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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민한 관찰이란 어떠한 현상을 단순히 보는 데에 있지 않다. 훌륭한 관찰은 현상이 얽혀진 설계도를 보게 되고야 마는 것이다. 홍상수의 영화들은 무책임하게 뒤섞어 놓은 현상들이 아니며, 매우 단단한 설계도를 제공한다. 그리고 그 설계도는 자주 스스로의 의식을 통제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의심하고 경계하며, 이를 자신하는 사람들이 양산하는 오류를 희극화 하여 드러내고는 한다.
이런 홍상수 감독의 여섯 번째 영화 <극장전>에 대해 평론간 정성일은 매우 꼼꼼한 분석을 하고 있는데, '홍상수는 죽음 대신 존재를 선택한다. 그래서 죽지 않기 위해서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고 결심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허문영은 극중 동수의 결심이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하루 동안의 행적을 보셨습니다. 혹은 제 결심을 귀담아 듣지 마세요.'처럼 들린다고 말하고 있다. <극장전>은 지속의 실패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것은 곧 역사적 시간으로 편입되는 것에 실패한 것인데, 생성과 축적을 가능케 하는 시간이 없으므로 성장은 불가능하고 역사적 시간은 그의 영화 밖에 있는 것이라는 거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극장전>은 감독의 영화 필모그래피에서 어떤 도약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허문영의 말을 빌리자면 이 영화는 감독의 축적과 생성을 보여주며, 이는 감독의 역사적인 시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극장전>은 전작들이 보여주는 반복처럼 평행적인 구도를 갖지 않는다. <극장전>은 영화와 현실이라는 깊이를 가진 반복을 행한다. 그 전 영화들의 시간은 계속적으로 가는, 하나의 직선적인 시간 속에 속한 반복이었지만, <극장전>에서 시간은 들어가고 나가는 시간이다. 극장에 들어갔던 시간과 극장 밖에서의 시간이 닮은 모습은 애초에 지속의 시간 속에 존재하는 반복이라기보다는, 서로 이질적인 시간이 어떻게 관계를 맺거나 혹은 관계를 맺는다는 기대를 저버리는지를 보여주는 반복인 것이다.

영화 속의 인물들은 여전히 제 자신을 인지하지 못하고 단지 시시각각 드는 감정에 따라 자기를 포장하려들고, 동수는 영화를 보고 난 후 영화에서와 닮은 궤적을 밟는다. 마치 상원이 된 것처럼 놀랍게도 영화 속 영화의 영실을 안경집에서 발견하고 그녀를 졸졸 따라다니며 그녀에 몰두한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 말보로 레드 담배를 사는 장면은 영화 속 영화와 그 밖에 있는 현실의 반복을 보여주는 단면적인 예이다. 그리고 이러한 반복은 서로 직접적인 영향 관계에 있다는 것을 노출하지는 않지만 그 하루 동안의 주제라고 할 만큼 계속된다.

그런데 <극장전>에서 반절 이상을 차지하는 영화 속 영화의 중요성은 그 안에 포함된 내용보다는 반복 자체, 즉 영화 속 영화 이야기가 있고 같은 이야기가 한 번 더 동수에 의해 반복된다는 것과, 그것이 스크린이라고 하는 거리를 통해 경계지어 있다는 형식에서 나온다.
인물들은 여전히도 자신의 의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애매한 채로 무언가를 흉내낸다. 진실한 사랑이라거나 절망이라거나 하는 것들을 말이다. 우리가 목격하는 동수의 하루는 영화를 보고 극장 밖으로 나오는 때부터 시작한다. 스크린 안에서 밖으로 나온 동수, 그리고 상원에서 동수로 이어지는 반복은, 지속되는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한 사람의 순차적인 시간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미 단절되어 있는 서로 다른 시간의 접점이다. 애초에 동수의 하루는 영화를 보고 난 후의 영향 아래서 그 전의 시간과 단절되어 새롭게 형성된 시간인 것이다.
여기서 들고 나감의 시간이라는 것이 생겨난다. 홍상수의 그 전 영화들에서 반복은 이러한 겹침이 형성되지 않는 평행적이거나 하나의 직선을 그리는 시간 속에 있었다. 이때 지속되는 시간 속에서는 질적인 도약을 볼 수 없다. 그 지속의 시간이야말로 서로가 흉내 내고 반복하는 시간일 뿐인 것이다.

