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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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기로 마음 먹은 계기는 주변에서 이어지는 예외적인 찬사 때문이었고, 이렇게 리뷰를 쓰게 된 것은 영화가 비평의 구미를 당기는 무언가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상 앞에 앉아 영화를 찬찬히 뜯어보면 볼수록 뭔가를 쓰고 싶다는 생각만 들 뿐, 할 수 있는 말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계속해서 한 가지 질문에 사로잡힐 뿐, 내릴 수 있는 해답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질문은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에 맞닿아 있었다. 적어도 스스로에게만큼은 자명한 해석을 혹은 어떤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깨진 뒤, 이 불가해한 영화 앞에서 결국 ‘나는 왜 이 영화의 리뷰를 쓰려 했는가?’라는 최초의 동기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영화 분석에서 좌초되어 돌아온 동기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진 자기분석 속에서 영화보다는 스스로에 관계된 씁쓸한 해석을 내릴 수 있었다. 비평에의 구미를 당기게 한 것은 ‘영화’라기 보다는 그 영화가 지녔다고 생각하는 영화적 자기반영성 혹은 자기성찰성이었고 덧붙이자면 그 성찰이 영화와 현실과의 관계, 그러니까 리얼리즘이라는 지고지순한 영화 미학의 논쟁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화에 대한 영화’는 개개의 영화를 넘어 영화라는 매체 자체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빠져나올 수 없는 매혹덩어리다. 그것은 마치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에 대한 열쇠를 쥐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실제로 어떤 해답-물론 만능은 아니겠지만-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를 통해서 그 해답을 쥐어보려 했던 나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 얻고 싶었던 영화 미학적 성찰의 지점은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실패야말로 영화와 비평이라는 절대 만날 수 없지만 항상 마주할 수밖에 없는 평행선의 상황이자, 비평이 언제나 회귀할 수밖에 없는 영화의 지점이 아닐까. 비평가의 질문에 ‘영화는 영화다’라고 응수하는 감독의 모습, 영화가 아니면서도 영화인 클리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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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위기는 그 속에 현실이 침투할 때 온다. 리얼하게 찍어야 하는 액션 장면에서 수타가 실제로 맞아 그의 얼굴에서 피가 흐를 때, 배우의 연기는 중단되고 카메라는 멈출 수밖에 없다. 고통을 가장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실제적인 고통은 흐르는 피와 같이 영화의 외부로 뚫고 나올 수밖에 없는 지극히 현실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적인 영화는 가능하지만 사실인 영화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영화 속에 침투한 현실로 인해 더 이상 배우를 구할 수 없는 커다란 위기에 봉착한 영화는 어쩔 수 없이 연기가 아닌 실제를 찍는 대담한 해법을 내놓는다. 한때 영화배우를 꿈꿨지만 이제는 아닌 강패의 출연 조건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역시 애초부터 실현가능성이 의심되는 어려움을 내포하고 있었다. 시나리오대로 영화가 완성되기 위해서 수타는 깡패인 강패를 실제로 이겨야만 한다. 그것도 거의 지다가 극적인 역전으로. 일견 불가능해 보이는 결말을 성사시키기 위해, 현실을 담은 영화를 완성시키기 위해서, 수타는 피나는 격투 연습에 몰입한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연기 연습이기도 하다.

