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년대 후반부, 한국영화의 르네상스가 펼쳐지면서 장르 영화속에서 인상적인 여성캐릭터들을 볼수 있었다. 이는 심은하, 전도연, 이영애, 김하늘, 김윤진 등으로 시작해서 현재 전지현, 이나영, 김지수, 엄정화, 김혜수, 송윤아, 문소리 등의 여성 배우들로 이어져 왔다. 2000년대에 들면서 손예진, 하지원 그리고 공효진은 데뷔 때로부터 급격한 발전을 보여주었고 고 이은주는 다양한 배역의 아우라로 청춘 속에 봉인되었으며, 배두나는 일상 연기의 자연스러움으로 출연한 일본 영화에서도 개성을 발휘했다. 한편 지난해엔 김아중이 한편의 영화로 대중적인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화려한 조명은 받지 못했으나 은근히 스며드는 여성 주인공들을 연기한 엄지원의 영화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엄지원은 현대적이라기보단 고전적인 느낌을 갖고 있었고 뇌리에 강렬히 남는 이미지 대신 텍스트 내부의 배역으로 각인되어온 액트리스(actress)였다. <주홍글씨>의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 파멸을 지켜보는 역을 선보이고, <극장전>의 약간 변덕스러운 홍상수의 여성의 한 전형을 연기하며 독자적인 세계로 진입한 듯 보인다. 이제 읽고자 하는 <가을로>, <스카우트>는 각각 삼풍백화점사고와 광주항쟁이라는 역사의 좌표들이 배경인 영화들이다. 앞의 김정은의 작품들은 30대 여성만의 당당함과 약간의 주책스러움(?)을 보여줬다. 상대적으로 엄지원은 청순, 평범하면서도 신비로운 면이 있는데, 김대승은 이를 주목해 비극적인 사건을 겪은 인물 ‘윤세진’에 그녀를 기용했다. <가을로>는 중반부까지 최현우(유지태)가 주인공이다가 연인 민주(김지수)를 삼풍사고로 잃고 10년의 시간이 흐르는데 그 도약이 무리스럽지 않다. 죽은 김지수가 수시로 등장하여 여행지를 소개하는 장면들이 삽입되고 점차 세진의 비중이 늘면서 호기심을 자아낸다.
어쩌면 이 작품도 <우생순>같은 맥락에서 무리수가 있는데 무슨 소리냐면 너무도 명백한 ‘그 때 그 일’을 영화적으로 재현함에 있어 날것 그대로의 사실과 픽션화가 모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가을로>는 개봉 당시보다는 지금 오히려 진심이 느껴지고 영화 속 윤세진이 설령 가공의 인물이라 할지라도 판타지로써 훌륭히 기능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제작의 모티브를 아는) 우리는 도입부에서 사라지는 풍경에 대해 아쉬움을 표하는 방송PD 서민주를 보며 안타깝기 시작하고, 결혼내정자 현우에게 감정이입을 하며 백화점이 무너지는 순간 비통함을 느낄수밖에 없다. 배우자의 죽음이라는 소재는 어쩔수 없이 신파성을 띄는데 <가을로>에선 남녀 관계 묘사 외에 부모도 촘촘히 제시하며 개연성을 얻는다. 동시에 이 대목에서 민주라는 존재가 워낙 무게감이 있다보니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지순하게 묘사되는 점은 유일한 치명적 약점이다. 하지만 아무 준비없이 사랑하는 이를 잃은 현우와 살아남았으나 상처받은 세진이 다이어리를 통해 만나게 되는 상황은 <번지점프를 하다>처럼 운명론으로 다가온다. 다시 말하면, 불쑥불쑥 등장하는 고인(故人)의 내레이션은 문학적이고 피상적이나 그녀와의 관계를 회상하는 현재 사람들의 모습에는 공감이 가게끔 했다.
삼풍사고는 지난 시간에 있던 굵직한 사건 중 하나였는데, 민주는 애인을 기다리려고 백화점엘 갔고 세진은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중에 당하였다.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 인한 일이었고 어떻게 보면 엘리트 계층인 현우 커플은 그냥 그런 피해자가 있었다라고만 알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구사일생 살아남은 세진은 이른바 요즘 말하는 비정규직 여성 근로자의 화두와도 연결고리를 갖는다. 살아생전 민주가 꿈꿨던 여행 프로젝트는 죽고나서 한참후에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와 최후를 같이 했던 친구를 연결시키는 매개체가 되고, 자연은 치유의 능력이 있다고 영화는 계속 말을 걸어온다. 현우가 가는 곳마다에서 마주치는 세진은 한국영화에서 보기 드문 홀로 여행하는 젊은 여성의 모습이고 그녀의 리얼리티에 의해 두 남녀의 동행이 자연스러울수 있는데, 엄지원의 아우라를 통해 이는 성취되고 있다. 대한민국 각지의 아름다운 풍경들은 그저 배경일뿐 <가을로>에서 중요한 것은 현실을 떠나 열린 마음으로 타인을 만나기 시작한 주인공들이다. 한편으론, 한번의 여행으로 곧바로 모든 상실감과 후유증이 나았다고 볼수는 없겠기에 결말이 무력해보일 수도 있다. 그리고 연기자의 기존의 내성적이고 순진한 듯한 겉모습이 다소 클리세처럼 남아있는 것도 사실이다. 장점일수도 있고 단점일수도 있는데 CF나 TV에 거의 출연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더 여자 배우로서 자기관리를 충실히 할수 있었고 연기로써 승부하는 면이 컸다. 엄지원은 자신의 정체성을 이렇게 고스란히 끌어안고 <스카우트>의 히로인 세영으로 존재감을 확실히 알리는 작업을 꾀한다.

