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서린 옛 정취가 묻은 파주역, 기차에서 내린 중식(이선균)은 찌푸린 얼굴로 먼발치를 바라본다. 그리고 또 다른 주인공 은모(서우)는 택시를 타고 깊은 밤, 촌스러운 네온사인 불빛을 가진 어딘가에 들어선다. 이 두 이미지는 ‘파주’라는 공간(지역성)을 확인시켜준다. 도시가 삭제되어 있는 공간 파주. 영화 <파주>는 왜 안개를 빌어 변방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일까. 이 영화는 도피처와 안개라는 설정 때문에 김수용의 <안개>를 떠올리게 하고, 개발과 귀향의 의미에서 이창동의 <초록 물고기>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시대적 의미로도 해석할 수 없는 이상한 기운만이 남겨진 영화이다. 영화 속의 파주라는 공간은 무진과 같은 도피와 이상의 공간으로서도, 개발과 귀향의 의미로서도 명확한 설명 없이 모호하게 설정되어 있다. 많은 의문을 던지게 하지만 결코 명확한 답은 얻을 수 없는 영화다.

파주는 중식에게 도피처였지만, 새로운 가정을 꾸리는 보금자리가 된다.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의식적으로 주인공들은 자신이 사는, 돌아오는, 떠나는 공간인 ‘파주’를 말한 적이 없다. 도로 표지판, 기차역, 우체국 등으로 알 수 있는 그 곳은 이상하게도 펄럭이는 깃발처럼 영화 내내 지시만 될 뿐이다. 그래서 개발을 기다리는 버려진 농촌 같은 푸석하고 어두운 그곳은 과연 등장인물에게 어떤 의미의 장소일지 자못 궁금하게 한다. 수배 중이던 중식이 유부녀가 된 첫사랑에게 저지른 끔찍한 잘못(혹은 실수)은 그를 파주로 들어서게 하지만 중식은 결코 작금의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는다.

두만(이대연)을 만났을 때 중식은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지 않고, 두만이 귀농하겠다는 말을 듣는다. 그리고 중식은 은수(심이영)를 발견한다. 중식이 은수를 만나는 순간부터 중식에게 파주는 더 이상 도피처가 아니라 보금자리의 의미로 바뀐다. 공부방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지만 그것은 하나의 설정으로 남고, 중식의 흐름으로 전개되던 영화는 은수와 은모의 입장에서 중식을 보여준다. 은수는 중식에게 점점 호감을 가지게 되는데, 그녀는 중식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 것일까?

파주, 안개로 뒤덮인 마을

영화는 중식이 은모와 은수를 알게 된 시점부터 파주를 안개로 설명하지 않는다. 안개는 중식이 파주에 도착했을 때, 그리고 은모가 파주에 돌아왔을 때에만 이미지화된다. 그리고 영화에서 파주는 지역 명을 주지시키는 몇몇 표지판 외에, 철거해야 하는 건물과 집안 내부, 네온사인 켜진 나이트클럽, 논밭의 정경, 휑하니 비어있는 국도를 보여줌으로써 파주의 모습을 그려나간다. 중식은 이방인이지만 너무 쉽게 파주에서 안식을 하고, 은수와 은모는 이방인인 중식을 너무 쉽게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중식은 파주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떠나지 않는다. 물론 그가 수배중인 것을 감안했다 치더라도, 그가 왜 거기서 또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고 ‘정착’하게 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파주의 의미를 되새기기란 허탈할 수밖에 없다. 중식의 아내가 된 은수는 그곳에서 가스폭발로 증발되어 버리고, 그녀의 동생 은모는 중식을 사랑한 나머지 언니의 죽음에 기여한 가해자가 되어버린다.

