌한 상상력으로 재구성하고는 있지만, 드러나는 부족함은, 그래도 놀라운 약간의 볼거리와 동시에 귀엽게 봐준다면 다음의 몇몇의 대사는 그 귀여움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심중을 뚫는다.
인간사냥꾼 원숭이가 인간을 대하는 것을 보고 "인간을 그렇게 야만적으로 다루면 우리도 인간과 다를바 없어"라는 원숭이(아리)의 말과 "인간의 문명은 허리 밑만 발달했다"(테드)는 분석, 그리고 '영리할수록 잔인해진다'는 인간 존재의 규정은 조금만 생각을 바꾸어 보면 우리 스스로의 모습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의 천재성은 잔인성과 비례하는 것이 아닌가?
인간인 나 자신이 대상으로 전략한 느낌을 받기에는 원작보다 충분하지는 못했지만 "주체의 객체화"를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렇게 인간 중심주의의 시각을 벗어나니 두 가지 두려움이 드러나는데,
먼저는 원숭이의 막강한 힘에 대한 두려움이며-이것은 타자가 엄습하는 권력적 힘과 싸르트르가 말하는 타자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과 상통한다. 혹은 플라톤의 시각중심주의에 대한 반발이라고 확장한다면 너무 나간 것인가?- 또한 인간 존재의 그 엄청난 폭력성과 배타성이 바로 나의 존재적 본성임을 깨닫게 되는 두려움이다.
이 두가지 두려움은 지금 우리 문화를 구성하고 있는 자본주의에 대한 반발로 드러나는데, 자본주의 물질문명의 휘황찬란함에 주눅들어 혼자는 입장하기도 밥먹기도 어색한 영화관, 그 어색한 '극장탈출'을 엄청난 광고가 서서히 영화 시작 전 나의 뇌를 마비하는-티브이 광고와는 다른 매우 강한 강렬함이 있는데-것으로 무색케 하는 그 여름날 밤의 탈출은 인간의 혹성탈출로 이어진다.
3. 차이를 제거함으로 드러나는 지배욕
나와 다른 생각, 사상, 사고는 모두 없애버려야 할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 그래서 현실이란 모두 '나의, 나에 의한, 나를 위한" 현실이 되어야하는 것인가?
고려대 아시아문제연구소(소장 최장집 정치학과 교수) 주최로 지난 22일 열린 「한국민주주의 특강」에서 최장집 교수는 통일문제로 인해 불거진 현재의 이념갈등 상황을 두고 보수파와 개혁파 모두 문제점을 드러냈다고 진단하고 있다.
최 교수는 말하기를
"반공주의를 신봉하는 보수파들은 다른 이념과 가치에 대해 극단적인 거부감을 보이는 동시에 억압하고 있다. ... 이로 인해 우리 사회의 공동체적 평화와 상생의 가치가 요원해지고 있다"
고 지적하며 동시에
"개혁파 역시 통일문제, 대미인식, 노동문제 등 역사와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도식적이고 현실성이 결여돼 있다"고 한다.
잘잘못을 떠나 혹은 정치적 성향의 편당파를 떠나 우리 사회의 이러한 차이에 대한 배격과 배타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래서 차이를 제거함으로 드러나는 그러한 지배욕은 "지배의 심리학", "정복의 정치경제학"으로 오늘 우리의 목을 옭아 메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말 오늘 하루를 살아가면서 '너의, 너에 의한, 너를 위한' 현실이 불가능하다는 말일까?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정도로만 우리 타협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우리의, 우리에 의한, 우리를 위한"
꾸미의 이야기 신학
http://column.daum.net/storytheology/
1. 인간중심주의
인간은 자기와 같은 것을 좋아하고 다른 것은 기피한다. 그 현상을 심리학적으로 잘 설명한 프로이트에 따르면 현대의 인간에게는 히스테리와 불안이 존재하는데, 이 이유는 스스로가 기피하는 '자신과 다른 것'이 자신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다른 것은 이제껏 스스로가 중심을 가지고 있던 위치에서 변두리로 물러나 버렸기에 느끼는 불안이며 히스테리인데, 프로이트가 지적하는 것은 먼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의 충격이다. 이제껏 우주의 중심은 인간이라고 믿었던 인간들이 단지 태양을 도는 하나의 행성(혹성)이라는 사실에 엄청난 히스테리를 느낀다는 것이다.
주위를 돌아 보라. 얼마나 많은 현대인들이 그 히스테리에 빠져 허우적대는지...
아직도 해가 뜬다고 믿는 이들은 철저히 인간중심의 사고에 빠져있다. 심하다면 이렇게 둘러 말할 수 있다. 아직 어설픈 시인의 감성을 소유했다고...
