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단상
어두운 골목, 물이 고인 작은 웅덩이가 있었다. 그 곳을 바라보았는데 쓸쓸한 내가 있었다. 그 위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작은 물속의 내 현실들은 물결의 미세한 떨림과 함께 순식간에 흩어졌다. 첫사랑의 기억도 이처럼 쉽게 부서지길 바라지만 언제나 진한 흔적들로 존재감을 스스로 증명한다. 조각난 기억들은 곳곳에 자리 잡아 추억으로 굳어간다. 여기서 향수가 자생적으로 발생한다. 그것은 아주 진하며, 진한 향기에 흠뻑 젖었을 땐 정신적인 통증이 동반되기도 한다.
이명세식 스타일의 향연, 영화 <M>은 첫사랑의 진한 파편 조각을 아름답게 기록한다. 설렘과 상처를 새긴 첫사랑의 파편들을 흩뿌려 영화는 절대 친절하지 않게, 꿈과 같이 난해하게 진행된다. 일반적인 대중과는 이 접점에서 소통의 부조화가 일어난다. 내러티브의 견고함보다는 분명 영상미가 훨씬 부각되어있는 영화이기에 감각적인 색과 조명에 탄복하나, 이야기의 기둥을 찾는 관객들은 이명세의 영상미학적 성취 앞에서 길을 잃은 미아가 된다. 여기서 영화를 받아들이는 이들의 호불호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장르적 분위기도 실험적이다. 따뜻한 봄날과 같기를 바라는 첫사랑의 재현들은 꽤 날카롭고 어둡다. 멜로적 공간에 차가운 미스터리의 표면이 닿는다. 잊으려고 해도 잊어지지 않는 기억은 강렬하게 뇌리에 남아, 끊임없이 민우(강동원 분)와 미미(이연희 분)를 고통스럽게 한다. 영상 속 빛의 설계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느와르처럼 어두움 속에 빛이 확연히 구분되어 있는데, 첫사랑의 주인공들은 어둠 속에 자리하고 있다가도 홀연히 나타나서는 쉽게 지워지지 않은 기억의 상처로서 사랑의 의미를 되새긴다. 쉴 새 없이 빛과 어둠, 기억과 망각을 반복하며 혼란을 자아낸다.
이 혼란스러움이야 말로 <M>의 형식미다.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영화는 첫사랑의 흩어진 기억을 드러내고 있다. 사랑의 파편들이 어디 그대의 의식 속에 조금의 균열도 없이 질서정연하던가. 꿈과 현실을 거칠게 오가는 것이야말로 당신의 기억 속 리얼리티가 된다. 거울에 비친 모습, 액자로 빨려 들어가는 그들, 현실과 가상을 오가며 사랑은 진리가 되기도 하고 허구가 되기도 한다. 현실과 가상의 균형감 있는 잣대들을 파괴하며 끊임없이 교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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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은 몽환적인 판타지다. 이를 드러내주는 디테일의 과잉은 영화의 주된 흐름마저 덮지만 그것이 무작정 단점은 아니다. 내러티브와 플롯은 영화의 중요한 구성요소지만, 때로는 그것이 약하게 작용할 수도 있으며 동시에 예술가의 예민한 미술품으로서 영화의 가치가 훨씬 더 중요할 수가 있는 것이다. 독특한 색감과 미장센들의 아름다움은 본능적으로 지각된다. 그리고 뛰어난 음악이 이 아름다움을 훨씬 더 부각시킨다. 특히 '안개'의 가사와 분위기는 주인공들의 상황을 감성적으로 제시하는데 일조하고, 극 전반의 분위기와도 훌륭히 어울린다.
이야기는 진부하다. 그러나 이야기는 어떻게 드러내지는가의 문제다. 알맹이보다는 껍질이 더 중요히 작용할 때가 있다. <형사> 이후로 이명세 영화에 대해 불신을 표할 때 늘 화두에 서는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이 문제 역시 그 자체로서 이제는 진부하다.
이연희는 백지장과 같은 배우다. 어떻게 조율되느냐에 따라 그녀의 연기는 천차만별이다. 그녀는 늘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에덴의 동쪽>과 같은 드라마에서 보여준 부족한 연기가 그녀와 같은 배우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근본 자체가 아무것도 손대지 않은 순수함으로 점철되어있다. 영화 <M>에서처럼 뛰어난 조율로 장점을 최대한 끌어낼 때, 그녀는 한없이 훌륭한 연기자가 된다. 상처가 된 첫사랑이 아주 맑고 고스란히 드러난다.
과잉 된 스타일리쉬, 캐릭터들의 비현실성과 연극적인 대사, 이것들이 만들어내는 괴기스러움은 영화의 리얼리티를 떨어뜨리는 듯하나, 리얼리티의 의미를 '현실성'에서 찾으면 안 된다. 첫사랑의 기억은 결코 현실적이 아니다. 이제와 기억하는 첫사랑의 흔적은 당신 혼자 만들어내는 아름답고 몽환적인 가상의 이야기다.
by 김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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