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다음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영문본으로 출판한 한국의 영화감독 총서 가운데, 허문영이 편저한 Korean Film Drecters HONG SANG SOO에서 프랑스 영화감독 클레어 드니가 홍상수영화의 프랑스판 DVD에 코멘터리한 음성 해설을 녹취, 편집해 올린 것을 번역한 글이다. 클레어 드니는 <네네트와 보니>(1996) <아름다운 직업>(1999) <트러블 에브리데이>(2001) <텐 미니츠 첼로>의 "낭시를 향해" 등의 영화를 감독 한 바 있다. 드니는 홍상수의 열렬한 팬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글에서 그녀는 감독으로서 바라보는 홍상수영화의 매력을 독특한 시선으로 표현해내고 있다.
※이어지는 텍스트는 <생활의 발견>과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프랑스판 DVD서플먼트에 프랑스 영화감독 클레어 드니(Claire Denis)가 두 영화에 관해 해설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텍스트는 클레어 드니의 동의하에 적정 수준에서 교정되었다. 드니의 해설은 홍상수 영화의 정서적 효과를 풍부하게 묘사할 뿐만 아니라 미학적 원리를 분석하였으며, 특히 홍상수 영화 속 여성의 역할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나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를 보면서 돌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강렬하고 자극적이었지만, “외국” 영화 였다. 이 영화는 내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했다. 나는 <생활의 발견>에서도 이 같은 느낌을 받았었다. <생활의 발견>은 실제 충격 속에 나를 밀어 넣었고, 완전히 나를 흔들어댔다. 마치 “회전 문” 안에 뒤흔들린 것처럼 정말 무서운 경험이었다.
홍상수 영화에서 그려진 폭력은 분명하고 직설적이다. 그의 영화에서 폭력은 멋있게 포장되지 않을 뿐 아니라, 매혹적이거나 장식적으로 포장되지도 않는다. 어떤 영화들은 폭력을 예쁜 포장지처럼 사용한다. 그런데 홍상수 영화에서 폭력은 유머나 조명의 그림자 등과 같은 요소들과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 한 숏 안에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그의 영화 속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든 것은 같은 방법론으로 연출된다. 나는 그것이 홍상수가 폭력을 창조해내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홍상수 영화에서 모든 것은 명백하게 표출된다. 달리 말하면 홍상수는 결코 어떤 것도 잊지 않는다는 말이다. 모든 것이 제시되기 때문에 모든 것은 즉시 지각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영화를 다시 봐야 한다. 하지만 그의 영화는 그렇게 섬세하지는 않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신은 그의 영화가 이해하기 힘들다고 쉽게 결론내리는 것이다. 물론, 홍상수 영화는 대단한 의미나 공감을 주지는 않는다.
그의 영화에서 내가 보는 것은 “유폐(confinement)”이다. 나는 홍상수(영화)의 언어들을 감금된 영화라고 부르고 싶다. 인물들은 하나의 프레임 속에 갇힌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가 하나의 숏을 포함할 때 그것은 내게 큰 영감을 주었다. 문호가 그의 아파트로 선화를 데리고 간다. 카메라는 아파트 빌딩에서부터 복도를 걸어오는 두 인물을 파노라마기법으로 찍는다. 홍상수 영화에서 공간을 보여주기 위해 파노라마를 쓰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파노라마 숏을 잊을 수는 없다. 그러한 숏은 과시적이라 중요한 어떤 것도 보여주지 않으려 한다. 홍상수는 일종의 감옥처럼 공간을 노출시킨다. 도시는 캐릭터가 갇힌 장소이다. 택시, 창이 있는 카페, 식당, 호텔룸, 기차 안에서도 탈출을 위한 공간은 제공되지 않는다. 이러한 구조는 그들이 삶에 감금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 모든 요소들, 감옥, 유머, 섹스, 윤리 등은 영화에 흥미와 특별함을 부여하기 위해 모두 파헤쳐졌다가 모인다. 홍상수는 우리들에 관한 많은 것들을 폭로 한다. 이런 점에서 영화는 매우 매력적이며, 이국적이지 않다는 사실로 인해 더욱 그렇다. 홍상수는 결코 아시아 영화감독으로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지 않는다. 감독은 그것이 마치 거짓 타이틀인양 단호히 밀어내고 있다. 홍상수의 영화는 뒤에 남아 성숙한 도덕 체계로 들어가지 않길 원하는 학생같이 보인다. 동시에 그의 영화는 인간의 운명에 대한 매우 성숙한 시선을 보여준다. 이런 양상 때문에, 홍상수 영화들은 두 박자 영화 혹은 가끔은 세 박자 왈츠와 같다.
