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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캐릭터 영화

필름2.0의 “한국영화사에 전무후무할 ‘비호감’ 양미숙 캐릭터”라는 설명이 따를 정도로 <미쓰 홍당무>는 캐릭터 영화라는 사실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이 영화를 이야기하는 다른 글들 또한 이야기의 논의는 양미숙이라는 캐릭터로 수렴된다. 양미숙 캐릭터로의 수렴은 대체적으로 호의적이다. 모처럼 밋밋한 한국영화계에 꽤 걸출한 캐릭터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아니 더 나아가 놀라운 반응을 보이며, 양미숙 캐릭터에 환호도 한다.

한국영화에서 여성영화라 불릴만한 영화도 적고, 안면홍조증이 전면에 내세워지는 것 등, 분명 양미숙같은 캐릭터가 주인공으로 전면에 등장한 것은 이례적인 상황임에 틀림없다. 우선은 여성이 전면에 있는 영화가 드물다. 여성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캐릭터 자체가 무난한 타협을 하는 여타의 경우에 비교한다면 주목받을 만한 경우임에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지금의 분위기 만큼 이 캐릭터에 주의를 둬야하는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비교하자면 나홍진의 <추격자>가 흥행을 이어가고 저널들의 평가도 호의적이었던 순간, 내가 직접 확인한 <추격자>의 기대와 허전함 만큼 <미쓰 홍당무>에도 대입되는 것 같다. (실제로 이 영화에는 ‘<추격자>이후에 한국영화의...’라는 비교가 따르는데, 어쨌든 그 비교는 적당한 듯싶다.)

양미숙 캐릭터에게서 허전함을 받는 점은 이 영화의 결말부이다. 그 전까지 그래도 한국영화에서는 독특하다는 캐릭터를 끌고오던 양미숙이 이상한 결말을 재촉하고, 그 순간에 나는 이 영화가 ‘아, 맞다. 이것은 양미숙이라는 비호감 캐릭터를 공효진이라는 배우가 연기한 것이지’라는 자각을 할 수 있었다.

제작비의 규모 면에서 보면 10억 정도의 저예산이라는 규모에 바탕한 <미쓰 홍당무>는 감독이 밝혔듯이 처음부터 저예산으로 기획되었기 때문에 예산의 투입에 따른 기대부응의 압력으로부터 보다 자유롭다고 했다. 이경미 감독은 또한 ‘갈 때까지 가보는’ 식으로 양미숙 캐릭터를 진행하였다고도 했다. 이런 감독들의 말이 주는 기대 수준이라는 것이 나랑은 달랐던 것인지, 양미숙이 영화의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은 분명할 것 같던 캐릭터에 애매함을 더해줬고, 감독의 의중도 의아하게 느껴졌다.

이런 내 느낌을 해결할 방법은 ‘캐릭터 영화’라는 수식어라는 것은 명확하게 제한적인 말이었다고 이해해야 하는 방법뿐이다. 양미숙이라는 캐릭터는 이 전체 매트릭스에는 어쨌든 저쨌든 결국에는 해가 되지 않는 문자 그대로의 ‘캐릭터’일 뿐이라고 여겨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자 그대로의 캐릭터로 양미숙을 한정하는 순간, 여러 저널들의 양미숙 캐릭터에 대한 호의와 환호가 부담스럽다. 한국의 저널들이 한국영화에서는 제한적인 의미의 캐릭터를 두고, 그 중에 좋은 캐릭터를 골라야 하며 그리고 평가해야하는 암묵적 합의가 형성된 것인가. 캐릭터 영화라는 <미쓰 홍당무>와 독특한 캐릭터라는 양미숙을 대하는 저널들의 반응이 한참 의아하기만 하다, 나는.

2. <인형의 집으로 오세요>

비겁한 비교일 수도 있겠지만, <미쓰 홍당무>를 보면서 연상한 영화는 토드 솔론즈의 <인형의 집으로 오세요>(1995, 미국)이다. <인형의 집으로 오세요>는 ‘작고 뚱뚱하며 도수 높은 안경의’ 돈 위너(Dawn Wiener)가 이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과 만나 세파를 겪는 내용의 영화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중1소녀 돈 위너에게 세상은 ‘안면홍조증’의 양미숙에게 제시된 세상처럼 가혹하기만 하다. 물론 두 영화는 제작한 나라도 시기도 다르며, 각각 주인공의 세대도 다르며, 장르도 다르다는 점에서 분명 차이가 있는 영화이다. 그럼에도 이 두 캐릭터가 각각의 영화에서 각개전투를 벌이는 모습은 묘한 연장선상에 있다. 아니, 개인적으로는 <미쓰 홍당무>를 보는 내내 돈 위너가 크면, 양미숙이 되어 이런 상황과 곤경에 처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상상이 가득했다.