하지만 해결할 문제는 이것이 다가 아니다. 장수타의 몰래 카메라 사건은 또 다른 문제를 발생시킨다. 테이프가 유출되었을 때, 예상되는 배우의, 영화의 위기 그리고 해결하기 위해 발생하는 경제적 위기 등 다각적인 난제들이 파생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는 그것이 영화를 영화가 아닌 것으로 만드는 데 있다. 수타의 동영상은 영화의 카메라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영화를 망칠 수 있는 것은 영화 밖에서 벌어지는 그의 모습이 영화 속 인물로서 그가 관객에게 줄 이미지를 변질시킨다는 데에 있다. 그렇기에 영화에서의 이미지 그리고 관객이 기대하는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보존할 수 있는 능력은 배우의 중요한 덕목이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영화와 현실의 구별 못할 정도의 가오를 지키고 철저하게 비밀스런 연애를 하는 장수타는 영화적 덕목의 훌륭하게 실천하고 있다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영화적인 삶은 반대로 현실의 영역에서는 오히려 문제로 등장한다. 비밀스런 연애는 연인과의 트러블을 낳고, 액션 배우로서 보여주는 가오는 폭력을 낳는다. 하지만 그런 수타 역시 계속해서 날아오는 주먹을 견딜 수는 없었던 것처럼, 현실의 고통 앞에서는 그 마저도 유지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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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런 현실을 어떻게 영화가 끌어안을 수 있을까? 단지 흉내만 낼 수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영화의 백미라 부를 수 있는 갯벌씬이 비교적 명확한 알레고리를 담고 있기에 쉽게 말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이 장면을 말로 풀어 쓴다면 ‘영화는 현실을 이기고 그 자신을 완성한다.’라는 비교적 명확한 결론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이 해석은 두 가지 석연찮은 점을 남긴다. 첫째는 수타와 강패의 모습이 진흙으로 완전히 지워져 있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수타의 승리로 끝날 것 같았던 영화가 강패의 살인이라는 부연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영화는 더 이상 간단히 말할 수 없는 지경으로 가버린다. 영화는 현실을 담는 것처럼 보였지만, 담은 것은 현실의 모습이 완전히 지워버린 기괴한 진흙 인간의 형상으로 시나리오대로의 영화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흉내만 냈다고도 볼 수도 없다. 또한 이어지는 강패의 살인은 영화와 현실 사이에 절대 침범할 수 없는 선을 긋는다. 영화가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하던 현실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무시무시함을 과시한 것이다. 이로 인해 끝까지 서로를 침범하지 못한 채, 영화는 단지 영화로, 현실은 현실 그 자체로 남아 버린다. 즉, 영화에 대해서 말하는 이 ‘순수한’ 영화는 영화가 그 외의 다른 것들을 통해서 설명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여타의 순수한 모더니즘 예술들처럼 자기반영성을 통해 스스로의 미학적 형식과 존재 양식에 대해 탐구하지도 않는다. 다만 <영화는 영화다>라는 모토에 충실한 채, 영화가 파헤쳐지는 것 자체를 거부한다.

<영화는 영화다>라는 단순명료한 제목은 이러한 분석의 실패를 이미 예견하는 제목으로 들린다. 영화는 영화고, 현실은 현실이라는 언제나 참일 수밖에 없는 자기순환적인 명제로 말이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다.’라는 명제는 그것이 지니는 자기순환적인 논리로 인해 설명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면이 있다. 이를 받아들이기 위해 필요한 것은 털보 감독의 말처럼 단지 믿음뿐이다. 영화에 대한 의문과 의심들로 가득 찬 상황에서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맹목적인 믿음이 그다지 낯선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영화에 대해 생각하기 전, 영화를 영화로 즐기던 바로 그 순간에 믿음이 존재했다. 액션 장면의 촬영에서 감독이 그들이 재현하려던 일차적인 환영적인 리얼리티가 성립할 수 있는 것도, 주인공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도 이러한 믿음에 기초한다. 그러나 이 믿음 역시, 영화가 현실이 아닌 것처럼, 현실 속에서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기에 “영화는 영화다.”라는 제목은 더 이상 참과 거짓을 판별할 수 있는 명제가 아니다. 그것은 영화라는 종교에 대한 설파이다. 현실이라는 거센 저항을 딛고 영화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다. 강패가 영화배우가 될 수 없었던 것은 그가 종교를 믿지 않아서이다. 그는 불상을 깨버리지 말았어야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