홍상수 영화는 때때로 두 남자를 필요로 한다. <생활의 발견>에서 ‘반감을 부르는 기억’이 있다. 한 남자는 그의 압박을 덜어줄 수 있는 또 다른 인물을 필요로 하고 이 두 번째 인물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 모욕당한다. 이 인물은 더 큰 위안을 얻기 위해 타협하려 하지만 결국은 모든 걸 잃어버리는데, 그 이유는 그의 전복적 행위가 여자를 떠나도록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기 때문이다.
<생활의 발견>은 두 남자와 한 여자로 시작한다. 세 인물들은 서로를 필요로 하지만, 주인공은 갑자기 떠나버린다. 그때 두 번째 여자가 등장한다. 이 두 번째 여자는 마지막에 아주 재밌는 방식으로 주인공은 떠난다. 점집 앞에서 그것은 매우 코믹하게 그려진다. 홍상수의 모든 영화들은 작은 실수를 보여주곤 한다. 두 번째 여자는 주인공에 의해 차이고, 그는 심지어 그녀의 사진을 버리기까지 한다.
명숙이 두 남자 앞에서 춤을 추는 장면은 내게 충격이었다. 그 장면은 거의 고통 속에 놓여 있는 것처럼 느끼게 했다. 이런 이유로, 그의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용기를 낼 필요가 있다. 난 내 자신과 명숙을 동일시할 수는 없었다. 난 그 장면에 등장한 모든 캐릭터에 동일시하였고, 특히 그 상황에 대해 그러했다. 무엇보다도 그런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들에게 공감한다.
이는 나의 상상을 넘어선 것이었다. 그 장면은 매우 아름답고 용감하다. 그 장면은 이상한 관점으로, 거의 연극적인 방식으로 찍혔다. 젊은 여자는 관객 쪽으로 그녀의 등을 보이고, 두 사람은 그녀와 마주보고 앉아 있다. 두 남자는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만, 관객은 그녀의 일부만을 보게 된다. 이는 그 장면이 그녀에 대한 것임을 보여준다. 이 장면이 만들어내는 것을 꽤 특별하다. 이 장면은 조금이라도 그녀와 관련된 것이고 남자 주인공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그는 이 시점에선 어떤 식으로라도 그녀와 연관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혼란스러운 시기에 의미없이 시시덕거리기를 원할 뿐이다. 그의 경력은 그가 속했던 상황 때문에 망쳤고, 그는 상관하고 싶지 않아 한다. 그는 누군가에게 복수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는 누군가로 인해 모욕을 당했고, 누군가를 모욕하길 원한다. 그는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기 위해 그것을 원하는 것이다.
홍상수 영화에서 여성들은 각기 다른 역할을 한다. 먼저, 그녀들은 희생자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성들은 영화에서 시간의 축이다. 여성들은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 이는 또한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실제로 그렇다. 한 여자는 배신당하고 급기야는 또 다른 여자 때문에 잊혀지거나 더 매력적인 여자로 인해 교체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여자는 때맞춰 통일성을 만들어낸다. 여성들은 메트로놈처럼 영화의 시간을 조절한다.