김현석 감독은 전작 <광식이 동생 광태>에서 흥미롭지만 모호한 여자주인공을 제시했었는데, <스카우트>의 이세영은 이와 같은듯 다르게 변주된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직전의 상황을 소재로 했지만 영화는 그것과는 큰 관련이 없이 이호창(임창정)의 대학생활과 현재가 교차되며 이어진다. 선동열이라는 고교 최고 투수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광주로 내려간 호창은 라이벌 학교와 치열한 경쟁을 하는 와중에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친구와 조우한다. 그녀 곁을 얼쩡거리는 깡패남자를 통해 질투를 하다가 세영이 몇 년전 자기를 아무 이유 없이 떠났던 일에 미련을 갖게 되고 드라마는 그가 서울로 떠나기전의 열흘을 펼쳐놓기 시작한다. 멜로로써 영화의 가장 중요한 지점은 세영이 호창을 버린 이유에 관한 것인데, 이는 스카우터로서 출장온 남자의 사정과 혼란 속 광주 이 둘이 만나며 종래의 야구영화나 광주영화와 또 다른 시각을 낳는다. <화려한 휴가>의 이요원이 시위의 피튀기는 현장에서 현실을 깨닫고 뛰어들었다면 엄지원의 역할은 차분하면서도 가열찬 시민운동가의 초상을 그린다. 야구를 둘러싼 이야기와 대학생 후일담이라는 두 뼈대는 그다지 공통점이 없어보였는데, 세영과 호창이 사랑을 하고, 헤어지고, 또 다시 만나며 뜻밖에 밝혀지는 사연은 이데올로기적으로 드러난다. 운동권에 속해 있던 세영을 호창은 ‘그거 사실 다 겉멋아니냐’고 조롱하고 야구에 매진하며 정치에는 무관심한 호창을 세영은 무시했었다. 세영이 몸담은 조직의 데모장소에서 ‘무개념’의 호창은 이를 진압했었고 사소한 그 사건은 둘 사이에 건널수 없는 강을 흐르게 해버렸다. 그런데 518이 일어나기 전 짧은 기간을 함께 하며 겉으론 드러내지 않지만 세영은 동렬 모(母)를 소개해주고 호창은 어렴풋이 세영의 사상과 활동을 인정하며 둘은 서로의 입장을 받아들여간다. 하지만 스토리가 거기서 머물렀다면 아직 아물지않은 상처인 광주에 대해 우리가 아직 웃을수없는 것 또한 엄연하기에 뭔가 부족했을 것이다. 최루탄 속에서 심상치 않은 광주 시내를 보면서 거리감을 유지하던 호창은 마침내 선수 스카우트에 성공해 계약하려는 순간, 세영에 대한 자신의 잘못을 그제서야 알아챈다. 그리고 다른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한 투쟁의 한가운데로 들어가고 서곤태과의 세영구출작전은 결국 성공하며 세월이 흐른 지금 그녀는 TV로 선동렬을 보며 웃고 있다. 후반부 취조실에서 경찰들이 호창을 잡아와 대질시켰을 때 ‘이쁜 아가씨가 데모 하지 마세요’ ‘아저씨나 잘하세요’라며 서로를 외면하는 장면은 상투적인 미장센임에도 80년대를 마음으로 느끼게 해주었다. 임창정의 코미디언적 기질이 진지한 주제에 부적합하다는 의견도 있지만, 호창이 후배와의 사랑을 되살리는 과정에서 용서를 구하는 씬만큼은 두드러진다. 목숨을 걸고 자신을 구한 그 앞에서 세영은 ‘하던대로 하고 살지 왜 그래요, 위험하잖아’라고하는데 여기에서 서로 다른 아비투스 속의 남녀는 화해를 하게 된다. 한 인터뷰에서 감독은 호창이 감옥에 있었으므로 몸을 부지했을 거라 했으나, 정석적으로 간 엔딩은 여지를 남겨놓았다.
엄지원은 현재 새로운 영화를 작업중이다. 앞으로 한국영화속에서 다양한 스펙트럼으로서 빛내주기를 팬의 한사람으로서 기원해본다. (hana)
* 이메일을 통해, 영화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frontier410@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