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단상
될 놈은 되는 게 세상이다. 그 이면에 흑백논리의 슬픈 현실이 존재한다. 안될 놈은 안 되는 세상이기에 안 될 놈들은 안 될 놈들끼리 갇혀있다. 평탄한 삶의 행보를 세상이 허락하지 않아서 될 놈들의 바닥으로부터 멀찍이 소외되어 있는 존재의 내막은 늘 피범벅이다. 철철 끓는 피가 너무나 뜨거운 양익준의 영화 <똥파리>는 이 부조리한 세상과 현실적 존재에 대한 직접적인 인식의 계기가 된다.

<똥파리>의 인물들은 상처투성이다. 감당되지 않을 상처들로 범벅되어 있지만, 감당해야한다. 현실은 그들에게 냉랭하고 어떠한 해답의 길도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물들이 가진 근원적 상처들은 가정, 가족사에 위치해있다. 무능하고 권위적이기만 한 아버지는 자신의 처지가 억울하다. 나약한 존재는 헐떡거리며 더 나약한 존재를 찾는다. 그 곳을 향해 하소연을 하염없이 늘어놓는데, 그것이 표면적으로는 결국 약자를 향한 폭력으로 거칠게 드러난다. 비관적인 처지를 혼자서 옹알이하다가 이어지는 구타와 살인, 그 뒤는 참 쓰다. 영화 곳곳에 이러한 폭력의 표상이 비일비재하다. 이들의 비극적인 삶은 마치 운명론적으로 전개된다. 이 운명을 짊어진 이들이 <똥파리>의 모든 주인공들이다.
영화의 표면이 제시하는 근원적 상처의 공간, 가정. '근원'은 무척 추상적인 의미를 가진다. 규정 된 '근원'이란 어떤 것도 없다. 그렇다면 상처의 가정을 만들어 낸 또 다른 근원점이 있다는 것이다. 모든 문제에 해답을 제시해주는 듯 만능 도구로 둔갑된 무서운 '자본'의 의미와, 의미는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라지만 이것이 '자유'는 아닐 것이라 확신되는 新자유주의 사회의 배경적 근원이 그 뒤에 더 크게 자리하고 있다. 그렇듯 대한민국 영화계에 그럴싸한 진정성을 가졌다는 영화는 언제나 기형적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과 직면한다.
부조리와 불합리, 이 현실을 타계할 이상적 대안이 있을까. 아쉽게도 <똥파리>는 늘 우리에게 익숙한 똥파리적인 가치의 존재로 머물게 됨을 보여준다. 일말의 여과가 없다. 안 될 놈이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 치면 처참한 현실이 그들을 매몰차게 거부한다. 어떻게 해서든 이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나름의 처세술을 찾아가지만 사회적 구조는 너무 막막하다. 이미 이 사회를 상징하는 화폐는 폭력의 순환을 부르며, 폭력은 새끼를 친다. 폭력의 잔재는 자신을 겨냥하고 동시에 끈질기게 파괴한다. 삭막한 벽들 외에 어디에도 출구는 없다. 희망은 단지 어두운 세상 위로 얇게 바른 벽지와 같았다.
폭력의 주인인 그대가 소멸해도 폭력은 새끼를 낳았다. 우울하다. 안 될 놈은 끝까지 안 된다. 죽으려고 해도 그것을 붙잡는 혈연관계의 보이지 않는 끈이 있다. 지저분한 것 같아 거부하고 싶지만 또 놓아버릴 수는 없는 것이 슬프다.

영상의 심미적 가치를 논하기조차 쑥스럽게, <똥파리>는 사회의 밑바닥조차 허락되지 않은 이들의 비극적인 풍경과 훌륭하게 통한다. 그나마 우리는 <똥파리>가 보여주는 거대한 풍경 속, 힘없이 내재한 이들의 초라한 소통에 한 틈의 숨을 내쉴 수 있다. 감독 양익준과, 배우 양익준은 너무 지독하다. 하지만 이것이 맞다. 부조리를 부조리함으로 고발하여 토해내고 싶다면 부조리한 존재 역시 무자비해야한다. 관객은 이것을 인식해야한다. 그때는 예술이 곧 정치다. 예술이 정치적 힘을 가지면 그것은 아름다움과 선이 되어, 정치인들의 한심한 주먹놀음 수준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 따위는 우스워진다.
독립영화로서 <똥파리>는 내숭 없이, 헐벗어진 투박함 그대로를 보여준다. 가슴의 영화다. 가슴으로 영화하는 이들은 정말 뜨겁다. 그러나 장기적인 안목으로 후일의 행진이 영화의 미학적 가치에 있어서는 조금은 두려운 것이 사실이다. 배우들은 인상적이다. 특히 고등학생 연희를 연기한 김꽃비는 진정성을 지닌 영화계의 부분들에서 중요한 생명력을 지닌 소중한 배우로 성장할 것이다.

가슴에서 우러나온 진정성의 영화는 인위적 담론의 매체가 아닌 진실이 된다. 독립영화여, 헐벗어라. 이곳엔 진실한 막말이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