홍상수는 그의 학생들과 관객들에게 자신의 영화의 원리에 관해 이야기한다. 나는 그가 언급한 파편들의 법칙을 주의 깊게 듣는다. 그리고 그가 말한 것을 이해한다. 시간의 토대와 파편들은 그가 말한 내용에 포함되어 있다. 그 시간은 여주인공을 위한 것이다. 영화에서 통일성을 만들어내는 것은 시간이다. 내가 옳게 이해했다면, 그가 영화를 구성하는 방식은 그러한 조각들을 결합시키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수집이며, 첨가와 축적과는 다르다. 역시 옳게 이해했다면 홍상수는 하나의 장면을 써내려간 것이다. 그는 무언가를 찾으며 작업을 하고, 그의 시나리오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새 영화의 설계 중인 세트 속에 있다. 홍상수는 파편들을 모은다. 그것들은 그의 기억, 상상, 그가 일상에서 본 것들로부터 온 것이다. 홍상수는 자신이 수집한 것들이 어느 정도 질서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며,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을 때 그 파편들은 한 편의 영화를 뜻한다.
심지어 최근 미국 영화에서도 일종의 검열이 있었다. 여성은 술에 취했을 때만 자신을 풀어놓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여성은 절대 스스로 자유로워질 수 없다. 나는 그런 것이 역겹다. 그것은 여성의 가치를 보호하는 방식이며, 도덕을 지키기 위한 끔찍한 방법 중 하나이다. 그래서 인간은 오직 술에 취했을 때만 동물적 본능의 경계선을 보이도록 허락 받는다.
그러나 홍상수의 영화는 정확히 반대 입장을 보여준다. 술은 그의 영화에서 결코 인간의 나약함을 위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금욕을 흔들어놓을 도구로 사용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즉 누군가를 욕망할 때 나약함을 감추는 도구가 아닌 것이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모든 것은 술을 마시기 전에 결정된다. 술을 마시는 것은 이미 결정을 내린 후 동의에 이른 것이다. 술은 인물들이 자신의 결정을 명백하게 하도록 만든다. 그들은 술을 마실 때 서로에게 “우리 자신을 기만하지 말자”라고 말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반드시 “로맨스”가 아닌, 단지 섹스를 즐기는 것이다. 그래서 정확하게 미국 영화의 반대 지점에 있다. 대부분의 영화들 속에서 묘사되는 술은, 인물들이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면서 “신이시여, 내가 이방에서 무엇을 하고 있나요!”식의 자기 비난을 하도록 만든다. 홍상수의 영화들은 이것과는 정반대이고 이점에서 그의 영화가 놀라운 것이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두 명의 중심 캐릭터 중 하나는 문호인데, 그는 초라한 선술집에서 그의 학생들과 진실게임을 한다. 관객은 문호가 빨간 목도리를 두르고 있는 동안 그것이 그의 꿈의 일부분인지 아닌지 아직 알지 못한다. 이 장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한 젊은 여학생을 향해 있다. 목적은 그녀를 유혹하기 위한 것이다. 한 남학생이 게임에 참여한다. 게임은 솔직함을 요구하지만 문호와 남학생은 어떤 것도 진실하게 말하지 않는다. 이 두 남자들은 줄다리기 하듯 논쟁을 벌인다.
영화의 마지막은 매우 복잡해진다. 영화는 조심스럽게 짜여 졌고 규칙대로 결합되었다. 또한 홍상수는 미리 시퀀스를 계획하고 시작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퀀스는 숏이 길게 지속되기 때문에 위험하다. 많은 사고들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지속되는 시간은 배우들에게 현실감을 제공한다. 이것은 마치 안전망 없이 공중 그네에서 뛰어내리는 것과 같다. 당연히, 시퀀스숏은 많은 준비를 요한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꽤 많은 것들을 남긴다. 마지막 장면에서 커다란 남자의 실루엣이 홀로 길 위에 비춰져, 강한 인상을 준다. 여학생은 갑자기 택시를 잡아타고 떠나버리고 남자는 바보같이 길 위에 남겨졌다. 이 영화에 전시된 망상의 그물은 끊어지지 않는다. 영화에서 묘사된 달궈진 감정도 오래 지속된다. 그 감정은 매우 단단하게 싸여져 장식할 공간도 공기가 들어갈 틈도 없다. 이 영화 속에서 다툼과 대면은 두 남자나, 한 남자 내부에 존재한다. <생활의 발견>에서 첫 번째 챕터는 단순히 처음 하는 행동처럼 끝내지 않는다. 첫 번째 챕터는 두 번째 챕터 속에 삽입된다. 첫 번째 챕터의 시간 덩어리는 두 번째 챕터에 드라마적 요소로 첨가된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는 한 여자와 두 남자가 등장한다. 남자들은 서로에게 무언가를 숨긴다. 여자만이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우리, 관객은, 이 두 남자가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길 원하지만, 오로지 여자만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 또한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 정말 흥미로운 장면이 있다. 이 장면에서 나는 어떤 빈 공간을 본다. 두 남자는 그녀의 집 근처에서 여자를 기다린다. 그녀는 아직 호텔 바에서 일하고 있다. 마침내 그녀가 회색 벤츠에서 내린다. 그때 우리는 두 남자가 기다리고 있는 술집을 본다. 이들 둘은 그들이 그녀와 치킨을 먹었던 것에 대해 말한다. 여자는 그 즉시 등장하지 않는다. 후에 그녀는 숨을 고르며 등장한다.
