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화에서 일상은 일상인데, 여행을 보통 다루고 있잖아. 서울을 보여주더라도 하루간의 여행을 보여주고. 사람들이 직장과 집과 취미활동단체를 오고가는 이야기는 거의 없다. 그렇게 고정적으로 반복하는 곳에 들어가서 뭘 보여주는 걸 내가 싫어하거나 혹은 아직은 보여주기 싫다. 난 주로 여행을 떠나서 부딪히는 관계, 특별히 너무 이상한 사건은 아니지만 모르는 사람과 만나거나 스쳐지나갈 때 생기는 관계를 그린다. 난 그런 상황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직장과 집을 오가는 일상을 그리려면, 그들이 원래 갖고 있는 역사를 표현해야 한다. 거기서 피로를 느낄 것 같다. 반복을 통해 시간 경과를 보여준달지,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하고 응축되어왔는가 하는 설명이 들어가야 하는데, 설명은 심리적이고 논리적인 무언가가 될 위험이 있다. 너무 계획을 많이 해야 한다. 배우들이 나와 작업하는 게 힘들다고 하면서도 결국 좋아하는 건, 거의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고 오거든. 태도만 유지하는 거다. 그런데 그 사람한테 “야, 너는 2년 반 전엔 그랬어” 하다가 그 다음엔 “이번엔 1년 전이야”, “이건 오늘이야” 이렇게 요구할 수가 없다. 난 배우가 풀어져 있는 상태에서 뭔가 이상한 부분을 잡아내는 걸 좋아하는데, 그렇게 계획이 들어가면 불가능해진다. 모르는 사람과 탁, 부딪히며 튕겨 일어나는 스파크 정도만 갖고 일상적인 관계를 꾸미고 싶다.”
(김용언, 『씨네 21』 702호 스페셜 [홍상수]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다른 게 보인다(홍상수 감독 인터뷰),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1001&article_id=56237)

클레어 드니(이번 특집에 실린 번역문 참조)는 홍상수의 영화들을 ‘남성적’이라고 하였다. 자세한 설명 없이 던진 이 단어에 대한 근거가 홍상수 본인의 인터뷰 내용에서 드러난다.
홍상수는 지속적으로 만나는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기 싫다고 말하면서 그 까닭이 관계의 변화 과정에 대한 설명이 심리적이고 논리적이 될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한 너무 많은 계획이 필요해서라고 한다. 그의 이러한 발언은 섀런 톰슨이 만난 십대 소년들을 떠올리게 한다.
1980년대 후반 섀런 톰슨이 미국 십대들을 중심으로 면접조사를 통해 섹스를 논하는 방식에 있어서 소년, 소녀들의 차이점을 발견하였다. 소년들은 섹스에 대해 서사 형식으로, 즉 마음속에 그려본 미래와 연관시켜 이야기하지 못하고 다양한 성적 정복 같은 산발적인 성적 에피소드만 주로 말했다. 반면 소녀들은 약간만 장단을 맞춰주면, ‘만남과, 고뇌와, 의기양양한 친밀한 관계들이 담뿍 담긴’ 기나긴 이야기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고 한다(앤소니 기든스, 배은정, 황정미 옮김,『현대 사회의 성 ? 사랑 ? 에로티시즘』, 새물결, 1996, 91쪽).
여행에서 스쳐지나가는 관계들을 보여주는 것을 선호하는 것은 산발적인 성적 에피소드만 주로 말하는 소년들과 유사하지 않은가! 물론 큰 차이는, 소년들의 과장과 우월감이 사라진 자리에는 그들이 가질 수 없는 시선이 들어선다는 점이다. 만남과 고뇌가 있는 이야기로 감동을 주지는 않지만, 홍상수는 ‘남성적’ 방식으로 냉소와 유머를 선사한다. 우리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 일어나는 일들을 팔짱 낀 채로 거리를 두고 바라볼 줄도 알아야하는 것이다. 그래야 친밀함에 대해 재고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느끼는 친밀함의 정체는 <생활의 발견>에서처럼 의미를 만들지 못하는 ‘반복’에서 오는 것은 아닌가하고 말이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말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열심히(?) 반복하면 새로운 경지가 열린다고!
클레어 드니의 표현에 따르면 홍상수의 여자들은, 우주에서 부유하고 있는 남자들의 방문에 응해 정거장에 있는 자신들의 공간을 열어준다. 여자들 역시 홍상수의 세계에 초대 받으면 손발이 오그라드는 면면들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 이렇듯 홍상수가 여자 캐릭터를 특화시키거나 신비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남자와는 다른 점을 그리고 있다. 그것이 여자가 남자의 미래가 될 수 있는 근거인지는 잘은 모르겠다. <생활의 발견>에서 하룻밤 사이에 사랑한다고 경수(김상경)에게 들이대는 명숙(예지원)과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 자신의 과거를 간략하지만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후 구경남(김태우)을 꼬시는 고순(고현정)이 있다. 고순과 더불어, <생활의 발견>에서 짧게 내비쳤지만 명숙 역시 과거의 연애사에 대한 심리적이고 논리적인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상대방에 대한 통찰까지는 제쳐두고서라도, 이 두 캐릭터는 관계에서 자신의 심리 상태, 행동의 이유를 알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알고 있다고 홍상수의 세계로부터 초연한 존재가 될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녀들은 남자 주인공들과는 다른 태도를 보인다. 다시 한 번 섀런 톰슨이 발견한 소녀들과 소년들의 차이점이 홍상수 영화에도 적용되는 듯하다. 홍상수는 어떤 심리적이고 논리적으로 구성된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위험하다고 했다. 논리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때 그 이야기는 위험할 수도 있지만, 관계 속에서 영향을 주고받는 자신의 모습을 살필 수도 있다. 형식상에서 장르영화의 내러티브에 대한 반발 이외에 감독의 어떤 심리 기제가 그것을 싫어하게(회피하게?) 하는 지 살짝 궁금해진다.
개인적으로 할리우드식의 로맨스도 거부하지만 홍상수가 보여주는 일시적인 관계의 반복도 원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이 두 형식과는 갈라지는, 남녀 사이에서 다른 무언가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 (dela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