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트릭트9> - 범주와 경계의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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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사회적 차원과 개인적 차원의 배타성을 고찰한다. 물론 두 차원은 서로 독립적일 수 없다. 사회적 차원의 배타성은 6만 명 이상의 흑인을 강제 이주시켜 인종차별의 거대한 상징물이었던 남아공의 District6에 대한 신랄한 은유일 것이다. 그러나 인종차별에 대한 이 영화의 관점은 좀 더 보편적이다. 인종차별에 대한 역사적 고찰과 비판보다는 외계인이라는 ‘낯선 존재’를 도입시킴으로써 배타성의 근원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현실에서는 탄압과 차별의 대상인 흑인들 역시 영화속에서는 백인과 외계인 사이의 중간 지위를 점유함으로써 외계인들에 대한 차별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 영화가 묻고 있는 것은 ‘우리는 왜 낯선 존재를 배격하는가?’쯤 될 것이다. 때문에 이 질문은 개인적 차원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다. 주인공 비커스(샬토 코플리)는 평범하고 선량한 개인으로서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외계인 차별 정책에 가담한다. 그러나 외계물질에 노출되며 유전자 변이를 일으키는 실존적 상황에 처한다. 이런 변신으로부터 비커스가 처하게 되는 상황과 변화는 카프카의 ‘변신’에 나오는 그레고르와 정확히 일치한다. 다만 그레고르가 철저하게 고립된 채로 파국으로 치달았다면, 비커스에게는 그와 유전자가 일치하는 동료들이 존재한다는 차이점이 있을 것이다.

비커스는 인간이라는 집단에서 외계인이라는 집단으로 변신해 가는 실존적 개인이다. 이를테면 ‘집단’은 (너와 우리가 다르기 때문에) 어느 한 개인을 배격하는 동시에, (너와 우리가 같기 때문에) 그 개인을 끌어안는다. 역설적이게도 배타성의 기원은 동질성에 있는 것이다. 너와 우리가 같기 때문에(동질성) 우리가 아닌 다른 너는 우리가 될 수 없다(배타성).

이것은 범주와 경계의 문제다. 인간이라는 범주와 경계에서 흑인과 백인은 동질 집단이다. 생명체라는 범주와 경계에서 인간과 외계인은 동질 집단이다. 문제는 우리의 감성적 이질감이 무의식적으로 동질 집단의 범주와 경계를 좁혀간다는 데 있을 것이다. 영화의 목적은 바로 관객으로 하여금 집단과의 동질의식이 범주와 경계의 문제임을 자각하게 하는 데 있는 게 아닐까?

영화에서 묘사되는 외계인에게 혐오감을 느꼈다면 우리는 모두 그 외계인에 대한 감성적 이질감을 공유한 것이다. 요컨대 그들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초반부에 보이는 외계인들을 역겹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존재로 느낀다. 그러나, 영화는 비커스의 변신을 통해 이 이질감의 반전을 시도한다. 외계인으로 변화되어 가는 비커스를 통해 영화 속 외계인은 좀 더 풍부한 인간적 서사로 다가오며, 도리어 혐오감은 비커스를 쫓는 쿠버스(데이빗 제임스)에게로 이전되는 것이다.

비커스는 과연 ‘끔찍한’ 인간으로 다시 되돌아오려 할까? 새로운 존재로의 이전과 체험은 인식의 지평을 넓힌다. 설령 외계로 떠난 외계인이 돌아와 비커스를 인간으로 되돌려 놓는다고 해도 비커스는 더 이상 이전의 비커스일 수 없을 것이다. 배타성이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고 해도 여전히 그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다면 범주와 경계를 확장시킬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