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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수가 1년 만에 병운을 찾아간 것은 진정 350만 원을 되찾기 위해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과거와 접속하고자 하는 회고주의는 대체로 현재에 대한 절망에서 오는 법, 1년 동안 찾지 않았던 350만 원, 혹은 병운은 희수에게 지금 유일한 희망인 셈이다.

그러나 희수는 그 희망에게 쌀쌀맞고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그녀의 최종적인 기억에 병운은 무능력하고 바람기까지 다분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도대체 희망을 갖는다는 것이 가당키라도 하냐는 심정이었으리라. 그럼에도 그녀는 절망적으로 그(희망)를 찾는다(근본적으로 희망은 절망이 짓는 눈빛이다.).

도입부에서 확인하는 병운은 희수의 기억이 정확하다는 듯 무능력하고 바람기까지 여전하며 대책 없이 낙관적이다. 그러나 그와 함께 350만 원을 받기 위해 떠나는 여정 속에서 그녀가 확인하는 것은 그녀 자신의 이기심이다. 그녀는 결혼이라는 현실에 수용되면서 그 남자의 사랑을 읽지 못했다.

영화의 모든 내러티브는 병운과 병운의 인맥에 의존한다. 놀랍게도 그 인맥은 한 사람(사촌형)을 제외하고 죄다 여자다. 게다가 더 놀랍게도 한 사람(사촌형)을 제외하고 죄다 병운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가지고 있다.

이 사태는 병운이 아무리 ‘여자’에게 헌신적이며 진심인 ‘플레이보이’라고 하더라도 썩 개연적이진 않다. 희수에게 350만 원을 빌리고는 1년 동안이나 갚지 않은 병운이 아닌가? 설령, 병운이 결혼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연애하기에는 ‘최상의 남자’라고 해도 시종 ‘최상의 남자’로 이끌어 가는 내러티브는 필연적으로 오해를 낳을 수밖에 없다.

병운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화 없이 능글거리고 짜증 내지 않으며 인내를 거듭한다. 짜증을 내고 눈물을 흘리고 미소를 짓까지 변화를 겪는 것은 희수다. 요컨대, 이 영화의 반동성은 <사과>가 그러하듯 여주인공에게만 변화와 반성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캐릭터의 불균형으로 인해 영화가 복원하려는 관계의 온기가 작위적이 된다. 게다가 이렇다 할 갈등이 없는 탓에 특정 배우의 빼어난 연기로도 어쩔 수 없이 지루하고 싱거워진다.

마지막 희수의 미소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둘의 미래는 밝지 않다. 이 영화가 희수에게는 변화를 통해 병운을 이해하고 사랑과 희망을 복원하도록 했다면 병운에게는 그저 있는 그대로 ‘플레이보이’로서의 미덕을 재확인하도록 하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결혼 후 두 달 만에 이혼한 병운의 과거사가 일종의 암시인 셈이다. 서로의 이해가 선행이 되더라도 어쩔 수 없이 사랑은 지극히 세속적인 환상이며 또한 현실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