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기에는 사건이 있다. 그리고 사건에는 처음과 끝이 있다. 우리의 삶 또한 처음과 끝이 있는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영화에는 이야기 즉, 원형 그대로의 내러티브가 있고, 의도적인 구조를 부여한 플롯이 있다. 이것이 작품에서 너무나 사소한 부분으로 취급되고 있거나 아니면 전복되었을 때, 전형적인 이야기 구조에 익숙해왔던 관객들은 갈피를 잡지 못한다. 그로부터 오는 것은 재미없음 아니라 낯섦이다. 전체를 볼 수 있을 때 좀 더 가까이가면 부분을 볼 수 있고, 부분을 더 가까이서 보면 극히 작은 일부를 볼 수 있다. 설령 볼 수 없더라도 상상할 수 있다.

 

김곡, 김선 감독의 <고갈>은 인물들의 끝에 있다. 인물들은 삶의 벼랑 끝에서 생애를 그린다. 남자(박지환 분)는 여자(장리우 분)를 공단의 이주노동자들에게 5만원을 받으며 매춘시킨다. 그것을 통해 살아가는데, 그들 삶의 풍경은 도무지 왜 사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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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기억이 안나는데.. 우리 엄마가 날 낳았덴다. 넌 누가 낳았냐?"

 

남자는 술을 마시며 별 것 아닌 듯이 이야기한다. 영화 전반에 대사가 거의 없다. 일반적으로 여기저기 흩어진 많은 대사 속에서도 대사들의 진위는 있으나, 침묵 뒤에 오는 대사는 더 큰 힘을 가진다. 생(生)의 시작점에 대한 의심은 당연할 수도 있는 것이나, 발화 하는 인물의, 삶 그리고 그의 몇 마디가 맞닿아있음에 의미는 더 극대화 된다. 이는 극 전반의 처절한 분위기를 더욱 부각시킨다.

 

또한 <고갈>은 이미지의 영화다. 그리고 투박한 상징과 반복들로 이루어져 있다. 8mm필름으로 촬영한 뒤, 35mm 사이즈로 확대한 영상은 거친 입자와 함께 악몽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분명하지 않다. 확실하지 않은 공간에서 그들은 확실하지 않은 행위들을 하며 산다. 남자와 여자가 몸부림치는 흐릿한 갯벌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벌의 흙을 서로에게 던진다. 그리고 맞는다. 갯벌은 원초적인 생명의 공간이면서 낯선 회색빛을 띄며 동시에 점성을 가진 늪이기도 한다. 그 곳의 미생물처럼 그들은 단지 생존한다. 정체성이 모호한 그들이 생존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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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단의 거친 이미지들과 화면의 거친 입자, 그리고 흔들리는 화면은 끊임없이 불안하다. 또한 남근으로 상징되는 공단의 굴뚝과 건물들의 공간은 여자(장리우 분)를 더욱 숨 죄여온다. 특히 사운드는 굉장히 민감하게 다루어져 그 불안함을 더 강하게 한다. 공단에서 들리는 반복적인 쇳소리, 그들의 움직임과 행위들, 사운드는 비정상적으로 크고 거칠다. 끊임없이 거슬리며 괴롭힌다. 어느 곳에도 그들에게 소통하려는 이도 없고, 길도 없다. 그들에겐 오늘 먹었던 짬뽕과 내일 먹기 위해 남긴 국물 밖에 없다. 단 하나의 실오라기도 남지 않은 삶의 의미로 살아가는 것 뿐 이다. 갯벌, 공단, 모텔, 작은 터널. 공간은 한정적이며, 이것은 그들의 삶처럼 잡히지 않는 불분명함과 어두움으로 표상된다. 

   

어떤 문제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상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상을 바라보는 자체도 부족한 경우가 허다하다. 영화 <고갈>을 통해, 끝없이 고갈되어 밑바닥의 극단적인 삶을 꾸역꾸역 넘겨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볼 수 있다. 왜 그들이 그렇게 되었는지, 확증된 단서도 없다. 불친절한 영화 속 서사의 전모를 단지 상상해볼 수밖에 없다. 핏덩이를 꽉 물고 있는 날고기 같은 <고갈>이 우리에게 입히는 상처를 견디는 동안, 처절한 삶과 그 속에 살고 있는 인간들과 나아가 그것을 초래한 것들에 대한 상상을 거듭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이 시대에 필요한 인식의 상상이며, 그래서 영화 <고갈>은 더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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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말도 할 수 없는 벙어리라도, 극단의 분노에 치닿을 땐 악을 쓸 수 있다. 악에 찬, 비명 같은 고함 속에는 그가 할 모든 말들이 있으며 분하고 쓴 눈물도 있다. 벙어리의 악에 찬 고함은 분명한 발언이며, 그 어느 말과 문장보다 함축적이며 진실 된 언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