난 이 장면을 여러 번 보았지만, 그때마다 의문이 남는다. 그녀가 벤츠에서 내려 술집에 도착했을 때는 옷을 갈아입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그녀가 그 시간 동안 우리가 모르는 뭔가를 숨기기 위해 무엇인가를 한 것처럼 느껴진다. 이것은 그녀가 두 남자에게 숨기길 원하는 어떤 것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우리로 하여금 지시하는 것의 공범자로 만든다. 우리에게는 몇몇 정보가 주어진다. 우리는 아이처럼 꼭두각시극을 보고 있지만 형사들은 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알고 있다. 홍상수는 위대한 감독이다. 그는 영회 속 캐릭터들과 영화 그 자체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홍상수 영화의 여자들은 첫 번째 영화에서처럼 죽임을 당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을 받는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주인이다. 그들은 몸을 표류시키지 않는다. 나는 홍상수 영화에 대한 하나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공간에는 정거장들이 있고, 여자들은 그들 내부에 있다. 남자들은 산소 탱크를 가지고 공간을 떠도는 우주비행사이다. 그들이 정거장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문을 노크해야 한다. 이러한 상상을 한다면, 홍상수의 영화가 여성혐오라고 말할 수 없다. 여성혐오라는 용어는 여성을 바보처럼 다루는 관점을 의미한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여성들에게 평화로운 동심의 세계와 같은 이미지를 선사하지 못할 뿐이다.
존경을 가지고 홍상수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내게 있어서 자기파괴적이다. 물론 그의 영화는 나를 풍족하고 풍부하게 만든다. 매우 남성적인 것을 좋아하기 위해서는 마조히스트가 되어야만 한다. 그의 영화는 매우 남성적이다. 내 영화가 여성적인지는 모르겠다. 내 생각엔 잘 만든 혹은 실패한 영화들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홍상수의 영화는 한 가지 질문만이 가능하다. 영화가 남성주의적이거나 여성주의적일 수 있는가?
그의 영화는 나로 하여금 굉장히 풍성하고 풍부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가? 그건 잘 모르겠다. 난 홍상수의 영화가 적어도 우리를 덜 멍청하게 만든다고 본다. 그의 영화들은 최근 영화에서 점차 사라져가고 있는 복잡성을 내러티브에 부여한다. 영화들은 로맨스 소설처럼 변해서는 관객들을 유혹한다. 그러한 영화들은 드라마 법칙에 따라 발단, 전개, 결말을 가진다. 모든 것이 에피타이저에서부터 시작하여, 메인 요리, 디저트로 끝나는 코스 메뉴처럼 제공되고 있다. 이는 심각한 문제이다. 이전 영화들은 결코 그러한 강압적인 법칙에 갇히지 않았었다. 그러나 현재는 그 규칙에 구속되어 있다. 그 때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가 나타났다.
출처: "single phases of Turning Gate and Woman Is the Futeure of Man"『Korean Film Drecters HONG SANG SOO』, HUH Moonyung, 2007, KOFIC, 31-36p
번역: 김다현(vovovdh) / 감수: dela68