파주는 첫사랑의 아들에게 치명적 상처를 입힌 중식이 도망치듯 떠나와 버린 도피처였지만, 그곳에서 은수와 결혼한 그는 안식처를 얻자마자 그녀를 잃는다. 중식은 죄책감을 짊어진 것처럼 파주에서 떠나지 않는다. 은모에게 파주는 부모님을 잃고 언니마저 잃어버린 끔찍한 공간이지만, 여행을 떠났다가 다시 귀향할 수밖에 없는 곳이다. 어쨌든 중식과 은모에게 끔찍한 기억을 만드는 파주는, 도피와 정착의 의미를 공존하게 한다. 그런데 그것이 왜 ‘안개’로 수렴될 수 있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중식이 철거민 대책위원장까지 맡아가면서 파주의 저개발을 붙잡으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은모는 결국 그에게 묻는다. “이런 일 왜 하세요?”라고. 중식은 대답한다. “모르겠어. 그냥…”

파주, 모호한 군상들의 서식처

<파주>는 공간을 ‘위치 짓기’ 보다는 안개를 드리운 채 이미지를 부각시킨다. ‘파주=안개’라는 등식이 성립되어야만 하는 것처럼 실제 파주의 지역성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은수와 은모의 캐릭터가 좀처럼 설명되지 않고, 이들에게 중식을 향한 사랑만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래서일까. 적어도 중식은 운동권 출신이자, 신학공부를 했던 정체성이 부여되어 있다. 은수는 그렇다 치고 은모는 자신의 정체를 스스로 만들지 않는다. 중학생이었던 그녀가 중식을 알게 되는 순간, 그녀는 공부방 학생이자 은수(보호자)의 동생일 뿐이다. 이미 중식 옆에는 은수가 버티고 있고, 은모는 언니에게 해야 할 말을 중식에게 바꿔 말한다. “우리 언니 건드리지 마” 라고. 은모는 단지 그런 말만을 할 수 있는 아이다. 그녀가 간접적이든 은수의 죽음을 방기하고 떠났다가(물론 은모는 몰랐지만) 3년 후 다시 돌아왔을 때, 철거대책위원장이 된 중식과 그녀는 이질적인 한 쌍처럼 보이지 않는다. 어느 순간 은모는 중식과 함께 철거농성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중식과 자신의 관계에 몰입한다. 언니가 남겨놓은 생명보험금 때문에 비로소 언니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파헤치지만 은모는 그에 대한 죄책감이 정말 있는 것인지 파악하기 힘들다. 그녀가 파주에 돌아와 ‘하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런 점에서 안개는 은모와 등식을 이룬다. 파주의 안개는 은모다. 결국 파주는 안개이자, 은모가 된다. 그러나 영화는 ‘안개=은모’의 등식을 곧이곧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은모가 파주에 돌아왔을 때 맞닥뜨리는 것은 언니의 죽음과 그녀가 남긴 생명보험금과, 부모님이 남긴 집, 대학입학 그리고 중식이다. 그녀는 그것들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하며 선택을 해야 한다. 왜 영화는 은모에게 할 일을 부여하지 않고 선택만을 남겨놓은 것일까?

그렇다고 중식은 은모를 선택하지 못한다. 그가 “널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어” 라고 은모에게 말했을 때 은모는 “그게 나에게 할 수 있는 모든 말이냐”고 울며 매달린다. 중식은 두 번의 상처를 경험한 남자다. 다시 말해 트라우마를 지닌 남자다. 그런데 은모에 대한 연민을 갑작스럽게 고백한 후 그는 진심에서인지 알 수 없게 그녀에게 키스를 한다. 이 형국이 과연 중식과 은모의 사랑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일까. 의아하기만 하다. 희뿌연 안개가 의미하는 모호함처럼 중식과 은모의 불투명한 관계는 영화에서 설정한 파주의 이미지와 상응하지만, 결코 그들이 흩뿌려 놓은 사건들과 관계는 결론 내려지지 못한다.