두 번째로는 다윈의 진화론의 충격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인간은 신학적으로 창조주의 특별한 은총으로 창조된 피조물이다. 그러나 진화론 이후 인간은 자연계에서 진화해 온 존재라는 사실이 대두되며, 더 이상 이 자연계에서 어떠한 주도권도 우선권도 가질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히브리어의 단순한 한글적 번역어인 성서의 "정복하라"는 말이 더 이상 "정복"이 아니라, "배려"라는 언어로 바뀌어야 함을 눈치채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간이 느끼는 히스테리는 심리학자답게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든다. 즉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무의식에 의해서 지배된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러한 사실들이 인간을 불안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자신의 인식 범위밖에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마음, 부처님 손바닥의 손오공처럼 모든 것이 자기 인식의 위계에서 서열을 가지고 존재해야하는 심리적 구도!
어쩌면 제국주의란 '힘있고/불안한' 현대인이 스스로의 돌파구로 이 지구상에서 찾아낸 것이 아닌가 싶다. 다른 존재를 자신의 인식 범위 하에 놓아두려고 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고는 못 배기는 심리의 표출이 그러한 지상의 정치, 경제적 권력을 만들지는 않았을까? 이러한 인간 중심주의를 재미있게 해체한 영화가 있다. 바로 팀 버튼 감독의 『혹성탈출』이다.
2. 인간의 혹성 탈출
영화에 관한 분석은, 가령 사상 최고의 이상한 삼각관계(주인공-여자행성인-여자원숭이)라는 투의 어설픈 구성도 있지만, 그래서 원작의 그 놀라운 충격을, 비록 팀 버튼 특유의 유쾌한 상상력으로 재구성하고는 있지만, 드러나는 부족함은, 그래도 놀라운 약간의 볼거리와 동시에 귀엽게 봐준다면 다음의 몇몇의 대사는 그 귀여움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심중을 뚫는다.
인간사냥꾼 원숭이가 인간을 대하는 것을 보고 "인간을 그렇게 야만적으로 다루면 우리도 인간과 다를바 없어"라는 원숭이(아리)의 말과 "인간의 문명은 허리 밑만 발달했다"(테드)는 분석, 그리고 '영리할수록 잔인해진다'는 인간 존재의 규정은 조금만 생각을 바꾸어 보면 우리 스스로의 모습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의 천재성은 잔인성과 비례하는 것이 아닌가?
인간인 나 자신이 대상으로 전략한 느낌을 받기에는 원작보다 충분하지는 못했지만 "주체의 객체화"를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렇게 인간 중심주의의 시각을 벗어나니 두 가지 두려움이 드러나는데,
먼저는 원숭이의 막강한 힘에 대한 두려움이며-이것은 타자가 엄습하는 권력적 힘과 싸르트르가 말하는 타자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과 상통한다. 혹은 플라톤의 시각중심주의에 대한 반발이라고 확장한다면 너무 나간 것인가?- 또한 인간 존재의 그 엄청난 폭력성과 배타성이 바로 나의 존재적 본성임을 깨닫게 되는 두려움이다.
이 두가지 두려움은 지금 우리 문화를 구성하고 있는 자본주의에 대한 반발로 드러나는데, 자본주의 물질문명의 휘황찬란함에 주눅들어 혼자는 입장하기도 밥먹기도 어색한 영화관, 그 어색한 '극장탈출'을 엄청난 광고가 서서히 영화 시작 전 나의 뇌를 마비하는-티브이 광고와는 다른 매우 강한 강렬함이 있는데-것으로 무색케 하는 그 여름날 밤의 탈출은 인간의 혹성탈출로 이어진다.
3. 차이를 제거함으로 드러나는 지배욕
나와 다른 생각, 사상, 사고는 모두 없애버려야 할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 그래서 현실이란 모두 '나의, 나에 의한, 나를 위한" 현실이 되어야하는 것인가?
고려대 아시아문제연구소(소장 최장집 정치학과 교수) 주최로 지난 22일 열린 「한국민주주의 특강」에서 최장집 교수는 통일문제로 인해 불거진 현재의 이념갈등 상황을 두고 보수파와 개혁파 모두 문제점을 드러냈다고 진단하고 있다.
최 교수는 말하기를
"반공주의를 신봉하는 보수파들은 다른 이념과 가치에 대해 극단적인 거부감을 보이는 동시에 억압하고 있다. ... 이로 인해 우리 사회의 공동체적 평화와 상생의 가치가 요원해지고 있다"
고 지적하며 동시에
"개혁파 역시 통일문제, 대미인식, 노동문제 등 역사와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도식적이고 현실성이 결여돼 있다"고 한다.
잘잘못을 떠나 혹은 정치적 성향의 편당파를 떠나 우리 사회의 이러한 차이에 대한 배격과 배타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래서 차이를 제거함으로 드러나는 그러한 지배욕은 "지배의 심리학", "정복의 정치경제학"으로 오늘 우리의 목을 옭아 메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말 오늘 하루를 살아가면서 '너의, 너에 의한, 너를 위한' 현실이 불가능하다는 말일까?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정도로만 우리 타협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우리의, 우리에 의한, 우리를 위한"
꾸미의 이야기 신학
http://column.daum.net/storytheolog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