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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던바’와 ‘늑대와 춤을’

제이크 설리(샘 워싱턴)는 영화 <늑대와 춤을>의 ‘존 던바’ 대령(캐빈 코스트너), 혹은 ‘늑대와 춤을’과 겹친다. 제국주의적 침략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제이크와 던바 대령은 반침략적 특이점이다. 침략은 이질 집단에 대한 감성적 배타성을 합리화의 근거로 삼는다. 영화 <늑대와 춤을>은 그 배타성을 반지성의 산물로 본다. 자연법칙에 근거하지 않는 절대적 도덕원리는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이성에 기초해 있으며 나와 다름으로 인해 허용되는 폭력은 그 도덕원리에 맞지 않으며 선하지 않다. 존 던바 대령이라는 이성적 영혼이 ‘늑대와의 춤을’으로 구현되기까지의 여정은 인간에게 가능한 지성을 증명하면서 동시에 제국주의적 침략의 야만과 반이성을 역설한다.

여기서 물음은 ‘던바 대령’과 ‘늑대와 춤을’의 동질성 여부, 즉 그 둘은 동일한 존재인가, 라는 것이다. ‘던바 대령’은 용감한 기동대 군인이었다. 용감함은 변함이 없지만 수우족의 문화를 체득하고 그 문화에 동화되어 가며 더 이상 인디언 전체를 적으로 삼는 기동대 군인은 될 수 없다. 다시 세심하게 고쳐 묻자. 존 던바 대령 안에 ‘늑대와 춤을’의 영혼이 깃들어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 둘 사이에는 겹칠 수 없는 존재론적 분절점이 존재하는가. 전자에 따르면 우리가 고전적으로 믿고 있는 그대로 이질적 존재에 대한 배타성과 그 존재에 대한 폭력은 이성적으로 선하지 않다. 더 나아가 우리가 지니고 있는 올바른 이성에 기초해서 사태를 명석 판명하게 보면 이질적 배타성은 극복 가능하기도 하다. 그러나 후자쪽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우리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이성’만으로는 ‘던바 대령’에서 ‘늑대와 춤을’이 결코 될 수 없다.

 

분절점으로서 몸

하나의 대답을 18년이 지난 뒤 영화 <아바타>가 해주고 있다. 미리 <아바타>의 답안을 보면 ‘던바 대령’과 ‘늑대와 춤’을 사이에는 명백한 존재론적 분절점이 존재한다. 해병 제이크와 나비족 제이크는 완연히 다른 존재다. 그 분절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몸’이다. 세간의 평자들이 결국 백인 메시아가 핍박받는 선민을 구한다는 스토리라며 역시 ‘진부한’ 비판을 가하지만, 성년식을 치른 나비족 제이크를 수우족 ‘늑대와 춤을’과 마찬가지로 백인으로 보는 것은 지나치게 안일한 관점이다.

이성적 존재인 그레이스 박사(시고니 위버)가 숱하게 아바타로서 나비족과 융화되려고 시도했지만 결국 그가 아닌 제이크가 성공한 것은 제이크가 이성적인 영혼보다는 원초적인 감각(단순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레이스 박사가 자신의 아바타를 쇠돌이가 조정하는 마징가 제트 정도로 생각했다면 제이크는 직관적으로 아바타라는 육신을 자신과 동일한 존재로 수용하면서 아바타가 겪는 지각 경험을 원초적 수준에서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요컨대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성적인 앎이 아니라 육체적인 삶으로부터 시작해야 했다는 것. 이미 나비족 개체의 유전자에는 판도라 행성에서 나비족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선험적 조건이 직조되어 있으며 이 몸의 차원에서 문화적 관습이 체득되었을 때 비로서 제이크는 나비족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몸의 차원에서 반성을

 

메를로 퐁티의 표현을 빌리면 지각되는 경험에 대해 그레이스 박사가 의식적인 차원에서 반성을 수행했다면 제이크는 몸의 차원에서 반성을 수행한 것이랄 수 있다. 나비족의 육신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순간 백인 인간의 육신을 지닌 제이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나비족으로서 온전히 세계를 받아들이고 나비족으로서 세계에 참여하게 된다

이런 ‘몸’의 관점은 영화 <아바타>의 스토리 밖에서도 존재한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12년 동안 매달린 것은 다른 무엇보다 3D 기술의 구현, 즉 ‘테크네’였다. 이 막강한 테크네의 구현이 실은 많은 영화나 소설의 짜깁기라는 평가를 넘어서 엄청난 흥행과 논란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관객은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영화의 박진감을 통해, 즉 생생한 몸의 지각을 통해 영화 <아바타>가 구축해 놓은 메시지에 좀 더 원초적으로 접근한다. 관객 역시 제이크와 마찬가지로 이성적 반성에 앞서 ‘몸의 반성’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성적으로 베트남전, 아프카니스탄전, 이라크전 등 제국주의 전쟁이 옳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국익을 위해서 파병은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이성적 반성의 한계가 아닐까. 영화 <아바타>가 20세기 들어 거의 모든 침략전쟁의 근원지였던 미국에서 미국의 자본과 기술로 완성되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비록 관객들이 제이크가 수행한 차원까지 몸의 반성을 경험하지는 못했을 지 몰라도 엄청난 흥행과 논란만으로도 여전히 살아 있는 제국주의 담론의 한 복판에서 <아바타>는 테크네의 진화가 불러온 하나의 이정표가 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