그런데 <극장전>은 그 반복을 경계 짓고 잘라서 서로 다른 차원 속에 집어넣어 버렸다. 그 서로 다른 차원은 들어가고 나가는 시간이라는 구도를 갖는다. 지속의 시간이 아니라 들고 나가는 시간에는 문이 있다. 물론 이 영화가 이 문을 통해 해결점을 보인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속 영화가 내용상으로 우리에게 정보가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주된 것은 그 이전과 다른 식으로 반복되는 시간 그 차제인 것이다.

이러한 시간의 들고 나감은 그 전보다 더 발전적인 설계도인데, 그것이 이 전 감독의 영화들에서보다 더 다채로운 반응의 결을 포함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홍상수의 영화에서 서로가 결국 흉내 내고 있다는 사실보다도 흉내를 내는 시간의 들어가고 나가는 결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즉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간의 결을 보는 것이다. 홍상수의 영화들은 어떤 현상들이 관찰되는 판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답답하고 그 자체로 닫혀있는 단 하나의 시간이었다. 그런데 <극장전>은 시간이 여러 개 존재함을 발견한다.

그것을 알고 있는 영실은 자신의 의지로 하나의 시간을 종료시키고 동수를 꾸짖는다. 이러한 인물은 시간의 배치와 함께 홍상수 영화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는 매우 획기적인 것이다. 스스로 "동수씨는 영화를 잘못봤다."거나 "이제 그만 뚝!"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은 말이다. 물론 동수는 여전히 헤매고 있다. 그렇지만 동수는 영실에게 혼나 본다. 또 동수는 마지막에 죽음 앞에서 눈물을 보이면서 하루 간 지속되었던 시간, 즉 영화 속 영화를 보고나서부터 시작되었던 그 시간을 끝내 보기도 한다. 동수는 갑자기 생각을 하려하고, 담배를 끊으려고 결심하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한 시간의 죽음이 주는 영향 속에서 또 다른 시간을 형성하려 하는데, 이것이 감동적이거나 거창할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홍상수 영화의 남자들은 드디어 자신을 제어하는 것들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앞서 소개한 것처럼 허문영은 영화가 지속에 실패하고 있기에 아무 것도 말하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오히려 <극장전>이라는 작품은 감독의 영화에 새로운 전환점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슬슬 홍상수가 보여주는 우리네의 적나라한 모습에 허허실실 익숙해갈 무렵에 감독의 인물들은 무언가와 새롭게 부딪히고 바둥대며 우리에게 또 다른 차원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극장전>에서 감독은 시간을 이전과 다르게 배치한다. 그 시간은 단순히 평행적인 것이 아니라 깊이를 가지고 있는, 서로 다른 차원을 갖는 시간이다. 하나의 숏 안에서 카메라와의 거리차를 보여주는 줌이나, 화면과 동떨어져 거리져 있는 나래이션이라는 사운드를 노출한 것도 이러한 새로운 시간의 사용과 딱 맞아떨어지는 시도로 보인다. <극장전>은 이렇게 단 하나의 시간이 아닌 우리네 시간의 깊이, 차원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의 영화에서 새로운 것이며, 그것이 또한 하나의 지속을 포기하고 단절하여 가능한 새로운 배치, 새로운 시간이다. 계속 이어지는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또한 죽음과도 같은 것이다. 반대로 단절의 계기들은 오히려 삶의 순간들이다. 그것은 새로운 살을 돋게 하는 반복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감독이 자신의 작품 속에서 삶을 밀고 나가려는, 즉 계속 살아보려는 버둥거림으로 보이며 그렇기에 우리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또 다시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by gipsym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