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그림) 헌즈.jpg (글.그림) 헌즈

 

대의도 명분도 없는 도사 전우치. 그의 신출귀몰 도사질이 홍길동과 다른 지점일 것이다. 그에게 생의 목적은 ‘풍류질’이다. 도사질은 풍류질의 수단일 뿐. 그런데 어째서 그는 화담과 맞서는 것일까?

그가 조선의 왕을 기망하여 백성들의 기근을 해결한 것은 백성들을 긍휼히 여겨서가 아니라 실력 있는 도사로 이름을 얻기 위해서다. 그러나 도사로 이름을 얻는 것마저 전우치에게 갈급한 목적이 아니라 순수한 치기나 놀이에 불과할 뿐이다.

반면 화담은 ‘진실로’ 백성들의 아픔을 가엾이 여기고 이를 치유하는 덕망 있는 도사였다. 그런데 어째서 만파식적을 보자 돌변했던 것일까?  만파식적은 절대 권력이자 절대 유혹이다. 일종의 ‘절대 반지’인 셈이다. 화담은 그 절대 권력의 절대 유혹에 흔들리며 돌변한다. 실은 화담에게 도사로서 이름과 덕망을 얻는 것이란 절대 권력을 가지고자 했던 욕망의 일부였던 것.

세상살이가 그저 부적 놀음에 불과한 전우치에게 화담이 적으로 부상한 것은 그가 화류적으로다(미학적으로) 매우 짜증나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권력욕에 ‘자뻑’하여 반성도 성찰도 없는 사람은 세상에 위해가 될 뿐만 아니라 미학적으로도 역겹기 그지없다.

간절히 갈망하는 자가 결코 그저 즐기는 자를 이길 수는 없다. 물론 갈망 없이 그저 즐기며 살기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 전우치가 그처럼 멋스럽고 유쾌하게 느껴졌던 것은 그의 재기나 유유함이 우리가 바라는 판타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영화 <전우치>에서 현실을 본다. 화담의 모습에서는 과거 빈민운동과 노동운동으로 신망을 받았지만 지금은 철저히 변신한 유명 정치인들의 모습이 보이고(그중 한 정치인이 TV에서 젊은 시절 노동운동을 하며 땄던 각종 자격증을 자랑삼아 내보일 때는 먹은 것을 다 게워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전우치의 모습에서는 글쓰기라는 적극적 실천을 밑천 삼아 자기미학을 유유히 구축해 가는 한 진보 논객의 모습이 보인다(그의 존재 미학 구축이 올 한 해에도 부디 건실하길).

500년 만에 세상에 나온 전우치가 ‘그럼 왕 대신 누가 백성들을 먹여 살리느냐?’며 신부에게 묻는다. 신부가 ‘기업인이라는 장사치가 먹여 살린다’라고 답하자 전우치는 ‘무릇 장사치란 자기 잇속이나 챙기는 법이다’라고 일갈한다. 별 수 없이 며칠 전 당당히 법치를 무시하고 사면받은 모그룹 왕회장님이 떠오를 따름이다. 선진화 원년에 참으로 후진 장면이 아닐 수 없다. 헛헛함에 한 번 혀를 차주는 것만으로는 참으로 부족한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