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단상
발성과 소멸
중식(이선균)이 은모(서우)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그러나 영화 속 팔 할을 숨겨두었던 그 말은 발화되는 순간 우스꽝스러워진다. 발화되기 이전에 은모는 중식 곁에 있기만 해도 충족한 존재였다. 또한 그 말을 하지 않음으로 인해 말해지지 않는 공간은 미학적 의미로 꽉 차 있었다.
그러나 사랑을 고백하면서 스스로 봉인해 왔던 제약의 틀로부터 남루한 욕망이 풀려 나온다. 영화의 처음 중식이 보였던 그 날것의 욕망, 진화하지 않는 욕망이 3년 동안 대단히 헌신적으로 살았던 중식의 삶과 배치되면서 안타까울 만큼 초라하게 드러난다.
욕망의 목적은 욕망 그 자체다. 풀려난 욕망으로 인해 그녀를 기다린다는 목적, 그녀를 보살핀다는 목적, 그녀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는 목적, 전적으로 그녀를 위해 복무했던 목적은 모두 사라진다.
진실을 왜 말하지 않는가?
중식은 은모가 진실을 아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녀가 받을 상처나 고통 때문일까? 어쩌면 처음엔 그랬을 지도 모르겠다. 처음 자신의 감정을 올곧게 보지 못했을 때, 중식은 양의 목자처럼 그녀가 받을 상처나 고통을 염려한다고 믿었을 지도 모른다.
중식은 진실을 은모에게 알리지 않는 이유를 ‘아흔 아홉 마리보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더 사랑하라’는 성경의 말로 대신한다. 재희의 아버지는 길을 떠나는 은모에게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한다. 은모는 길 잃은 한 마리 어린 양이며 목자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이다.
그러나 은모가 어리석은 것은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진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실로부터 소외되었기 때문이다. 은모가 상처받을 것이라는 중식의 추측은 독선의 산물인 것이다.
그렇다면 중식은 왜 끝까지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일까? 그는 남루한 욕망의 누수로 변함없는 자신의 미욱함을 깨닫는다. 그가 진정으로 두려워했던 것은 그녀가 상처받는 것이 아니라 그를 영원히 떠나는 것이 아니었을까? 은모는 여전히 진실을 알지 못한다. 중식은 여전히 진실을 알지 못하는 은모를 기다릴 수 있는 것이다.
막을 수는 없어도 깨달을 수는 있다
배우 서우의 연기는 정말 각각의 시절에 찍었다고 해도 믿을 만큼 자연스럽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런 외연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은모는 내연적 변화를 부여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미성숙하게도 가출을 하고 충동적으로 인도로 떠난다.
반면 중식은 고민하고 방황하며 변화를 겪는 존재다. 그는 욕망을 막을 수는 없어도 그 초라함과 비루함을 깨달을 수는 있다. 중식이란 캐릭터는 나약하기 그지없는 인간이 자신의 욕망에 대처하는 한 방식을 보여준다.
그러나 한편, 중식과 은모의 불평등은 은모를 영원히 타자화시킨다. 그녀에겐 ‘깨달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은모는 중식에게 진실을 알고 싶다고 말한다. 자신을 미성숙한 존재로서 중식에 의해 통제된 진실이 아니라, 동등한 존재로서 있는 그대로의 진실, 중식의 미욱한 욕망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파주와 안개
파주의 '坡'는 둑이나 제방을 의미한다. 파주에는 안개가 많다. 보이지 않는 안개의 심연에서 막을 수 없는 욕망이 새어 나온다. 그 안개 너머를 볼 수 있을까?
운명을 믿는가? 운명을 믿는 순간 삶은 미로가 되어 버린다.
안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모르는 것보다 불확실하다.
운명에 대해 안다는 것은 의혹의 가지 수가 늘어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삶은 곧 운명을 알아가는 것이다.
침묵은 많은 것을 말한다. 침묵은 지극히 사적인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령 침묵이 욕망에 대처할 수 있는 구원의 한 방식일 수 있을 지 몰라도, 우리의 삶엔 분명 진실의 문법이 필요하다. 물론 그 진실의 문법은 연속적이지 않으며, 징검다리처럼 특이점으로 존재한다. 특이점을 통해 우리는 무언가 알아버리며 그것을 기점으로 우리는 변화한다.
중식의 생각처럼 무언가 안다는 것은 불확실함의 고통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식이 그랬던 것처럼 은모도 언젠가는 그 앎의 단계를 거쳐야 하리라. 그것이 곧 삶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