이런 엉뚱한 ‘연장’의 상상은 차라리 양미숙이 선택한 결말에 동의를 주는 것 같다. <인형의 집으로 오세요>의 결말이 팍팍한 세상살이의 고된 눈빛을 가득 앉고 버스에 오른 돈 위너의 모습으로 영화는 끝나는데, 이것의 연장에는 그가 커서 어른이 되어 교사가 된다면 그래서 다시 버스를 타게 된다면 어딘가 있을 ‘행복’을 찾아가는 것도 나름 충분히 설득이 될 것 같았다.

바꿔 말하면, 양미숙이 택한 마지막 버스 여행은 어딘지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어학실에서의 ‘재판극’을 부단히 치루고 나선 양미숙인데, 그렇게 쉽게 여행을 갈 수 있을까 싶었다. 만약 그렇게 여행을 갈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쉬운 결정이 아니라면 보다 타당한 이전 사연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야 했다. <인형의 집으로 오세요>의 돈 위너 정도는 되는 전언 말이다.

3. 사연 : 잘돼가? 무엇이든

<인형의 집으로 오세요>가 양미숙의 이전 사연이라는 것은 나의 허망한 상상이라면 이경미 감독이 만든 <잘돼가? 무엇이든>은 엄연히 존재하는 양미숙의 이전 사연이다. 이경미 감독의 단편 <잘돼가? 무엇이든>은 무역회사에 여직원으로 일하는 지영과 희진이라는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로, 양미숙이 학교에서 숙식을 하듯 희진은 무역회사에서 숙식을 하고 지영에 대한 강한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으며 “적일 수록 가까이 두고 배워야 한다”는 문구를 책상 앞에 붙여 놓는 행동 등 양미숙이 희숙과 일정정도 연장되어 있다는 것이 명확하다.

<잘돼가? 무엇이든>, 그리고 <미쓰 홍당무>를 통해 파악되는 이경미 감독의 심상은 ‘남을 해치는 재주’는 부족하지 않나 추측된다. <잘돼가? 무엇이든>의 지영은 가슴에 칼을 품는데 다른 사람과 부딪쳐 자신이 칼에 베이는데 이것이 그냥 꿈이고, 희진은 사장이 ‘불타 죽었으면’ 해서 정말 불이 나는데 애써 죄의식을 갖는다. 양미숙 또한 사람이 이상한 행동을 할 때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논리로, 이상한 행동으로 불만을 승화시키고, 그래도 해소되지 않는 불만은 안면홍조 얼굴에 인상을 찌푸리는 것으로 대신한다. 아무도 해치지 않는다.

<미쓰 홍당무>를 <잘돼가? 무엇이든>의 연장으로 보았을 때, 좋아진 점은 익숙한 배우가 등장하고 화면이 밝아졌고 이야기도 코메디로 밝아졌다는 것이다. 반면 나빠진 점은 <잘돼가? 무엇이든>에서 지영은 분명하게 욕을 하고, 희진은 사장이 불에 타길 희망하지만 양미숙은 치과의사를 찾아 여행을 떠난다는 것이다. 이경미 감독의 아무도 해치지 않는 심성은 더욱 강화된 것인데, <잘돼가? 무엇이든>의 지영이 욕이라도 했다면 양미숙은 철저하게 캐릭터로 남길 도모한다.

4. 씨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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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미쓰 홍당무>에서 나의 온 신경이 모인 것은 양미숙의 마지막 결말부 선택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결말부 여행은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양미숙은 사실 공효진이었고, 실제 비호감이 아니라 비호감 캐릭터를 연기한 것이라는 것을 한 순간 자각하게 만들어 주는 장면이었다.

<잘돼가? 무엇이든>에도 나에게는 비슷한 느낌을 주는 장면이 있는데, 지영이 직설적으로 ‘씨발’을 남발하며 온갖 녀석들을 욕하는 장면이다. 순간, 이경미 감독에게는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영화’라는 사실을 관객이 자각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고, 무엇보다 한참 대한민국을 달궜던 유인촌의 ‘씨ㅂ'도 생각났다. 유인촌의 ‘씨ㅂ'이 아니었다면 지영의 화법이 품격없는 직설화법으로 보였을 것 같은데, 유인촌의 ‘씨ㅂ'을 겪어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품격‘있는 화법은 아닌지 싶었다.

그리고 이쯤되니 나의 마음도 복잡해 진다. 이경미 감독의 남을 해치지 못하는 심성을 고려하면 <미쓰 홍당무>의 양미숙 캐릭터의 (나에게는) 이상한 결말에 이르른 것을 과감하게 허전하다고 말하기에는 나도 마음이 걸린다. 그래서 준비한 것이 <잘돼가? 무엇이든>의 지영이 말한 ‘씨발’로 돌아가는 것이 양미숙 캐릭터의 온전한 완성이 아닌가라고 <미쓰 홍당무>를 해치지 않는다면 말하고 싶다. 국감에서 장관이 ‘씨ㅂ'도 하는데, 영화에서 양미숙이 이정도 해줘도 되는 것 아닌가. <미쓰 홍당무>의 허전함을 <잘돼가? 무엇인가>에서 채워가며, “품격”있는 욕설을 향후 이경미 감독 영화에 주문해 본다.(mamo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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