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단상

태주
단조로움과 억눌림 속에서 수도자적 자기 단련과 지적 실현으로 자신을 발산하기에 그녀의 욕망은 너무나 원초적이다. 그녀는 아프로디테이자 메데이아인 것이다.
상현
단조로움과 억눌림 속에서 수도자적 자기 단련과 지적 실현을 통해 자신을 제어할 줄 안다. 그러나 그것은 불완전한 ‘지혜’이다. 그는 아폴론이고자 하는 오이디푸스인 것이다.
욕망의 분화
태주와 상현의 욕망은 분화를 겪는다. 태주는 상현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고 상현은 태주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발견한다. 그러나 여전히 미분화한 상현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믿는다. 그는 비록 사제의 옷을 벗어던졌지만 여전히 ‘종교적’인 것이다. 반면 태주는 자신의 욕망에 이름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녀의 욕망은 여전히 '날것'이다.
원죄
원죄의 출발은 유혹이다. 그 유혹이 유혹임을 알면서도 그래서 그 유혹에 빠지지 않아야 함을 알면서도 위반의 욕구가 압도할 때 원죄는 성립한다. 우리는 그것을 ‘죄’임을 알고 저지른다.
사랑과 권력의 혼동
놀랍게도 그것이 원죄이고 그것이 사랑이며 그것이 또한 위반이고 욕망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상현으로부터 폭력적 권력이 생성된다. 이 권력은 자신이 그 인식과 동일자임을 오해하면서 생겨나며, 이 ‘주체적 오해’가 권력과 사랑의 혼동을 일으킨다. 상현은 자신의 희생으로 종교를 선택했듯, 자신의 희생으로 사랑을 선택했다고 믿는다. 이 나르시시즘은 어떻게 소멸되는가?
자신의 욕망을 올바로 인식하기
인식의 기본적인 왜곡, 혹은 단절적인 특성을 깨달을 때 비로소 자신의 날것 - 욕망을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다. 그로부터 인식의 왜곡된 틀에 의해 굴절된 자신의 사랑이 드러난다. 그 사랑을 위해 자신이 정말 무엇을 해야 할지 실천이 윤곽이 분명해진다.
박쥐
왜 영화 제목이 드라큘라가 아니고 박쥐일까? 박쥐의 상징성이 갖는 기묘한 이중성과 경계(境界)성을 바로 인간이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 상징성의 수혜 - 그로 인한 고뇌와 고통, 방황과 자기 모멸 - 가 온전히 상현에게 주어졌음에 주목하자. 태초의 야성을 가진 태주는 그저 타자일 뿐이다. 이 치명적인 약점으로 인해 이 영화는 풍부함의 가능성을 견고하지만 단조로운 구원의 주제로 환원시켜 버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