파주, 현재와 단절된 땅

이 영화는 지금의 시대 현실과 맞물려 말할 수 있는 가치가 사실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물론 철거민 문제라든가, 재개발 문제 등을 던져놓고는 있지만 결국 그것을 ‘문제시’하지 않고, 내러티브와 캐릭터 그리고 현실과의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지 않은 채 끝맺어 버리기 때문에 이도저도 아닌 영화가 되어 버렸다. 묻고 싶다. <파주>는 한국영화로서 현재와의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인가?

<파주>는 1967년의 <안개> 와 1997년의 <초록물고기> 2006년의 <밀양> 등을 경유함으로써 한국영화에서 다뤄왔던 현대사회의 개인과 지역, 개발의 문제를 수직선에 두고 논해볼 중요한 가치가 있을 뻔했다. <파주>는 안개, 도피, 안식, 회귀, 죽음, 사랑, 지역성, 운동권, 저개발과 개발, 그리고 재개발의 문제를 나열해 놓고 어느 것도 제대로 파헤치거나 말하지 못한 채 끝맺는다. 과연 <파주>의 개인(특히 중식)은 어디서 온 인물일까?

점점 한국영화 속 공간은 <파주>와 같이 지역성을 지워버리려는 경향이 보인다. 한국사회는 도시 서울과 그렇지 않은 곳은 아직도 도시사회와 변두리(혹은 지방)로 이분화 되어 있다. <오! 수정>, <극장전>과 <멋진 하루>, <비스티 보이즈> 등 도시 서울에 대한 집착적 이미지들은 한국사회의 변두리는 삭제되어 있다. 반면에 변두리의 집착적 이미지도 있다. 지방만을 부각시켜버린 조폭영화는 지방도시를 영화적 공간으로 혹은 장르 화된 공간으로 한때 자리매김해 놓은 바 있다. 그러나 <행복> <마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박쥐> 등과 같은 영화에서 그려지는 한국의 지역은 실제 공간임을 부인한 채 가공의 공간처럼 설정된다. 한국이긴 한국인데 어딘지 도통 알 수 없고, 그럼으로써 캐릭터들은 더욱 방만하게 혹은 자유롭게 내러티브 속에서 움직이는 것 같다.

그런데 <파주>는 분명 가공의 시간을 설정한 것도 아니며, 가공의 공간으로 설정된 영화도 아니다. 제목으로 알 수 있듯, ‘파주’라는 지역에서 벌어진 이야기다. 만약 제목 파주가 지역 명을 지시하는 파주가 아니라면 모르겠지만(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영화는 현재에서 7년 전 그리고 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다시 현재로 되돌아오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영화는 적어도 주인공들의 개인적인 시간과 공간의 히스토리를 전제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어쨌든 <파주>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전면화 시킨 파주라는 공간과 재개발의 모티브를 좀 더 현실적인 문제로 끌어당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철거 농성 장면을 보면 나름 시위의 격렬함을 스펙터클하게 찍으려는 노력이 배어있다. 그런데 깡패와 철거민 사이의 긴장관계 역시 깊은 갈등으로 치닫지 않는다. 이 부분은 중요하다. 제목 ‘파주’가 왜 설정되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중식과 은모의 관계 역시 죽은 은수가 남긴 유산 때문에, 혹은 형부와 처제라는 그어진 금기 때문에 감정만으로 남고 만다. <파주>는 드라마를 가장한 멜로영화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중식을 둘러싼 세 여자의 이야기. 그러나 은모와 중식이 프롤로그에 차례로 등장하면서 둘 간의 이야기가 <파주>의 중심이 될 것을 예견할 수 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 은모는 오토바이를 타고 어디론가 가는 도중 나이트클럽 사장(이경영)이 타고 가는 차를 보고 그와 시선을 교환한다. 영화는 중식의 이야기가 전개될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은모의 이야기로 도달한 채 끝맺어진다. 결국 <파주>가 정말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었을까? 식상하지만 가장 중요한 질문이 아닐까라고 되뇌고 싶다. by 김다현(vovovdh)

김다현 [스크린] 2009. 12월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